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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갈수있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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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갈수있나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90 첫글. [새창] 2015-12-26 03:01:15 0 삭제
    제가 관심있게 공부하고 있는 부분의 전제조건이라 찔끔찔끔 공부하고 있는데요.
    이 부분은 몇 번 여기서 소개한 적이 있지만 아감벤의 연구를 찾아서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아감벤의 연구성과 중 "열림 - 인간과 동물"이 이 부분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아직 번역이 안되었죠.
    나온다 나온다 말은 있지만 몇 년 전부터 계속 같은 말이라 내년에도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번역계가 돈이 안되는 게 사실이니 번역자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먹고 살기 바쁘셔서 그냥 찔끔찔끔 하고 있겠죠.
    그러나 구글에 "Agamben Open" 정도만 검색해도 영문번역본이 떡하니 나오네요. 저작권 개념이 없나봅니다.

    한글로 대충이나마 보고 싶으면 국회도서관 사이트에서 "서나연" 검색하시면 서나연 석사의 석사논문 나오는데
    카프카를 아감벤의 시각으로 읽어보는 내용이라 "열림"의 전반부 중 일부를 번역해서 소개하고 있어요.
    정작 아감벤이 이 내용의 다음 단계를 먼저 연구하고 이 전제조건 단계를 나중에 연구해서
    먼저 연구한 다음 단계는 몇번 소개했던 "호모 사케르"를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감벤이 허세가 있어서 글을 어렵게 쓰는 것 같고, 한글 번역본도 썩 좋지 않아
    저도 읽을 때마다 새롭긴 한데, 그냥 큰 내용없이 간단히 소개하면,

    글쓴이가 "인간은 동물이다."라고 결론 내린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말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를
    "사회적"과 "동물"을 때어서 연구해본 거에요.

    "인간"이란 기준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추측되는 근대 생물학의 연구성과를 살펴보고,
    유인원과 원시인이 인간 범주에 포섭되거나 배제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감벤은 "인간학적 기계"란 개념을 도출해내죠.
    인간이 들쑥날쑥한 기준으로 움직이는 기계의 제품처럼 보인다는거죠.

    이런 내용 보시면
    철학게시판에서 쿨타임 돌면 나오는 뇌사자, 낙태문제나
    유대인, 부랑자, 범죄자 문제와도 연관되는거죠.
    이성이 최고의 가치를 가졌던 근대에서 자행된 문제,
    그 가치관이 이어져 내려와 현대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하는 문제 등등.

    글쓴이가 이성적 인간관의 반작용으로 그러한 주장을 하신건지 모르겠지만,
    그 주장을 시작으로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가 파생되어오고 있고, 이걸로 설명할 수 있어요.

    아감벤의 정치철학도 푸코의 중, 후기 연구를 공부하면서 발전된 것이니
    푸코의 생명정치(생명관리정치)를 공부하셔도 좋죠. 제가 공부하는 부분인데 홍보하고 있네요.
    토마스 렘케의 "생명정치란 무엇인가"가 번역되어서 나왔던데
    아직도 안 읽어서 번역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말 나온 김에 내일이라도 서점이나 도서관 가서 볼까 싶네요.

    제가 공부하고 있는 부분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문제의 많은 부분과 연결된 내용을 건드렸네요.
    이 주장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니
    이 키워드를 기준으로 자료 하나씩 찾으시면
    철학계의 최신 연구성과를 다양하게 공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고, 논의와 사유의 많은 확장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89 20,30대 명퇴 이슈에 대해 [새창] 2015-12-21 16:04:43 0 삭제
    이 글에 공감하지만 오히려 전 더 무섭기도 합니다.

    똑같이 푸코를 논의하고 인용하는 학자지만 아감벤은 현실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네그리는 현실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죠. 뭐 이택광 교수의 기본책 달랑 하나 읽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글을 적었을 때, 참여정부 당시 진중권 교수의 불안한 느낌 또는 잘못된 판단을 소개한 적이 었었습니다.
    진보진영에서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성립을 통해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 보고, 더욱더 앞으로 나갈 계획을 세웠다는 거죠.
    그 말을 한지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발밑을 보지 않은 결과가 무엇인지 우리는 몸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이명박 정부때도 그랬지만 위기론 위기론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현실이 위기스럽기에 미래는 더 나아질 수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글쓴이와 비슷한 이유를 가지고요.
    정권교체가 되더라도 진중권 교수가 가졌던 불안한 느낌이 다시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는 단지 우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분노란 말을 싫어합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분노해도 좋다고 이야기하지만, 분노의 표출은 결국 해소인 것이죠.
    분노가 정권교체라는 하나의 성과로 모두 해소되어 버렸을 때 그 이후의 동력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죠.
    1998년의 응답이 2008년이 된 것처럼 다시 이와 똑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공황으로 주도권을 잃은 신고전파 경제이론자들은 케인즈식 자본주의가 주류가 되었을 때에도 그들끼리 지속적으로 교류하면서 기반을 다져왔습니다.
    "내가 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라고 외치는 한 만화의 대사처럼 몇 십 년간 움츠린 그들은 오일쇼크로 일어나 다시 주류담론으로 자리잡았죠.

    글쓴이의 글처럼 뼈저리게 느껴지는 현실의 인식은 또다른 발전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고찰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여기서 맨날 인용해서 우려먹은 지젝의 "공부하고, 공부하고, 공부해야"한다는 문구를 우린 다시 "기억하고, 기억하며, 기억해야"한다로 바꿔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먼 미래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이런 게시판이기에 먼 미래의 일도 한번 꺼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이겠죠.
    88 다매체 시대의 원본에 대한 의미 [새창] 2015-12-21 15:43:07 1 삭제
    결론적으로 저도 출처의 과도한 요구는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논의를 하기 위해서 몇 단계 검토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검토를 단계별로 나누어 보면

    1. 출처를 요구하는 분야에서의 출처표기 요령
    2. 출처를 결벽증처럼 과도하게 요구하는 이유
    3. 이런 상황을 유연하게 만들 수 있는 대안의 제안

    이런 식으로 따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전 1 - 3 - 2 순서로 간단히 이야기해보죠. 그래도 길겠지만요.
    그러나 인터넷 글을 쓰다보면 용두사미로 흘러가버려서 흐지부지로 끝내겠죠.

    먼저 출처를 요구하는 인문, 사회쪽 전문 분야에서 출처 표기를 어떻게 하는지, 구체적이고 딱딱한 형식이 아니라 대략적인 기준을 이야기해보면,(구체적으로는 각 학문 분야에 따라 방식이 제각각이지만 큰 틀은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니체의 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1) 가장 좋은 것은 니체의 원문(독일어 원본이든 한글 번역본이든)을 그대로 가져와서 인용하고 그 출판사와 출판연도, 쪽수를 적어주면 됩니다.
    한글 번역본이 읽을만 하다면 한글 번역본 가져와도 되고 한글 번역본의 번역이 너무 안좋으면 독일어 원본 글을 가져오고 각주 혹은 미주에서 왜 굳이 독일어 원본 글을 가져왔는지 이유를 설명해주면 잘난 척도 할 수 있고 좋겠죠.

    2) 꼭 원문을 보지 않더라도 타인이 인용한 글을 가지고도 니체를 논의할 수 있겠죠.
    예를 들어 니체의 글을 인용한 진중권 교수의 글을 보고 인용할 때,

    가) 진중권 교수 책 글 그대로를 인용해서 진중권 교수 책의 쪽수를 출처로 적으면 되겠죠.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니체의 글 자체가 아닌 니체의 글에 대한 '진중권 교수의 평가'를 인용한 것이 되어버리니, 니체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들어올 때 본인이 할 말이 없어지긴 합니다.

    나) 그리고 진중권 교수가 인용한 니체의 인용 쪽수를 그대로 가져와서 인용한 뒤 괄호처리 해서 (진중권, OOOOO, 2000, 00쪽에서 재인용)으로 처리해도 되겠죠. 이것도 가)와 같이 구체적인 반박이 들어올 때 할 말이 없어지긴 하지만
    보통 이런 인용은 이 진중권 교수의 글에서 니체의 글을 몇 줄 정도 통째로 인용했을 때 Ctrl + C, V 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어, 잘 못 된 번역을 가져왔다 이런 반박을 주로 당할 듯 합니다.

    그러나 재인용 자체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기에 몇몇 연구자들은 뛰어난 정리논문의 주석을 읽고 원출처 글을 찾아 읽은 뒤 인용은 원출처에서 했다고 남기는 것이 대부분이죠. 심지어는 뛰어난 정리논문만 읽고 출처를 원출처로 다는 사람도 있긴 하다고 들었습니다. 정리논문 쓴 사람만 이름을 못남기는 슬픈 전설이 되는거죠.

    비록 어렵게 설명하긴 했지만, 여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문 분야에서도 재인용은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고, 재인용한 문헌만 밝히고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문헌의 신빙성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표기로도 읽는 사람이 판단하는데는 충분할 것이라는 이야기죠.

    그래서 요즘 이 사이트의 과도한 출처 요구에 대한 문제는 너무하다고 보고, 제 개인적으로는 본인이 봤던 곳에 대한 출처만 밝혀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 출처나 근원에 대한 이야기는 답글로도 남길 수 있는 것이고, 글쓴이와 답변자가 "그런가 봅니다. 허허허"라는 아재개그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죠.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곳에서 스트레스를 더 쌓을 수도 없고, 전문 분야의 전문 연구가도 안하고 요구 안하는 행동을 오히려 이 곳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니깐요.

    그러면 이 과도한 원출처 요구의 이유 또는 근원은 무엇일까요? 거창해 보이지만 진보담론의 문제점이 여기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선민사상이죠.

    일베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벌레라고 멸시해도 별다른 화를 내지 않습니다. 정말 벌레이기 때문에 화를 안내는 것이 아니라 바보 코스프레를 한다고, 즉 자기는 능력있는 사람인데 단지 여기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코스프레 행위만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일베에 대한 분석이 여러가지 나왔을 때, 제가 봤던 글에서는 일베를 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멀쩡했다는 조사만 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석을 하지는 않았더군요. 뭐 2014년 이후 일베에 대해 분석하는 수많은 석사논문을 당연히 읽지 않았고, 심지어 박가분씨가 분석한 책도 안읽긴 했죠. 한겨레 신문과 계열사의 잡지만 봤을 때의 제 생각입니다. 2015년은 책이나 신문하고 담쌓은 삶을 살아 최신 정보는 더 없긴 하죠.

    전 이와 반대되는, 선지자, 개혁자 코스프레가 오유 내에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보진영의 한 축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오유의 이미지 상, 이런 이미지에 따라 잘못과 실수에 대한 엄격함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거든요.
    도박과 음주운전 범죄를 저지른 연예인에 대한 비판 또는 비난도 출처에 대한 과도한 요구와 연결이 된다고 보거든요. 개혁을 위해서는 타 진영에 틈새를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도덕적 잣대에 엄격함을 가하죠. 차라리 자신에게만 엄격함을 가하면 괜찮을 수 있지만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 자신의 가치가 낮아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가지고 있는 대상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무섭기도 하죠. 물론 적당하면 좋은 것이긴 하나 우리가 항상 실수하는 것이 그 정도, 그 수준이잖아요. 모두들 스스로가 자유주의자라고는 하지만 순수한 사회주의자는 나밖에 없다라고 하는 이나미 박사의 지나가는 듯이 하는 이야기는 이 모든 내용이 진보담론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 글에서 간단히 언급한 강준만 교수의 글도 이와 유사하고, 오유 이미지를 선비라고 조롱하는 것도 이 문제를 담고 있는 것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2012년 나는 꼼수다의 열풍은 이런 엄격함을 꼬집은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엄격하게 꼰대처럼 웅장하게 혁명을 부르짓기 보다
    깔깔 거리면서 비웃고 헛소리 하면서도 좋은 뜻을 담고 함께 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깐요. 진보담론이 하나의 즐기는 문화로 되었다고 할까요?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었다면 우리도 스스로 낄낄거리면서 가볍게 진보담론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텐데, 다시 이런 분위기가 된 사실은 악폐습을 없애자
    악폐습을 경험하지 못한 병사들이 다시 악폐습을 만드는 과정을 생각나게 하네요. 악폐습 문제는 거시적인 문제를 없애지 않고 미시적인 문제만 없앴을 때의 폐해라고 할 수 있지만, 선민사상을 지적하지 않고 출처 문제를 논하는 것에 유추해서 적용해봤습니다.

    또 의미없이 끝났지만, 출처 문제는 출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네요. 자칭 타칭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랑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논의가 확장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다 끄집어 내어서 이야기할 내용 같아서 길고 의미없고 붕뜬 글을 적어봤습니다.
    87 그냥 생각난 두가지 [새창] 2015-02-04 03:30:18 0 삭제
    어제 오늘 있었던일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뒤척이다 모바일로 다시 글 읽어보니 임오유님이 재정이란 단어를 좁은 의미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제 글은 단순 동어반복 뻘글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군요.

    뭐 그렇고 그런거니 어쩔 수 없죠. 의미없는 재방송만 반복하나 봅니다.
    86 그냥 생각난 두가지 [새창] 2015-02-04 01:11:42 0 삭제
    1번 질문은 절 소환하고자 하신 것 같아서 소환되었네요.
    형렬이/부활한형렬이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글 쓴다고 선전포고는 몇 달 전에 했는데
    개인적인 일이(이전에는 인생이 망했다고만 했는데 요즘은 망했다기 보다 정말 애매~~~~~하게 되어버려서 뭘 어떻게 풀어나갈지 감이 안와 멍때리고만 있는 상태라 놀기도 뭣하고 일하기도 뭣하고 공부하기도 뭣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있어서 쓰지도 못하고 있어서 제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 부끄러웠고,
    그나마 쉰다고 생각할 때 다른 분들의 글에만 묻어가고 있다가도 '왜 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라고 후회하고 있었으며,
    '약속을 지키면 나 자신도 많이 쪼잔하고 치사한 모습을 보이겠지?'라고 생각도 해보고 있다보니 이것도 애매모호 해졌네요.

    일단 소환되었고, 또 글 쓰다가 애매모호해져서 사라지겠죠.

    1번 질문은 "재정"이란 관점이 아니라 "비용"이라는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이것도 제 마음과 같이 애매모호한 단어로 번역해서(제가 번역한거 아닙니다. 저도 번역된거 갖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어감이 이상하긴 한데,
    "비용"을 좁은 의미로 돈이란 의미로 보지 말고 넓은 의미로 생각하는 "비용"이란거죠.
    임오유님은 "비용"을 아주 좁게 해석하다보니 1번 질문과 같이 생각하셨는데,
    제가 작년 한해 지속적으로 썼던 이야기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경제적 분야뿐만 아니라 비경제적 분야에서도 경제학적 척도로 분석해서 산출해낸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흔한 예는 스포츠 선수 이적비용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는 경기와 스포츠 뉴스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지만 근원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에게 어떻게 금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란 비경제적 요소에 대해 경제적 가치로 돈을 환산해내고 있는 점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성과라는거죠. 제가 한 말이 아니라 푸코가 미국 신자유주의 특성 중 본인이 관심있는 특성이라고 한 것을 제가 이해한대로 풀어서 써봤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가 말하지 않은 스포츠 이적시장이 나온거겠죠.
    작년에 유럽 축구 시장의 선수 가치에 대해 펀드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쓴 유럽 학자의 글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몇 월 것인지 기억은 잘 안나네요. 당연한 이야기를 쓴 것 같아 추천은 안하는데 정말 심심하실 때 찾아서 읽어보시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임오유님이 예를 든 것처럼 수사하는데 드는 비용(다시 이야기하지만 임오유님은 사람들 인건비, 사무용품 비용 등 금전적인 것으로 좁게 보신 듯 합니다.)이 그 수사를 통해 얻는 수익(전두환 전 대통령의 천문학적 추징금을 생각하시고 적은 듯 합니다.)보다 훨씬 과다한 경우에 대한 질문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이 비용이란 관점은 이 범죄를 처벌하면서 동종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을 때에 우리가 얼마 정도의 경제적, 사회적 비용을 아낄 수 있는지도 산출해서 비교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뉴스에 맨날 나오는 이야기, 따져보면 정말 말도 안되지만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넘어가는 이야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따른 00조 경제적 이익 예상", "어벤져스2 한국 촬영에 따른 00조 경제적 이익 예상"을
    "이 범죄를 처벌해서 다른 범죄를 막을 가능성을 높혀 00조 경제적 이익 예상"으로 바꾼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법경제학 중 형사법 분야는 범죄 억제에만 중점을 두고 있죠.
    횡령범죄라고 하더라도 그 횡령금액을 환수하는 것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을 때 유사범죄가 발생할 경우의 비용까지 미리 산출하여 수사여부, 처벌여부 등을 고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용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피해(또는 피해예상)비용과 수사, 처벌비용의 균형을 노린다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으면 가장 큰 의문이 있죠.
    "이 비용은 무슨 근거로 산출하는거야?"
    경제학 전공자들은 무식한 질문이라고 하면서 한심해할 수 있지만
    이런 질문 이전에 보험금(사망시 00억 지급, 상해시 상해 부분에 따라 차등금액 지급) 등으로 이미 사회 전반적인 분야에 비용이 산출되어 있는 세상이지만
    이 경제학적인 세상의 전제 조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죠.
    과연 이 기준은 무엇일까요? 제가 '멘큐의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아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스티븐 레빗 교수의 '괴짜경제학', '슈퍼괴짜경제학'이란 책이 있는데 이런 비경제적 분야에 관한 경제학적 해석이 친절하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친절해서 무섭죠. 제목 자체가 유치해보이긴 하나 외국에서도 일반인들을 위한 친절한 교양도서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발췌독만 했는데 도서정가제 전에 잘 샀다고 생각합니다. 할인 엄청 받았거든요. 지금은 불행히도 아니니 도서관 가서 보시면 될 것입니다.

    2번 질문에 대해서는 장지연의 '만물사물기원역사'란 책을 우리나라의 최초의 성과라고 본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습니다.
    최근 발간되었죠.
    이 책이 나오기 몇십년 전 이 책의 바탕이 되는 일본의 연구성과가 있었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런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정리해놨겠지만
    사서 읽고 싶은데 제 상황이 애매~~해서 당분간은 무리일 듯 하군요. 임오유님이 읽는다면 한번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85 호/불호도 정해진대로 해야할까? [새창] 2015-01-29 02:41:42 0 삭제
    글쓴이의 글과 답글을 다시 읽어보니
    전 간단하게 가능성과 정당성으로 나누었고, 정당성의 예시에서 법과 처벌을 들었는데
    글쓴이는 가능성의 영역에 도덕적 비난도 가능성으로는 맞다는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가고 있는 듯 합니다.

    제가 비록 정당성의 예시에 단순히 법만 들었지만
    책임은 꼭 법적 처벌만 받는 것은 아니죠. 도의적 책임도 책임이고 사람들에게 한심한 취급을 받거나 무시받는 것도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것도 정당성의 영역에서 판단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적었지만 일베인은 한심한 행동을 하면서 자신은 애국보수인으로 대우받고 싶어하잖아요.
    간단한거죠. '한심한 행동을 하면 한심하게 대우받는다'가 가능성과 정당성의 2단계 판단을 잘 적용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준을 전제로 놓고 생각해보면 더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84 호/불호도 정해진대로 해야할까? [새창] 2015-01-29 02:21:20 0 삭제
    비록 극단적이고 논란이 많을 말일 수 있는데 이 내용은 오히려 간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쓴이가 가능의 영역과 옳고그름의 영역을 함께 생각하고 있는거죠.
    이를 다른 영역으로 분리하면 이 논의는 간단해집니다.

    뚱뚱한 사람 싫어할 수 있죠. 동성애자 싫어할 수 있습니다. 가능의 영역이죠.
    싫다는 것을 표현하면서 그들을 경멸하고 사회적으로 차별하는 것, 옳고 그름의 영역이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사회의 약속에 따라 책임을 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는 이 가능의 영역과 옳고 그름의 영역을 분리하지 않고 있는게 문제죠.
    일베의 경우 지역차별, 성차별, 고인모독,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침묵과 죽은 권력에 대한 조롱 등 많은 일을 저지르고 있죠.
    네, 할 수 있죠. 그러면 하고 나면 그에 따른 처벌을 담담히 받으면 되는 것이죠.
    제가 지난번 글에서 정치범에 대해 관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형법학자들의 통설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네,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가 허용해야 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해 모두가 이야기해보는거죠. 모두가 고민해보는거죠.
    그래도 영 안되면 어쩔 수 없는거잖아요.
    그러나 일베인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자신의 권리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죠.
    그러나 이는 행동과 정당성을 같이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 있고 그 행동은 정당하냐, 2단계의 논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1단계 : 일베인은 고인 모독의 표현을 상습적으로 했다. (가능성의 단계에서 허용)
    2단계 : 과연 고인 모독의 행동은 정당한가.(정당성의 단계에서 허용불가)
    이러면 해결이 됩니다.

    형벌의 목적 중 사람들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하는 것과 그외의 행동을 하게 하는 기능이 있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행동이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죠. 법적으로 보장된 자유가 아니라는 거죠.
    이런 논의를 보면 우리나라가 무법천국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정말 법에 대한 교육이 잘 되어있는 나라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분노할만한 사건이 발생하는 이유는 정말 적용되어야 할 때 적용이 안되는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죠.

    오래전에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방송을 봤는데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경찰서에 출두해서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자수를 하더군요.
    그러니 경찰이 그냥 담담하게 조서쓰고 그 신도는 담담하게 수사에 협조하고 집에 가더군요. 재판받고 징역살겠죠. 뭐 오래전 일이니 벌써 나왔겠죠.

    곰곰히 생각해보면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실행하고 그 책임을 온전히 지는 사례를 찾아보긴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들며 정당화하는 모습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겠죠.
    83 철학서적 완역본과 연구서 추천 부탁드려요 [새창] 2015-01-29 02:03:21 0 삭제
    제 글을 어느정도 좋게 봐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사람에게 하는 조언은 항상 안좋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데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멋있게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쑤셔서 헤집어 놓는 스타일이라 걱정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글쓴이도 제가 말한 것과 같이 사색과 독서를 병행한다고 하여서 제 이야기가 오지랖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글쓴이가 설명한 본인의 방식 중에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잠시 지적하고 제 흑역사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글쓴이께서도 자신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느끼고 철학을 공부했고 자신의 아집을 깨닫고 고정관념을 수정하면서 발전해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근 사색을 하면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가 본인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독서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사색과 독서의 반복과정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죠. 독서 후 사색을 한 다음 지식의 한계를 깨닫고 다시 독서를 하고 싶다고 하신거죠.

    그러나 제가 걱정되는 부분은 글쓴이의 답글 중 '대화'란 단어입니다.
    과연 글쓴이의 대화에는 무슨 내용이 오고갔을까?
    어떠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을까?

    이제 이 질문에 대해 제 마음대로 망상을 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부터는 제 망상이니 불쾌한 내용이 있더라도 단지 미친 사람 헛소리로 여기고 넘어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뒷이야기부터 해보죠. 과연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을까?
    글쓴이는 철학적 지식을 공부하면서 어느 정도 소양을 쌓고 계신 분이죠.
    그러나 대화를 하는 상대방이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인 경우, 이야기가 동어반복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겠죠.
    심지어 일베인과 대화를 한다고 하였을 때, 그들의 대표 논리를 하나 적용하면 연쇄강간살인범과 노상방뇨범이 둘다 동일한 불법행위자라고 그들은 주장하죠.
    그렇게 위법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시해버리고 불법하다는 논리 하나만 가지고 물어뜯다가 갑자기 종북논리를 가져옵니다.
    노상방뇨범에게 종북을 붙이고 연쇄강간살인범에게는 애국을 붙이면 그들이 그렇게 강조하던 불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종북불법행위자와 애국보수만 남게되죠. 이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 오히려 한숨만 늘겠죠.
    괜찮은 수준의 사람이랑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글쓴이처럼 이런 광범위한 책을 읽은 사람이 없어서 상식적 차원에서 대화를 하다가 흐름이 막히는 경우도 존재하겠죠.

    앞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철학적 이야기의 대부분은 현재 상황에 대한 이론적 접근 및 해결이죠.
    어마어마한 수준의 관념론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구체적인 사례로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당수 철학 논의는 이 현재 상황을 가지고 관념적으로 들어가고 있지
    그 관념과 이론을 가지고 다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독자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특히 글쓴이가 본 책들이 대표적으로 위와 같은 책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뭐 지젝은 현실과 이론을 왔다갔다 하고 있지만 정말 그 사람은 글을 친절하게 쓰는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본인이 몇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책을 써서 내면 뭐합니까. 결론적으로 자기가 천재라는 것 자랑하는건데요.
    다시 내용으로 돌아가면 방금 답글을 보고 느낀 가장 큰 걱정은 글쓴이의 대화가 단지 이 이론적 내용에 관한 단순 나열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철학적 책을 처음 봤을 때 다른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이론적 논의로 넘어가 버렸거든요.
    정말 쓰레기같은 짓이었죠. 그 이론을 제가 소화하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쉽게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말문이 막힌다고 원 글 그대로를 읊어버린거죠.
    그러면 대화 상대방이 어떻게 됩니까? 그러나 그런 짓을 제가 했던거죠.
    지금은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하니 그나마 나아진 듯 합니다.

    철학적 이론은 왜곡하더라도 간단하게 설명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안경을 빌려와 세상을 한번 바라보는거죠.
    정확하게 말하면 안경렌즈라고 할 수 있겠죠.
    눈 도수를 맞추고 그에 맞는 렌즈를 찾은 다음, 눈 간격과 얼굴 모양을 측정하여 제 눈 초점에 맞는 안경을 만드는 과정,
    렌즈가 철학적 이론이라면 이 안경을 만드는 과정은 이 이론을 글쓴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없다면 사물을 바라볼 때 항상 호주머니에 보관한 렌즈를 꺼내서 호호 불어서 먼지 털어내고
    눈에 맞춰서 보는 번거로운 과정을 계속 해야하는 거죠.

    이런 작업을 사색을 통해서 할 수 있고 사색 중 대화도 포함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 위주의 사색이 되다보면 결국 남는 것은 본인의 이론적 지식의 나열밖에 없겠죠.
    제 개인적으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통한 내용의 정리 및 현실의 적용과 그 결과물을 대화를 통한 확인, 혼자만의 시간에 더 강조점을 두고 싶습니다.
    글쓴이가 비록 예전 사색에서 많은 오류가 있었다고 하였지만 그때의 본인과는 다른 상황이잖아요.

    글쓴이가 읽은 글 중 밀의 자유론과 하이에크를 예로 들면
    밀은 자유주의자, 하이에크는 신자유주의자, 밀의 주장을 하이에크는 어떻게 계승해왔을까? 계승하긴 했을까?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러면 지금 이 공허한 감정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할 것인가?
    하이에크가 말한 것처럼 수정자본주의는 공산주의랑 다를 바가 없을까?
    단지 자신의 적을 일망타진해서 몰아잡기 위해 그냥 이분법적으로 사고한 것이 아닐까? 등등 질문을 하면서 답을 찾아갈 수 있겠죠.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본인이 만든 답, 가설을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해나갈 수 있겠죠.
    그러다가 말이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하면서 내가 이해를 못한 것인지 내가 읽은 이론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인지 찾아보는거죠.

    글쓴이가 읽은 책을 보면 그 한권만 제대로 이해해도 어마어마한 사람이 되는 책들 중심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글쓴이는 지식의 갈증을 느껴 계속 새로운 책을 찾고 있죠.
    참고로 전 이 게시판에서 제 관심분야를 계속 이야기해왔지만 또 써보면
    미셀 푸코의 신자유주의적 생명관리정치와 조르조 아감벤의 생명관리정치 비판적 계승 이론 중심으로 관심을 갖고 있고
    그에 따라 인간이 벌레같은 취급을 받고 있고 정당화되고 있는 부분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는 철학 비전공자입니다.
    이 부분을 중심으로 공부하니 아직도 공부가 많이 부족하지만 다른 부분으로 접근해 들어가기 상대적으로 쉽더군요.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라 예전에 이해가 잘 안갔던 부분도 예전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남이 감놔라 배놔라 하는 글은 읽기 참 불쾌한 글이죠. 안 그런 사람도 많겠지만 쓰는 사람 중 상당수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
    인간은 약간 변태끼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데 발달된 사람이면 좋아할 수도 있겠죠. 뭐 저도 이렇게 하다가 새로운 동네에 눈을 뜰 수 있겠죠.
    그러나 제가 예전에 했던 흑역사처럼 글쓴이도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오지랖으로 위의 글보다 더 긴 글 썼습니다.
    제가 잘 안 읽은 책 중심으로 읽으셨던데 다음에 가르침 한 수 청하겠습니다.
    82 인권이 먼저인가 평등이 먼저인가 [새창] 2015-01-29 01:00:39 0 삭제
    일은 많지만 다 던져버린지 오래고 글쓴이의 질문이 궁금해서 그 웹툰을 읽어봤습니다.
    네이버에서 연재하고 있는 작품이고 리그베다위키(엔하위키)에 따르면 평가도 좋은 작품이라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상황에 맞지 않는 일본의 소재를 무턱대고 차용해서 이질감이 느껴져 더이상 읽고 싶지 않더군요.
    10화까지 보고 그만두긴 했지만 반응이 좋다는 평가가 있는 것을 보면 제가 느꼈던 감정을 극복했을 수 있겠죠.
    일이 잘 풀리면 웹툰이나 영화 시나리오 취미 삼아서 써볼까 했는데 일이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어서 시작도 못하고 있죠.
    그래서 웹툰에 관해서는 독자의 시각뿐만 아니라 어이없지만 동업자라고 생각하고 더 엄격하게 평가합니다.
    심지어 제가 만들고자 하는 이야기와 약간은 비슷한 이야기라 아주 엄격하게 봤네요.

    초반만 봤는대도 글쓴이의 질문이 뭔지 딱 이해가 가더군요.
    인권과 평등의 대립이 아니라 '생존'과 '평등'의 대립이었습니다.
    평등이 없더라도 살아있을래? 죽더라도 평등할래? 이야기인거죠.

    이 질문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지겹게도 나오는 이야기인거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과오를 평가하면서도 나오는 이야기고,
    신자유주의자들이 주로 쓰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그런데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곰곰히 살펴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빨갱이 소굴에 거지 천국이 되었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제도고, 이 제도를 시행했기에 너희들이 그나마 이렇게라도 먹고사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죠.

    웹툰을 아주 초반만 읽어서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글쓴이의 질문을 웹툰의 전개라고 생각하고 빌려오도록 하죠.
    어떤 것을 없애면 90%의 인간이 죽는다. 주인공의 능력이 사소한 줄 알았는데 실상은 어마어마 한가 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 웹툰에서 적들이 주장하는 논리가 꼭 위의 논리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을 부정하면 거지 천국이 되고, 자본주의를 부정하면 공산국가처럼 몰락해버린다.
    그들이 있어서 그나마 이렇게 산다는 논리 말이죠.

    이 논리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제가 이 게시판에서 지겹게도 우려먹고 똑같은 이야기 쓰고 있는 푸코의 생명관리정치 이론을
    오늘도 또 빌려올 필요성이 있을 듯 합니다. 내일도 모래도 계속 빌려오겠지만 어쩔 수 없죠.
    우리의 삶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있지만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우리의 삶을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에만 국한해서 바라보고 있죠.
    그러다보니 전 세계, 예시를 들면 한도 끝도 없으니 우리나라의 대통령 공략만 보더라도 주된 논의는 다 경제와 관련한 주제입니다.
    경제만 좋아지면 정치, 사회, 문화 등은 다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거죠.
    이 이론은 역설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정치화시켰고, 생존의 문제 자체를 정치와 밀접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전에 인간의 여러 요소 중 하나가 인간의 모든 것이 되어버리고 정치의 지배를 받아버린 것이죠.
    우리의 생명과 삶이 관리받고 양육되는 정치체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경제이론이 아니라 정치이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인간상이 제가 여기서 맨날 이야기하는 '호모 사케르', '벌거벗은 생명'인 것이죠.
    법적 제도적 보장이 없어진 세상 속에 벌거벗겨진 인간,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나 사회적으로는 인간이 아닌 존재죠.
    이론적인 설명 때문에 이렇게 극단적인 인간상이 나타났지만 우리 사회 내에서는 인간의 등급화를 통해
    인간과 호모 사케르의 양 극단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인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카스트 제도처럼요.

    이런 검토를 통해 다시 질문을 바라본다면
    지배자들이 만들어 놓은 공포라는 정치기술 속에서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 벌거벗겨진 생명으로서의 삶을 단순히 유지하는 것이냐,
    우리의 인간성을 죽더라도 우리 스스로 찾는 것이냐의 문제로도 바꿀 수 있겠죠.
    그러나 90%의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거지천국이 된다, 공산국가처럼 몰락한다라는 기존 정치의 공포와 협박 방식과 너무 유사하군요.
    과연 정말 90%의 인간이 죽을까요?
    이 해답은 웹툰 작가가 해결하겠죠.
    81 철학서적 완역본과 연구서 추천 부탁드려요 [새창] 2015-01-28 23:24:38 0 삭제
    가끔씩 글을 쓰고 쓸때마다 길게 쓰며, 쓰는 내용도 질문에 맞는 걸 쓰지 않는 사람이라서 이 글에서도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글을 적어보겠습니다.

    글쓴이가 읽은 책을 보니 좋은 책을 많이 읽은 것 같은데
    책에 큰 공통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철학에 대한 관심과 그 궁금증의 해소, 이를 위해 속칭 닥치는데로 읽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지젝의 책을 읽은 것이 대단하게 느껴지네요.
    그 사람 글 쓰는 것 보면 잠깐 집중 안하고 보면 무슨 내용을 하는지 한 문단 내에서도 내용이 확확 바뀌던데요.
    무슨 내용 설명하다가 그 내용을 위한 전제조건이 나오면 문단도 안 바꾸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고,
    그 전제조건만 몇 문단 동안 주욱 써버려 원래 설명하는 부분이 뭔지 까먹게 되죠.
    그러다가 문단 바꾸면서 원래 내용으로 돌아오면서 결론 내버리니 이거 참...... 당황스럽더군요.
    속독으로 읽는 스타일인데 지젝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을 보고 사회계약론도 보며 하이데거까지 서양철학의 몇천년의 역사를 짧은 시간 안에 다 경험해보신 듯 하군요.

    글쓴이가 천재여서 이 모든 내용을 다 이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오지랖일 수 있지만 지금 글쓴이에게 필요한 것은 독서가 아닌 사색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쓴이가 읽은 책은 그 당시 시대에서 몇 발자국 앞서 나간 선각자들의 글이죠.
    지금 현재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고, 변형해서 받아들인 부분도 있을 것이며, 왜곡되거나 아예 반영되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글을 읽다보면 '이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하는 이유가 뭐지? 이 사람이 이 제도를 처음 말한건가?' 하는 생각도 종종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론을 통해 우리 사회가 풍부해졌지만 그들의 이론을 왜곡 반영하여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생기기도 했을 것입니다.
    한번 한 두달 정도 철학책이 아닌 다른 책 읽어보시면서 세상을 보고 주위를 보고 본인을 보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본인이 읽었던 내용을 한번 비판적으로 되새김질하고 적용해보신다면,
    아마 본인의 철학적 능력이 한두달 사이에 뛰어나게 발전할 것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책을 항상 읽었던 때보다 책을 잠시 덮고 길을 혼자 걸으면서 고민했던 시기에 발전이 있었거든요.
    계속 책을 읽다보면 단지 지식으로만 남아 결국 '난 이 책을 읽었다.'라는 기억 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되새김질을 통한 체득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면 더 오래, 평생동안 기억에 남으면서 지혜가 될 수 있겠죠.

    이미 글쓴이가 이런 과정을 하고 있다면 제 이 글은 단순한 오지랖에 불과하겠죠.
    그러나 만에 하나 제가 지적한 것과 유사한 단계라면 비록 밖은 춥지만 책을 덮고 한번 혼자 걸어다녀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나서 새로운 궁금증에 관한 구체적인 분야의 책을 읽어보는 것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80 IT기술이 사람들을 열반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새창] 2015-01-28 23:03:17 35 삭제
    반대표를 던지고 싶지만 던지지 않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글은 어마어마하게 끔찍한 글입니다.
    글의 논리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자의 안일한 논리를 글자 몇개만 바꾸고 차용해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글쓴이는 인터넷이 세계 시민 모두의 노력으로 결실을 이루어낸 자랑스런 발명품이고,
    IT기술은 나와 너의 구분을 사라지게 하여 세상 모든 문제의 근원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결론에 도달한 첫번째 질문과 고민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글을 마무리 짓습니다.

    글의 형식으로 놓고만 봤을 때는 정말 친절한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글 내면에 있는 논리 그 자체가 너무 끔찍합니다.

    네 인터넷은 세계 시민 모두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자랑스런 발명품이죠.
    그 결과 나와 너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를 제외한' 너, 이렇게 어떤 한 집합과 여집합의 관계로 나눈 것이 아닐까요?
    지금 인터넷 문제의 거의 대부분이 '소중하고 가치있는' 나와 존재도 애매모호하고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 '가치없는' 너의 문제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익명성'에 기대어서 나타나는 문제라고 말하는 문제 대부분이 이런 구분에 따라 진행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렇기에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악담을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이겠죠.

    글쓴이는 친절하게도 자신의 사상의 기초를 마지막 문단에 정리해줬습니다.
    '인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회체계'인 '자본주의', 얼룩말이 먹히고 사자가 먹는 이 모든 과정이 큰 관점에서는 '협동'이다.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의 승리를 근거로 하여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오만함이 그대로 느껴지는군요.
    글쓴이가 글을 쓴 시간도 역사고 제가 답글을 남기는 이 순간도 역사겠죠.
    그렇듯이 삼국시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었던 시기에는 '인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회체계'는 '중앙집권적 군주제'였을 것이고,
    유럽 봉건제도 시대에는 교황과 왕의 제정분리와 봉건제도였겠죠. 그 역사의 순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겠죠.
    글쓴이가 판단한 지금 현재, 자본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힘과 자연의 논리에 맡겨놨더니
    오히려 자본순환이 막혀버린 지금 자본주의 현실은 가장 성공한 사회체계가 되어버렸네요.
    심지어는 약자는 먹히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협동이란 논리를 들면서 말이죠.

    제가 이 게시판에 글을 길게 쓰는 사람이고 몇번이나 썼던 글이지만 다시 쓰면
    중농주의자가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도입한 관점이 국가적 관점의 경제가 아닌 세계적 관점의 경제죠.
    국가적 관점으로 보면 재양 수준의 식량난이지만, 세계적 관점으로 보면 국지적, 한 지역의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무역의 자유를 인정하여 곡물의 순환을 촉진하면 식량난은 없어지는 것, 아예 없는 개념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느정도 진실을 갖고 있긴 하지만 말장난스럽긴 하죠.
    '창천항로'란 만화책에서 '천하삼분지계'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했죠.
    '천하삼분지계'는 말 그대로 패러다임의 전환인 것이죠.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여 유일한 천하를 가지고 있던 조조는 단지 세 개의 천하 중 하나만 가지고 있는 군벌로 만들었고,
    변변치 않은 땅 한쪽도 없던 유비를 조조와 동격으로 격상을 시켜버렸죠. 이 논리를 신빙성 있게 하기 위해 손권을 끼워넣은거죠.
    상황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새로운 개념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 버린 것입니다.
    무역의 자유를 인정해서 식량난을 극복한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중농주의자는 이를 단순한 통계로 치환해 버립니다.

    국가는 우릴 위해 존재하죠. 인터넷과 IT기술도 우릴 위해 존재하겠죠.
    그것을 글쓴이의 단어를 빌리자면 이는 얼룩말과 사자를 위해서도 존재하겠죠.
    그러나 얼룩말을 위한 국가와 IT기술은 없죠.
    단지 대의를 위한 희생, 협동이란 새로운 개념으로 중농주의자의 통계처럼 한 인격체는 이렇게 사라져버립니다.

    이전에 하이에크 글 소개하면서 하이에크 본인도 자본주의에 차별이 있고 단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체제 속에서는 이런 자유조차 못 누린다고 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꼰대같은 아저씨들이 하는 소리와 똑같은 논리를 주장하고 있죠.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문제가 있다면 더 개선해나가야 하는데 '싫으면 떠나라'는 논리로 대꾸하고 있죠.
    밀턴 프리드먼은 더 적반하장이라고 지난번 글에 소개했습니다.

    글쓴이의 글을 보니 이런 신자유주의자의 논리를 비판없이 차용하면서 IT기술에 그냥 끼워맞추고 있는 듯 합니다.
    나와 너의 경계가 없어진다고 우리 모두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을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기업가로 만들어 실제 기업과 형식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만들어 인간의 연대성을 다 끊어내버리고
    파편화된 존재로 만들어버린 신자유주의의 결과물인 우리는
    인터넷이란 공간 속에서 나와 나 아닌 다른 것이란 이분법적인 보이지 않는 장벽에 둘러쌓여
    쓸데없이 자기애는 커져가는데 더 소외되는 모순적인 존재로 더 격하되고 있지 않을까요?

    문제는 글쓴이가 말한 부분도 있고, 제가 말한 부분도 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지,
    보이지 않는다고, 뿌옇게 보인다고, 대충 '협동'이란 안일한 개념으로 둘둘 말아서 포장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글쓴이가 이 현상의 결과물, 자기애의 과잉으로 자신은 절대 얼룩말이 아니고, 될 수 조차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79 르네 지라르 관련해서 논문을 쓰려고 합니다. [새창] 2014-12-18 22:32:20 0 삭제
    이 글에 대해서는 안좋은 이야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전 르네 지라르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비록 폭력과 희생제의에 대해 관심이 있어 "폭력과 성스러움"과 "희생양"을 샀긴 했는데
    제가 원하는 내용이 안 나와있어 대충 훑어보고 놔둬서 무슨 내용인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글쓴이의 질문은 르네 지라르에 관한 논문을 쓰고 싶다. 책을 추천해달라. 입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연관이 있는 거라도 좋다는거죠.
    이 말의 뜻이 뭘까요?
    르네 지라르 정도면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폭력과 희생제의 부분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죠.
    우리나라에도 그에 대한 많은 책이 나와있고 그의 책을 직접 번역한 책도 많이 나와있습니다.
    유명 포털 사이트에 "르네 지라르"만 검색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나오는거죠.
    심지어는 저자 본인도 친절해서 그런지 다양한 분야를 연구했지만 그의 연구분야에 대해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원하는 분야가 있으면 포털 사이트에 "르네 지라르"를 치고 제목만 30초 훑어보면 좋은 책 고를 수 있는 것이죠.
    즉, 르네 지라르와 발톱만큼 연관있는 책이 아니라 르네 지라르를 정통적으로 다루는 책만 어마어마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르네 지라르의 어떤 부분에 대해 연구하고 싶다는 내용이 없죠.
    르네 지라르에 대한 전공자도 우리나라에 많겠지만 대형사이트도 아닌 오유의 정말 인기없는 철학게에서 그런 사람을 찾기는 정말 힘들겠죠.
    그것도 르네 지라르의 학문 전반을 두루두루 섭렵하고 있어 쿡 찔러도 억~하고 답이 나올 사람은 더 없겠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때리고 맞는 개그나 영화에서도 약속이 잘 되어 있어야 재미있는 작품이 나오죠.
    이 논리는 질문과 답변에서도 좋은 질문이 있어야 좋은 답변이 나온다는 사실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가장 흔한 사건, 콜로세움 세울 때 봐도 상당수 시작은 애매모호한 단답형의 글에서 나오는 경우잖아요.
    그런 글을 각자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다보니 전제조건이 다 안맞아서 다 자기 말만 하는거죠.
    이런 애매모호한 글은 이 글과 같이 답변이 없는 글로도 나오게 되는거죠.

    결국 이 글에서 남는 것은 "난 르네 지라르에 대해서 논문 쓰는 사람이다. 이 녀석들아." 밖에 없네요.

    더 안좋은 말로 끝내겠습니다.

    이 질문 그대로 교수님께 한다면 좋은 대답보다 벙~쪄있는 교수님의 표정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저랑 똑같은 말씀 하실 것 같습니다.
    그때 글쓴이는 구체적인 연구방향을 교수님께 말씀하겠죠. 그리고 어느 정도 상담을 받겠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연구방향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잊어버리겠죠.
    그런 것이겠죠.
    78 [질문,본삭금] 푸코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새창] 2014-12-18 21:59:38 1 삭제
    글을 미친 듯이 길게 쓰는 사람이지만 결국 인생이 망했고 낮술까지 먹었으므로 질문에 대한 정리와 내용을 찾을 수 있는 간단한 지적만 하겠습니다.
    즉, 내용 설명은 별로 안할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깁니다.

    1. 전제 : 푸코의 이론은 획기적이긴 하지만 당시 모든 사회, 정치적 주제를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이론 상당수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뛰어난 시각을 제공하나 정작 그는 바라보는 도구, 예를 들면 근시 때문에 뿌옇게 보이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도수맞는 안경만 제공을 하지 문제의 해답은 우리가 내리도록 한발 물러선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선각자가 끌어줘서 바뀌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제 시작 단계인 수준이라 단정짓긴 이른 것 같다. 이런 관점에서 공부해보고 아니면 생각을 바꾸도록 하겠다.

    2. 문제의 정리

    가. 푸코의 이론 흐름 정리

    1) 정리 전 답변자의 공부 상태

    푸코 강의안 중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독서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발췌독

    즉, 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시각으로 바라본 신자유주의 해석에 관심이 있어 그것 중심만 읽었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알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다는 점을 밝힘.

    2) 푸코의 이론 흐름 정리 - 질문 중심으로

    1976년 1~3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강의 : 마지막 강의에서 생명관리정치 내용 제시
    1976년 5월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발간 : 마지막 장에서 생명관리정치 소개
    1978년 "안전, 영토, 인구" 강의 : 감시와 처벌에서 다루었던 규율장치가 이후 안전장치로 바뀌는(정확히 말하면 규율장치를 안전을 위해 사용하는,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미묘하다. 규율과 안전이 동급의 의미가 아닌 안전을 상위개념으로 바라보는 듯한 뉘앙스다. 이런 뉘앙스만 알고 공부하면서 수정하도록 하자. 강의안이 나오기 전 일명 강의 찌라시만 한두장씩 나왔을 때 학계의 유력한 설, 일명 통치성 학파는 규율이 안전 또는 조절로 대체된다고 푸코의 이론을 설명하였지만, 강의안이 제대로 발간된 현재는 아쉽게도 해프닝 정도의 의미만 가지고 있다.) 상황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자신의 강의를 더 상위개념으로 끌어올려 '통치성'이란 단어만 들어서는 이해하지 못할 내용으로 바꿔버림. 자신도 산만한 논리를 가지고 견고한 논리에 들이밀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있음. 또한 이 강의에서 생명관리정치의 조절기술이 중농주의와 자유주의에 나타나는 사례를 제시함.
    1979년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 신자유주의 이론이 국가권력과 결합한 과정, 신자유주의 이론이 국가권력의 무모한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모습에 대해 관찰하고 고발함.
    1980년 : 강의를 하였으나 답변자 본인이 강의 내용 대략적으로라도 모름.
    1981년~1984년 : 국가 권력의 인간 복종화 전략에 대해서 "주체"로 주제를 완전히 바꿔버림. 개인적으로는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작용할까라는 기존의 연구에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로 관심 분야를 바꿨다고 생각함. 이것이 푸코가 연구하고 싶었던 진정한 과제고 앞의 내용은 이에 대한 선행연구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함. 그러나 선행연구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음.
    1984년 : 주체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성의 역사 2, 3" 발간, 그러다보니 앞의 "성의 역사 1"과 내용의 연결성이 없어져 버림.
    1984년 6월 : 사망

    즉, 전문적으로 푸코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 취미로 푸코를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푸코의 저작이 썩 잘 나와있는 편이 아님.
    1975년 발간한 감시와 처벌은 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작용하는 규율권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함. 푸코하면 판옵티콘이 생각나는 것처럼 권력이 개인이라는 한 개체를 기준으로 작용하는 점을 분석한 것임.
    그러나 1년 뒤인 1976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강의를 하면서 마지막 강의에, 종강을 하고 한해 강의 마무리 정리하기 모자란 시간에 그냥 새로운 주제인 생명관리정치에 대한 운을 띄워버림.
    그리고 그 내용을 "성의 역사 1"에 반영해버림. 책만 나왔을 때, 푸코 사후 진행되었던 강의안 발간작업이 진행되지 않았을 때에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1년만에 자기 이론을 바꿔버린 사람이 되어버렸고, 약 8년 뒤 "성의 역사 2, 3"이 나왔을 때에는 그 바꾼 이론마저 지키지 않고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림. 노골적으로 표현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은 아니고 이런 학문 변화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린 것은 사실임.
    그러나 강의안 발간작업이 완료되고 푸코의 책과 강의안을 함께 보았을 때 이론의 진행과정을 이전보다는 쉽게 알 수 있게됨.
    특히 1976년 망망대해 가운데 무인도처럼 덩그러니 놓여져있던 "성의 역사 1"의 의미를 그 시기 때 강의인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으로 잘 알 수 있게 됨.

    나. 글쓴이 질문의 푸코 이론에 따른 해체 및 정리

    1) "푸코는 성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규제되어 왔다고 하는데"

    "성의 역사 1"의 내용과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내용이 합쳐져서 나온 결론으로 파악됨.

    2) "인구의 증가가 노동력의 증가로 직결되므로 동성애, 자위를 억압한다고 했습니다"

    이것도 위와 같은 부분임.

    3) "그런데 왜 인구의 조절을 하는건가요?"

    생명관리정치의 본질적 작동내용임.

    4) "또한 여성의 히스테리화는 왜 생기는 건가요?"

    푸코의 이론은 정확히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하지 않음. 푸코의 관심분야를 기존의 연구에 비추어 추측한다면 "왜 히스테리가 여성에게만 생기느냐?"임.
    실제로 생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 여성에게는 히스테리라 부르는 것이고 남성에게는 아무런 말이 없냐는 것임. 간단한 예시로는 "왜 내가 하면 불륜이고 네가 하면 로멘스냐?"는 것임.
    그러면 푸코의 이론이 단순한 계급론으로 비춰질 우려가 있는데 비록 인생의 실패자 백수 나부랭이의 중간결론이긴 하지만 푸코의 논의는 단순한 계급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는 인종적 계급론에 대한 탄식'임.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 1 도 의외로 간단한 이야기임. 우리가 권력 앞에 발가벗겨지는 이야기고 심지어는 발가벗겨지는 것조차 모르게 이미 벗겨져있는 상황에 대한 고발임. 우리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버린 것으로 생각하면 편함.
    그러므로 4)의 질문에 대해서는 푸코, 정확히 말하면 패배자 백수인 답변자가 말을 할 수 없는 내용인 점을 밝힘.

    5) "멜서스주의의 성은 왜 나타난건가요? 즉 인구의 축소 조절을 의미합니다."

    3)의 이야기랑 겹침.
    그런데 성의 역사 1을 발췌독만 하고 2, 3을 읽어보지 않아서 단정짓긴 뭣하지만 꼭 여기에 '성'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음.
    글쓴이의 심리를 추측해보자면 글쓴이는 생명관리정치의 인구조절기술을 성의 역사 1을 통해서 알았거나 성의 역사 1을 통해 공부한 사람의 내용을 본 것 같음.
    그렇기 때문에 성에 대한 이야기와 생명관리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섞인 것 같음. 맞는 이야기이긴 하나 성을 통해서도 관리한다는 측면이기 때문에 꼭 인구조절기술에 '성'을 붙일 이유는 없음. 생산 조절뿐만 아니라 죽여서 조절하는 것도 인구조절기술이기 때문임.

    6) 정리

    즉, 글쓴이가 알고싶어하는 내용은 생명관리정치의 조절기술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데 왜 굳이 인구를 줄일려고 하는 정책이 나오느냐에 대한 문제임.
    많으면 많을수록 일할 사람이 늘어나서 자본주의에는 더 좋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함.
    그런데 논의만 정리했는데 글쓴이 전제 자체에서부터 문제가 있다는 점이 나와버림.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겠음. 지금까지 서론이었는데, 웃긴 것은 본론은 서론보다 훨씬 짧게 끝날 것 같음. 그러나 쓰다보면 어찌될지 모를 듯함.

    3. 본론 : 생명관리정치

    제목을 이렇게 달았으나 술이 깨기 시작해서 패배자 인생이 더 서글프게 느껴짐. 그냥 후다닥 쓰고 사라지겠음. 이제 소목차도 안 달 것임.
    아무리 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님. 인구 10억이 넘어가는 중국에서 호날두와 메시가 안나오는 것과 똑같은 이치임.
    사람이 많으면 일할 사람도 많아지지만 관리할 것이 많아짐. 극단적인 예로 사람이 많은 만큼 화장실도 많이 갈 것이고 폐기물이 어마어마하게 늘 것임. 그거 처리하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일이 됨. 심지어 사무직 인력이 많이 필요한데 컴퓨터 전원도 못켜고 버튼 누르면 터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몇억이 된다고 하면 이것도 문제임.

    즉, 양질의 인력을 제대로 확보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임.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에 대해 외적의 침입을 위해 막아주기만 하는 역할에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는 역할로 바뀌어야 된다는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함.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일단 생략하고 그러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새로운 권력의 작동방식인 생명관리정치임.

    기존 권력의 방식을 "살게 내버려두고 죽이는 권력", "생살여탈권"으로 분석한 푸코는 19세기 이후 권력이 "(적극적으로) 살리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생사여탈권"(이 말은 사전에 없음. 그러나 이 말이 이 내용을 표현하는 좋은 단어인 듯 함.)으로 바뀌는 것을 알아챔. 그리고 그 작동기준이 인종주의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함.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나누고 분류하는 과정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려야 할 사람과 뭐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살아갈 사람, 살든 말든 신경쓸 필요없는 사람 등을 분류하는 것을 발견한 것임. 역사적으로도 인권의 신장과 함께 나타난 것이 인간에 대한 차별인 점, 자유와 함께 정교화 된 것이 규율이라는 점도 같이 생각해보면 좋음.

    지금 이 설명으로는 글쓴이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이 되지 못함.
    그러나 푸코는 양질의 인력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 과학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과정을 관찰함. 그 결과 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이 이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물끄러미 쳐다봄.
    멜서스의 인구론도 그런 의미임. 인간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공멸의 위기를 맞는다면 정치, 경제, 사회, 과학이 결국 나아가는 길은 누굴 살려야 할 지의 선별과정임. 딥 임펙트나 2012에 나오는 그런 선별내용인 것임.

    조절기술이 나온 이유를 잠시 보면 중상주의 이론이 국가 기준으로 경제를 바라보며 타국보다 부강한 자국이란 목표를 가질 때, 중농주의는 그런 이론 가지고는 세계적인 식량난 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이론을 제기함. 국가 기준으로 바라보면 대재앙이겠으나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등 전유럽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식량난은 단지 국지적 관점의 이야기고 식량난이란 말조차 필요없다고 함. 그에 따른 소수 인원의 사망은 단지 통계 수치의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해버림.

    4. 결론

    푸코의 이론은 "멜서스의 인구론이 왜 나왔는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하진 않음. "이런 이론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음.
    77 법경제학 형량관련 질문 [새창] 2014-11-27 01:27:41 0 삭제
    잉? 제가 한 말에서 lastlaugher님을 이상주의자라고 조롱하였다고 생각하셨나요?
    그렇게 느꼈다면 그렇게 적은 제 잘못이겠죠. 제가 그렇게 안적었다고 해도 그렇게 읽혔다면 100%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상당부분 제 잘못이 있단 이야기겠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변명을 해보자면 제가 현실주의자였다면 제가 지금 백수로 왜 살겠습니까? 제 능력껏 무슨 일이라도 하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무지렁뱅이라고 비난하면서 자위하고 살아가겠죠. 그게 지금 소시민에게 주어진 몇 안되는 스트레스 해소수단이니깐요.

    할 말은 많지만 간단하게 요약하겠습니다. 그래도 남들보단 훨씬 기니 그게 그거일 것입니다. 그러나 줄여보죠.
    lastlaugher님의 인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요구입니다. 국가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쳤다면 최소한 그런 모습은 보여줘야 합니다.
    법이 정의구현과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면 법은 그러한 시늉이라도 해야합니다.
    애인이 있는 사람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면 최소한 애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합리성이란 이유로 기존에 했던 약속들을 다 내팽겨쳐버리고 현실을 자기 유리한대로 바꿔버리죠.
    푸코도 미국 신자유주의 도입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듯 이야기했는데, 2차 세계대전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복지를 책임졌던 정책, 우리 옛날 소설이나 드라마 보면 부하를 전쟁터로 보내거나 적장을 죽일때 가족은 책임져주겠다고 하고 부하나 적장은 고마워하죠. 이런 정책을 경제적 합리성이란 이유로 취소해버리는 것을 잠깐 지적했습니다. 국가가 이미 약속한 정책마저도 뻔뻔하게 없애버리죠.
    정치인들이 공약을 말하고 국민들은 그 공약을 듣고 뽑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은 공약을 안지키고 심지어는 '당선되려면 무슨 말인든 못하랴?'라고 적반하장으로 대합니다. 거기에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위대한 근거를 제공해주죠.

    마지막 문단의 사회학 분야의 인간의 몰개성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간을 통치하고 뽑아먹을 수 있는 만큼 뽑아먹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이 게시판에 자주 나오는 성선설, 성악설 논의도 지난번에 제가 적었듯이 뽑아먹기 위한 이야기인거죠. 착하고 악한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최대한 뽑아먹기 위해서는 복지란 것이 필요하겠죠. 적당히 쉬고 먹고 살게 해줘야 더 뽑아먹을 수 있으니깐요.
    그러나 신자유주의 정책은 더 효율적인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인간을 기업화해서 인간의 공동체와 연대를 다 끊어버렸습니다. 형식적으로 평등한 1:1의 관계로 만든 다음, 실질적인 불평등함을 외면하죠. 공동체와 연대를 끊어버린 인간은 사육장의 소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죠. 경쟁체제라는 자칭 역사적으로 검증된 발전이론에 따라 심지어는 서로 헐뜯으면서 상대적 우월감에 도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공무원과 비공무원,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과 여 등등 아시는 바 그대로죠.

    국가는 국민에게 어린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사기쳤고, 뻔뻔하게 굴고 있죠. 뭐라도 정상인 것을 경험해봐야 이게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아는데, 우리에게 비교할 거리는 없죠. 슈퍼마켓에 소세지 2개에 1000원과 소세지 1개에 600원이 있으면 쉽게 비교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이러하지 못하죠. 반공주의 교육은 우리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킨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비교할 것은 단지 저 이상한 나라밖에 없다. 저 나라보다는 잘 사니깐 괜찮은게 아니냐. 우리에게 반대하면 저 나라로 보내버린다. 참 어이가 없어지죠. 이게 현실이죠.

    눈 하나 밖에 없는 세상에서 눈 두개는 비정상이다. 누가 정상이고 비정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집단 다 잘 살면 되는 것이잖아요.

    난 이상주의자였다가 현실에 순응했다. 그래도 난 이상주의잔데 그럼 멍청한 것이냐?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요? 이 X같은 세상 순응하면서 살아봤자 성공해봤자 최근 나온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에서 사무엘 잭슨이 연기한 노예 관리인에 불과하겠죠. 대학에서 하는 개그, 학점이 안나와서 교수님께 전화를 해서 따졌더니 "자넨 C등급 중에서 1등이네." 이게 뭔가요? 여기서 1등이면 뭐하죠? C인데.
    현실에 가장 잘 순응한 롤모델이 우리 주위에 있죠. ㄱㅇㅅ ㅂㅎㅅ라고 있잖아요. ㄱㅎㅇㅇ했을 때 논란이 되었던 말 속에 현실 인식만 있지, 그것이 잘못되었고 바꿔나가야 된다는 말이 하나도 없었죠. 그리고 인생 말아먹자 방송 나와서 공공연하게 대통령이 목표라고 말하죠. 그 사람 머리 속에는 국민은 멍청하니 방송 이미지만 잘 만들면 국회의원하고 대통령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현실인식 밖에 없죠. 거기에 대한 당위성,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하나도 없죠. 극단적 현실주의자의 표본이죠.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요.

    그러나 현실을 모르는 이상은 나중에 큰 위기로 찾아올 수 있겠죠. 푸코의 연구가 이런 내용이거든요. 당시 행동하자는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푸코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가르쳐줬죠. 상상하는 것보다 더 얽히고 설켰다는 점 말이죠. 격투기를 배우는 것도 상대방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죠. 이런 지식이 없어도 럭키 펀치로 이길 수 있어요. 그렇다고 럭키 펀치만 기대할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로또를 사고 말죠.
    이상과 현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상이란 목표를 바라보면서 현실, 우리 발목을 누가 잡고 있는지 어떻게 잡고 있는지, 오른발만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양 발과 양 팔이 다 잡혔다든지, 저 하늘의 해와 달은 가까워 보이는데 실제로는 어마어마하게 멀다든지, 등등 현실인식은 이상으로 다가가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죠.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고 누가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알아야 문제를 일으킨 곳에 가서 왜 학창시절부터 사기를 쳐왔는지, 어떻게 손해배상을 할 것인지,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를 물어볼 수 있죠. 푸코의 말대로 얽히고 설키더라도 끈을 더듬어 끝을 찾아 풀 수도 있고, 정말 심하게 얽혔으면 가위나 칼로 끊어버릴 수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처절한 현실인식이 중요한 거에요. 우리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서죠.

    영 안되면 정말 현실이 처참하면, 도망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피하지 못하면 즐겨라는 말은 지배하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죠.
    즐기지 못할꺼면 피해야죠. 그게 우리를 위한 말이에요. 비록 개별적으로 혼자서만 도망가는 사람은 짜증나죠. 그러나 다 도망가버리거나, 함께 도망가버리는거에요. 아마 그렇게 한다면 세상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죠. 푸코의 주체화 전략도 아주 간단히 표현하면 이런 내용과 똑같죠. 반대만 하지말고 아예 경기장을 새로 만들라는거죠. 말을 일일히 들어주지말고 그냥 무시하고 할 일 해버리라는거죠.

    또 아무 내용없는 이야기만 잔뜩 적었는데, lastlaugher님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요. 저 자신도 이상주의자이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거죠.
    이상없는 현실인식은 상대적 우월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죠.
    그러나 처절한 현실인식은 나 자신의 탈출에도 우리 모두의 탈출에도 큰 도움이 될꺼에요.

    그래서 전 법경제학 분야를 어떤 의미에서 참 좋아합니다. 이 정도로 노골적으로 그들의 의도를 드러낸 학문도 드물거든요.
    빼먹었는데 이렇게 노골적이어서 그런지 우리나라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 책이 번역이 잘 안되거나 중소출판사에서 번역해서 절판되어버렸나 봅니다. 국민들이 한글로 읽으면 이 노골적인 의도를 깨달을까봐 겁이 났나봐요. 구텐베르크의 성경인쇄가 종교혁명을 일으킨 것과 같이 혁명을 막기 위해서 애초부터 막았나 봅니다. 이건 음모론이라서 신빙성 없습니다. 술자리에서나 써먹으십시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급한 이상의 추구가 현실에 발목을 잡힐 수는 있는거죠.
    지난번 글에 적었던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에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말 : 아주 약간 관계있는 이야기인데 처절한 현실인식 속에 이상을 추구하는 만화책이
    카이타니 시노부가 지은 "원아웃"하고 "라이어게임"이에요.
    처절하다고 하니 약간 오버스러운데 현실인식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잊지 않고 있죠.
    근무 중 여유있으실 때, 머리 식히실때 읽어보세요. 사실 철학적 만화 전혀 아니고 오락물입니다.
    철학적 생각 할 수 있는 것은 위에 추천한 이사카 코타로/오스가 메구미의 "마왕"이죠.
    76 법경제학 형량관련 질문 [새창] 2014-11-26 22:13:54 0 삭제
    쉬면서 lastlaugher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니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시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습니다.
    lastlaugher님에 대한 형렬이님의 분석이 틀린 것 같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는 돈이많아서 벌금형을 집행하면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범죄억제가 된다고하는 기본적인 전제자체가 이해가질 않아서입니다."

    lastlaugher님이 이해가 안된다고 한 이 부분, 사실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공도 아닌 법경제학 공부를 혼자 낑낑 거리고 했던거죠.
    lastlaugher님은 모든 사람에게 양심, 공감대, 연대 등 화합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아주 작게나마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봅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가지고 있죠.
    그러다보니 본인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마음이 없는 사람, 심장이 없는 사람을 맞닥뜨리고 그들이 정책결정권자 또는 학계의 선봉에 서 있는 이 현실이 도무지 믿을 수 없는거죠.

    형렬이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lastlaugher님이 이런 학문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은 백지와 마찬가지의 두뇌를 가지고 있는데, 이 게시판의 상황파악, 분위가 파악도 하지 못하는 저는 쉬운 말이라고 자위하면서 허세에 빠져서 주절거린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어떠한 글, 어떠한 행동은 꼭 하나의 동기나 원인으로 나오지 않죠. 전혀 상반된 목적과 의도를 통해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행동과 결과 속에 하나의 목적과 의도만 있다고도 볼 수는 없죠.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 속에 자연사도 있을 수 있고, 고의에 의한 살인, 과실에 의한 살인, 다양한 원인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거죠. 우리 앞에는 단지 시신, 이 게시판에서는 글이 놓여져 있는거죠. 그러다보니 부분적인 증거와 정황 속에서 진실과는 다른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그 결과 진실과는 다른 진실이 만들어지기도 하겠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자본주의 교육을 받고 자본주의에 적합한 인간이 됩니다. 법경제학도 책을 읽다보면 다 고개가 끄덕여지고 당연한 이야기만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당연히 보이는 글의 전제를 바라보았을 때 아주 괴상망측한 논리가 숨어있는 것을 일부, 소수의 학자들이 발견한거죠. 우리는 사이가 좋지 못하고 다투는 상대를 싫어하고 보고 싶지 않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생각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의 깊숙한 곳을 바라보니 그들에게 우리는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내용이 나온 것입니다. 마르크스, 엥겔스 등 이런 내용을 설명한 학자들의 말은 재껴놓더라도 법경제학이란 학문 속에서 노골적인 의도를 드러낸 그들의 자백을 들어버린거죠.

    배제라는 것은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 취급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1세대 진보논객 중 성공한 강준만 교수가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을 내서 진보세력의 실수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사실 읽어보지 않았는데 서평을 대충 훑어봤더니 진보진영의 행동 하나하나가 보수진영을 깔보는 듯한 수치심을 유발하기 때문에 보수진영을 안고가는 대범함을 보여야 한다는 내용 같더군요. 이런 내용은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도 나온 분석이죠. 뭐 서평도 3초 정도 보고 하는 평가라 틀렸겠죠.

    그러나 정책결정권자나 학계의 일부, 기득권자들이 대다수의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고 배제한다는 사실에 대해 고발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배제한다고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을 바라보는 거니깐요.

    lastlaugher님께서도 이런 현실이 믿겨지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니 비슷한 질문을 계속하는거죠. 이 정도까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생각은 못한 것 같으니깐요. 저도 작년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 노골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올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제 눈으로 봐버린거죠.

    우리를 배제하는 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 우리가 그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바라봐야 한걸음 더 나갈 수 있겠죠. 이런 세상도 있다, 이런 인식도 있다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껍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단지 공무원 연금을 깎고, 정규직을 비정규직화 하려고 하는 정치적인 행동만 봤는데 법적으로도 그러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 그러나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문제라는 현실, 본인이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하고 노골적이란 사실을 알았잖아요. 언제 끝날지 모르고, 인류가 지속하는 한 계속 일어날 문제일 수도 있지만 시작이 반이라는 우리나라 좋은 말이 있네요. 천천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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