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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
2015-10-05 10: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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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 낙랑군이었다는 것은 학계 정설입니다.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문헌상으로도 교차검증해서 비정했으며, 애초에 평양설은 정약용에서 시작되는 학설입니다. 유물적 근거를 다 뒤덮을만한 획기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평양설이 엎어지지 않을겁니다. 이건 동북공정이나 식민사관과 관련이 없는 얘기입니다. 결과적으로 한사군은 망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고 근대적 식민지와도 다른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장하는 분들 아무도 없습니다. 일단 임나라는 지명을 사용했다 해서 그게 곧 임나일본설인게 아닙니다. 임나는 우리나라의 다른 문헌에서도 보이는 지명이고 일본은 그 곳에 자신들이 기관을 설치해서 다스린거라고 우기는겁니다. 그리고 그 문제의 지도가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만든 그 지도라면 임나일본부설이라고 물고 늘어지는 부분은 마한, 변한, 진한등을 표시한 지도를 보고 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삼한을 표시한게 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한게 되는건지 이해가 안갑니다. 지도도 보지 않고 왜 이렇게 추측하냐는 분들 있으실텐데, 이덕일이 그렇게 주장을 했고 그에 따라 넷상에서 자료가 만들어져 퍼져나가는걸 봤는데 그게 바로 저 기사와 똑같은 논조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아무튼 저 기사는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리는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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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반도에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 미 의회에 보냈다
[새창]
2015-10-05 10:13:0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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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베리/그 부분이 이해가 안간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한사군이 망하거나 내쫓겨서 고구려가 그 영역을 차지했고 그 이후로는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는데 그게 왜 명분이 되는거죠? 그 뒤로 계속 영향력을 미쳐서 통치가 지속되었다면 모를까 ....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했을땐 한반도에 일제의 영향력리 미쳤지만 결국 광복해서 내쫓겼잖습니까. 님의 논리라면 몇십년 혹은 몇백년후 일제가 그 일제 강점기를 명분삼을 수도 있다는 얘기인데, 그럼 그런 위험때문에 그때도 일제가 지배한건 사실 한반도가 아니었다고 해야 되는걸까요? 일제 식민지와 한사군의 성격이 다르긴 합니다만 어쨌든 님 논리대로면 저렇게 생각됩니다;
13
[단독] "한반도에 한사군" 왜곡된 고대사 자료 미 의회에 보냈다
[새창]
2015-10-05 09:51:3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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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그러는데 전 이거 좀 이해가 안돼요. 한사군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는거 아닌가요? 그럼 요동에 한사군이 있다고 한들, 평양에 있다고 한들 한사군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게 아닐텐데 도대체 평양에 한사군이 있는거랑 동북공정이랑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어요. 한사군 위치에 따라 고조선의 영역 차이는 있겠지만 한사군에 요동에 있어봤자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인건 매한가지라서 고조선 망하고 한나라가 군현을 설치했는데 그게 후에 동화되거나 망했다는 역사적 맥락은 똑같잖습니까? 아예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이거 인정하면 동북공정이라고 하는건 그나마 맥락이 이해라도 되는데, 위치가지고 한반도 안이네 밖이네 하는게 동북공정이라는건 이해가 안갑니다; 제가 제대로 몰라서 그런거겠지만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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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
2015-10-01 15:13:2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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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의 수/위에도 썼듯 외교적 감각은 있어 보이는데 다른 정책들에서 깽판을 치면서 자신의 외교적 기조마저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중립외교를 높게 보지 않고 아마 갈수록 그에 대한 평가는 낮아질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무조건 학설 폐기를 주장하는 분을 보니 비전공자분들에게 잘 알려진 학설이 금방 생각이 안나서 광해군을 예로 둔것 뿐입니다. 중립외교를 좋게 보기 어렵긴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좋게 볼만한 증거들이 발견되었을때, 그런 경우 이병도 학설이니까 근거가 아무리 명확해도 폐기해야 되냐는거죠. 예를 조금 잘못 든거 같긴 하네요 ㅋ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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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창]
2015-10-01 14:56:59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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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가 수정이 안되네요.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10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5-10-01 14:56: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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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금 좀 이해가 안가는게요. 이병도는 친일파 맞습니다. 근데 지금 하시는 밀씀이 친일파인 이상 그 사람 학설 다 폐기해야 된다 이걸 주장하시는서죠? 이 부분이 좀 이해가 안됩니다.
이병도 학설을 폐기했다고 치죠. 근데 나중에 유물이나 기타 문헌 자료로 이병도가 주장했던 학설과 같은 결론이 유추되면 이 때는 어쩌나요? 그럼 문헌적으로, 유물적으로 다 살펴보고 사료 교차검증 다 해봤을때 틀리지 않은 주장이지만 일단 친일파가 했던 주장이니까 그게 옳다고 해도 인정하지 말아야 하는겁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틀린걸 별로 찾지 못하는 주장이 하나라도 있다면 , 그래도 일단 틀렸다고 봐야 옳은겁니까? 그걸 외면 해야만 되는건가요?
현재 이병도 학설중에서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나 문헌, 유물 등으로 반박되는건 다 폐기되거나 수정되었습니다. 남아있는 것도 물론 있지만요.
그중에 한가지 묻죠.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게 치는건 만선서관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많고, 해방후 광해군에 집중한 사람이 이병도입니다. 이병도가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높게 평가한 편인데, 그럼 이병도가 친일파니까 학설 다 폐기야 하므로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아무리 뛰어난 점이 보여도 무저건 폐기해야 합니까? 물론 저는 광해군을 혼군으로 보고 있고 외교적 감각은 있었지만 내정을 깽판쳐 자신의 그런 외교적 기조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고 보는 편입니다만, 중립외교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나뉘고 있죠. 근데 이병도가 친일파니 학설 다 폐기해야 된다는 논리라면 이병도가 중립외교를 좋게본것도 그의 학설에 속하니 아무리 좋은 점이 나와도 무조건 폐기해야 겠군요?
9
친일파에게 '권력'은 사익 실현의 도구 - 이덕일 소장
[새창]
2015-08-27 10:54:4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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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지 않으셨으면 억측을 하지 마셔야죠.
간략하게 말하자면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라는 물음에 "네, 허구입니다."하고 답하는게 책의 내용입니다.
8
본삭금/질문글. 사도라는 영화가 곧 개봉하고 예고편이떳는데요..
[새창]
2015-08-12 23:04:1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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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조는 영빈 이씨를 오랫동안 총애했고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특별히 대우했습니다.
실질적인 영조의 조강지처는 영빈 이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사도세자를 그 어미의 출신때문에 미워했다는 것은 말이 안되지요.
정성왕후 서씨가 명문가의 여식에 손이 고와서 영조가 멀리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뿐입니다.
7
본삭금/질문글. 사도라는 영화가 곧 개봉하고 예고편이떳는데요..
[새창]
2015-08-12 22:59:0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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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 이씨 집안은 명문가 아닙니다.
영빈 이씨는 어릴때 궁녀로 들어왔는데 인원왕후의 추천으로 영조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된 궁녀출신 승은 후궁입니다.
한미한 집안 출신에 원래 궁녀였던 탓에 세자의 친모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를 키우던 경종의 상궁들에게 무시를 당했는걸요.
그것때문에 그 상궁들이 후에 궁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이는 한중록만의 기록이 아니라 사도세자 행장에도 나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 사도세자가 명문가 어머니를 둬서 영조가 질투를 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6
천재 한인 소녀의 사기극 ( 수상실적과 합격이 다 거짓으로 들어났어요
[새창]
2015-06-10 01:29:0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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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shingtonpost.com/local/education/virginia-student-earns-admission-to-all-eight-ivy-league-schools-and-others/2015/04/10/64e46100-df0d-11e4-a500-1c5bb1d8ff6a_story.html
엠팍에서 퍼온 링크인데 일단 확실한건 평점 4.6이 만점이 아니라는 것, 저 여학생이 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 여학생이 아이비리그를 휩쓸다시피 했다고 기사가 났는데 저 여학생이 정말로 사상 초유의 특혜로 스탠포드와 하버드 동시 입학을 하게 되었다면 기사가 안났을리 없을 것 같습니다.
5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
[새창]
2014-09-30 00:04: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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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낀/ 다른 글에서 이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당시 을해옥사때도 큰 권한이 없었다는 것을 밝혔놓았습니다. 실록의 기사이니 혜경궁이 쓴 한중록과는 관계가 없죠. 사도세자는 그런 등용을 할 수 있는 권한 자체가 없었습니다. 대리청정을 했어도 아주 일부분의 가벼운 것들만 처리하였고, 이는 한중록이 아닌 실록에서 확인되는 기록입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에 대해서는 실록과 한중록의 사실관계가 많이 겹칩니다. 한중록에서 거론했던 자살시도도 훗날 정조의 입을 통해서 "금정의 변"으로 회자되고,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실록에서 사도세자가 뜬금없이 낙상을 했다는 기사도 나옵니다. 그래서 한중록이 말한 자살시도 역시 실제로 있었던 사실로 볼만 하죠. 국문과 교수의 주장이 소수론이라는건 저도 역사학도가 아니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근에 힘을 얻고 있는 의견들은 대체로 그 교수님과 비슷한 것으로 압니다.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신병주 교수님이 양육의 문제였다고 말씀하셨고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출판된 <영조와 사도세자 이야기>에서도 국문과 교수인 정병설씨와 거의 비슷한 논지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도세자에 대해서 딱히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큰 비판없이 당쟁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식이었는데, 최근에는 실록과 승정원일기, 대천록, 현고기와 사도세자가 보낸 편지등, 다양한 사료들을 통해서 당쟁희생설이 크게 비판받고 있는것으로 압니다.
4
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
[새창]
2014-09-26 16: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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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127권, 52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2월 4일(병오) 2번째기사
왕세손이 청정의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왕세손이 수은묘(垂恩廟)에 나아가 전배(展拜)한 뒤에 재실(齋室)에 나가 여러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하고 하령하기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경들을 소견하였다.”
하고, 이어서 눈물을 줄줄 흘리고 목메어 스스로 견디지 못하다가 하령하기를,
“그때의 처분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할 수 있으랴마는,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말이 많이 실려 있어서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는데, 이제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도 이미 사람의 도리로 견딜 것이 아니거니와, 완고하게 아는 것이 없는 체한 것은 다만 대조(大朝)께서 위에 계시고 또 그때의 처분에는 감히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내 그지없는 아픔을 생각하면 어찌 일찍이 먹고 숨쉬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늦추어진 적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제 또 대조의 명을 받아 외람되게 송사(訟事)를 듣고 판단하는 책임을 맡았으니, 모년(某年)의 일기(日記)를 어찌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을 버려두고 태연하게 여긴다면, 이것이 어찌 아들의 도리이겠는가? 지금의 의리로는 모년의 일에 대하여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다시는 눈을 더럽히고 이[齒]에 걸지 말아야 옳을 것이다. 사초(史草)로 말하면 명산(名山)에 감추어 만세(萬世)에 전하는 것이므로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마는, 일기는 이것과 달라서 그것이 있든 없든 관계되는 것이 없다. 이제 이것을 내가 청정(聽政)한 뒤에도 둔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백료(百僚)를 대하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억제하고 차마 말하지 못한다.”
하고는 눈물이 비오듯하니, 좌우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세손이 환궁(還宮)한 뒤에 흑포립(黑布笠)·백포(白袍)·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서 한데에 앉아 대신들을 소견하여 소매 안에서 소초(疏草)를 내어 도승지(都承旨)를 시켜 읽게 하고, 하령하기를,
“일이 성취되고 안 되는 것은 오직 대조의 지극히 인자한 은혜를 믿을 뿐이거니와, 내 도리로서는 또한 힘써 성의를 쌓아 천심(天心)에 사무치기를 바라야 할 따름이니,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계교(計較)하겠는가?”
하였다. 곧 일산(日傘)을 치우게 하고 뜰 가운데에 몸을 드러내고 엎드려 궁관(宮官)을 시켜 소(疏)를 도승지에게 주고 이어서 중관(中官)을 청해서 주게 하였다. 상소에 이르기를,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신에게 곧 하늘이십니다. 정수리에서 발끝에 이르는 모발까지 모두가 내려 주신 것이고 덮어 길러 키우신 것도 모두 은덕이며, 신이 25년 동안 산 것도 다 전하께서 관용하신 가운데에서 얻은 것입니다. 신은 큰 은혜를 감사히 여기고 받들어 마음에 새기고 뼈에 새기고서 오직 문침(問寢)하고 시선(視膳)19439) 하는 것으로 구구히 보답할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우리 전하께서 신이 불초하여 능히 부담할 수 없는 줄 모르고 하루에 만기(萬機)를 살펴야 하는 번다한 것을 모두 맡기셨습니다. 그 일은 지극히 엄하고 지극히 중하며 그 책임은 지극히 어렵고 지극히 큽니다. 신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무릅써 감당할 희망이 있겠습니까? 피눈물을 흘리며 사양하기를 두번 세번 하여도 윤허받지 못하고는 분의(分義)에 몰려 애써 따른 지 이제 두어 달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삼가고 두려워하여 마치 나무 위에 머물러 있는 듯하였는데, 근일 성상께서 종통(宗統)이 중대하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길이 근본이 되는 계책을 세우시어 드디어 상책(上冊)한 끝에 특별히 사호(賜號)하는 예(禮)를 거행하였으니, 신은 영화롭고 감격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죽도록 힘쓴들 어찌 그 만분의 일이라도 우러러 갚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신에게는 아 주 박절한 사정(私情)이 있습니다. 이제 일의 기회가 생김에 따라 불안한 마음이 더욱 격렬하여 스스로 누르지 못하니, 말하려 하여도 소리가 먼저 삼켜지고 글을 쓰려 하여도 눈물이 먼저 쏟아집니다. 아! 이것은 전하께서 차마 듣지 못하실 일이고 소자가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입니다마는, 끝내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애(仁愛)하고 복육(覆育)하시는 천은(天恩)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이고 신의 사정은 영구히 드러낼 날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크게 소리내어 외치고 피눈물을 흘리며 간절한 마음을 아뢰니, 전하께서는 가엾이 여겨 굽어살피시기 바랍니다.
아! 임오년19440) 의 처분은 우리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하여 마지못하신 일입니다. 대성(大聖)의 마음으로 달권(達權)의 도리를 행하셨으니, 온 동토(東土)의 신민이 누구인들 감히 그 사이에서 이의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죽을 뻔한 목숨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전하의 큰 은혜입니다. 높은 하늘과 두터운 땅과 큰 산과 깊은 바다도 이 감격을 견줄 만하지 못하니, 신이 보답하고 힘을 다하는 도리로서는 오직 사시(四時)처럼 미덥고 금석(金石)처럼 굳게 지켜서 만세에 이르러도 폐단이 없게 해야 할 것입니다. 괴귀(怪鬼) 같은 방자한 무리가 감히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방자히 추숭(追崇)하려는 논의를 내더라도 신이 그 부추김을 받아 함부로 의리를 바꾸려 한다면 이는 참으로 전하의 죄인이 되는 것이고, 전하의 죄인이 될 뿐더러 종사(宗社)의 죄인이 되고 만고(萬古)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하늘의 상제(上帝)가 위에서 굽어보고 종묘(宗廟)의 신령(神靈)이 옆에서 질증(質證)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속일 수 있겠습니까? 후원일기(喉院日記)19441) 로 말하면 그때의 사실이 죄다 실려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못 본 사람이 없으며 본 자는 전하고 들은 자는 의논하여 세상에 퍼지고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더럽히니, 신의 사심(私心)이 애통하여 거의 곤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어리석더라도 이 한 가지 없어지지 않는 마음이 있는데, 지금은 이극(貳極)19442) 에 높이 있어 엄연히 백료(百僚)를 대하니, 어찌 마음에 아픈 것이 없겠으며 어찌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신이 애통하게 여기는 것이 전하의 처분에 대하여 방해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개 전하의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한 것은 애통한 것이기 때문이니, 참으로 이른바 병행하여도 어그러지지 않고 양존(兩存)하여도 손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일기가 없으면 처분에 대하여 진실을 밝힐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대저 국조(國朝)의 전고(典故)는 모두 간첩(簡牒)에 실려 있는데, 금궤(金匱)·석실(石室)에 넣어 명산(名山)에 감추어서 천추 만대(千秋萬代)가 지나도 옮길 수 없으니, 또한 일기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는 것은 전하께서 어떻게 처분하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마는, 신이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저위(儲位)를 손피(遜避)하고 종신토록 숨어 살며 다만 하루에 세 번 삼가 문안드리는 직분을 닦는 일뿐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니, 저절로 창자가 꺾이고 마음이 터지며 하늘에 호소하여도 방법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슬피 여기고 가엾이 여기며 헤아리고 살피시어 빨리 신에게 청정(聽政)하라 하신 명을 거두고 이어서 신의 저이(儲貳)의 지위를 제거하여 끝내 인자하게 덮어 길러 주시는 은혜를 온전하도록 하소서. 이것이 못내 큰 소원이며 못 견디게 바라고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삼가 상소하여 아룁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다 일렀는데 다시 무엇을 이르겠는가? 이 상소는 아까 하교한 것과 함께 사고(史庫)에 간직해 두어라.”
하였다.
세손이던 정조가 승정원 일기를 세초해달라고 상소를 올렸던 실록 기사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이 더 있습니다.
정조 4권,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7월 11일(갑술) 2번째기사
여제를 지낼 때에는 단을 하나 첨가하도록 하교하다
여제(厲祭)를 지낼 때에는 따로 단(壇) 하나를 만들어 술을 붓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아! 이는 과인(寡人)이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이기는 하다마는,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선지(先志)를 추모(追慕)하고 고혼(孤魂)을 위안하는 일이 아니게 된다. 무릇 여제는 주인이 없는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특별히 헌관(獻官)으로 하여금 따로 단(壇) 하나를 쌓게 하여, 모년(某年)785) 이전의 의탁할 데 없는 귀신들로 하여금 환후(患候)가 침독(沈篤)했음을 알게 하도록 하라. 특별히 일시적인 일에서 나온 것이니, 사방의 귀신을 불러서 술을 붓고 유식(侑食)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장 B면
【영인본】 44책 677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註 785]모년(某年) : 모년(某年)은 임오년 1762 영조 38년이다. ☞
여제는 떠도는 잡귀들에게 제를 지내는 것인데 정조는 재위초 여제를 지내면서 특별히 모년 이전의 잡귀들을 위해 단을 하나 더 마련해서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직접 위의 기록과 같은 제문을 지었습니다. 이는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사도세자가 죽였던 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제문입니다.
정조가 쓴 제문에서 모년은 임오년을 뜻하고, 환후가 침독했다는 것은 병이 오래되어 깊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년 이전의 잡귀들이여, 그 때 일은 (우리 아버지가) 병이 깊은지 오래되어 일어난 일이지 본심이 아님을 알고 좋은 곳으로 가라"고 제문을 지은 것입니다. 간접적이지만 아버지의 살인을 인정하고 있는 제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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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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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6 16: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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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분도 말씀하셨지만 몇몇분은 제가 본문에도 기록을 가져왔는데 안읽어 보신듯 합니다.
정조 본인이 직접 쓴 묘지문에 대리청정을 할 때 공공기관에 남아 있는 기록들과 승정원 일기를 자신의 요청에 의해 영조가 세초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승정원 일기에서 가장 많이 세초된 부분은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인 1761년과 사도세자가 죽은 해인 1762년의 기록입니다. 사도세자의 비행이 극에 달하던 시기이며 가장 참담한 기록이 많았던 시기이죠. 그것을 보다 못한 정조가 상소를 올려서 영조에게 그 부분을 세초해달라고 부탁했고 영조는 특별히 그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때 사라진 기록들이 사도세자에게 유리한 기록이었을까요? 사도세자에게 불리한 기록이었을까요? 유리한 기록이라면 정조가 그렇게 지울리 없겠죠. 사도세자에게 불리한 기록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세초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왕조 실록과 승정원 일기에 남아 있는 기록들은 그나마 사도세자의 좋지 못한 기록을 지우고 남은 것들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영조실록을 편찬한 것은 정조 재위년간인데, 정조가 한명에게 특별히 사도세자가 죽기 5년전부터 10년치의 실록 편찬을 맡겼고 이미 그가 잘 정리를 해놓았으니 다른 이들이 더이상 손 볼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조작의 의혹이 있다면 오히려 정조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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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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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6 15: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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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도세자가 저렇게까지 무너지게 된 데에는 영조의 탓이 큽니다. 영조는 40이 넘은 나이에 얻은 유일한 후계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습니다. 그래서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며 사도세자를 자신의 뜻에 맞는 후계자로 키우고자 극성을 떨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과도한 조기교육으로 10세무렵부터 눈이나 머리가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잦았고(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나와있습니다.) 책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도세자의 스승들은 영조에게 애를 너무 공부만 시켜서 그렇다, 조금만 쉬게 해줘라, 공부 시키는 시간을 좀 줄이자 라고 건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소설책을 읽히면서 공부에 재미를 들게 하자는 건의도 하였고요. 그런데 영조는 그럴때마다 소설을 읽히면 오히려 소설만 보고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거절했고 지금도 저렇게 공부를 하지 않는데 놀게 하면 노는데 재미를 붙여서 더 공부를 멀리할 것이다, 쟤가 아프다고 하는건 공부하기 싫어 꾀병을 부리는것이니 더 열심히 시켜야 한다고 대답하며 그들의 청을 거부했습니다. (이 역시 승정원 일기 등에 나와있는 기록입니다. 한중록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점점 스트레스를 받아 소아비만의 증세마저 보이고 맙니다. 실제로 승정원 일기의 기록을 보면 12세 무렵의 사도세자가 몸이 비대하여 영조가 청년시절 탔던 가마를 타지 못한다는 기록도 있고, 사도세자가 실수를 하자 영조가 저게 다 공부는 하지 않고 살만 쪄서 행동이 굼떠 그렇다고 야단을 일도 있고, 사도세자가 비대하니 넘어지면 크게 다친다고 걱정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세자가 소아비만에 가까웠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스트레스성 소아비만이었을겁니다. 그래서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서도 10세무렵 시집와서 처음 봤을때 사도세자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고 했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사도세자는 그때부터 이미 공부를 조금씩 멀리하며 이상증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하나뿐인 후계자였기 때문에 영조는 그가 15세가 되자 대리청정을 맡겼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후계자로 키우고자 안간힘을 썼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도 권력을 놓지 못해서 말만 대리청정일 뿐이었지만요.
흔히 대리청정을 무난하게 해냈다고 하지만 실제로 실록을 살펴보면 사도세자는 가벼운 업무를 결재하는 수준이었을뿐, 정치적 사안에 참가할만한 권한 자체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세자가 영조에게 이것 저것 물어서 일을 하면 영조는 하나 하나 묻지 말고 네가 알아서 하라고 답해놓고, 막상 세자가 단독으로 무엇을 하려 하면 너는 왜 나한테 묻지도 않고 일을 하느냐고 야단을 쳤었습니다. 그래서 세자는 더욱 위축되었고 그 후로는 무조건 영조의 뜻에 따라 대조(영조)에게 품하겠다, 대조에게 여쭙겠다, 대조의 뜻에 따르겠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는게 다였습니다. 처음에는 세자에게 대리업무를 제대로 하라고 무엇이든 영조에게 묻지 말고 혼자서 해보라고 했던 대신도 나중에는 영조에게 다 물어보고 하라고 태도를 바꿀 정도였습니다. 친소론이라는 성향도 그래서 사실은 세자에게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보통 친소론이라 주장할 때 10세의 세자가 신임사화에 대해 노론과 영조를 비난하여 크게 놀라게 하였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데, 실제 승정원 기록을 살펴보면 세자가 신임사화에 대해 물으니 영조 눈치를 보느라 당파를 내세우기 어려웠던 대신들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영조가 세자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는 일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사도세자가 신임사화나 경종의 일에 대해 관심을 보인 적도 없고 흔히 말하듯 나주벽서사건과 토역경과장사건때도 사도세자가 영조의 뜻을 따르지 않고 소론의 편을 든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나주벽서 사건과 토역경과장 사건때 사도세자는 영조의 뜻을 따랐을 뿐이고, 대신들 역시 세자가 영조를 설득해주기를 기대하는 수준이었지 세자에게 무언가 처리를 내려달라는 식으로 압박을 넣은 것이 아닙니다.(관련된 기록을 역사게시판에 올려놨습니다.)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 영조의 탕평에 어긋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사도세자는 정치적 색깔마저 거의 없는 사람이었고요. 따라서 부자간의 갈등은 당파와는 별 상관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갈등이 불거진 것은, 기질적 차이때문이며 더 정확하게는 영조가 지나치게 사도세자에게 기대를 하였는데 아들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탓입니다.
영조는 대리청정을 맡긴 후에도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호불호가 강했던 성격인만큼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남들이 보든 말들 아들을 비난하는 강도를 높여갔습니다. 당시의 조정 신료들은 부자지간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실정이었습니다. 노론이 모함을 했다고 하는데 정작 사도세자를 모함한 인물로 지목된 김상로같은 사람들조차도 그 당시 사도세자를 너무 책망하지 말라고 영조를 말리다가 욕을 먹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김한채를 죽인 사건이 벌어졌을때 그 사건을 감추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로 유배까지 갔던 적이 있고요. 신하들은 대체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중재하고자 하였고 사도세자의 잘못을 섣불리 고발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세자는 무엇을 해도 야단만 치는 아버지 앞에서 위축되어갔고 스트레스를 받던중 우울증과 화병을 앓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학문을 멀리하고 심지어 정무마저 내팽개친채 향락을 즐기며 현실도피에 빠지게 되었고요. 그리고 급기야는 살인과 궁궐밖 잠행, 기녀와 여승과 놀아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사도세자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그의 측근들은 사도세자에게 불리한 상소문을 고치기도 하고 사도세자가 평양을 갔을때는 세자가 궁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등 세자의 잘못을 감추기에 급급했습니다. (이 역시 사도세자가 죽은 후 박치륭이라는 자가 홍봉한을 탄핵할 때 올린 상소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홍봉한의 반대파였던 공홍파들은 그런 홍봉한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사도세자의 잘못을 간쟁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홍봉한에게 세자를 잘못 보도한 책임을 돌려 그의 권력을 견제하려 하였습니다. 그런 정치 싸움이 계속된 끝에 몇달째 감춰져있던 사도세자의 비행이 들통이 나서 영조의 귀에 들어가 영조가 크게 노하여 사도세자를 더욱 핍박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끝내는 나경언의 고변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더이상 사도세자에게 왕위를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마침 자기 마음에 쏙 드는 세손이 자라나 세자를 대체할 수 있게 되자, 세자가 아닌 세손으로 후계자를 교체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대죄하고 있던 사도세자가 크게 날뛰었던 것 같고 그로 인하여 흉흉한 소문이 떠돌자 보다 못한 세자의 친모가 영조에게 "처분"을 내려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임오화변이 발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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