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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독일인 숙청.manwha
[새창]
2015-02-11 23: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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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치독일은 점령하는 곳마다 그곳에 살던 독일계 주민들을 독일 국민으로 편입하여 현지지배의 보조세력으로 삼고, 그 사람들에 대한 징병도 실시했습니다.
나치의 전쟁명분중에 하나가 여기저기(특히 동유럽)에 흩어져 있는 독일계 주민들을 대독일의 지배하에 통합한다는 것도 있었지요. 체코 쥬데텐 지방의 합병도 그런 명분으로 추진되었고요.그러므로 소련이 독일계 주민들을 잠재적인 오열로 본 것도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지요.
이차대전이 나치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 전후처리중의 하나가 동유럽에 여러 나라에서 수 세기동안 살아왔던 독일계 주민들을 모두 독일로 추방한 것입니다. 그 결과 쥬데텐 독일인 삼백만을 비롯하여 천만이 넘은 독일계 주민들이 추방 당해 독일로 돌아오게 되지요.
이차대전의 중요한 결과 중에 하나가 일차대전 후 새로 독립했던 동유럽 국가들의 소수인종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도 있습니다. 다민족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독립한 동유럽 국가들은 모두 상당한 비율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었고, 많은 경우는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나라를 세우게 한 명분인 민족자결주의를 무색하게 하고 있었지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독립한 이 나라들이 자국 내의 소수민족의 민족자결주의는 부정한다는 자기모순이 존재했지요.
이차대전은 유태인의 학살과 전후 이스라엘으로의 이주, 독일계의 추방, 기타 인구교환등을 통해 동유럽국가들이 비로서 실질적인 민족국가이게 만든 결과를 가져왔지요. 그 과정은 다들 알다시피 인류 역사살 유례가 없는 참혹한 과정이었고요.
75
태종무열왕은 대식가
[새창]
2015-02-05 12: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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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표현이 부족하였거나, 님이 오독을 한 것 같습니다.
송강왕은 자신이 어느 누구보다도 더 술을 많이 마실 수 있으며, 하룻밤에 자신이 여자 수백명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정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사실로 믿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애 은유는 없습니다.
역사기록에서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때, alvarez님은 그것을 일부 오류가 있더라도 사실에 관한 기록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그 오류를 밝혀 보려고 하고 계십니다. 그런 접근이 많은 경우 타당하기는 하겠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님의 말씀대로 궁궐에서 하루 쌀 서말을 소비한다는 것이 과연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까요? 삼국유사가 신라 궁궐 회계에 대한 상세한 자료를 제공하는 역사서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무열왕의 대식 이야기는 무열왕이 비범한 사람이고 따라서 그의 비범한 덕에 나라도 풍요롭다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기록이 저 정도로 날아간다면,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보다는 문학비평이나 인류학적 접근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73
태종무열왕은 대식가
[새창]
2015-02-05 11:4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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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아니라 실패한 프로파겐다이지요.
송강왕은 겁도 없이 자신이 천자가 될 것까지를 원하다가 실패해서 완전히 망했는데, 또 모르지요. 만에 하나 성공했다면 꿀물이 아니라 진짜 술을 끝도 없이 마셨고, 여자도 찐짜로 하룻밤에 수백 명과 관계했다고 역사책에 나왔겠지요.
사실 저런 식의 영웅 만들기는 문자시대보다는 그 이전의 Orality시대에 더 전형적인 것일텐데, 그걸 역사시대에 시도한 것이 송강왕의 패인 중에 하나이겠지요.
72
태종무열왕은 대식가
[새창]
2015-02-05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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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마지막 왕인 송강왕이 키도 크고 힘도 쎄고 잘 생겼다는데 자신의 잘난 것을 믿고 당시 약소국인 송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드려고 하여 이웃 나라의 땅도 많이 뺃고 일부 성공은 하지만 또한 무리도 많이 합니다.
그가 한 일 중에 하나가 신하들과 술잔치를 벌일 때 자기 잔에는 술 대신 꿀물을 따라 마시면서 마치 자신의 주량이 엄청나다고 과시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이렇게 이야기했다지요.
"대왕의 주량은 바다와 같습니다. 천석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시니 대왕께서는 참으로 비범하십니다."
그리고 후궁을 많이 두어 하룻밤에 수십명과 관계를 했다는데 그것도 모자라, 후궁들에게는 밖에 나가 왕이 하룻밤에 수백명과 관계한다고 이야기를 퍼뜨리라고 했다고 하는군요.
결국 무리를 하다가 주변을 다 적대국으로 만들고 백성들도 이반하게 되어 결국은 제나라 주도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송나라가 망하게 되지요.
70
태종무열왕은 대식가
[새창]
2015-02-05 10: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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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아직까지 왕을 영웅으로 보는 영웅시대에 속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죽은 다음 용으로 변해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태종무열왕이 그까짓 밥 서말을 못 먹겠습니까?
그리고 영웅/왕의 과잉된 능력은 바로 나라의 번영으로 연결돠는 것이고 그래서 지증왕의 옥경이야기도 나오는 것이지요. 반대로 왕이 정력을 상실하면 나라에 기근과 역병이 돈다는 것이 성배 이야기이고요. 왕의 과잉된 식사능력과 나라의 번영이 바로 이어져 서술된 것이 저에게는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69
태종무열왕은 대식가
[새창]
2015-02-05 04:38:2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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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가 한 사람이 먹기에는 많지만 궁정의 소비량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식에는 대음이 꼭 따라가는 법인데 그게 빠진 게 이상하군요.
조나라 말기의 명장 염파는 말년에 위나라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진시황이 쳐들어오자 그를 다시 소환하여 군대의 지휘를 맡기자는 의견이 나옵니다. 조나라 정승인 곽개는 그와 정적관계라서 염파가 이미 나이가 70이 넘어 쓸모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이에 조나라 조정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염파가 아직 전장에 나갈만한 기력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조나라의 사신을 만난 염파는 자신의 기력이 아직 쇄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하 한자리에서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곽개의 뇌물을 먹은 사신은 돌아가 보고하기를 염파가 음식은 잘 먹지만 신장이 약한지 자기랑 만나고 있는 사이에 세번이나 소변을 보러 갔다고 거짓말을 하여 결국은 등용이 되지 못했습니다.
저 정도의 식사량이 과장일수는 있겠지만 옛날 영웅호걸을 묘사한 때의 표준적인 과장에서는 크게 벋어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68
중국인들 역사교육 ㄷㄷ..
[새창]
2015-01-31 16:42:5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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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한 번 읽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되겠군요. 이삼성 교수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서평입니다.
http://m.blog.daum.net/bmyju/8765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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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잦은 외침에 시달려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억에 남을 정도로 중대한 외부침략은 대부분 ‘중국’이 아니라 중국을 위협하거나 중원을 해체한 이민족, 특히 한반도 북쪽 유목민(노마드) 또는 유목-농경민들이었다. 적어도 신라 통일 이후 지금까지 1200여년 동안은 그랬다. 1627년 정묘호란, 1637년 병자호란은 중국이 아니라 중화체제를 무너뜨린 만주족(후금. 1636년 청이 됨)의 침략이었고, 10세기 고려를 침입한 것도 중국이 아니라 북방 거란족(요)이었다. 13세기 고려를 휩쓴 것도 중원을 무너뜨린 몽골군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원을 차지하고 중화체제를 재건했지만 그 이후에는 한반도를 침탈하지 않았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침입들이 많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중국으로 통칭될 수 없는, 오히려 중국을 위협하거나 멸망시킨 변방세력이었고, 그들이 중원을 위협했을 때의 중화체제는 약화됐거나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가 된 것도 1840년 아편전쟁으로 청의 중화체제가 무너진 뒤였다.
...
중화체제의 근간은 조공·책봉 관계였다. 이 교수는 유럽은 내부에선 대등한 국제관계를 형성했으나 비서구 사회는 식민지배하며 철저하게 약탈하고 착취했다며, 그런 서구적 개념으로는 중원 중심의 국제관계라는 독특한 ‘제3의 질서’를 창출한 동아시아 조공·책봉 관계를 이해하긴 어렵다고 지적한다. 공식적으로는 위계적으로 중원에 복속돼 있던 조공국들은 실은 내치와 외교 모두 내재적 자율성이 존중되는 독립적 정치체들이었다. 한반도는 조공·책봉 관계가 불안정하고 일시적이었던 북방민족, 그 관계에서 제외돼 있던 일본 등과도 다른 독특한 중화질서의 핵심 담당자였다. 공식적 주종관계를 유지했으나 중원과 한반도는 일종의 중화질서 연합체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다. 한반도가 침략당한 건 주로 중원이 약해지고 만주 등에 제3의 세력이 등장해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삼각구도가 만들어졌을 때였다.
...
중국위협론은 냉전 붕괴 뒤 중국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는 것을 허용치 않으려는 미국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을 비롯한 보수우파세력이 지어내고 일본과 한국 내 친미우파가 동조하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다. 지난 2천년 동안 중국이 한반도 침략을 주도했다는 ‘낭설’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야기한 잘못된 ‘기억의 정치’ 현상 때문이다. 이는 현대판 중화체제라 할 미국의 제국적 패권이 보장해준 기득권을 지켜준다. 미국 정책을 비판하기만 해도 ‘반미’로 몰고, ‘용미’로 정당화하지만 실은 무조건적 친미만 허용되는, 비판적 사유와 대안 탐구의 틈새조차 위험시하는 ‘한-미 동맹’의 이데올로기화, 즉 현대판 소중화의식에 찌든 기득권층은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세 변동을 무시하거나 거기에 대해 무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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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60.조선열전(朝鮮列傳)
[새창]
2015-01-30 08: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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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조상님들이 애써서 후손들 기죽지 말라고 족보세탁하신 걸텐데, 후손들이 중국이 조작한 거라고 고칠려고 하고 있으니, 조상님들이 저승에서 보시면 참 많이 난처하시겠습니다.
상당한 지역을 포괄하는 일정한 보편문명권이 있고 그것과의 연관에서 권위가 부여되는 시대에서, 작은 지역의 고유성에서 권위를 찾는 민족주의의 시대로 변한 것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겠지요.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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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
2015-01-30 0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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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가 된 곳에 살던 원래 주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예를 들면 인디안들이라든가. 하와이 원주민들이라든가.
그리고 감옥에 갇힌 사람의 숫자가 250만 명으로 절대수로도 인구비율로도 세계최고이고, 역사적으로는 스탈린 시절의 소련과 비슷한 수감율을 보이는 나라가 무엇이 부럽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참고로 다른 나라들의 수감율은 대체로 인구 십만 명당 100 명 전후이고 미국은 750 명 정도입니다.
65
<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60.조선열전(朝鮮列傳)
[새창]
2015-01-29 22:5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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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조선이야기의 원출처가 중국이 아니라 고조선일수도 있지요.
우리나라에 중국기원설을 주장하는 성씨들이 많지만 대부분은 사실이기 보다는 중국을 빌려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조작인 걸로 추측되는 것처럼, 기자조선설도 고조선 측에서 지어낸 족보세탁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중국 변방의 국가들이 중국역사에 처음 등장할 때, 중국역사의 먼 과거에 자신의 기원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도 드문일이 아니지요. 오나라의 경우는 춘추시대 말기에나 중국역사에 등장하지만 그 기원을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로 주장하고, 더 변방인 월나라의 경우는 더 과거인 하나라를 자신의 기원으로 주장했지요. 이런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보다는 중국과 접촉하게 된 변방국가들이 중국에 기죽지 않으려고 시도한 족보세탁일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런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인데, 프리메이슨이 솔로몬의 신전을 건설했다는 석공 히람을 자신들의 기원으로 삼는다든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유행했던 영국인이 사라진 이스라엘 10개 지파의 후손이라는 주장들도 마찬가지이지요.
64
사과하는 독일, 사과않는 일본, 민족성 차이일까?
[새창]
2015-01-29 08: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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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을 전범재판에 회부하지 않은 것은 잘 한 결정입니다.
일본이 마지막까지 요구했던 항복조건이 천황제보존이었습니다. 미국측은 이를 명시적으로 보장하지는 않았지만 묵시적으로 인정함으로서 일본의 항복이 이루어졌지요.
미국내에서도 천황제 유지에 대해서는 양보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대통령이 된지 얼마 안 되는 트루만은 그럴 경우 일본의 결사항전결의에 겁먹고 양보했다는 비난을 들을 것을 두려워하였지요.
그래서 원폭투하의 의미를 천황제보장을 일본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승자의 아량 으로 포장해서 미국 국내정치적으로 수용될 수있게 한 것에서 찾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니 미국이 천황제유지에 대한 묵시적 약속을 파기했으면 큰 난리가 났겠지요.
그리고 전쟁은 승자가 승리함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패자가 패배를 인정할 때 끝납니다. 그리고 패배자가 전투원들에게 항전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고 또 전투원들이 그 명령에 복종하여야만 합니다.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상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천황이었습니다. 또한 미군의 일본점령후 일본의 국가조직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점령군에 협조할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것도 또 천황이었지요.
만약 천황을 제거했다면 일본의 정부조직이 와해되어 총체적이 무정부사태와 게릴라투쟁이나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라크의 예가 이를 잘 보여주는데, 후세인을 처형하고, 이라크 군과 정부기구를 해체함으로 해서 총체적인 무정부사태와, 미군에 대한 게릴라투쟁, 그리고 종파간의 내전이 동시진행형으로 전개되어 최소 50만, 최대 100만까지의 이라크인 희생되었지요.
63
사과하는 독일, 사과않는 일본, 민족성 차이일까?
[새창]
2015-01-28 03: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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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민족성이 아니라 국제관계를 중심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좀 더 보충을 하자면 독일의 전후처리에 참여한 미소영불 4개국 중 프랑스와 소련은 국토가 점령 당하고 큰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지요.
이에 비해 일본의 전후처리는 미국 단독으로 처리했는데, 미국은 일본과 주로 군사적으로 다투기만 했고 그외의 피해는 별로 없었는고, 일본의 침략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중국이 전후 일본 처리에서 배제되었지요. 그러니 일본은 전후처리에서 미국의 비위만 맟추면 되었고 일본 침략행위의 가장 큰 피해를 받았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국가들은 무시해도 상관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에 덧붙여 중국이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여 냉전의 대립선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니 더더욱 눈치 볼 필요가 없게 된 것이지요.
독일의 경우 동독에서는 소련의 지배하에 철저한 탈나치화가 이루어졌고, 서독의 경우도 소련이 냉전상황에서 적대진영이라 하여도 자신들이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소련이 냉전하 양대강국중의 하나인데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리고 독일의 경우, 프랑스의 드골이라는 변수가 또 있지요. 이차대전후 유럽에서 커진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일정한 독자성을 확보하고자한 드골의 프랑스가 자신의 힘만으로 미국을 견제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독일 껴안기를 했지요. 그것의 가장 구체적인 성과가 EU의 모태가 되는 프랑스 독일간의 석탄-철강 공동체였지요. 따라서 독일에게는 프랑스와의 과거사문제 해결에 따른 구체적인 이익이 있었고요.
일본의 경우 전후처리에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과 소련도 참여를 했다면 아마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중국에서 국민당 정권이 유지되었거나, 아니면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어도 미소대랍에서 일정하게 중립을 취할 수 있었다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이 서로 접근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또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겁니다.
이것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형인 것인데, 냉전종식이후 일본은 그 전까지의 대미 일변도의 대외관계에서 탈피하여 아시아로의 접근을 추구하기도 하였는데(여기서 아시아는 한국도 포함되지만 주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전에 비해 전향적인 발언들도 이때 나온 것들이었지요. 이런 일본의 시도가 미국에 의해 좌절되고 다시 대미 일변도의 대외관계를 추구하는 아베정권이 들어서자 과거사에 대한 문제있는 언행들이 늘어나게 되는 겁니다.
62
데자뷰. 강대국 사이에 낀 서글픈 운명의 한반도
[새창]
2015-01-23 22: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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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무시할 수 없지요.
월드뱅크의 평가에 의하면 2014년 말을 기준으로 중국의 구매력기준 경제규모가 미국을 추월하여 세계 1위가 되었습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학 스키그리츠가 얼마전 이에 대해 쓴 글이 있지요. 제목하여 "중국의 세기(The Chinese Century)".
http://www.vanityfair.com/business/2015/01/china-worlds-largest-economy
When the history of 2014 is written, it will take note of a large fact that has received little attention: 2014 was the last year in which the United States could claim to be the world’s largest economic power. China enters 2015 in the top position, where it will likely remain for a very long time, if not forever. In doing so, it returns to the position it held through most of hum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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