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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논문주제
[새창]
2014-09-06 14:28:00
2
삭제
답글 쓸 글이 몇개 있는데 머릿속에 정리할 부분이 많아 상대적으로 쉬운 답글부터 달아봅니다.
학사논문에서 자기 생각 중심으로 담을 생각은 완전히 버리는 것이 좋아요.
교수님들도 학부생은 바보취급하고, 본인도 학부시절 그닥 배운게 없잖아요? 그건 글쓴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학교육 전반의 문제거든요.
학부교육에서는 정의나 의의만 알아도 대단한게 되버리죠...ㅠㅠ
이런 상태에서 자기 생각으로 학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글을 쓰면 분명히 개판이 됩니다.
어차피 졸업논문이라 제출했단 기록만 남기고 서랍속에 들어가겠지만 그렇게 쓰면 그냥 분쇄기로 갈리겠죠.
글쓴이께서 동학의 생명사상이란 주제로 쓰고 싶다고 하셨는데 학부생, 그리고 졸업논문이면 간단히 이 주제에 대한 정리논문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쓴 글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는거죠. 정리할 것이 많아지니 각주 달 것 도 많고, 나중에 뒷면에 참고문헌 적을때 많으면 그만큼 다양한 자료보고 공부했다고 교수님도 좋아하실꺼에요.
사실 전 동학의 생명사상을 모릅니다. 그러나 자료 찾는 법은 알기에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1. 지금은 연휴니 일단 국회도서관 사이트 "www.nanet.go.kr"로 들어가세요.
2. 전자도서관 검색에서 "동학 생명" 이렇게 써보세요. 생각보다 검색기능이 안좋아 검색어 잘 넣으셔야 할꺼에요.
3. 그러면 자료가 많이 나오는데 왼쪽 보시면 자료 구분이 있는데 먼저 도서자료 중 일반도서를 누르니
동학의 정치철학 : 도덕, 생명, 권력 / 오문환 지음
이런 책이 보이네요. 이분이 누군지 전 하나도 모르지만 이 책 참고로 해볼만하다는 느낌이 생기네요.
4. 그리고 완쪽 계속 보면 학술기사 부분이 있는데 여기서는 특히 "등재(후보)학술지"를 눌러야 해요.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학술지에 실린 논문만 정리했단 이야기거든요. 눌러볼께요.
헤겔의 인륜성의 관점에서 본 동학 생명사상 / 조극훈
국내학술기사 동학학보 = (The)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17권 2호 (2013. 8), pp.395-425 동학학회 2013.08.30
플로티노스와 동학사상의 생명원리 / 김영철
국내학술기사 동학학보 = (The)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16권 3호 (2012. 12), pp.235-259 동학학회 2012.12.30
동학·천도교에서 '천(天)' 개념의 전개 : 천에서 신으로, 신에서 생명으로 / 허수
국내학술기사 개념과 소통 = Concept and communication. 제10호 (2012년 겨울), pp.135-172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2012.12.31
동학의 생명사상과 생명존중의 교육 / 정현미, 손승남
국내학술기사 敎育思想硏究 = The Journal of education idea. 제24권 제3호 (2010년 12월), pp.263-289 韓國敎育思想硏究會 2010.12.31
동학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 / 최민자
국내학술기사 동학학보 = (The)Korea journal of Donghak studies. 13권 2호 (2009. 12), pp.7-49 동학학회 2009.12.30
대박이네요. 1페이지 내에서도 이렇게 많은 논문을 찾아냈어요. 2페이지 넘기면 더 나오겠네요.
특히 글쓴이가 생각한 주제는 2010년 이후 계속 연구되어온 최신이자 지속적인 주제네요. 좋은 주제 선정하셨네요.
잉? 그런데 원문을 읽어보려고 하니 원문보기가 흑백처리되어있네요?
이건 국회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내에 국회도서관 검색 컴퓨터에서 읽거나 출력할 수 있어요.
지금은 추석이고 연휴네요.
그렇다고 짜증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학술지 발간하는 학회는 거의 대부분 인터넷 사이트 있고 인터넷에서 논문 볼 수 있게 해주거든요. 돈내느냐 무료공개냐 그 차이인거죠.
뭐 제 논문 아니니 일단 위 자료에서 제일 많이 나온 동학학회 가볼께요.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하니 곧바로 나오는군요.
사이트 들어가서 "동학학보" 누르니 학회지 검색이 뜨는군요.
"생명"으로 검색하니 자료가 우르르 뜨는군요. 오~ 공짜로 읽을 수 있군요.
이런식으로 국회도서관에서 자료 찾고, 학회 사이트에서 공짜로 볼 수 있는지 검색해보고 공짜로 볼 수 없으면, 국회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컴퓨터 찾아가서 출력해오면 됩니다.
이렇게해서 논문 10여편을 출력했으면 읽어야죠. 읽으실 때 중요한 점은 하나의 논문을 만들때 수많은 자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그 논문의 인용자료, 즉 참고문헌이 뭔지 각주를 꼼꼼히 읽어야 해요. 논문 저자 자기 생각인지 인용한 생각인지를 제대로 파악해야죠.
그러다보면 논문 하나만 읽더라도 그 논문저자가 참고한 책을 찾아보게 되고, 나무에서 가지가 생기듯, 나무가 땅속 깊히 뿌리내리듯 지식이 발전하고 그에 따라 지혜가 풍부해지죠. 이게 공부에요.
이렇게 읽다보면 글쓴이가 단지 생명사상을 정리할지, 아니면 한발자국 더 나갈껀지 감이 잡힐꺼에요.
지금은 이런 과정이 전혀 된 것이 없으니 뭘할지 모르는거죠.
일단 자료 찾는 법 가르쳐 드렸고 심지어는 제가 자료 몇개 찾아드린 듯 하니 먼저 읽고 고민해보세요.
그리고 정말 답안나온다 싶으면 찾은 논문 가지고 생명사상 정리해서 논문 쓰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졸업논문이 되어요.
분명히 출처, 즉 각주는 잘 달아야죠.
아무튼 추석 잘 보내시고 논문 잘 쓰시기 바랍니다.
14
철학과를 가도 될까요?
[새창]
2014-09-02 22:10:4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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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경전도 좋은 글이죠. 읽으면 정말 좋습니다.
철학책을 접할 때 입문서를 가르쳐드려도 되는데요. 전 글쓴이께서 어떤 부분이 특히 관심있는지 고민하셨으면 좋겠네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도 되는데 그러다보면 머리에 남는건 크게 없고 지치거든요.
꼭 철학적인 주제가 아니어도 좋아요.
제가 철학적 논점에 손대기 전에 고민하다 궁금했던게 '왜 사회는 발전하는데 인간은 벌레같이 살지?'였거든요.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그냥 범죄자나 도덕적인 규율을 위반한 사람만 벌레라고 생각하고 고민했는데
그 고민을 가지다보니 별다른 죄가 없는 사람도 벌레취급 받는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관련 책 읽어보고 제가 처음 한 생각 수정도 해보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철학게시판에는 대단하신 분이 많아요. 그러다보니 글쓴이가 특별히 궁금한 부분을 알려주시면 그에 맞는 책 입문서부터 기본서 심화서 논문까지 다 가르쳐줄꺼에요.
막연히 철학이 알고싶다고 하면 유명한 철학입문서만 추천할 것 같네요.
13
오유에도 베충스러운 성관념을 가진 인간들이 많나봐요?
[새창]
2014-09-02 21:50:1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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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게시판에 글을 올려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철학게시판의 글이 베오베에 가서 오유를 달궜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네요.
제가 철학계를 대표하는 사람은 당연히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의 지나가는 '행인 48853' 정도에 불과한 사람이고,저의 공격적인 어투, 쓸데없이 길기만 한 글 때문에 썩 여기에서의 평판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좋다 나쁘다 이분법이 있다면 나쁘다에 가까울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이 오유 철학게시판의 대표적인 입장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입장입니다.
그러나 글쓴이께서 베충스러운 인간이 오유에 많다고 하셨고, 꼭 저를 지칭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 의심의 대상이 되는 글에 답글을 달아 베충스러운 사람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용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여기에 몇안되는 글, 정말 몇 안되지만 어마어마한 장문의 글만 남겼는데 그 내용의 거의 대부분은 동어반복이었습니다.
그 중 많이 썼던 이야기가 '존재와 당위는 구분해야 한다.'였습니다.
제가 잘 못 읽었을 수 있으나, AV배우와 성매매종사자의 인식차이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글은 지금도 적었지만
그런 현상이 우리나라에 왜 존재하느냐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글이 아니었죠.
범죄는 나쁘죠. 그러나 범죄는 발생하죠. 범죄에 대해 분석할 수 있는거죠. 범죄를 분석하는 것은 범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가 옳다고 하는 것은 아니죠. 범죄를 분석하다보면 범죄 전반의 수요공급곡선을 볼 수 있을 수도 있고, 범죄자 개개인의 사정을 깊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다는 자체가 옳고그름을 인정하고 들어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글쓴이도 이런 존재와 당위는 구분하실 줄 아는 분이신가 봅니다.
제가 베오베 간 원글의 200개 넘는 댓글을 제대로 다 읽지는 못해서 글쓴이가 비판하는 부분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을 보니 글쓴이와 읽는이가 공통된 합의점이 있어야 하는데 글 전반부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군요.
그런데 글 후반부를 읽다보니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실 줄 아는 분이신데 존재와 당위가 구분이 또 안되는것 같지?'란 인상을 받아 글을 시작했습니다.
글쓴이께서는 글 후반부에 성매매와 av합법화를 주장하시고 그 근거로 인간으로서의 측은지심, 그들도 인간인데 제대로 살아야 되지 않겠냐는 것을 근거로 드셨습니다.
그들의 보호는 그들의 지위향상을 가져오고 그러다보면 사회가 발전하여 평등해지는 순간 이런 불합리한 것이 사라질 거라고 설명하신 듯 합니다.
글쓴이의 말은 맞습니다. 유럽 여러 국가에서는 그들도 사람이고 복지혜택 등 제대로 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합법화를 시킨 다음 세금도 제대로 거두고 복지혜택도 제대로 준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지금과 같은 정육점 진열장 형식(저도 성매매업소를 잘 몰라 TV에 나오는 장면만 생각해서 적었습니다.)의 상품에서 한단계 더 발전할 수 있는거겠죠.
그러나 성매매 합법화는 큰 이론적인 문제점이 있습니다. 국가가 스스로, 법적으로 국민을 1등 국민, 2등 국민으로 계급화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이건 국가가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성매매종사자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분위기에서 국가가 합법화를 해버리면 국민의 고정관념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사실상 국민의 법적 계급화가 이루어져 버리죠. 골때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한 말처럼 그들도 사람입니다. 사람다운 대우를 받아야죠. 그렇지만 이런 문제점으로 새로운 노예계급을 국가가 용인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 계속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국가는 계급사회가 되더라도 눈 앞에 고통받는 사람을 도와야 되느냐, 계급사회를 법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만큼은 할 수 없는거 아니냐.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해도 국가는 비난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합법화해서 직업으로 만들면 점차 사람의 인식이 좋아져서 그들의 인권이 향상될 것이라는 가정도 가능합니다. 물론 가능성 있는 이야기고 타당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합법화나 마찬가지인 일본의 상황도 우리랑 썩 다르진 않고(완벽한 합법화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합법화가 되었을 때 그 인식의 변화는 몇백년을 두고봐야 나타나는 초장기 프로젝트일 수도 있죠. 그러다 원래 목적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오유에서 누가 기사를 긁어온 것을 본 것 같은데 합법화한 유럽 국가에서 성매매와 종사자가 줄어들지 않고 있어 북유럽 국가의 불법화를 본받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링컨이 인종차별금지정책을 실시했다고 하나 1960년대 마틴 루터 킹, 말콤X 등 흑인인권운동가들이 열정적인 활동을 할 정도로 차별국가였죠. 지금도 미국 내 인종차별은 흔한 일이죠.
물론 합법화를 시켜야 성매매업계의 마틴 루터 킹이 나올 수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즉 그말을 반대로 하면 100년이 지나도 성매매종사자들의 인권은 다른 사람들보다 낮을 수 있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죠. 그것도 법적으로요.
저도 성매매합법화냐 지금처럼 불법화냐? 5 ! 4 ! 3 ! 2 ! 1 ! 이렇게 다급하게 물어보면 성매매 합법화를 선택할 사람입니다. 글쓴이와 근거는 같습니다.
그러나 그걸 당연히 그렇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거죠.
그리고 그 사람의 안타까움 때문에 섣불리 정책을 진행했다가 더욱더 큰일나는 경우는 우리 곁에 많았습니다.
케인즈식 개입주의, 우리가 수정자본주의라고 알고 있는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고 20세기 중반 황금경제기를 이뤄냈죠.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때문이라고 하는 말도 있지만 현상은 하나의 이유로만 설명할 수 없으니 그것도 하나의 이유 이것도 하나의 이유였겠죠.
그러나 오일쇼크를 통해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수정자본주의 시기 황금기때에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손' 일파들, 고전적, 신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서 세계를 지배해버립니다. 그리고 전세계를 사바나 초원이나 정글로 만들어버렸죠.
케인즈식 수정자본주의에 대해 제가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경제학의 시초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이론은 원인을 분석하는 것보다 상황을 해소하려고 한 경향이 큰 듯 합니다. '잉, 재분배가 안이루어지네? 재분배시켜야지. 실업이 발생하네? 공공근로 한번 해볼까?' 무엇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것인거죠. 오일쇼크 이후 그 이론이 안 통하자 신자유주의자들은 뻔뻔하게도 '보이지 않는 손'의 역사적 증명을 가져옵니다. "난 '보이지 않는 손'이 뭔지 몰라. 그런데 역사적으로 놔뒀더니 알아서 성장했어. 반박해봐. 굶어야 일하지. 배부르면 일하겠어? 반박해봐."
사실 케인즈식 수정자본주의가 어떠한 내용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냥 대충 아는대로 끄적거렸습니다. 그러나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를 읽어본 결과 제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고 제 뇌를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허접 그 자체의 논리였습니다. 이런 한심한 사람들에게 노벨상을 준 현실이 안타깝고, 이런 논리에 돌아가는 세계가 안타까웠습니다. 논리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적자생존의 세상을 만들기 위한 몇십년간의 기득권층의 치밀한 준비가 있었는데 수정자본주의는 그것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한 것은 사실이죠.
최근 논객 중 노정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지은 '논객시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강준만, 유시민, 진중권 등 한때 한국을 달궜던 진보논객들의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죠. 전 노정태씨보다 글을 못적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 평가하면 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읽다보니 재미가 약간 떨어져서 결국 다 못읽고 책꽂이에 꽂아놓은 비운의 책이죠. 각 논객을 나열해서 설명하다보니 제가 큰 관심없는 논객 나오면 확 관심이 떨어지는 영향이 있었나 봅니다. 결국 제 문제군요. 논객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보고 싶다면 좋은 책인 듯 합니다. 그 책에 진중권 항목에 보면 2004년 탄핵정국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승리하고 민주노동당도 원내진출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일부분 인용하겠습니다.
"박정희 망령은 물러갔고, 조선일보는 제 몫을 찾았고, 한나라당은 몰락했고,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진출에 성공했다. 모든게 내가 원하던 대로 된 셈이다. 그러데도 까닭없이 느껴지는 이 허탈함의 정체는 뭘까?" (논객시대, 74쪽.)
그는 미래를 예견했던 건가요? 10년 뒤인 오늘 이 글을 바라보면 그가 느꼈던 허탈함은 무엇인지, 그가 느꼈던 기쁨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사실 진중권 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도움도 안되는 집단이 진보라고 지칭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수립하고 나서, 진보라고 지칭받는 여러 집단에서는 나태하게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의 승리를 국민들의 인식이 성숙한 것으로, 성숙하였기 때문에 이런 경향은 앞으로 계속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만 하였죠. 어느정도 진보가 아닐까 생각되는 집단에서도 이제 드디어 우리나라도 제대로 된 보수 민주주의 국가가 설립되었으니 자신들의 목소리를 더 키워도 되겠다. 그나마 봐줄만한 보수 집단이 잘못해도 오냐오냐하지말고 꾸지람하면서 강하게 나가보자 라고 생각했죠.
그 결과는 우리가 잘 봤죠. 대통령이란 한 인간을 자칭 보수진영 자칭 진보진영 자칭 중도진영 다 포위해서 가루가 되도록 깠죠.
보수진영에서는 다시 정권을 찾아 제대로 해먹을려고, 진보진영에서는 이제 민주주의가 되었으니 목소리 크게 해도 된다고, 중도진영에서는 정신 못차리고
그러다 이 지경이 되어버렸죠. 어떻게든 정권을 찾아보려고 혈안이 되어있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던 자칭 보수진영의 공격에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다가 다 날아가버렸습니다.
어떠한 불합리한 상황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개선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국가의 본분이고 그래야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계속 주인일 수 있죠.
그러나 섣부른 시도와 개선은 이미 쌓아놓은 것을 모조리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즉 당위만 가지고 급하게 나아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질 수 있는거죠. 더러워도, 끔찍해도 존재가 무엇인지에 대한 판단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이란 막나가는 철학자가 했던 이야기를 적어보겠습니다. 책이 옆에 있지만 찾아서 적지 않고 생각나는데로 적겠습니다. 틀린 내용 많겠지만 그 느낌 중심으로 봐주십시오.
아프리카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다는 광고 중 지금 지나가는 10초에 몇명의 아이가 죽어갑니다. 라는 말이 있죠.
그러면 사람들은 지금 제가 글을 쓰는 중에도(제 글은 길어서 정말 많은 아이들이 죽었을 듯 합니다. 슬픈 일이죠.) 수많은 아이들이 죽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빨리 돈을 보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빨리 돈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돈이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빨리 갈까요?
그 복지재단도 근무시간이 있을 것이고, 은행도 근무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내는 즉시 곧바로 송금하지 않겠죠.
일정 금액 이상 모여야 돈을 보낼 것입니다. 돈을 안보내고 물건을 산다고 하면 물건을 사고 준비하고 배송하는 시간도 들겠죠.
물론 이 글을 읽으시는 다른 분들은 저에게 억측도 참 심하다. 그 광고를 보고 우리 모두가 돈을 빨리 보내면 빨리 그들에게 돈이 갈 수 있을 것이지 않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겠죠.
그러나 지젝이나 저는 돈을 보내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복지재단이 주체가 되어서 아이들을 돕는다는 점을 보여드리기 위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즉, 얼마의 돈을 모아 얼마의 돈을 어떤 형식으로 보내는 것은 복지재단 마음이죠. 우리는 ARS든지 계좌이체든지 일정 금액을 기부하고 나서 정신적 만족감을 얻지만 그 행정처리 과정 중에도 실제로 많은 아이들은 죽어가겠죠.
지젝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우리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죽는거는 마찬가지고, 광고를 하는 복지재단의 의도대로 이런 개똥철학같은 생각조차 안하고 급하게 헐레벌떡 행동하게 되는거죠.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수를 하면 죄짓는 것 같고, 삼수를 하면 역적이 되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공부는 때가 있다는데, 그 시기를 어기면 큰일날 것 같습니다. 기업체에도 우수한 인재를 뽑는다면서 입사제한 나이를 만들고 있죠. 우수한 인재보다 상명하복 기업의 위계질서가 더 중요한가 봅니다.
뭐든지 일은 제때제때 해야하고 안하면 야단이나 불이익을 받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것 같으나 사실 누군가 시키는 것을 뒤쳐지지 않을려고 아둥바둥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매슬로우는 욕구이론을 주장했죠.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이 되면 점차 고차원적인 욕구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매슬로우 욕구이론을 제대로 보진 않았지만 이 욕구이론은 통치이론의 상당부분을 발가벗겨 버립니다. 즉, 사람이 딴 짓을 못하게 하려면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된다는 반대해석이죠. 신자유주의 경쟁체제는 발전을 위한 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이렇게 사람을 딴 짓 못하게 일만하는 기계로 만드는 좋은 통치술입니다.
그런 뒤 지젝은 러시아 공산혁명을 일으킨 레닌의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그 당시 러시아는 자본주의자,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등등 여러 분파로 나뉘어서 난리가 났나봐요.
그러다보니 각 분파에서 당장 모스크바로 쳐들어가 왕정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성급하게 생각했나봐요. 출발신호총만 누군가 쏘면 곧장 달려갈 기세였던거죠.
많은 이들이 레닌에게 공산당이 먼저 쳐들어가야 한다고 했나봐요.
그때 레닌은 단호하게 결정하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요.
몇개월 뒤 몇번 읽었는지 모르지만 드디어 하산한 레닌은 러시아의 상황을 보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몇개월 전과 똑같이 사람들이 성급하게 행동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거든요.
그 후 레닌은 모스크바로 가서 혁명을 성공했다고 합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과 제도는 버려버리고 스스로가 제도와 법칙을 만들고 행동한 결과 혁명에 성공한거죠.
뭐 그 이후는 우리가 아는 공산당 이야기와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였는데 제 기억에 근거에 적을려고 하니 맞는지는 모르겠네요. 대충 느낌은 이렇습니다.
우리도 옳다는대로 행동해야 좋은 세상으로 바뀐다고 하죠.
과연 옳다는 것은 뭘까요? 어버이연합이나 일베1충에게는 지금 현 정권이 옳은 것이겠죠. 그러니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행동한다는 것 개선한다는 것도 본인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일 수 있는 거에요.
상황이 불쌍하고 급하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죠.
글쓴이는 당장 합법화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안한 것 같아요. 그러나 합법화해야하는데 사람들이 왜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수준이 저급하냐 이러니 사회가 이모양이지 란 생각은 하신 듯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를 둘러싼 것은 어떤 것이며 우리는 뭘할 수 있을까 존재를 보고 고민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네요.
당위만을 추구하고 행동하다가는 우리도 수정자본주의처럼, 우리도 겨우 10년 겪어본 그나마 나았던 보수정권처럼 없어져버릴 수 있거든요.
제가 봤을 때 이 av와 성매매의 인식과 관련한 글은 이런 사회의 불일치한 기준에 대해 의문을 던져본 글 같습니다.
분명히 이상한 답글 단 사람도 많았겠죠. 그러니 글쓴이가 이런 글을 적었을테니깐요.
그러나 당위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고민없는 당위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당위에 공감하지만 그 위험 때문에 주저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베충이가 될 수 있는 용의자선에 선 이유로 글을 한편 글쓴이께 올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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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설, 성선설 어느 것을 믿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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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21:5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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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글을 길게 쓰지만 이번에는 짧게 할 말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차라리 부족하게 설명한다고 생각하면 말이 짧아질 듯 합니다.
전 이 논쟁의 기본 전제조건인 선이 뭔지 악이 뭔지부터 생각해야할 것 같아요.
푸코가 '말과 사물'이란 책 서론에서 보르헤스가 인용한 중국 백과사전의 분류법을 다시 인용하죠. 책이 근처에 있어서 보고 적어볼께요.
동물을 분류하면서 1. 황제에게 속하는 것, 2. 향기로운 것, 3. 길들여진 것, 4. 식용 젖먹이 돼지, 5. 인어, 6. 신화에 나오는 것, 7. 풀려나 싸대는 개, 8. 지금의 분류에 포힘된 것, 9. 미친 듯이 나부대는 것, 10. 아주 가느다란 낙타털 붓으로 그린 것, 11. 기타, 12. 방금 항아리를 깨뜨린 것, 13. 멀리 파리처러 보이는 것
생뚱맞아 보이는 것이긴 하나, 우리가 아는 동물의 분류인 포유류, 파충류, 어류 등의 종속강목인가?? 이런 분류는 아니지만 이런 생뚱맞는 분류 속에서 체계적으로 동물을 나누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동식물을 나눌때 린네의 분류법을 사용하죠. 이 분류법이 진리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아닌 세상도 분명히 존재했다는거죠. 단순 분류법인데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 여기고 있죠.
보통 선과 악을 구분할 때 주로 나오는 이야기가 공리주의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이 뜻은 대체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공리주의가 극단적인 형태로 폭주했던 시기가 바로 나치죠. 최대다수인 아리아인의 순혈을 지키는 것이 최대선의 세상이었죠. 순혈을 오염시키는 유태인은 존재 자체가 악이 되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신자유주의 경쟁체제를 내면화시키고 기업이 원하는 노동력을 항상 유지하기 위해 평생을 갈고 닦는 인간상이 선이 되었죠. 생산직 노동자라고 하면 그 노동을 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술을 덜먹고 숙면을 취하고 공부를 하는 이 모든 것이 다 노동자의 책임이 됩니다. 나이가 들어서 노안이 오거나 근육이 점점 줄어드는 것은 신자유주의에서는 다 노동자 책임이 되어버리죠. 기업이 원하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은 기업과 노동자 쌍방의 평등한 계약에서 계약조건에 위반하는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그 결과 해고가 자유로워지고 재계약은 할 필요가 없어지는거죠. 즉,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맞추지 못한 사람은 악이 됩니다. 왜 악이 되냐고 황당하시겠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이 빈곤이 범죄가 되는 과정이 지금 완전 시작단계입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뉴욕시 줄리아니 시장의 무관용원칙부터 시작해서 빈곤한 사람들에게 엄격한 법집행을 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가고 있죠.
지금 우리나라 경범죄처벌법이 개정이 되어서 구걸행위를 하면 잡혀가는 조항이 추가되었다고 합니다. 이때까지 우리나라는 가난해서 시위하는 사람에게 시위란 명목으로 엄정처벌을 했지만 이제 가난해서 먹고살려고 하는 행동에 형법을 적용하기 시작한거죠. 우리도 가난하다는 것이 죄가 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악이라고 하면 저처럼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의 안구에 테러를 가하는 사람은 악이 될 수 있습니다. 글쓴이는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으셨겠죠. 선과 악이 어느 정도 잡혀가고 있다고 글쓴이는 답글을 통해 적으셨는데, 사람은 항상 자신이 살던 시대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죠. 종말론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종말이 일어날꺼라고 확신합니다. 삼국지연의를 재미있게 읽은 중2병 학생은 매년 몇만명씩 있어왔지만 그 친구들 중 상당수는 자신이 중2병걸린 이 시기를 난세로 지칭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게 맞다고 하나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당연히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죠. 자신이 별다른 불편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는 이 세상이 발전되었다고 착각할 여지를 낳습니다. 사실 불편한 세상에 적응을 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죠. 아마 타임머신이 있어서 중세시대 농노에게 물어봐도 불편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편한 걸 경험해봤어야 비교할 거리가 있죠.
참고로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야기는 유교 사상의 분파 맹자와 순자의 대표이론이라고 합니다. 유교는 교라는 단어로 종교같은 느낌이 들지만 원래는 통치이론이죠. 백성을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 전공이 아니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신자유주의가 국민들에게 경쟁의 내면화를 가져왔다고 하면 유교는 백성들에게 복종의 내면화를 가져왔죠. 즉, 이 이야기의 결론은 통치술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악설의 결론은 악하니 강력한 법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면서 부려먹어야 한다는거죠. 악하다, 강력한 법, 이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부려먹어야 한다는게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번 글에서 인구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결혼제도를 만들어서 인간공급을 원활하게 했다는 가설을 적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푸코의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위험한 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은 나빠도 원하면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다고 했죠. 그러나 시작이 나빴다는 사실, 정신을 놓으면 어떻게 변질되어서 내 목을 조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기만 하면 됩니다. 칼, 자동차 같이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죠.
성선설과 성악설은 항상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못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터넷 짤방에도 나오잖아요. "남자든 여자든 무슨 상관이에요. 맛있으면 그만이지."
인간이 착하든 악하든 부려먹기만 하면 되거든요. 어떻게 잘 부려먹을지 논하는거지 어떻게든 부려먹는거는 같거든요. 이런 통치술의 일종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새로운 발상을 얻을 수 있으니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잘못을 다시 안저지를려고 그러는거잖아요.
이 성선설과 성악설이 우리 조상과 동아시아 사람들의 목을 어떻게 조여왔는지만 알아두시면 아마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결국 또 전 아무런 결론이 없이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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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언어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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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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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다보니 진정한중립 님의 설명이 제 이야기랑 어느정도 비슷한 것 같아 진정한중립 님 설명 듣고 제가 보충적으로 또는 예시를 들어서 약간 비틀어 설명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기다려보다 이 글이 잊혀지는데 말이 없다하면 제 이야기 보충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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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누군가의 문제로 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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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14:5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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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오후부터 너무 많이 떠들어서 지치네요. 본연의 업무나 좀 하고 게시판 돌아와야겠습니다.
책 내용을 설명하는 것보다 책 어디에 글쓴이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는지 약간 적고 가겠습니다.
미셀 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마지막 강의 생명관리정치와 인종주의의 관계
미셀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초반 강의 자유주의의 특징
푸코 전도사가 되어버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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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삭금] 뉴턴과 데카르트,라이프니츠의 공간관이 이해가 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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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14: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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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는 듯 답글 숫자 하나 더 올려드리나 절망만 안겨드리겠습니다.
뉴턴과 데카르트, 라이프니츠에 대해 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아는 것은 버트란드 러셀은 글을 정말 못쓴다는 것입니다.
비록 서양철학사를 지어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나 제가 예전 글에 적었듯이 노벨상은 밀턴 프리드먼도 받았습니다.
버트란드 러셀이 영미철학계에서 어마어마한 사람이라 노벨상이 그 사람에게 묻어가려고 상을 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번역계는 직역 중심입니다. 전문번역가 이희재씨가 말했는데 직역은 직역 나름대로의 장점, 의역은 의역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지만
일본에서는 헤겔도 정신놓고 적은 정신현상학이란 초기 사상을 담은 책이 완전 초보자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의역을 잘해놔서 학계 뿐만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일반인도 환호했다는 글을 적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임석진 교수가 헤겔의 책을 번역하고 있는데 법철학만 잠시 읽었지만 책을 읽는 것인지 책이 나를 읽는 것인지, 자기 자랑하는 것인지 자기도 뜻을 모르는 것인지 독일어 원문 막 달아놓고 난리가 났죠.
직역을 한다는 것은 원저자의 권위에 기댄다는 말일 수도 있고 자신의 지식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문법파괴자가 되어서 이해도 못할 말을 한글이랍시고 적어놓는거죠. 최소한 주술 호응이나 대명사가 앞문장의 무엇을 수식하는지는 제대로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는데, 심지어 자기가 한글을 모르겠으면 각주라도 달아서 설명을 못하겠으나 이런 글로 풀어쓸 수 있다라고 추가설명을 하던지 해야하는데 그런 것은 학자로서의 자존심에 벗어나는가 봅니다. 책이란 것은 다른 사람이 읽는 것이고 읽을 수 있게 해야하는데 말이죠.
버트란드 러셀이 글을 못 쓴다고 하면서 한국의 번역풍토 이야기를 하니 말이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그나마 우리나라는 학문상 미국의 식민지나 마찬가지인 상태여서 영어 번역자의 수준은 뛰어난 편입니다. 직역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말은 알아듣죠. 버트란드 러셀의 책을 서양철학사 뿐만 아니라 두세권 훑어봤는데 이건 직역을 하는 번역풍토에다가 버트란드 러셀의 글솜씨가 합쳐져서 위대한 작품이 나온거죠. 버트란드 러셀은 뛰어난 학자가 맞지만 글을 쉽게 잘쓴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뛰어난 번역자들이 러셀의 악명에 큰 도움을 주기도 했죠. 또 글 못쓰는 사람이 리처드 도킨스라고 있죠. 저도 왠만하면 외국인 원저자가 글 못쓴다 이야기 안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무식해서 못 읽는 것일 수도 있거든요. 제가 지난번 글에 적었듯이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기 때문에 제가 바보여서 학자들이 바보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글을 잘쓰는 사람을 봤거든요. 할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제 눈으로 봤거든요.
러셀과 도킨스와 같은 나라인 영국 출신의 생명과학 저술자 매트 리들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전자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저술하는 사람이고 책으로 상도 어느정도 받은 베스트셀러 저술가죠. 그 사람의 글은 쉽게쉽게 술술 넘어갑니다. 번역가가 일을 잘했나 하고 다른 번역가가 번역한 책을 읽어봤는데도 쉽게 잘 읽히더군요. 책 중간에 이런 말을 자기가 적었더군요. 자기는 쓴 글을 다시 점검하면서 수동태 문장을 가급적 능동태로 바꿔 읽기 쉽게 노력한다고 말이죠. 독자가 읽는 것이 책이란 기본 마음가짐으로 읽기 쉽게 계속 점검하고 고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사람이 글을 쓰면 항상 리처드 도킨스가 추천의 말을 한문장씩 써주는데 그냥 인사치례로 쓰는 말이겠지만 전 더 이상 인사치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도킨스는 그런 마음이 없었겠지만 글 못쓰는 도킨스가 글 잘쓰는 리들리에 대한 찬사로 보인거죠. 리들리와 저의 정치적 사회적 시각은 완전히 다르긴 하지만 전 리들리에 대해 대단한 사람이라고 극찬합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쉽게 잘 적어줘서 자신의 의견을 저에게 잘 알려줬고, 그렇기 때문에 전 그 사람에게 반대를 할 수 있는거죠. 알지도 못할 글 적어놓으면 전 이해도 못하고 반대도 못하거든요.
참고로 우리나라 학자들도 글 못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수동태는 막 남발하고(이희재씨가 이야기했는데 영미권에서 수동태를 잘 쓰는 이유가 주어같은 책임 소재를 잘 안 밝히고 싶을때 쓴다고 하더군요. 판결문 같은 경우에 그런 경향이 보인답니다.) 우리나라는 동사 중심의 말인데 명사 중심의 영어를 그냥 무작정 번역해 명사 투성이로 만들어버리고, 읽다보면 술술 안읽히고 턱턱 중간에 막혀버리죠. 학창시절에 글쓰기나 말하기를 가르쳐야 하는데 객관식 문제풀이나 가르치고 있으니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또 서론만 잔뜩 적었습니다. 본론은 러셀은 위대한 학자지만 안 읽히면 그냥 놔뒀다가 나중에 찾아볼 때 쓰시고
썩 좋은 번역은 아니지만 러셀보다는 잘 읽을 수 있는 책이 있어 추천하려고 합니다.
한스 요하임 슈퇴리히 라는 독일인이 지은 세계철학사입니다.
표지를 너무 알록달록하게 해서 뭔가 지식인이 볼만한 책이 아니라 중딩이 읽을 책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원저자가 뭔가 쉽게 알려주려고 노력한 게 느껴집니다.
프랑스에 현대철학의 주류를 빼앗겼다는 아쉬움을 계속 보이면서 독일 철학자 짱짱! 이러고 있긴 하지만
러셀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듯 합니다. 뭐 돌아서면 다 까먹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그 책에 나온 글쓴이가 궁금한 부분을 적어주는게 인간으로서의 도리이겠으나 도망가겠습니다.
일이병생활 열심히 하시면 상병부터는 여유가 생기실 것입니다.
몸 건강히 잘 갔다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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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부와 av배우의 차이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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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13:5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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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한두가지 이유로 분석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지금 답글을 주신 분 내용을 다 혼합하면 이 내용을 잘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도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거든요.
일단 일본 av나 미국 포르노 등이 우리나라로 들어왔을 때(당연히 처음에는 밀수품으로 지금은 인터넷으로 들어오겠지만) 일종의 문화로 들어왔잖아요. 문화상대주의란 관점으로 '아 저 동네는 저렇게 사는구나.'라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박혔을 수 있죠. 그 무의식을 가진 사람이 늘어가고 생각대로 행동한다는 점으로 보면 그런 무의식이 사회 전반으로 퍼진 것일수도 있습니다. 분명 양성화시키려고 한 일본과 미국업계의 노력도 있겠죠. 미국 최고의 포르노배우 제나 제임슨은 어마어마한 재산으로 정말 남부럽지 않게 살잖아요. 아오이 소라인지 소라 아오이인지 아직도 성이 뭐고 이름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연예인하고 있고 마히로라는 배우는 자신의 안타까운 삶을 담은 영화까지 나왔죠.
그런데 주관적이고 주관적이며 주관적인 리그베다위키와 미러 사이트인 엔하위키 미러에서 보면 정작 일본에서도(이분들이 일본 av만 찾아보고 미국 것은 잘 안보나 봅니다.) av배우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지는 않다고 합니다. 남자는 정액창고, 여자는 매춘부랑 비슷한 대우라고 하죠. 그들 중 대부분은 소프랜드 등 성매매업소에 종사(죄송한데 소프랜드가 성매매인지 유사성매매인지 여부는 따지지 맙시다. 저도 모릅니다.)하고 한 av배우는 야쿠자에게 죽은게 정황상 분명한데 경찰은 자살로 수사종결 시켜버렸죠.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절대 자살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경찰과 같은 국가의 공권력도 av배우들을 야쿠자의 한 분파로 생각해 보호를 안하는가 봐요. 그러고 보면 bakky사의 av배우 집단연쇄강간 사건이 밝혀진 것이 대단하긴 하네요. 그리고 오히려 일반인이 성공하는 것보다 더 힘든 상황인가봐요. 정작 우리도 av배우나 포르노배우 중 성공한 사람 손에 꼽으라고 하면 진짜 손에 꼽을 수 있잖아요. 일반인 중에 성공한 사람 손에 꼽으라 하면 엄마친구아들, 엄마친구첫째딸 둘째딸 별의별 사람이 다 나오는데 말입니다.
또 일본이나 미국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폭격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보다 무관심한 사람이 더 많죠. 사람이 막 죽어나가는데도 말이죠. 또 다른나라 이야기하면 항상 나오는 것이 우리나라나 신경쓰라는 말이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정작 우리나라 일에 신경 안쓰고 훈수만 두는데 말이죠.
그런데 글쓴이가 쓴 세번째 문단은 논란의 여지가 큽니다. 다음 미즈넷 같은 사이트에 가보면 종종 올라오는 것이 남편이 야동을 보는데 화가 나고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다. 남편이 나 몰래 자위를 한다. 어떻게 해야하냐. 그런 내용이 잊을만 하면 올라오거든요. 그리고 제가 여자사람친구가 아예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제가 가끔씩 듣기로는 연애에서 성관계는 괜찮은데 성매매업소나 원나잇은 봐줄 수 없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제가 들었던 시기와 글쓴이가 들었던 시기가 달라 그 사이에 사회적 분위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죠. 그렇지만 제가 들은 이야기가 대체적인 이야기인지 글쓴이가 들은 이야기가 대체적인 이야기인지 아니면 둘다 특이한 소리 듣고 대체적으로 착각하는건지 한번 따져볼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보면 항상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거든요. 생각보다 팔랑귀로 남의 가치관과 자기 가치관이 섞여 뭐가 뭔지 모순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거든요.
노예생활 하는 사람에게 '넌 노예생활 한다. 벗어나야되지 않겠느냐. 자유생활을 하면 힘들더라도 더 많은 대가를, 덜힘들지만 지금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라고 말해주니 정작 노예생활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없애버리고 자발적으로 노예생활에 더 충실하게 살죠. 인종의 문제도 아니고 지식과 지혜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순적인 상황을 자기합리화해버리는거죠.
그러나 글쓴이의 주장을 어느 정도 받아들인다면 국내에 있는 실재로 존재하는 공포와 불안감, 바다 건너 있는 불안감이나 공포가 하나없는 하나의 영상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자유주의 정권의 특징은 아니지만 신자유주의 정권이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정책이 위험을 관리하며 위험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주입시키는거죠.
엉뚱한 이야기네요. 넘어갈께요.
저도 긴 글로 설명했지만 이건 한두가지 문제로 설명할 수 없을꺼에요. 모든 사람이 다른 이야기를 해도 다 맞는 말이 될꺼에요.
복합적인 문제거든요. 일단 전 위에 답글 다신 분과 비슷한 의견, 겹치는 의견 많지만 제 나름대로의 분석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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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언어_2
[새창]
2014-09-01 13: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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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대로 된 고민을 안해서 뭐라고 딱 설명할 수 없는데 글쓴이님의 첫번째 답글 내용에 공감을 합니다.
이 사유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정치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게 조르조 아감벤의 '동시대란 무엇인가'라는 글이거든요.
강의한 내용을 적은 글이라고 하던데 언어를 통해 살아가는 세상 속에 있긴 하지만 항상 표현하지 못할 것을 보는 사람이 있죠.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은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시대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동시대인이 아닙니다. 여기에 니체가 말한 '동시대인은 반시대인이다.'라는 반시대적 고찰의 내용이 떠오르죠.
그냥 사례의 적용으로 넘어가보면 우리의 삶도 그렇잖아요. 항상 처음 시작하려고, 부조리하다고 문제가 있다고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항상 그 시대 다른 사람들에게 빨갱이 취급을 받고 억울한 삶을 살았죠. 빨갱이라고 했으면 최소한 관심이라도 받았다는건데 심지어는 아무도 모르게, 악플보다 더 무서운게 무플이라는 것처럼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니체도 당시에 반응이 있긴 했으나 재조명을 받고 유럽을 니체의 세상으로 만든 것은 죽고 난 뒤 몇십년 뒤의 이야기죠. 우리도 빨갱이 취급 받았던 사람이 주장한 내용 속에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죠. 또 다른 사람을 빨갱이로 만들면서요. 막스 플랑크가 말했다는 내용인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 반대자들을 이해시킴으로써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자들이 죽고 새로운 진리를 신봉하는 세대가 주류가 되기 때문에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라는 뜻도 바로 패러다임과 동시대인, 사유와 인식 그리고 언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겠죠.
조르조 아감벤도 학자라 그런지 제가 위에 이야기한 사례의 적용과 같은 이야기를 명시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팍팍 풍겨요.
이 사유와 언어와의 관계, 반시대적 고찰의 니체, 동시대란 무엇인가의 아감벤의 주제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5~600페이지가 되는 해설서를 쓴다고 하더라도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입니다.
참고로 이 글은 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서론"이라는 작고 앏지만 비싼 책의 세번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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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를 가도 될까요?
[새창]
2014-09-01 12: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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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무거님 말씀처럼 복수전공, 부전공으로도 철학은 배울 수 있으니 너무 지금부터 진로를 정해놓진 마세요. 목표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에 매몰될 필요도 없거든요.
그리고 이건 완벽하게 제 독단적인 생각이라 많은 분의 반박이 있을 수 있는데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고 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눈의 소중함과 특별함을 깨닫겠죠. 모든 대학교의 과가 다 그렇지만 학부생활 때 배우는 내용이 그렇게 심오한 것이 없어요. 막말로 거의 다 개론 정도 수준이에요. 제가 학벌주의를 혐오하는 이유 중 하나도 개론 정도 내용만 아는 사람들이 학벌을 통해 지배계층으로 올라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것이 어이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을 대학원으로 전공한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천재가 아니면 거의 예전 학자들의 해석론 정도 정리해서 비교, 대조하는 정도로 논문 쓰고 나오는 경우가 많아요. 그건 인문사회계열 다른 학과도 마찬가지죠. 석박사 중 어마어마 하신분도 종종 있지만 상당수는 어이없는 분도 많은 이유에요. 그러다보니 지식을 어떻게 쓰는 것보다 단지 지식의 나열, 머리가 백과사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는 경우가 많죠. 차라리 백과사전 펴보는게 낫죠.
타 학문을 전공하시면서 철학을 같이 배우면 아마 타 학문이 새로워질꺼에요. 타 학문에 매몰된 상태로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속칭 위대한 학자들이 보이기 시작하죠. 제가 밀턴 프리드먼을 소시오패스 정도 수준으로 보는 이유도 그것이죠. 정작 전 철학도 경제학도 전공은 아니지만요. 제 친구였던 사람 중 한명이 부전공으로 철학과를 선택했죠. 서양현대철학에 관심있어 선택했다고 하는데 푸코하고 아감벤 이야기나 현대철학자의 대표적인 주제 이야기하면 철학전공 안한 저보다 모릅니다. 걔가 아는 최신 철학자는 하이데거거든요. 정작 저는 하이데거 이전 사람 이야기하면 잘 모르지만요. 호모 사케르를 선물로 줬을 때 세상에 이런 것도 존재하냐는 식으로 보더군요. 그래도 저보다 학점 좋고 고위공무원 하고있고 퇴직해도 스카웃 제의가 어마어마하게 들어와 상위 0.5% 안에 들어가니 저보다 월등히 성공한 삶이죠 뭐.
세상은 생각보다 안일하게 돌아가요. 자기도 그런 개론 수업 듣고 대학 다녔는데도 다른 과는 다를 거라는 생각을 대수롭지 않게 하죠. 모르는 것을 모른다, 추측은 추측이다, 하면 되는데 추측이 어쩌다가 진실이 되어버려요. 그 진실이 깨어졌는데도 생각을 안바꾸죠. 열심히 고민해보시고 진로는 천천히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요즘같은 힘든 시기 이제 철학과나 다른 취업 잘되는 과나 비슷해져서 개인의 장점을 살리는게 더 중요할 수 있거든요. 너무 환상은 가지시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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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주의자 질문 글 재반박글입니다.(신세한탄이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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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12:3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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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99분 // 요즘 술만 먹으면 항상 과음해서 같이 먹는 사람도 저도 만신창이가 되어버리네요. 제 이야기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술을 아예 못하시는게 아니라면 다시 돈을 벌게 될 때 한 잔 사드릴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네요^^
lastlaugher // 지식과 지혜와 앎에 대한 열정이 충만하신 분이 저에게 이런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lastlaugher의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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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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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0 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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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그래도 용기냈으니 해야죠.
글쓴이의 말은 다 틀렸습니다. 이건 다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그름의 문제입니다. 생각하는 태도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글쓴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겠지만, 제대로 된 정보나 지식이 없더라도 본인이 이야기한 주제에 대해 약간의 고민만 했다면 이 정도 수준까지는 안왔을껀데 이건 너무한 수준이라 일단 쓴소리부터 합니다.
글쓴이가 제대로 여러가지 전제조건을 이야기에 쓰지 않았는데 제가 임의적으로 채워가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단 글쓴이는 독신이 예전부터 있어왔다고 했는데 종속적인 의미로 쓴 것으로 보아 이 말을 반대해석해 글쓴이의 속내를 추측하면 혼인, 즉 일부일처제도 예전부터 존재했고 사회의 기본단위라는 가정에 의거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니 독신이 부수적인 의미로 나왔겠죠.
그러나 혼인 중 일부일처제는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화에 따라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인 곳도 아직까지 존재하고, 집단과 집단이 결혼관계를 가지는 경우도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존재했습니다. 글쓴이는 비자발적인 형태로 신분, 직업 등을 거론했는데 문화권에 따라 짝이 없어서 결혼을 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돈많은 사람들이 여자들을 다 데리고 가버렸을 수도 있죠.
즉 한쌍의 남녀가 만나 결혼하는 일부일처제는 예전에는 환상일 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밑에 질리도록 적었는데 푸코 이야기 또 하자면 중농주의 이전 중상주의가 국가경영의 바탕을 이룰 때 처음으로 인구의 중요성이 인식이 되었다고 합니다.
밑에는 글에는 중농주의와 위험, 그리고 인구를 적었는데 말이 달라지는군요. 일단 중상주의 시기부터 인구란 존재를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 이전까지 사람 있으면 쓰고 없으면 잡아와서 쓰고 같은 주먹구구식 논리였다면
중상주의 시기부터 인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합니다. 산골짜기와 들판에 있었던 사람들을 잡아 끌고 오는 것보다
도시란 것을 만들어 한 곳에 모아놓으면 전쟁이나 노역에 쓰기 훨씬 편했겠죠.
도시를 만들어 주거공간을 만들어 쉬게하고, 상업공간을 만들어 교역이 쉽게 되도록 하는 과정,
사람이 많이 모이면 식량문제가 가장 크겠죠. 식량의 조달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
또 사람이 많이 모이면 많이 싸기도 하겠죠. 오물에 대한 배출 방법.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이면 전염병도 생기겠죠. 전염병에 대한 대처방법.
또 사람이 많이 모이면 범죄도 생기겠죠. 치안 유지와 관련한 방법.
이 모든 것이 인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막말로 르네상스 이후 부터 만들어진 방법입니다.
푸코는 언급하지 않지만 인간을 잘 다룰려면 인간의 공급이 원활해져야겠죠. 그러면 혼인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이 부분은 자료가 많겠지만 일단 자료는 찾지 않고 제 마음대로 적는 부분입니다.)
결혼에 대한 많은 문화적 사회적 개인적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의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결혼은 인구관리(유지 및 재생산)의 하나의 수단이었다는거죠.
이렇게 생각해보면(제가 이전 글에서도 계속 이야기하지만 이런 제도라고 행복을 느끼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나 현상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첫 시작은 그랬어도 좋으면 쓰면 되죠. 거기서 행복을 느끼면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결혼의 숭고함이 약간 사라질 수 있는데 글쓴이의 글에서는 그것보다 더 한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런 설명으로도 약간의 다른 생각도 안하실 것 같아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글쓴이의 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재구성하는 것이니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겠으나 뭐 스크롤만 올리면 원문 볼 수 있는데 넘어갑시다.
예전에는 대부분 비자발적 독신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자발적 독신을 많이 한다.
자발적 독신은 숭고한 사랑의 감정을 즐기려고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연애상대를 수단으로만 본다.
네, 그러면 글쓴이에게 결혼은 뭡니까? 숭고한 사랑의 감정을 즐기려고만 하지 않는 것이겠죠. 근거는 없지만 갑자기 희생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 억측이지만 희생없이 단물만 쪽쪽 빨아먹는 것이 자발적 독신주의 아니냐. 예전 종교인도 인고와 희생의 마음가짐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는데
자발적 독신주의자는 연애 상대방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거 아니냐. 이 말을 풀어서 글로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에서 희생이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까지 다 내어놓는 것일까요? 제 억측이 맞다면 글쓴이는 이걸 가정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희생의 애매모호함은 슬프게도 더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이미 함께 살아갈 수 없게 사이가 갈라져 버렸는데도 살아가는 것도 그 의미가 될 것입니다.
제 억측으로 글쓴이가 희생을 생각하고 이 글을 적었다고 했는데 만일 제 억측이 맞다면 희생이란 무거운 단어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지금까지는 다 서론이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다음부터 나옵니다.
이건 완벽한 King of the 억측이긴 하지만 글을 읽자마자 이런 생각이 떠올라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권위주의적 관점, '까라면 까야지 뭔 헛짓거리야'라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인과 같은 비자발적 독신은 종교에서 시켜서 독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사회에서도 결혼은 해라고 하고 언론에서는 뭐 2750년에 한국인이 멸종된다는 드립까지 나오고 있죠.
멜서스의 연구(1800년대)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1500년대)도 틀린 마당에 지금 상황을 가지고 그들의 연구나 예언자료보다 더 먼 미래를 예측한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아무리 학문과 기술이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한 치 앞의 경제위기도 못 맞추는데 700여년 뒤 인구를 맞춘다니 그 오만함에 고개가 숙여집니다.(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추측해보면 연구한 사람은 그냥 간략하게 한 줄 적은 것인데 언론에서 크게 부풀였을 것입니다.)
결혼은 사회에서 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안하는 것은 상대방을 수단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종교인들처럼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네까짓 것들이 뭔데 국가에서 해라고 하는 결혼을 안할려고 하는거야?
국가가 시킨데로 결혼을 한 사람은 1등 시민,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2등 시민이 되어버리는거죠.
내가 뜨겁고 숭고하게 사랑을 하면 남들도 뜨겁고 숭고하게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건데
글쓴이는 별다른 논거도 없이 그냥 엔조이로 격하시켜버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인종주의적 관점으로 열등하다 여기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글쓴이에게 죄송한 이야기지만 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을 쓰는 사람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있다면 공감은 하지 못하더라도 여러가지 과정 끝에 이해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해가 꼭 그 사람의 의견과 같을 필요는 없거든요.
뭐 제가 쓰는 공감과 이해의 단어정리가 필요하긴 하겠지만요.
제가 오유에 글을 많이 쓰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억측이 좀 많습니다.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해보려고 하거든요.
그러나 전 그나마 나은게 억측인 부분은 억측이라고 밝힙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상대방은 '아닌데~~'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거든요.
군 복무시절에 단장이 조선일보 나부랭이 읽고와서 요즘 젊은이들은 북침인지 남침인지 모른다고 안보관에 큰 구멍이 났다. 우리 부대는 그런 사람 없지 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에게 시켜보기도 했죠. 당연히 못 말하죠. 북침 남침은 안보관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우리나라 문법은 주어 목적어 동사(나는 너를 사랑한다.)입니다. 영어는 주어 동사 목적어( I love you)죠. 중국어 배우신 분은 중국어도 영어와 같이 주어 동사 목적어 순서(我愛你, 워 아이 니)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제가 한자 문법은 잘 모르지만 방금 인터넷 검색해보니 주어 술어 목적어 즉, 영어와 중국어랑 같은 구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단순 문법적으로만 볼 때 북침이란 단어는 북이란 주어 침이란 서술어로 북한의 침입, 북한이 침공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남침, 이것도 제대로 된 단어가 아니라 '북한의 남침'이란 단어로 함께 써야 겨우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걸 또 해석해보면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 이건 한자 문법이 아니라 우리말 문법에다가 한자를 끼워맞춘 것입니다.
한자 문법을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아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한국말 배울 때 문법 제대로 배웠습니까? 어린시절부터 한글을 쓰면서 문법을 자연히 익힌 것 처럼 한자어가 상당한 수준인 우리 한국말을 쓰면서 그에 따른 문법을 자동적으로 익혔다고 볼 수 있죠.
다만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전에는 '북한의 남침'이란 단어를 교육을 받으며 너무 들어 문법의 예외로 외운 것이고 요즘 들어서는 단어보다도 내용을 중심으로 배우다보니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한자의 문법체계에 맞춰서 단어를 만들다가 이런 일이 발생한거죠.
오히려 이 북침 남침 문제는 단답형으로 단순암기하던 세대가 단순구호와 같은 단어보다 원인과 과정, 결과 등 총괄적으로 배우는 세대에 대해 낙인을 찍는 범죄같은 파렴치한 짓이었던거죠.
왜 북침 남침 이야기를 했냐면 그 단장이 제일 많이 썼던 말이 자기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었거든요.
저도 군인이라 표현을 못했지만 속으로는 '네 머리가 딸려서 그런거다.'라고 많이 비웃었습니다. 단장은 이해를 하지 못했지만 전 단장을 이해했죠.
쓴 소리로 시작해서 조롱으로 진행하다 쓴 소리로 끝내겠습니다. 사실 누군지도 모를 질문한 사람에게 쓴 소리하고 조롱을 하는 사람 자체가 제대로 된 성격은 아닌 것 같군요.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죠.
상대방이 하찮게 느껴지고 한심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반대로 자신이 하찮고 한심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제 글은 이 게시판에서 인기없는 글이긴 하나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넌 왜 타인을 한심하게 보냐? 너도 한심한가 보지?'라고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네, 저도 한심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한심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내일은 좀 더 덜 한심해질 수 있겠죠.
자기 전에 이불을 뻥뻥 차고 흑역사를 많이 남기는 만큼, 사람은 그만큼 성숙해지는거겠죠. 성숙해진다는 의미에는 나이는 아무 필요없잖아요?
저도 이제 노화란게 진행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되니 제가 어린 시절 우러러봤던 사람들이 아무것도 아니고 단지 나이만 먹은 사람이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저도 나이가 더 들면 제가 그들을 보고 대단해 여겼던 것처럼 저도 누군가의 눈에는 대단하게 보이겠죠.(안경돼지가 바라는게 많은가 봅니다.)
정작 저 자신은 달라진게 없는데, 한심한 그 상태고 제 동년배들도 별반 다를 바 없는 한심한 족속들인데 그래도 사회가 돌아간다는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지금 글쓴이에게 필요한 것은 고민인 것 같습니다. 어떤 개똥철학이 나와도 상관없고 심지어 똥이 나와도 상관없습니다.
위에서 해라, 누군가가 해라고 하는 것만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면서 어떻게든 살아가보려고 하는 타인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것보다 타인이 한심한만큼 나도 한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필요한 듯 합니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지만 사회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거든요.
또 푸코 이야기인데 푸코도 초중반에는 권력에 대해 세밀하게 분석하다 말년에는 주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로 주제가 확 바뀌어 버립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안타깝긴 하지만 결국 인간의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살아갈까'가 맞는 것 같습니다.
푸코도 살아가볼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방해를 많이 하지?라는 의문으로 권력을 분석했고, 하다보니 너무 지나쳐 온 것 같아 주제를 다시 원점으로 돌린 듯 합니다.
살아가기 위한 고민 많이 하시길 바라고 이불 뻥뻥 많이 차시길 기원합니다. 이불을 안 찬 사람보다 찬 사람이 성숙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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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쳤다. 사랑이 섹스를 위한 계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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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30 1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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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글쓴이에게 미친놈으로 정의된 것 같아 미친놈이 반론을 써봅니다.
지금 글쓴이가 하고 있는 오류는 마치 코끼리의 코만 보고 코끼리의 특성을 이야기 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장님 몇 명이 코끼리의 코, 귀 등 일부분만 만지고 코끼리의 특징에 대해 자기 말만 맞다고 싸우고 있는 것과 똑같죠.
글쓴이는 사랑이나 연애가 다른 것과 다른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애가 계약이라고 한 사람은 코끼리는 포유류다, 네발동물이다, 눈코입이 있다 등등 다른 것과의 공통점을 통해 연애를 보고 있습니다.
계약과의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계약을 통해 연애를 바라본거죠.
그러니 글쓴이의 이야기와 글쓴이가 비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주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연애를 계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물신주의에 빠진 사람들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부정의 대상으로 정의한거죠.
그러나 그런식으로 표층만을 바라보다가는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우려가 있습니다.
인간의 객체화, 대상화는 단지 자본주의 발달 이전부터 나타난 것일 수도 있거든요.
푸코는 17~18세기 정치경제학의 변화과정을 추적하며, 중상주의에서 중농주의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천천히 바라보며
규율사회가 조절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위험이란 것은 100% 근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던거죠.
그 결과 위험이란 것을 관리하기 시작했고, 위험을 관리하는 비용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위험을 근절하는 것이 아닌 최적화시키기 시작한거죠.
그런 과정과 동시에 나타난 것이 인간이 아닌 '인구'란 인간 종족이라고 푸코는 주장하였습니다.
제가 말의 선후관계가 엉키게 이야기했는데 푸코는 인과관계보다 관련없어 보이는 것이 서로 비슷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푸코는 중농주의에서 자유주의로 다시 신자유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을 바라보며 인구를 어떤 식으로 관리하는지를 분석합니다.
정작 중농주의자나 자유주의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보이지 않는 손'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역사적인 당위성과 자명성을 가집니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은 서점이나 도서관가면 5분 안에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자유주의의 역할은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적합한 사회와 제도 만들기, 그러한 인간이 될 수 있는 환경만들기가 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손'에 적합한 인간 만들기로 바뀌어버린거죠.
그러다보니 경제학 중심으로 모든 학문이 재편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이 형벌제도에도 새로운 경제적 인간상이 나타나는거죠.
기존의 논리는 사람이 이성적이라 감옥에 가는 것이 손해이기 때문에 범죄를 단념하지만 아닌 사람도 있다라는 식이면
그런거 없다 어떠한 범죄도 사람은 털끝 만큼의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므로 높은 형량은 의미가 있다는 의미로 바뀌게 됩니다.
또한 경제학이 형사정책에 개입하니 범죄체계에 대해서 경제학적인 재편을 시도하는 경우
(마약중독자는 어차피 내놓은 존재니 낮은 가격으로 마약을 시도하려는 사람에게는 시도조차 못하게 높은 가격으로 책정하면 마약범죄 관리가능)도
나타났습니다.
푸코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강의 전에 생명관리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며 인종주의를 정의한 것으로 보아
이 경제학적 인간상에 맞지 않는 사람의 처우는 어떠할지 우리는 말을 안해도 잘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즉, 이런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는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시각이 존재하고 그 시각이 우리에게도 깊숙히 스며드는 내밀화과정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 푸코의 이야기만 정리했을 때에는 글쓴이의 주장과는 별반 다를 바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같은 존재가 신자유주의의 경제학적인 인간상에 매몰되어 경제학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버리는거죠.
그러나 과연 꼭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중농주의의 발전에서 나온 위험이란 개념은 중상주의와 그 이전에도 존재하던 것이었죠. 그때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가 중농주의의 발전에 따라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 이전에도 범죄자를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고,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종교제의를 지내는 것은 위험을 알았다는 당연한 증거죠.
중농주의를 통해 그 위험을 인식하고 관리할 준비과정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절권력 이전에는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봤을까요?
푸코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푸코의 논의였던 생명관리정치와 통치성의 논의가 완성되지 못하고 끝나버리자 아감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기 나름대로 푸코의 유지를 이어나갑니다.
말이 그렇지 푸코의 논의를 바탕으로 우스갯소리로 폭주와 마찬가지로(몇몇 학자는 푸코의 변주곡을 연주한다고 표현하더군요.) 논의를 진행합니다.
그러다가 나타난 것이 지난번에도 적었지만 '호모 사케르'였던거죠.
호모 사케르란 단어를 통해 현대의 신자유주의를 바라보겠다는 느낌만 풍기고 끝나버린 책이긴 하지만
이 단어 발굴 하나로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관점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시기가 아닌 고대까지 확장되어 버립니다.
역사적으로는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한 논리적 근거의 일부분이 나타난거죠.
푸코가 말했던 생명의 정치화, 그 결과이자 근거인 호모 사케르는 자본주의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푸코가 자유주의를 논의하며 자유주의는 일종의 자연주의라고 잠시 평가했는데 이를 확장해서 논의하면, 자유주의의 기원도 이 생명의 정치화처럼
그 시작이 앞당겨질 수도 있습니다.
글쓴이의 말처럼 인간성 회복을 위한 혁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없는 혁명은 성공할 수 있지만 혁명 이후가 문제가 되겠죠.
농담조로 술자리에서나 하는 이야기지만 인문사회계열 사람들도 정치는 쉽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독재를 하면 제대로 다 바뀐다는거죠.
그런데 누가 독재를 하면서 제대로 하겠습니까? 제대로 하는 것은 힘들고 티도 안나지만 권력을 잡고 언론조작하는거는 그것보단 쉽죠.
그냥 정권을 차지하고 언론장악만 해버리면 독재자는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되겠죠. 이 모순적인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지만 참 해결하기 힘들죠.
까면 깔수록 장난아니거든요. 정치적인 것인지 사회적인 것인지 욕망적인 것인지 유전학적인 것인지 이제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과 같이 얽히고 설켜있는 분야입니다.
오히려 글쓴이에게 묻겠습니다. 인간성이란 무엇일까요? 단지 자본주의 물신화에 대한 부정으로 인간성은 회복할까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인 것을 잘 알고 물어봤습니다. 오히려 설명을 한다면 잘 못 된 설명을 할 가능성이 높은 부분입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적었는데 알맹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거죠.
글쓴이도 마르크스(근데 저 말을 한 사람이 마르크스입니까? 막스 베버입니까?)를 인용했으므로 저도 푸코가 했던 말 중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어서 그걸 써보겠습니다.
"모든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위험한 것이다."
오히려 이 말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주는 말 같습니다.
중농주의가 위험을 깨달은 것은 우리에게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죠. 그러나 위험관리로 나아가면서 인간이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없는 개입보다 적자생존인 자연 그대로 놔두는 것이 더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태되어버린 자에 대한 이야기는 없죠. 사회까지 자연으로 만들어버렸나 봅니다.
글쓴이가 말한 것처럼 연애를 계약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상대를 수단으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목적 그대로 바라보면서 수단화시켜버리는 방법도 존재합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모든 것은 자기 책임이죠. 자기 결정에 따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상당수 사람들은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서 자유를 느끼기 힘듭니다. 재미있죠. 칸트와 자연의 적자생존이 비정상적 기형적으로 엉켜버린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하였는데 왜 홍시라고 물으시면..." 이라는 대장금의 대사가 있었죠.
경제학의 발전으로 우리는 경제학이 아닌 부분도 경제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물론 신자유주의에서의 경제학의 타학문 침투의 영향을 받았겠죠.)
항상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의 새로운 면이 보이기 시작한거죠. 그렇지만 이 새로운 면도 그것의 한 내용입니다. 새로운 면이지 새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대로 가다보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해서 애초부터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도 잘 못 된 말 같습니다.
우리가 자주하는 예시(칼과 자동차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니 쓰지 말아야 할까?)와 같은 것이죠.
제가 글쓴이에게 미친놈으로 정의받고 진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이 부분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했던 것을 다른 사람이랑 비교해보면 연애라고 하기엔 뭔가 모자란 것 같고,
지금보다 상당한 부분에서 인격적, 지식적, 지혜적 성숙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제 상태가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구요.)이 되어버렸는데
전 오히려 글쓴이에게 "인간을, 자기자신을 사랑해본 적은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군요.
생각이 다르다고, 가치관이 다르다고 서슴없이 미친 놈이라고 규정하고 세계에서(자기 자신의 세계이긴 하지만) 배제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의 그 수많은 감정 속에(좋은 감정 뿐만 아니라 나쁜 감정, 이상한 감정이 생기는 것은 제가 미친놈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부분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수많은 감정을 우리에게 사실대로 다 털어놓을 이유는 없죠.(그러면 어제부터 저만 이상해지게 됩니다.)
그렇다는 것과 그래야 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즉 존재와 당위는 다른 것이죠.
글쓴이는 자신의 당위를 가지고 존재를 말살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손'이 잘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을 바꿔야 된다고 하고 실제로 바꾸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죠.
당위란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부인권, 사실 근거는 없습니다. 그래야 한다는 선언이죠.
인민, people란 단어 속에 가난하고 배제된 자의 의미가 담겼다는 아감벤의 해석을 가져오면 그 당위에 어느 정도 근거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어마어마한 것이 당위란 이름을 같고 우리에게 접근하고 조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자의 당위는 무서운 것이고, 약자의 당위도(강자가 되었을 때의 생각이 없다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바라본다는 관점, 있는 그대로 한번 본다는 개념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의 역할을 하지만 이데올로기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도 설명할 수 없지만 보인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당위에 맞지 않다고 그런 부분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또다른 권력이 되어 권력자의 행동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세상의 변화는 제대로 된 의도를 통해 변화하기도 하지만 그런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발단이 되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겠지만 여러 분탕질이 존재하는 이 현실 속에 관용이 필요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용이 필요할 때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상 진짜 사랑은 해본 적이 없는 감정없는 자본주의 물신주의 아키하바라에서 자주 볼 만한 안경돼지가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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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9 17: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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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글쓴이가 적은 글 일부에 단어 몇개만 바꿨더니 참 이상한 글이 되더군요. 바꾼 부분은 작은 따옴표 치겠습니다.
'사기치는'것이 잘못?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순간까지 '돈을 벌었다 썼다하고' 한평생 사는 존재인데
그 길고 긴80년의 '삶' 가운데 '한 두건의 사기' 그거 별거 아니라고생각해요.
근데 '그깟 돈이' 무슨 하늘로부터 점지받은 천부의 권리라도 되는것처럼 구는사람들보면
그 사촌기소년 소녀의 시니컬한 감수성이 웃기죠.
그냥 일부만 바꿔봤습니다.
지난번 쓰신 글을 보니 20대 초반이신 것 같아 연애를 가정하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연애란 것이 무엇인지 정의내려보면(일단 제 정의가 모든 것은 아니겠지만, 정의라고 해도 모든 것을 설명하진 않겠지만.)
연애는 서로가 사랑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한 조건부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서가 쓰여진 것만 계약이 되는게 아니죠. 계약의 가장 기본은 구두, 즉 말로하는 계약입니다. 계약서를 쓰는 이유는 소송에서 증거로 쉽게 쓰기 위해서죠.
서로가 사랑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가지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는, 더 좋은 관계가 되었을 때 결혼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
제가 말로 표현하지만 제가 하는 말로도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는 비정형계약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죠.
즉,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즐겁게 지낸다는게 계약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 계약내용 중 하나가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대하기, 한눈 팔지 않기 등도 포함할 수 있겠죠.
분명 계약이냐 아니냐 말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반론근거 중 하나는 계약을 강제할 수 있는, 제재 할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죠.
결혼은 잘못한 사람에게 이혼을 청구할 때 위자료나 재산분할에 우위를 점하죠.
사실혼도 결혼에 대한 법을 인용해 어느 정도 받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애는 애매모호하죠. 우리나라 최강의 법인 민법 제750조 불법행위책임을 가지고 물어버리면 이론상 가능하긴 하나
아주 위대한 판결문을 남기게 되겠죠. 학계에 길이남을 판결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드러진 제재수단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계약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정작 제재수단 여부는 계약이냐 아니냐의 여부랑은 관계없거든요.
제재수단이고 뭐고 떠나서 위에 적었듯이 우리나라에는 위대하신 민법 제750조가 있습니다.
네 글쓴이의 말은 맞는 내용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사결정권이 있고 자기행복추구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결정과 행복추구에는 책임이 따르죠.
그 자유를 추구했을 때 타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되고,
어떠한 행동을 통해 타인에게 비난받거나 법에 저촉될 수 있으면 그에 따라 대가를 받을 책임이 있습니다.
글쓴이의 말을 비유를 통해 접근하면 살인을 통해 성욕을 느끼는 사람도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자기의사결정과 그것을 통해 성욕을 느끼겠다는 자기행복추구가 존재합니다.
네 맞습니다. 존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정당화될 수 있냐는 문제겠죠.
그러나 글쓴이는 이런 권리가 있다는 것은 인식하나 정당화 시키는 문제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듯 합니다.
보통 글 같으면 어떤 오류가 있느냐를 논증하겠지만 일단 주장만 내뱉고 논증에는 도망가겠습니다. 이 논증보다 재미있어보이는 글쓴이의 글 내용이 있거든요.
바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준다면 상대를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봤을 때다.
사람과 사람이 대등하다면 상처를 주거나 받는 것이 아니고, 이에 대한 이야기는 동등한 상대방 존재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 것.
제 말대로 연애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즐겁게 지낸다는 계약이라고 하면 그 계약이 깨졌을 때 계약에 대한 신뢰위반으로 상처받을 수 있겠죠.
저같은 경우는 제 실수로 교통카드 환승안하고 내려 다음날 돈 왕창 나왔을 때도 상처받는데요.
제 말을 근거로 하여 판단하면 상처를 받지 않는 경우가 존재하긴 합니다. 자기는 좋아하나 상대방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
연애계약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죠. 자기 감정에 대해 상대방의 감정이라는 반대급부를 받을 수 없으니 상처받을 것도 없겠죠. 그래도 현실은 상처받잖아요.
글의 뉘앙스를 통해 나타난 글쓴이의 마음을 보면 글쓴이가 상대방보다 많이 좋아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많이 좋아하지만 상대방의 감정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고, 글쓴이도 그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마음 속은 누구보다도 뜨거웠던 것 같네요.
그러다가 상대방의 안타까운 행동을 통해 잘못 된 것이 원래 그런 것인양 자기합리화를 시켜버린거죠.
철학게시판에 글 쓰면서 철학적인 글은 별로 안쓴 것 같은데 이제는 인생이야기마저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저도 20대 초반에 1년 연하의 후배를 만났는데 절 좋아하는 것 같았으나 이성적으로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지방에서 상경해 혼자 살고 있었는데 제가 아버지처럼 잘 해줬나 봐요. 한 때 아버지 같이 의지된다는 말을 했으니깐요.
그러다보니 바람은 아니지만 많은 남자를 만났고, 한 녀석하고는 죽이 맞아서 계속 붙어서 돌아다니더군요.
그 녀석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무시하면서 과 동기라고 하루종일 붙어서 살더군요. 정작 저도 과 1년 선배인데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녀석 때문에 많이 다퉜고, 비굴하게도 그 녀석하고 지내는만큼 나에게도 추억을 만들어달라는 찌질한 소리까지 했었네요.
항상 그럴때 마다 걘 남성적인 매력도 없고 마음이 맞아서 같이 다니는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정작 저도 남성적인 매력없는 찌질이였거든요.
자기는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나는 상관없는데 왜 이러냐 등 자기 말만 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녀석과 제 마음은 신경을 안써주더군요.
심지어는 걔랑 있었을 때의 추억을 저랑 있었을 때의 추억으로 착각하면서 저보고 그때 즐거웠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때는 미치겠더군요.
여러 친구들하고 같이 놀러다녔으면 말은 안하는데 그 녀석이랑 하루 12시간 넘게 붙어다니니 원......
인격적 성숙은 별로 없어서 그런지 지금도 그런 상황이면 참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연말에 크게 싸우고 며칠뒤 통화하면서 걔가 우리 사이를 "친한 선후배 사이였잖아"라고 해버려서 그때 제가 절교선언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 남들도 어느 정도는 했겠지만 찌질이의 모든 것을 보여줬는데 정작 걔랑 그 녀석은 과 내에 제가 나쁜 놈이라고 다 퍼뜨리고 다녔더군요.
그래서 저는 우울증에 걸려 기억력 감퇴를 맛보았고, 머리는 더 커져서 여드름만 없는 안경돼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후 씁쓸한 것은 몇달 뒤 다른 학교의 남자를 사귀니 이제 그 녀석이랑은 안만나더군요. 헤어지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났을 때에도 그 녀석이랑은 예전 관계로 안돌아간 것 같습니다.
찌질이 녀석들이 쓰는 등급표를 통해 보면 걔에게는 애인 >>> 그 녀석 >>>>>>>> 저였던 것 같습니다.
조롱과 훈계조의 글을 쓰다가 찌질한 자기고백을 한 이유는 그렇게까지 자기합리화를 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20세가 넘어서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군대만 들어가봐도 간부들이 부모님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지 성인인 본인에게는 별다른 신경을 안 씁니다. 부모님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죠.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려고 하면 거의 대부분 사장들이 어리다고 모른다고 어떻게든 노동착취해볼려고 안달이 나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서야 조용하지 20대 초반은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어른으로 취급을 안해주죠. 물론 이런 우리 사회 전반이 잘 못 된 것이 맞습니다.
갑자기 결론으로 확 가버리지만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면서 어차피 나중에 입게 될 옷이니 미리 입는다고 자기위로 하는 것 보다
자기가 어떠한지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어른이 아니면 굳이 어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찌질하면 찌질하게 살아도 좋고, 울어도 좋고, 소리질러도 좋습니다.
자기에 맞지 않게, 사회가 요구한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은 단지 어른 놀이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글쓴이가 위에 80년 중 겨우 1~2년이라고 표현하셨는데 20세인 나이에 1~2년이면 인생의 10%입니다. 이건 어마어마하게 큰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을 보며 웃을 수 있게 살아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긴 하나 해볼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너무 사회의 권위에 짓눌려 자기합리화하면서 살지 마세요. 감정껏 살아보세요.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질 수 있으면 되잖아요.
제가 어머니랑 싸울 때, 어머니는 항상 "너같은 자식 낳아서 길러봐야 후회하지."라고 말하면 전 항상 "그 후회는 그때가서 하면 되지"로 응수하면서 사네요.
이상 백수 안경돼지가 인생이 안풀려서 쓰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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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람 인에 사이 간이잖아요.
[새창]
2014-07-24 02: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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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있으시다면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시리즈 추천합니다.(계속 나오는 중이라 어차피 다 읽을 수는 없으니 지금은 1부인 '호모 사케르'만 읽으셔도 좋습니다.) 글자 크기가 커서 양은 적어보이지만 번역의 문제인지, 적은 말 속에 많은 뜻을 함축한 문제인지 그렇게 잘 읽혀지지는 않습니다. (쉽게 읽으신 분이 있다면 그분의 지식과 지혜가 부럽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몇 페이지씩 읽고 덮고 하다보면 아마 많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글쓴이가 생각하고 있는 이 주제를 정확하게 지적한 뒤 분석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고 표현한 아리스토텔레스(이 당시 생명 또는 삶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생물학적인 의미를 가진 '조에'와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비오스' 두 가지 단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말에는 문어와 낙지가 있지만 영어에는 없어서 영미권에서는 낙지를 이해하기 힘들다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이런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미셀 푸코는 생명관리정치를 이야기하면서 인간은 생명을 가지고 사회성을 가지는 이 표현을 뒤집어 생명 자체가 사회적(정치적)으로 문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이런 역발상 정말 부럽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런 애매모호해진 정의에다가 조르조 아감벤은 희생물로 바칠 수 없지만 죽여도 죄가 안되는 신성한 사람이라는 로마시대의 단어인 '호모 사케르'를 가져오며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립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인간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기 위해 갈 때까지 가보는거죠.
여러 과거 문헌과 그것을 연구한 학자들의 논문을 검토한 뒤 조르조 아감벤은 현대로 논의방향을 확 바꿔버립니다. 뇌사상태의 사람은 죽은 것인지 산 사람인지도 검토해보고, 현대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현재 발생하는 중인 사건은 일단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 부분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진 않지만 조르조 아감벤의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읽으면 새로운 시야가 트일 것입니다.)인 나치의 유태인 학살사건을 검토합니다. 그 사건만 아니라 수용소로 보내기 전의 준비단계(독일국민은 무엇인지, 인간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는 과정이죠.)부터 살펴봅니다.
내가 글을 읽는건지 글이 나를 읽는건지 장자의 호접몽을 눈뜬 상태로 경험하면서 읽다보면 코풀다 만 것처럼, X을 다 안 눴는데 중간에 끊고 급히 닦고 나온 것처럼 애매모호한 상태로 책은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아마 머리 속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좀 더 선명해지면서 인간의 역사상 과오와 지금 현재 세계적으로(세계적 따지기 전에 삶 속에서 매일매일 보고 듣고 느끼고 있는) 일어나는 문제가 더욱 더 잘 보이게 됩니다. 로마시대만의 이야기, 미셀 푸코가 주로 이야기했다는 몇 세기 전의 이야기,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끝나버린 나치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던거죠. 제 실력이 부족해서 집중해서 읽지 못하고 무아지경에 빠졌다가, 집어던졌다가, 베고 잤다가, 모니터 각도 맞춘다고 받침대로 썼다가 하며 읽은거라 틀린 부분도 많겠지만 조르조 아감벤은 무언가 결론을 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도구를 이 책을 통해 제시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호모 사케르’ 논의는 사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학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내용입니다. 뭔가 있긴 한데 뭐라고 표현할지 몰라 뿌옇게 알고 있었던 부분에 대해 이 논의가 들어와서 뭔가 딱 보이기 시작했던거죠. 폭발적인 반응이 나오며 이 논의를 사례에 적용하면서 ‘OO는 호모 사케르다.’. ‘XX는 호모 사케르다.’ 해본 결과 ‘우리 모두는 호모 사케르다.’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공식에 집어넣으면 다 호모 사케르거든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이게 맞는 듯 한데 이러다보니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절망감(현재에 대한 절망감은 인식 못할 정도로 적응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미래조차 보이지 않는 것은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밖에 없는 것이죠. 기승전결, 문제-분석-해결이 있어야 하는데 멍~해지는 상황만 나온 것입니다. 그러다 조르조 아감벤의 연구를 계속 보다보니 ‘바울’을 공부하고 있는 모습에 ‘이건 메시아주의로 가는게 아니냐’, ‘종말론으로 가는거냐’ 등등 비판도 있었죠. 이렇게 파격적인 주장에 몇몇 인용근거가 틀리고, 역사적인 사실 인용에도 오타가 몇 개 나오다보니 세부적인 정확성이 약하다는 말도 있어 지금은 그 인기가 약간 시들해졌습니다. ‘호모 사케르’ 시리즈가 이탈리아에서도 다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논의는 글쓴이가 질문과 같이 뭔가 있는데 안개가 껴서 뿌옇거나 지독한 근시 때문에 흐릿하게 보여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는 유용한 도구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비록 절망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더라도 그 절망의 정체를 당당하게 바라볼 수 있는거죠. 틀릴까봐 잘 못 될까봐 외면하는 것 보다 틀리거나 잘 못 되었을 때 고민하고, 점검하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몇 년 뒤, 몇 십년 뒤 세상을 바라보는 틀린 시각 중 하나로 ‘호모 사케르’ 논의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의미를 ‘호모 사케르’를 통해 바라보는 것 추천합니다.(글쓴이도 말했다시피 ‘인간’이란 단어의 사회적 의미와 그리스 단어 ‘비오스’와의 연관성과 ‘호모 사케르’의 논의는 대학 레포트 주제나, 인문, 사회학의 논문 주제로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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