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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여느 신화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계기.
[새창]
2011-07-26 13: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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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령
매우 수준높은 자료들을 인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피림이 등장하고 좀비가 되어서 인간을 잡아먹고, 자기들까리도 뜯어먹어서 그래서 홍수를 일으켰다는 환타지가 공의라는
부분은 이러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에녹서는 말씀하신대로의 환타지 입니다.
그 이유때문에 외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경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의 권위를 부정해서는 아니됩니다.
말씀하신대로 에녹서의 글귀를 그대로 인용한 유다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외경의 연구를 통해
지금 가지고 있는 정경들을 좀 더 올바르게 해석하고 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산신령님께서 말씀하신것 처럼 에녹서는 환타지적 요소를 참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하신 것은 그것이 바로 "묵시적 문학"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상적인 것들을 보고 그 시대의 사람들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경인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환타지적인 묘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을 환타지라고 이해해서는 경전을 올바로 이해하는데에 무리가 생기게 됩니다.
마치 초등학생때 본것을 대학생이 되어서도 똑같이 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인데,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 환상을 보았을때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정도와 표현의 정도가
과거의 수천, 수만년 전의 사람이 그 환상을 보았을때의 이해의 범위와 표현의 정도가 같다면
그것이 더 환타지적 이해가 아닐까요?
에녹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의 환상의 것을 에녹서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범주내에서 그 환상을 보고 표현한 것이지요.
뼈에 대한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해결해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마치 미싱링크와 같다고나 할까요^^?;;
링크하신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신의 공의의 발현은
에녹서, 창세기와 같이 인간의 죄가 땅에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홍수뒤에 네피림이 또 존재했다는 것에 대해서
정경과 외경에 관한 기록은 없지만, 그 뒤에 또 그런 천사들이
있지 않았다는 보장또한 없다고 볼 수 있지요.
(이부분은 납득하시기 어려우시겠어요^^;)
갈수록 저의 논리또한 파괴되어 가는 것 같지만
정리하자면 그러합니다.
에녹서는 분명 가치가 있는 외경이며 정경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환타지적 요소가 있다고 하나 그것을 환타지로 받아들여서는 정경또한 환타지가 됩니다.
그것을 기초로 볼때,
하나님의 공의는 인간 스스로의 죄뿐 아니라, 천사들의 타락, 네피림의 등장등으로 인한
"죄의 편만상태"로 인한 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환타지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믿고 안믿고가 정해지는 것이겠죠^^?
7
성경이 여느 신화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계기.
[새창]
2011-07-26 13:14:1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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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령님께
기독교의 경전을 매우 잘아시는 분이군요^^ 반갑습니다.
다만 언급하신 것들에 대한 것이 기존 교회에서 가르쳐 오던 신앙고백에 대한 비꼼이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신이 단순히 경배를 받기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면,
말라기 1장 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과 같은 구절이 나오지 않았어야 합니다.
경배를 싫어하는 신이라니.
앞서 언급한것처럼 신은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였습니다.
사랑이 받침이 되지 않은 경배는 신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것이 결국 경배받는 것이 목적입니까? 사랑이 목적입니까^^?
아마 사랑이 목적이라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볼 수 있지요^^?
@욕망창고님께
네^^ 인간은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기독교경전에 의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에 의한 처벌의 부분은 좀 더 다른 개념을 차용해야 합니다.
신의 여러 속성가운데 "사랑"도 있지만 "공의"라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심판에 관해서는 스스로가 철저해야합니다.
사랑이라는 속성도 발현되어야 하지만 공의라는 속성이 발현되지 않으면
그런 신은 신이 아니게 되는 것이니까요.
신은 인간을 고치기는 것보다, 신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태초모습으로의 회귀를 바라시죠.
신과의 교제관계가운데 있는 것. 그것이 오늘날 신의 바람이니까요.
그래서 신화와 기독교경전은 "다릅니다"
어느 한쪽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다르다"라는 사실이지요.
어느 한쪽이 저급하고 우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창조론을 믿더라도, 비난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네요^^;
이것은 간절한 부탁이지요^^
@다시 산신령님께
위의 욕망창고님께 언급한 것처럼
신에게는 "공의"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스스로가 우주라는 공간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 공간을 다스리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의"라는 속성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위의 글에서의 오류는
수메르의 신이 인간을 귀찮다고 쓸어버린 것과
기독교 경전에서의 신이 인간을 심판한 것이 동일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경전에서의 신은 "공의"에 의해서 우주의 질서를 위한 타당한 심판이지만
수메르 신들의 인간 심판은 단순히 "시끄러워서" 입니다.
저라면 저의 친척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법을 어겨서"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심정적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 저항하고 반항해야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친척이나 가족이나 친구가 단지 "시끄러워서" 처벌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고 반항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어떠하신지요^^?;
6
절대적인 진리란 없으니,
[새창]
2011-07-26 12:54:4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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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숫님께
절대적인 진리가 없어진 것은 모더니즘의 반대급부로 나온 포스트모더니즘 때부터 이지요.
이미 현 세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고,
인간을 절대적인 잣대에서 자유하게 하고 있지만, 종교에의 있어서는 거의 쥐약이나 마찬가지인 철학적 흐름이지요.
잘 지적하신 것처럼 그런 논리적인 이해는 있지만, 또 그렇게 비약하여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합니다.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그렇게 싸우는데 힘을 쏟기 보다
아는것과 확신한 것에 거하기 위해^^;
스스로 깊이 내면의 것들을 다스리고 가르쳐 나감이 옳지 않을까합니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것을 더 알아가기 위해 노력해보심은 어떨지요^^;
저도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입니다^^
함께 힘내보았으면 좋겠네요.^^
5
성경이 여느 신화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계기.
[새창]
2011-07-26 12:49: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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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신론과 인간론은 기독교 경전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개념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 전자는 유일신이고, 후자는 다신교이고, 전자는 정절을 중요히시는데, 후자는 난잡해서?
몇 번 얘기 한 적 있지만, 초딩들 방학 숙제 일기장 베껴도 등장인물, 등장 배경은 틀리게 해서 베껴요. ^^
@산신령님께
^^; 전자와 후자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해 따지자는 것은 아닙니다. 또 정순하고, 난잡하다를 따지자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산신령님과 욕망창고님은 기독교인이 아니시니까요.
그냥,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애초의 논점이 신화가 기독교의경전과 다를것이 없다. 이니까요.
다만 제가 숫자숫님께 경전의 독창성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분이 기독교적 배경에서 글을 쓰시는 것 같아서 그런것이고요.
그리고 제가 다른 댓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에뉴마 엘리쉬=길갈메시서사시와 같이 고대 근동의 문서들은
거의 같은 신관과 인간관에 대해 언급하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을 섬기느냐 어떤 것을 믿느냐에 대해서는 조금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요,
그러나 그런 고대근동의 문서들과 기독교의 경전은 아주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욕망창고님께 드린 댓글에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차이는 매우 커서
"유물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만큼의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판이한 차이를 이미 알고 있으시지요^^?
비판하실것이 있으면 글 남겨주세요^^
4
성경이 여느 신화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계기.
[새창]
2011-07-26 12:42:4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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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창고님께
1. 그부분에 대해서는 역시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요,
기독교적 세계관은 Open System을 차용하고 있거든요.
신이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주었고 그 선택을 존중하였다는 점입니다.
전지전능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인간이 악을 선택하지 않도록 고치는 것이 옳지만
신이 인간을 창조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자유의지와 선택이라는 제약에 신 자신을 가두기로 했습니다.
정리하자면, 신은 인간이 악을 선택할것인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선택을 존중했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함에도 인간이 자신을 선택하기 보다 악을 선택했다는 점은 신의 마음을 더 아프고 고통스럽게 했을것이고,
이런 부분은 성경의 여러부분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2. 창조가 다른 신화에의 모방이라는 것의 이해는 그렇지 않다고 제가 윗댓글에서 언급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에뉴마 엘리쉬"와 "길갈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신관과 인간관을 언급하자면 이러합니다.
에뉴마 엘리쉬의 문서와 길갈메시 서사시에서 나오는 신들은 인간을 자신의 수종으로 부리기 위해 창조합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자꾸 부르짖어 귀찮게 하자 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립니다-_-;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 몇몇 신들은 인간이 없어지는 것을 옳게 여기지 않아서 한 인간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피할길을 가르쳐 주어 겨우 살아남게 됩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인간이 살아남은것을 안 신들은 그마저 죽이려하지만
살아남은 인간은 신을 경배하여 겨우 살아남아 다시 인류를 이루게 됩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경전은 인간과 신에 대한 관점자체가 다릅니다.
기독교경전에서의 신의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발현할 대상을 창조하게 됩니다.
신의 사랑을 오롯이 차지할 대상이 인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한 인간이 땅에 가득하게 되자, 신의 속성 중 또다른 부분인 "공의"가 인간을
심판하게 됩니다. 그 가운데 신의 의지를 찾아온 노아에게 피할길을 내고, 살려내었으며, 노아는
그 사실에 대한 감사와 언약으로 신에게 경배를 하게 됩니다.
형식적 모양과 사건은 같으나 그 속을 차지하고 있는 정신이나 개념들은 판이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것이 신화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독교인들은 그 중 자신들의 경전에 나와있는 것들을
신뢰하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욕망창고님은 기독교인들과 다르게 기독교의 경전이 옳지 않다고 믿고 신뢰하고 계시는 것이구요. ^^
또, 다른 비판하실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셔요^^
@숫자숫님께
성경은 다른 신화와 달리 독창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독창적인 것입니다.
성경과 신화가 공통된 사건을 다루는 것이 많습니다. 위의 에뉴마 엘리쉬와 길갈메쉬 서사시 처럼
공통적으로 "홍수"에 대해 다루지만, 그 안에 사건들은 다르지요.
말씀하신것 처럼, 사건들이 다른 문헌학에 비슷한 기록이 많으면 사실일 가능성은 많아지지만
그만큼 성경의 독창성이 떨어져서 다른 신화와 다른 문헌과 같아지는 오류가 되지요.
숫자숫님이 어느 교파 어느 교단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개신교의 시작인 마르틴 루터가 주장한 오직은혜, 오직 성경, 오직 기도
라는 것에 대한 반박은 하실 수 없으시겠죠^^?
성경은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우리 삶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되고, 모든 것의 기초가 되지요.
그런 우리의 경전이 "다른 신화와 독창적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물으신다면,
글쎄요~~~~^^; 라고 밖에 대답을 해드릴 수가 없네요.
다원주의는 아니실테고요^^
또 비판해주실 점이 있으시면 댓글남겨주세요^^
3
성경이 여느 신화와 그닥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계기.
[새창]
2011-07-26 11:17:5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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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재미있게 이해하시는 군요^^
하지만, 기독교 경전에 기초하자면 몇가지 다른 점들이 눈에 보여 글을 남겨 봅니다.
1. 악을 설명할 때에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악의 존재는 언제나 스스로가 그 악을 선택적으로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태초의 악조차도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통해 악을 선택하게 된 것이지요.
인간이 악을 선택하지 않게 하면 되지 왜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었느냐? 왜 방관하게 내버려 두었느냐?
라는 질문에 대한 것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논쟁으로
그야말로 신의 자유의지 존중입니다. 경전에서 전능한 하나님이지만, 인간의 선택적요소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으시는게 원칙입니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자유의지를 통해 신을 섬기지 않았을까라는 말은
기독교경전에 대한 오해입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를 만든 신을 거부하고 악을 선택했으니까요.
즉, 경전에 의하면, 악은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발현된것이라고 이해하시는 것이
경전상 이해에 더 부합합니다.
2. 다른 신화와 다를 것이 없다라고 격하시키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저도 그랬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기독교의 경전을 고대 근동의 어떤 문서들과 비교하면 오히려 확실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문서들 중 권위가 있다고 알려진 "에누마 엘리쉬" 또는 "길갈메시 서사시"에서 제시하는
신론과 인간론은 기독교 경전의 그것과는 정 반대의 개념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신화와는 전혀다르다고 할 수 있죠. 댓글이라 너무 글을 길게 달지 못하지만,
혹시 이부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알려주세요^^
비판과 비난은 달게 수용하겠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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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
2011-07-26 02:52:3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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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적인 글이시네요~
항상 이런글에 댓글달기전에 하는 말이지만요~
어차피 논리적 논박을 하고 설득을 한다고 해도 마음을 돌리시진 않으실것 같아요
하지만, 그냥 지나쳐가기엔 좀 그래서 댓글을 남기는거랍니다.
기독교는 경전을 기초로 하는 건데,
(물론 요즘 거지같은 한국기독교계가 경전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비판을 받습니다. 옳은일이죠)
기독교 경전, 신약중에 대부분을 집필한 바울이
모든것이 가하나, 모든것이 유익하지 않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그 경전에는 베드로가 돼지와 같은 대표적인 불경한 것을 먹기를 거절하자
내가 깨끗하다는 것을 네가 더럽다고 주장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기도 하죠.
(물론 이부분은 해석의 다양성 때문에 말이 많지만요)
실제로 어느 연구에서 보면, 인간이 육식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합니다.
타 동물을 취해 먹거나, 그 피를 먹으면 인간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며,
요즘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ADHD같은 장애도 식단을 육식에서 채식으로 전환하자
크게 개선되었다는 보고도 올라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즉, 과거의 인류가 육식을 생존을 위해 해오고 있었다면, 오늘의 인류는 육식을 즐기기 위해 하고 있죠.
그런상황에서 볼때, 기독교의 경전에서 이야기 하는 것처럼
먹는 것을 가려서 먹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는
행위구원에서 선물구원으로의 패러다임 쉬프트 이후에
먹는 행위가 도덕적인 잣대로 물러나게 되었고 그로인해
오늘날의 기독교에서의 육식의 개념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하지 않다."이기에
육식에 대해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기독교"근본주의를 표방하시는 분들은
육식과 피를 가까이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주변의 분들도 참 많이 있고요,
답변을 마무리 하면서 드리는 말씀은
늘 그랬듯, 경전에의 해석은 논리적이나
글을 쓰신분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운것은 경전을 잘 알지 못해 일어나는 질문과 비판들은
이렇게나마 이런 논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이니 참고해주시고
현 상황에의 기독교는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적해주신다면 달게 받고 달게 생각하겠습니다.
읽어주실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1
목사는 직업이 아닙니다. 헌금은 모두 기부해야합니다...
[새창]
2011-07-26 02:36:08
0
삭제
답답하시겠네요~
님이 찾으시는 예비성직자가 저 인데요,^^;
댓글로라도, 여러 이야기들 나누고 싶네요~
대답해주실꺼죠?^^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