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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부옹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13-02-06
    방문 : 24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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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옹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41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3:51:20 7/12 삭제
    ★ 쥬엔류 /

    과거엔 단군이란 것 자체를 신화로만 가르쳤고,
    없다고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일본과 친일파들에 의해서였죠.

    단군이 임금이란 칭호로 굳어진 건 최근의 일입니다.
    저렇게 파시즘 타령하는 환단고기 덕분?이죠..

    위에 썼다시피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들만 취하면 된다고 봅니다.
    저도 어떤 사서도 100% 믿지 않습니다.
    그런 역사서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리도 없기 때문이죠.
    다만 참고로 받아들일뿐이죠.

    그리고 님이 47대 임금이 이상하다고 하셔서 찾아봤는데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요...

    https://ko.wikipedia.org/wiki/%EA%B7%9C%EC%9B%90%EC%82%AC%ED%99%94

    <단군기>의 각 임금의 치세 기간은 다음과 같다.

    단군(檀君) 임금 : 재위 93년 - 원년(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하였다. 우수하의 벌판에 수도를 세우고 그 이름을 임검성(壬儉城)이라 하였다.
    부루(夫婁) 임금 : 재위 34년 - 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가륵(嘉勒) 임금 : 재위 51년
    오사(烏斯) 임금 : 재위 49년
    구을(丘乙) 임금 : 재위 35년
    달문(達文) 임금 : 재위 32년
    한율(翰栗) 임금 : 재위 25년
    우서한(于西翰) 임금 : 재위 57년
    아술(阿述) 임금 : 재위 28년
    노을(魯乙) 임금 : 재위 23년
    도해(道奚) 임금 : 재위 36년
    아한(阿漢) 임금 : 재위 27년
    흘달(屹達) 임금 : 재위 43년
    고불(古弗) 임금 : 재위 29년
    벌음(伐音) 임금 : 재위 33년
    위나(尉那) 임금 : 재위 18년
    여을(余乙) 임금 : 재위 63년
    동엄(冬奄) 임금 : 재위 20년
    구모소(緱牟蘇) 임금 : 재위 25년
    고홀(固忽) 임금 : 재위 11년
    소태(蘇台) 임금 : 재위 33년
    색불루(索弗婁) 임금 : 재위 17년
    아물(阿勿) 임금 : 재위 19년
    연나(延那) 임금 : 재위 13년
    솔나(率那) 임금 : 재위 16년
    추로(鄒盧) 임금 : 재위 9년
    두밀(豆密) 임금 : 재위 45년
    해모(奚牟) 임금 : 재위 22년
    마휴(摩休) 임금 : 재위 9년
    나휴(奈休) 임금 : 재위 53년
    등올(登兀) 임금 : 재위 6년
    추밀(鄒密) 임금 : 재위 8년
    감물(甘勿) 임금 : 재위 9년
    오루문(奧婁門) 임금 : 재위 20년
    사벌(沙伐) 임금 : 재위 11년
    매륵(買勒) 임금 : 재위 18년
    마물(麻勿) 임금 : 재위 8년
    다물(多勿) 임금 : 재위 19년
    두홀(豆忽) 임금 : 재위 28년
    달음(達音) 임금 : 재위 14년
    음차(音次) 임금 : 재위 19년
    을우지(乙于支) 임금 : 재위 9년
    물리(勿理) 임금 : 재위 15년
    구홀(丘忽) 임금 : 재위 7년
    여루(余婁) 임금 : 재위 5년
    보을(普乙) 임금 : 재위 11년
    고열가(古列加) 임금 : 재위 30년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1205년간 지속되었다.
    40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3:44:44 4/6 삭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47&aid=0000036936

    "단군신화설은 식민사학자들의 왜곡·농간"

    오마이뉴스 2003-10-06

    경기대 법대 교수이자 국사찾기협의회 부회장인 고준환 교수가 개천절을 맞아 '개천절과 단군조선사'를 기고해 왔다. 고 교수는 언론인 출신으로 우리 상고사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바 있다....편집자 주

    지금부터 4336년전 10월 3일은 왕검단군께서 첫 민족국가 조선(고조선 또는 단군조선)을 개국하신 날이다. 우리는 10월 3일을 4대 국경일의 하나인 개천절로 자랑스럽게 경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47대 단군 2095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사(實史)로 생각하는지? 아니면 신화로만 생각하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실사로 생각하겠지만, 사대식민사학자를 비롯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신화로 생각하는 것이 실정인 것 같다. 지금은 남북해외의 한민족 8천만이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민족대통일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려면, 주인의식을 갖고, 그 뿌리인 민족자주 역사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바, 사대식민사관이나 유물계급사관등으로 왜곡돼서 잘못 알려진「2천년 반도의 패배사」를 극복하고, 단군조선사를 포함한「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를 되찾아 자리매김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단군조선사 2천여년이 신화로 몰려 부정되는 엄청나게 잘못된 사태가 발생한 것인가?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그에 따른 일본과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의 조작왜곡 농간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단군조선을 부정하는 일제식민사학의 첫 기록은 일본의 사학자 동경제대의 시라도리(白鳥庫吉)교수가 AD 1894년 단군고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이라 했고 이어서 나가통세(那珂通世)가 AD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승도(삼국유사를 지은 일연대사를 지칭)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조작했고, 그에 이어 1902년 금서룡(今西龍 = 이마니시류 이병도 박사의 스승)의 「단군고」등이 뒷받침하여 단군을 철저히 부정했다.

    또 AD 1910년 한·일 합방이후 일제가 전국에서 민족고유사서 20만권을 모아 불사르고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고, 한국사를 일본역사 2600여년 보다 짧은 2천년이하로 하기 위하여 단군조선사 2천여년을 빼버리고 본격적으로 단군신화론을 왜곡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8·15광복 후에 이승만 정권은 민족정기를 찾는데 노력을 경주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를 탄압하고 해체하는 등 반민족적 행태를 나타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 역사 말살·왜곡에 참여한 이병도 박사(서울대 사학과 주임교수), 신석호 박사(고려대 사학과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초대 위원장)등이 해방 후에도 식민사학에 대한 반성 없이 강단사학을 사실상 장악하여 일제식민사학이 유지되고 전파되게 한데 큰 원인이 있다하겠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2천여년의 단군조선사를 실증과학적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유적과 사료인 문헌자료를 살펴보는 것인바, 먼저 단군조선의 유물유적을 살펴보자. △ 왕검단군이 단기 51년 부루태자 등을 시켜 강화도에 쌓은 정족산성과 마니산 참성단 △평양 강동군 대밝산의 구을단군릉 △흘달단군 50년(BC 1733년)에 벌어진 5성취루(五星聚婁)현상의 과학적 입증(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가 천문과학으로 입증)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 정효공주 묘비(환단고기 기록 입증) △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시 노은면 불상(장수왕 연호가 건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 입증) △ 단군조선의 성터(평양 낙랑성터, 하얼빈 대전자성터, 지가영자성터, 내몽고 적봉성터 등 60여곳) △ 단군조선시대 암각화(울산 반구대 암각화, 고령 양전리 암각화, 함안 도항리 암각화 등) △ 단군조선시대 고인돌(세계고인돌의 반이 한반도에 몰려있다. 그 중에도 많은 곳은 강화도, 평양 문흥리 등 10개 지역, 경기 파주군 옥석리, 전북 고창, 전남 화순, 대구 대봉동 지역 등) △ 단군조선의 청동기문화출토(초기 청동기 유적∼요동지역, 평북 신암리 세죽리 유적, 평양시 금탄리유적,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등 7개 유적, 함북과 길림성 50개이상 지역에서 출토) (발달된 비파형청동검∼단기 13세기 요동지방부터 한반도를 거쳐 단기 20세기경에는 일본구주지방까지 전파됨.) △ 미송리형토기(단군조선의 대표적 토기, 평북 의주군 미송리동굴서 질그릇과 유골2구등 발굴), 채색토기, 흑색토기, 나무곽무덤, 귀뜰무덤, 벽돌무덤 등 다양한 출토물들 많음.

    다음엔 단군조선사에 관한 문헌자료를 살펴보자.

    단군조선에 관련된 사서는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통감,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 응제시주, 해동역사, 산해경, 위서(魏書), 사기(史記)등 많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주사학자와 강단식민사학자 사이에 사료적 가치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서는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이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에 대하여 내용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위서로 몰고가는 편에선 강단사학자는 이기백, 조인성, 송호정, 박광용, 송찬식 교수등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 선 것은 조인성 교수로 민족자주사학자들은 본다.

    진정한 국사를 찾는 남·북사학계의 결론은 규원사화는 사료적 가치가 있음은 물론 위서가 아닌 참된 사서임에 틀림없고, 환단고기는 부분적으로 가필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에 있어 이를 더 연구해야하나, 사료적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조인성 교수는 AD 1988년 논문 "규원사화와 환단고기(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 71쪽)등 여러 논문에서 일부용어가 현대어라든지,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규원사화 단군기를 기술하는데, 저본인 진역유기나 원저본인 조대기(朝代記)를 안보았을 것이라는 것 등을 내세워 위서로 몰고 갔으나, 민족자주사학자인 이상시 변호사가 이를 조목조목 비판하여 제압하고, 규원사화 단군기는 단군조선의 실사라고 결론 지었다.(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 192면 참조)

    조인성 교수의 이론을 제압하는 이상시 변호사의 글과 대동소이한 글이 북한에서도 나왔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 국사학계를 사실상 대표하는 후보원사 원로교수인 손영종박사는 AD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개천절 남·북민족공동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공동 학술토론회"(필자참석)에서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대한 이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며, 참된 사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은바, 이를 발췌해 본다.

    《규원사화》는 저자인 북애자에 의하면 고려말의 청평산인 이명이 쓴《진역유기》(3권)을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저자가 안팎의 사서들에서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뽑아서 추가하고 일정한 자기식의 설명을 가하기도 한 것이며《진역유기》는 발해사람들이 편찬한《조대기》를 참고하여 쓴 것이다.《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에서 이 책의 저술년대인 1675년 이후에 추가기입하였다고 볼만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① 우선 인명에서 이 책에 보이는 사람이름들은 다 옛스러운 느낌을 주며 다른 비사들에서 보는바와 같은 중국식성씨를 가진 인물은 없다.

    ② 다음 지명 역시 매우 옛스러운 고장이름으로 된 지명이거나 소밀성, 길림 등과 같이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에도 잘 알려 진 지명들이다.

    ③ 인용서목도 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출판 또는 필사, 보급되여 있었던 책이다. 또 책이름을 밝힘이 없이 인용 또는 이용한 글도 다 그 이전시기의 책들의 내용이다.

    ④ 사건, 사실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보충적해설도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책들에 나오는 것들과 그것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설한 것으로서 17세기 사람으로서는 능히 그렇게 쓸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⑤ 관직명을 보아도 중앙관직명인 《단군8가》는 매우 옛스러운 명칭으로 되어 있고 수상(首相)이니, 상장(上將)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쓰지 않았으며 지방관직도 여러《후》,《남해상장》(上長)등은 보이지만《태수》니《녹살》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없다. 이 역사 근대이후의 가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⑥ 사상, 이론, 개념들도 17세기 사람들이 능히 쓸 수 있는 내용과 어휘들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태백일사》등에 보이는《천부경》이나《삼일신고》등은 나오지 않고《서경》같은데도 보이는《대고(大誥)》가 나온다.

    ⑦ 과학, 기술관계 서술에서도《단기고사》등에 보이는 근대부문과학도서나 비행기, 잠수함 같은 근대기술의 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보이는《문화의 계발》이라는 표현에서《문화》란 말은 서유럽근대의《Culture, Kultur》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문치, 교화》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고려사》성종 10년조에 나오는 여진관계기사의 연대를《광종 10년》이라고 했으니 같은 내용으로 된《해동역사》를 베낀것이고 따라서 1823년 이후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북애자와 한진서가 다 같이 선행한 어떤 기록을 보고 쓴 것이라고 보면 문제로 될 것이 없다.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태백일사, 삼성기 그리고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 등을 국사서적에 정식으로 인용하여 제1대 단군성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기술하고 있다.(허종호,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 남- 도서출판 중심 펴냄, 2001. 3. 40쪽 등 참조).

    조인성 교수가 계연수 선생이 펴낸 환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대강 요지는 ① 국가형성과 관련된 청동기 사용연대에 관하여 BC 10세기 전으로 올라가기 어려운데, 단군조선 건국은 BC 24세기로 올라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역사를 일본역사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 한국 청동기 문화를 BC 5세기∼8세기경으로 잡았으나, 만주·몽골·중국등지에서 나오는 청동기문화는 BC 30세기정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중국사학계의 유력 학설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②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용어가 근대용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寧古塔, 文化, 父權, 原始國家〉등이다. 이들 용어는 옛날에도 사용했을 수도 있고, 필사하고 정서하며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필이나 손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엄밀히 가필여부를 밝혀야 한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지금도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이 있다면, 우선 다음과 같은 6가지 실증사례에 대한 반증을 제시해야 한다.

    ① 서울대 박창범교수가 입증한 13세기 흘달단군 50년 천문학적 5성취루 현상 ② 발해 3대문왕 대흠무가 "대흥"이라는 환단고기 기록이 정효공주묘비에서 입증된 점 ③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에 대제(大齊, 평로치청)를 세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처음 나오는 바, 이것이 김병호씨의 저서 "고구려를 위하여"와 KBS역사스페셜(2001. 5. 16)에서 입증한 점 ④ 환단고기 단군세기 왕검단군 51년에 마니산 참성단과 정족산성을 쌓은 바, 지금까지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음 ⑤ 평양 강동군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는데, 환단고기에 구을단군이 전국 순행 중 붕어하여 평양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이 있음 ⑥ 규원사화나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현재 그런 사람이 없음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자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타계 직전 과거에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찾기협의회원들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 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반 유물유적과 사료로 볼 때, 왕검단군은 지금부터 4336년전 아사달(백두산 천평 비정)에 첫 민족국가 조선(朝鮮→朝光鮮明에서 따옴)을 건국하셨다. 그 이념은 홍익인간, 광화세계(光化世界=光明理化)를 내용으로 하는 신선도로서 천하평화를 지향하였다.

    고조선 초기 국경은 북으로 대황(흑룡강 흥안령 산맥)서는 설유(몽고 훈육), 남은 해대(중국 산동성), 동은 창해(한반도 동해)까지였다고 규원사화는 전하고 있으며, 그 후에 영역의 부침이 있었다. 조선의 수도는 왕검단군때 세 번 옮겼으며(백악산 아사달<길림성 돈화, 소밀성>. 요녕성환도산성. 장당경<황해도 문화현>) 그 후로 2세 부루단군때(환도산성) 22세 색불루 단군때(요동 험독현 창려) 34세 오루문단군때(낙랑홀=지금 평양) 44세 구물단군때(장당경) 각기 천도하였다.

    단군조선은 1단군 3한 3사 8가의 기본체제와 화백(和白 고루살이) 민주제와 범금8조법 등의 법제가 있었다. 22세 색불루 단군은 우현왕 고등의 자손으로 스스로 봉기하여 단군이 되어 후단군조선을 열었고, 단군조선사 가운데 기자(奇子)조선과 위만조선 및 한사군은 3조선관경의 하나인 변방 번조선(요녕성 지역)에서 생멸하였다.

    독립운동가요, 민족자주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님은 "역사만이 희망이다"라고 하였다. 개천절을 맞아 우리 한민족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의 뿌리가 되는 역사를 되돌아보아 평화적으로 남북통일을 이루며, 우리나라가 영세중립국이자 세계문화중심국으로서 열린 마음을 갖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39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3:39:06 5/7 삭제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2/04/20150204003649.html

    사그러들지 않는 ‘식민사학 청산’ 논란

    일제 관점서 재단… 학계 권위·학맥 막혀 주체 역사 못세워

    관련이슈 : 광복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1945년 8월 광복을 맞은 역사학계의 최대 화두는 ‘식민사학’의 극복이었다. 일제가 식민통치 35년간 난도질한 한국사의 온전한 복원은 지상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광복 70년을 맞은 2015년,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조선총독부 사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직설적인 비난까지 있다. 이런 비판과 주장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학계 내부에서의 논쟁은 물론 소송으로 번지거나, 정치권으로 확대되기도 했었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뀔 세월이 지나고도 ‘식민사학 청산’의 주장이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역사학이 근대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을 무렵인 20세기 초 일본인 학자들의 막강한 영향력, 광복 직후의 정치 상황과 식민 잔재의 불완전한 청산, 주류 학계의 학맥 형성 과정을 들여다봐야 이해가 가능하다. 학계의 권위주의와 소통 부재도 짚어야 할 대목이다.

    ◆한국사에 드리운 식민사학의 짙은 그림자

    역사학이 근대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인 20세기 초, 역사학계는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으로 크게 양분됐다. 한국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해석할지에 대한 양 진영의 힘겨루기는 치열했다.

    일본에서 한국 연구는 17세기에 이미 시작됐다. ‘고사기’, ‘일본서기’ 등 일본 고전을 근거로 “일본이 과거 한국을 지배했다”고 주장했고, 19세기 ‘정한론’(征韓論·일본이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식민사학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함께 본격화되어 1920년대에 이르면 체계화된다. 1925년과 1926년 잇달아 설치된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는 두 축이었다.

    두 기관에 소속된 학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료만 골라 모은 ‘조선사’를 1937년에 완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식민사학은 ‘타율성론’(한국사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전개됐다), ‘정체성론’(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를 수 없는 낙후되고 정체된 후진사회다), ‘일선동조론’(한국과 일본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으로 한국사를 재단했다.

    민족사학은 학문적 차원을 넘어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전개됐다. 1910년대 일제의 박해를 피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한 신채호, 박은식, 김교헌, 이상룡 등 독립지사가 진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특징이다. 이들은 ‘민기’(民氣), ‘국혼’(國魂) 등 정신력을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며 왕조사관에서 벗어나는 발전을 보였다.

    또 고대사의 무대를 만주, 중국 동북지대로까지 확대해 한국사의 자주성, 진취성을 강조했다. 신라, 발해의 병립을 ‘남북조 시대’로 이름 붙이고, 조선시대의 당쟁을 ‘붕당발전론’으로 해석해 일제의 ‘당파망국론’에 맞서기도 했다. 이국 땅에서 개발된 민족사학의 주요 이론은 국내의 신문, 잡지 등에 연재되며 주목을 끌었고, 일제를 긴장시켰다.

    민족사학자들은 분투했지만, 식민지의 현실에서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무엇보다 양적인 면에서 식민사학자들이 쏟아내는 연구 결과물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청구학회 등을 결성한 식민사학자들과 달리 민족사학자들은 연구조직을 결성할 조건도 되지 못했다.

    ◆친일경력 이병도를 정점으로 형성된 역사학계

    광복 후 역사학계의 흐름을 짚을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이병도다. “역사를 완전히 독립된 학문으로 정착시킨 이를 꼽는다면 아마 이병도를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이란 평가를 받는 학자였고, ‘누구도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학계의 1인자였던 인물이다.

    1910년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한 이병도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이케우치 히로시와 쓰다 소키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을 맡으면서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이런 경력 때문에 광복 직후 학계의 ‘친일파 제명운동’ 대상이 되면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사학자들이 광복 직후 정치에 참여하고, 6·25전쟁 와중에 월북, 납북되면서 학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반공주의 정책으로 친일파 청산문제가 잠잠해진 것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식민사학 청산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이병도는 ‘공적’(公敵)과도 같은 존재다. 식민사학의 틀 속에서 형성된 그의 학설이 제자들을 통해 학계의 통설로 군림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학설에 대해 “종래에 일본인들이 세워놓은 한국사 체계의 범위 안에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식민사학이 타율성론의 근거로 삼았던 ‘한사군 한반도설’이다. 그는 낙랑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하는 등 한사군의 중심지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인식했다. 일본인 학자들과 같은 견해이며 지금도 학계의 통설이다.

    한계가 분명했지만 학계에서 이병도의 권위는 누구도 넘볼 수 없었다. 1989년 세상을 떠난 뒤 나온 ‘역사가의 유향-두계 이병도 선생 추념 문집’이란 제목의 책에서 이런 위상은 확인된다.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이기백, 김원룡, 전해종, 이성무, 고병익, 이기동 등은 주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광복 이후 한국사 학계를 주도한 1세대 학자들이다. 이들은 이병도를 “한국문화의 연구에 획기적인 기틀을 마련하셨다”, “한국사학의 수립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셨다”고 추켜세웠다.

    ◆“변화 거부하는 ‘학(學)피아’가 무섭다”

    “스승 없이 혼자서 공부해야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승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고, 그 범위 안에서만 논문을 읽다 보니 세뇌가 되는 거다.” 한 중견 역사학자의 고백이다. 기존의 학설에 얽매여 건설적인 비판과 극복이 어렵다는 의미다. 학계의 토론 부재와 경직된 권위주의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식민사학 청산 주장이 반복되는 또 다른 이유다.

    주류 학설에 대한 도전과 문제 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1975년 10월에 ‘국사찾기협의회’가 발족했고, 1978년 9월에는 국사 교과서 서술상의 문제를 지적하며 소송이 제기됐다. 1981년 11월에는 국회에서 단군실존설, 고조선 영토 문제 등을 두고 토론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윤내현, 최재석 등이 고조선 성립 시기, 중국·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관계 등을 두고 주류 학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잠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깊이 있는 토론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 역사학자는 “통설에 반하는 논문을 학회지에 싣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예 학회를 따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지방 소재 대학의 한 교수는 “토론회를 해도 자기 말만 한다. 말 그대로 토론일 뿐 결과가 바뀌는 것은 없다”며 “다른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따돌림을 받은 경우가 왕왕 있다”고 전했다. 주류 학자들이 비주류 학자들과의 토론에 거부감을 보인다는 증언도 있다.

    신진 학자들의 기존 학설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학계에 안정적인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득 될 게 없기 때문이다. 국립연구기관의 한 교수는 “학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다른 이론을 주장하면 손해를 보는 구조인데 누가 제 목소리를 내겠냐”고 꼬집었다.
    38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3:31:05 4/7 삭제
    ★ 왜안가입요 /

    과거엔 오유가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비아냥 거리거나

    욕도 보이고.. 토론은 거의 없고, 닫혀있기만 했죠.

    저 블로그(책)의 어떤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말이 안되는 거죠?

    ★ 쥬엔류 /

    그렇다면 고조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버리죠.
    (중국이 원하는 바겠지만...)

    그 이전엔 한국인들이 고조선 자체가 없다는 사람도 많았지요.

    주된 논리가 한 사람이 어떻게 2천년을 통치하는가 하는 점이었죠.

    그리고 위에 썼다시피
    어차피 대부분 역사자료가 유실되었을 테니

    곧이 곧대로 믿는 것 자체는 위험하다고 보여집니다.

    그냥 참고로 하라는 것이죠.

    다만 극단적인 사람들이 이건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라면서
    모두 부정하니까 문제죠.

    한국인들이 신앙시하는 삼국사기도 오류가 있고,

    중국사, 일본사도 오류와 왜곡이 있습니다.
    37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3:10:47 11/9 삭제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5/06/14/20150614001965.html

    日帝, 신시·고조선 적통 이은 ‘400년 북부여’ 역사도 말살

    [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13〉 고조선과 북부여·부여 역사 부정하는 한국사

    ◆고조선은 8000리 땅을 100명 이상의 ‘단군’이 1908년간 다스린 나라

    고조선의 영토 크기와 위치를 알 수 있는 기록이 ‘관자’에 있다. 관자는 제나라 환공(서기전 685∼643년)과 관중(서기전 ?∼645)의 대화록이므로 서기전 645년 이전의 기록이다. 그 관자에 ‘팔천리지발조선(八千里之發朝鮮)’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이 기록을 ‘발조선이 제나라에서 8000리 떨어진 나라’라고 해석해왔으나 사실은 ‘발조선은 8000리 영토를 가진 나라’라는 말이다.

    이 관자와 ‘산해경’, ‘여씨춘추’, ‘사기’ 등에 수록된 조선 위치 관련 기록을 종합적으로 연구·분석한 결과 고조선 영역은 서쪽으로 영정하(베이징·톈진의 서부)에 이르고, 발해의 북쪽에 있던 8000리 대제국으로 나타났다.

    일본의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은 평양지역의 박수무당, ‘왕검’은 ‘선인’으로서의 호칭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을 이은 최남선은 ‘단군은 무당의 일명인 당굴, 왕검은 대인·신성인의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하였고, 이병도는 ‘제정일치 시대에는 단군뿐이요, 제정이 분리된 후로는 제사단체의 장은 단군, 정치단체의 장은 왕검’이라고 하였다.

    이런 주장에 따라 현 교과서에서는 단군왕검을 제사장을 의미하는 ‘단군’과 정치적 지배자를 의미하는 ‘왕검’이 합쳐진 제정일치 시대의 직책명칭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단군왕검’은 중국의 성명과 칭호의 표기 방법에 따라서 칭호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오도록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단군(壇君)의 ‘단(壇)’자는 하느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을 의미하고, ‘군(君)’자는 ‘임금’을 의미하는 칭호였으며, 왕검은 1세 단군의 이름으로 봐야 한다.

    ‘나이가 1908세였다(壽一千九百八歲)’는 기록은 단군 홀로 1908년을 살았다는 신화가 아니다. 신라·고려·근세조선 119명 임금의 평균 재위 기간이 16.7년이었음을 고려하면 고조선 1908년 동안 1세 단군 왕검, 2세 단군 ○○, 3세 단군 ○○에 이어 114세 단군 ○○까지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이다.

    그 흔적이 4000년 전 이전에 시작된 하가점하층문화와 하가점상층문화이고, 이보다 앞선 환웅천왕의 신시문화는 6725년 전 이전에 시작된 홍산문화이다. 이렇게 되면 요하문명이 우리 조상들의 유적임이 명확해진다.

    ◆환인이란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 기록 부정

    나카 미치요와 이마니시 류 등의 일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유사’ 고조선 편에 ‘환인(桓因)’이라는 불교용어가 등장하는 것을 이유로 이 기록이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 온 이후에 날조한 신화라고 하였다. 환인(桓因)이 ‘석가제파인타라’ 혹은 ‘석제환인인타라’라고도 불리는 불교의 천신을 간략하게 줄인 칭호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하늘님금’을 하느님이라며 받들어왔고, 한자로는 ‘천제’, ‘상제’, ‘황천’, ‘천(天)’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불교 도입 후에는 불교의 ‘천신’인 ‘환인’으로 표기를 한 것뿐이다.

    근세조선 말기에 한국에 온 선교사들인 로스, 게일, 기포드, 헐버트, 성서변역위원회 초대 위원장을 지낸 언더우드 등은 각기 한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내용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 책에서 “한국인들이 수천 년 전부터 하느님, 하나님을 부처님보다 높은 최고의 신,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관리하며 상과 벌을 주관하는 신으로 믿고 있으니 ‘성서’ 번역에 있어 여호와를 하느님(하나님)으로 번역하자”고 주장하여,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환인이라는 말을 빌미로 ‘삼국유사’의 고기와 ‘제왕운기’의 본기를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조작된 신화라고는 할 수 없게 된다.

    ◆해모수의 북부여와 동명제의 부여 400년 역사가 사라졌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이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어 1908년 만에 망했다 했으니 고조선이 멸망한 해는 서기전 425년이다. 이어서 서기전 419년에 북부여가 건국되었고, 서기전 100년 전후에 동명제가 해부루왕의 북부여를 빼앗아 부흥시켰다.

    이런 긴 역사적 흥망 과정을 시라토리 구라키치와 이마니시 류는 “단군과 하백의 딸 사이에서 부루가 태어났고, 해모수와 하백의 딸이 주몽을 낳았으며, 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라 하여 단군이 곧 해모수이고, 주몽과 부루는 형제”라는 식으로 모두 서기전 59년에 태어나는 주몽과 거의 동시대 인물들로 왜곡하였다.

    이렇게 되면 단군의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부여) 등 400여년의 역사가 없어진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를 근거로 신시, 고조선, 해모수의 북부여, 동명제의 북부여, 해부루왕의 동부여 등의 역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이병도는 ‘부여고’에서 북부여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하느님(천제)의 아들이라며 부여를 부흥시킨 동명제의 탄생, 성장, 탈출, 부여로 와서 왕이 되는 등에 대한 ‘논형’, ‘후한서’, ‘위략’ 등의 중국 기록이 고구려 건국시조(주몽)의 전설을 잘못 전한 것이고, 동명제 즉, 동명은 주몽으로 고구려의 시조라고 왜곡하였다. 이 논리는 현재의 교과서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역사교과서에서 ‘부여는 1세기에 이미 왕을 칭하고’라고 하여 전국시대부터 서기 1세기 이전까지 수백 년의 북부여·부여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의 영토 위치와 정체

    고대 한국의 맹주였던 고조선이 사라지자, 요동국과 더불어 가장 서쪽에 있던 고죽국이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수서’ 배구전에 “고구려 땅은 본래 고죽국이다. 주나라 무왕 때에, 이 고죽국 땅에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이 땅을 나누어서 삼군(낙랑·현도·대방군)을 두었고”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기자와 무왕은 서기전 12세기 사람이고, 고죽국은 서기전 18세기부터 서기전 7세기까지도 존재하던 나라이므로 무왕이 기자를 고죽국에 봉할 수 없다. 이는 고죽국이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것을 아는 사람들이 기자의 조선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말로 보인다. 고죽국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의 마지막 왕이 준왕이고, 준왕이 서기전 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고죽국은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그 지역의 창려가 준왕과 위만조선이 도읍했던 왕험성이었다. 고대 한국 영토 중에 가장 서쪽 지역에 있던 나라가 준왕의 조선과 위만조선이었다. 따라서 이 조선들은 혈통적으로나 영토 위치상으로나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고대 한국의 중심 국가가 될 수는 없다. 신시·고조선의 적통을 이은 국가가 북부여이고, 그다음이 오국(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으로 이어진다.

    ◆고조선 역사를 부정하기 위해 ‘고조선’ 국호 왜곡

    고조선은 본래 기자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쓰인 국호이다. 그러나 일본강점기에는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의 실존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이병도학파 학자들에 의해 현재 역사교과서에서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기자조선, 준왕 조선, 위만조선보다 고대에 있었던 조선이라는 의미로 고조선이라 불렀던 것인데, 준왕의 조선,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 한국 고대국가의 중심에 있는 국가라는 의미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의 망령이 중국 동북공정의 근원

    우리 역사에서 기자와 기자조선보다 더 큰 비중을 가진 인물과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 기자와 기자조선이 수·당나라의 고구려 침략 원인,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고, 유학자들의 모화·사대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 또 일제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였다.

    하지만 기자동래, 기자조선의 실존 유무에 대한 연구는 의외로 적다. 필자가 중국의 수많은 사서를 뒤져 고증한 바에 의하면, 기자가 조선에 온 적도 없었고, 기자가 건국한 조선이라는 나라, 기자조선은 존재한 적도 없었다. ‘사기’ 송미자세가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기록과 ‘상서대전’의 “기자가 주나라에 의해 석방된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조선으로 달아났는데, 무왕이 그 말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라는 기록에 등장하는 조선은 고조선이 아니라 하남성 상구시에 있었던 넓이 50리의 작은 땅이었다.

    기자의 이름은 서여이고, 서여를 봉한 이 땅 이름이 하남성 ‘조선(朝鮮)’이었다. 나라 이름은 조선이 아닌 ‘기(箕)’이며, 서여의 작위가 자작이다. 이 때문에 서여를 ‘기 나라의 군주인 자작’이라는 의미로 ‘기자(箕子)’라고 불러온 것이다.

    반고가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는 ‘송미자세가’와 ‘상서대전’ 기록의 조선을 한국의 고대국가인 ‘조선’으로 오인하고, ‘한서’ 지리지에 “은나라가 쇠약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에게 예, 의, 밭농사, 누에치기, 벼 짜기, 옷 만들기를 가르쳤다”라는 말을 창작해 넣은 것이다. 이러한 반고의 역사왜곡이 확대재생산되어 존재한 적도 없는 기자조선이 고대 한국을 920년 지배하였던 역사로 왜곡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대릉하 유역에서 기자조선의 군주를 뜻하는 ‘기후’, 연나라 군주를 뜻하는 ‘연후’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기를 비롯하여 은나라 말, 주나라 초기(서기전 1117년 전후)의 청동기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기존의 기자 동래, 기자조선에 대한 기록과 인식에 더하여 이 청동기를 기자조선의 실존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았고, 요하서쪽 유역이 상(은)과 서주의 세력범위에 포함된 증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청동기들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중국은 실존한 적도 없는 기자동래, 기자조선을 동북공정의 핵심 근거로 이용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중국의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불러올 수 있고, 영토분쟁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그러한 불행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진실,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찾고 가르쳐야 한다. 필자의 ‘기자·위만조선 연구’, ‘신시·단군 조선사 연구’, ‘잃어버린 한국의 고유문화’ 등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36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3:05:22 11/24 삭제
    오유가 점점 일베처럼 닮아갑니다.

    반대가 굉장히 많군요.
    파시즘이란 의미 자체가 이상하군요.

    환단고기 자체에 파시즘적인 내용이 있습니까?
    환단고기 자체가 파시즘일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사서는 오류와 왜곡도 많고, 의도적인 조작도 많았습니다.
    특히 중국, 일본사가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박창범 교수께서 천문기록을 한 결과
    중국, 일본사서가 맞지 않은 부면이 많다는 걸 밝혀냈고,
    왜곡, 조작이 많다는 걸 드러나게 해주었죠.

    한국의 역사도 왜곡, 축소되었다고 보여지며
    일제와 친일파들에 의해 더 가속화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를 테면 문익점의 목화씨는 왜곡이며 (중국은 단 한번도 금지한 적이 없으며,
    백제,신라가 목화옷을 한 기록이 있고, 증거도 발견)

    백제 의자왕의 삼천궁녀라던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의 옥사설, 거북선이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등

    검증도 안된 것들이 교과서에 실리거나 대중들이 진실처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지요.

    저 책(블로그)의 내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당시엔 일본의 강압에 맞서설 민족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환단고기도 그렇지만 어떤 것이든 100% 맹신하는 건 위험하고,
    다만 어느 사서나 그것을 참고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규명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35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7 22:35:15 13/29 삭제

    환단고기 자체가 파시즘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일부세력들이나 사람들이 극우적일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반대도 존재합니다.

    한국고대사, 특히 대륙백제뿐만 아니라
    고구려, 고조선, 발해사가 한국사와 관련이 없다는 사람들도 자주 보이는데
    이들이 주로 환단고기 자체를 혐오하더군요.

    진실이 무엇이인지 현재의 우리는 확인하기 어려운 게 많습니다.

    한국사는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고,
    한국인들은 역사에 관심도 없고,

    박정희 이후로 한국은 신라사(=경상도)에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북한과 대륙은 찾아가기도 어렵죠.

    그나마 남은 자료는 중국사들을 참고로 하는 것인데
    중국사들조차도 서로 엇갈려있는데다가

    중국사의 기본은
    첫째, 중국에 영광스런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런 일은 감추고(爲國諱恥)
    둘째,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리고(尊華攘夷)
    셋째,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祥內略外)라는

    춘추필법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죠.

    환단고기에 대해선
    이덕일, 이희근 두 사학자들이 쓴 책의 일부 내용이 블로그에 있더군요.
    많이들 읽어보셨을 테지만...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9eQE&articleno=17949569

    [환단고기]는 후세의 위작인가

    [《환단고기》라는 경계]

    한국 고대사 분야는 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웬만한 역사 전공자 뺨치는 수준에 도달해 있는 일단의 연구자들이 있다.
    역사 전공자들이 이들을 ‘재야 사학자’라고 지칭하며 자신들과 차별화하자,
    이들은 학계에 있는 역사 전공 교수들을 ‘강단 사학자’라고 맞서고 있다.
    유독 고대사 분야에 이런 연구자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이 분야의 사료가 그만큼 적은 것이 일차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한국 고대사를 보는 시각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재야 사학자로 불리는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사의 시기를 되도록 멀리 잡고
    그 강역을 넓게 설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연구 경향이 사료와 유물을 치밀하게 고증하려는
    역사 전공자들과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이 양 세력의 견해가 맞서고 있는 사료의 하나가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이다.
    이 책은 역사 전공자는 거의 예외 없이 후세의 위작이라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데 비해,
    이른바 재야의 연구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로 《환단고기》는 역사 전공자가 무시하든 말든
    한국사 관계 책들 가운데 스테디셀러의 하나이며
    고대사 관련 책 중에서는 부동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우리의 고대사를 찬란하게 기술해 놓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는데,
    그 기본 내용은 우리 민족이 고대 환웅(桓雄)의 신시(神市) 시대에는
    국력과 문화가 중국을 능가하였으며, 단군왕검시대에는 중국 동북의
    대부분 지역과 한반도에 걸치는 방대한 영역을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지금껏 학교에서 배워온 내용과는 너무 다른 것이어서
    기존 학계에서는 이 책을 조작된 책이라는 뜻의 위서(僞書)로 규정하며 무시해 왔다.
    반면 상당수의 재야 사학자들은 이 책의 내용을 근거 있는 것으로 믿으면서,
    이런 영광스런 고대사를 부인하는 기존 학계와 국정교과서를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라고 공격하였다.

    과연 《환단고기》는 위서인가? 아니면 그 내용을 부인하는
    기존 학계가 식민주의 사관의 잔재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일본에서 역수입된 수수께끼 같은 우리 고대사 책]

    《환단고기》는 서문에 의하면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대종교도(大倧敎道)
    계연수(桂宴壽)가 1911년 《삼성기(三聖記)》상․하, 《단군세기(檀君世記)》
    《북부여기(北夫餘記)》 《태백일사(太白逸史)》라는 각기 다른 네 종류의
    책을 묶어 하나로 만든 다음, 해학 이기(李沂)의 감수를 받아
    묘향산 단굴암에서 필사한 후 인쇄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편저자인 계연수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에 사망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이때 계연수는 한 간지(干支) 후인 다음 경신년(1980)에 발표하라고
    제자 이유립(李裕笠: 1907~1986)에게 유언했다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환단고기》는 1979년에 수십 부가 영인되었다.
    이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鹿島昇)가 이 영인본을 일본으로 가져가서
    1982년에 일역(日譯)과 원문을 함께 실어 출판했는데,
    이 책이 다시 국내에 역수입되면서 커다란 반향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전하는 《환단고기》는 1982년판 발문에 의하면,
    이유립(李裕笠)의 부탁에 따라, 1949년 오형기(吳炯基)가 강화도 마리산에서
    정서(正書)한 것을 가지마가 출판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처럼 국내에서 쓴 책이 일본에서 먼저 출판된 후 다시 국내로
    역수입되어 반향을 일으킨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출판 경로의 이례성보다 《환단고기》에 담긴 내용인데
    이 책은 현재 학계에서는 위서로 규정하여 많은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의 상당 부분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내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인 감이 없지 않다.
    고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들이나 옛날에는
    알 수 없던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는 청나라 시조 전설과 관련하여
    청나라 때에야 사용된 ‘영고탑(寧古塔)’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음을 들어 후세의 위작이라고 단정 짓는 식이다.
    이런 예는 적지 않은데 연개소문의 조부의
    이름인 ‘자유(子游)’를 적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자유’가 연개소문의 조부라는 사실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 묘비인 ‘천남생묘지(泉男生墓地)’가 발견된 이후에 알려진 사실인데
    《환단고기》에 이런 내용이 실린 것은 후세의 위작임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 각혼, 생혼의 성삼품설(聖三品說)이란 용어는
    명나라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기독교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한 《천주실의》에서 사용한 것인데
    《환단고기》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것 등이 지적되고 있다.

    사실 《환단고기》는 20세기 이후에야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들을 때때로
    사용하고 있는데 <단군세기>에서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문화는 서구의 ‘culture’라는 개념이 20세기 초 일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것으로서 고대에는 사용하지 않았던 용어이며,
    ‘nation’에 해당하는 ‘국가(國家)’라는 용어와,
    ‘인류(人類)’ ‘전세계(全世界)’ ‘세계만방(世界萬邦)’
    ‘남녀평권(男女平權)’ ‘부권(父權)’ 등의 용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환단고기》에서는 1915년에 출판된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通史)》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생각되는
    “나라가 형(形)이라면 역사는 혼(魂)이다.
    형(形)이 혼(魂)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점들이 《환단고기》를 후세의 위작으로 비판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위작과 가필은 같은 것인가?]

    그러나 후세의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환단고기》의 내용 전부를 후세의 위작(僞作)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이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후세에 가필(加筆)되었다는
    ‘한정적’ 증거는 될지언정 이 책의 모든 내용이 후세에 창작되었다는
    ‘보편적’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서는
    그 내용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환단고기》의 각 권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삼성기>는 원래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것과 원동중(元董仲)이 지은
    두 종류가 있었다고 하는데 계연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은 안함로의 저작이었다.
    이 가운데 안함로 저작의 책을 <삼성기전(三聖記全)> 상편,
    태천의 진사 백관묵(白寬黙)에게 얻어 원동중이 저술한 것을
    하편으로 엮어 <삼성기전>을 구성한 것이다.
    삼성(三聖)이란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을 말하는데
    <삼성기>는 《세조실록》3년(1457) 5월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1457년 이전에 작성된 책이거나 이 책을 보고 지은 책이란 답이 나온다.

    <단군세기>도 고려말 이암(李嵒)이 공민왕 12년(1363)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에는 47대 2096년에 이르는 단군조선의 임금 이름과 재위기간 및 치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북부여기>는 이암과 같은 시대를 산 법장(笵樟)이 지은 것으로,
    해모수부터 고주몽까지의 북부여 역사를 다룬 것인데,
    여기에는 동부여의 역사를 쓴 <가섭원부여기(迦葉原夫餘杞)>가 붙어 있다.

    <태백일사>는 이맥(李陌: 조선 단종~중종)이 지은 것으로,
    이 책은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 <환국본기(桓國本紀)> <신시본기(神市本紀)> <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
    <대진국본기(大震椈本紀)>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로 구성되어 있다.
    <삼신오제본기>는 주로 우주 생성, <환국본기>는 환인이 다스렸다는 환국의 역사,
    <신시본기>는 환웅이 다스렸다는 신시시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삼한관경본기>는 진한(진조선), 마한(막조선),
    번한(번조선) 가운데 마한과 번한의 역사가 실려 있다.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대진국본기>는 발해,
    <고려국본기>는 고려의 역사를 다룬 것이다.
    <소도경전본훈>은 단군 신앙과 관련된 경전, 교리를 다루고 있다.

    <태백일사>는 고기류(古記類)를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이중에는 세조가 8도 관찰사에 명하여 거두어들이게 한 20여 종의
    비기(秘記)․참서(讖書) 중 <표훈천사(表訓天詞)> <대변경(大辨經)>
    <조대기(朝代記)> <삼성밀기(三聖密記)> 등이 들어 있는데,
    이는 《환단고기》가 조선 초기까지 전했던 여러 서적들을
    참고한 책이라는 점과 선교(仙敎) 계통의 서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성립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이 선교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데
    선교는 최치원이 ‘현묘지도(玄妙之道)’라고 한 풍류도(風流徒)의 계승이라는 할 만하다.
    최치원은 풍류도가 유불도(儒佛道)의 3교와 결합하여 작용하였다고 할 정도로 유불도보다
    상위에 둔 우리 민족 고유의 사상이다.
    즉 외래 사상인 유교, 불교, 도교보다 먼저 존재했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사상인 것이다.

    선교는 유고 및 불교가 우리 역사의 주류 사상으로 등장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는데, 고려시대에는 도교와 결합하여
    새로운 역사인식 체계를 수립하기도 한다.
    이는 기존의 유교적 역사 인식에 대한 불만과 침체된 민족사에
    동력을 불러 넣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는데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역사책이 《신지비사(神誌柲詞)》로서,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삼국유사》와 《고려사》등에 단편적으로 인용된 것으로 미루어
    단군조선을 다룬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신비지사》나 세조가 수압령(收押令)을 내린 20여 종의 책이름을 보면
    도참서(圖讖書)적인 색채가 강하게 풍기는데 단순한 예언서라기보다는
    우리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사대주의에 대한 배척의식이
    그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또 다른 문제서 《규원사화》]

    조선시대에도 이 선교 계열에서는 역사서를 저술하는데,
    주목해야 할 책은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숙종 원년(1675)에 지었다는 《규원사화(揆園史話)》이다.
    이 책도 사학계에서는 당시 사용하지 않았던 ‘문화의 계발’이나
    ‘한글․한자 병용론’ 등의 용어와 사상이 기록되어 있어
    20세기에 저술된 것으로 비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단순히 후세의 창작품으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규원사화》는 자신의 저술 동기를 밝힌 <서문(序文)>과 내용으로는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와 저자의 인생관,
    역사․문화의식, 그리고 조선이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한 방략을
    서술한 <만설(漫說)>등 다섯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 책에 인용된 서적들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조대기(朝坮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진역유기(震域遺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사문록(四聞錄)> 등
    고기류와 《삼국사기》 《고려사》 《산해경(山海經)》 《사기》등 40여 종류에 이른다.
    이런 책들은 세조가 수압을 명령한 책 이름에 나오거나 17세기에 저술된
    <청학집(靑鶴集)>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숙종 때까지는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조판기>는 환웅이 천지를 창조하여 내려오는 과정을 그린 신화이지만
    <태시기>와 <단군기>는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고증한 역사적 사실을 저술하고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단군기> 가운데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인용하여
    “발해 왕자 태광현(太光顯)을 비롯하여 고려에 망명한 자가 많았는데,
    그중에도 공후(公侯)․경상(卿相)과 강개읍혈(慷慨泣血)한 선비가 많았다”는 기사인데,
    이는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에 망명한 발해 유민이 상당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기록이다.

    선교의 역사서는 한말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형성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나라의 운명이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던 때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현재의 잣대로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 민족의 유구성과 문화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선교의 역사서들은
    유교와 불교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민족의 장래에 심각한 우려를 반영하였는데,
    이러한 선교의 국사 인식은 1909년 나철(羅喆)이 창설한 대종교로 계승된다.

    [조직적인 한국사 서술 운동을 벌였던 대종교와 《환단고기》]

    사실상 1910년대에 한국사 서술을 주도한 것은
    만주와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대종교였다.
    대종교는 우리 고유 종교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민족을 보존하고 독립시키려던 종교 단체였는데,
    역사 교육을 통한 애국심의 함양과 고취가 가장 효과적인
    독립 운동의 한 방편이라고 믿고 많은 역사서를 서술했다.

    대종교도 계연수가 저술한 《환단고기》도
    이런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편찬된 책이다.
    《환단고기》는 앞서 말했듯이 서문에서 1911년에
    《삼성기》등 네 권의 책을 하나로 묶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환단고기》에 대한 그간 학계의 비판은 과도한 것이란 비난을 받을 소지가 많다.
    20세기에 편집했음을 서문에서 스스로 밝힌 책에 ‘20세기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위서라고 비판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1910년대 이후 국사서 저술을 주도한 이상룡(李相龍), 박은식(朴殷植), 김교헌(金敎獻) 등이
    모두 대종교도였다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후대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환단고기》를 후세에 조작된 책으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룡의 《서사록(西徙錄)》과 박은식의 《동명성왕실기》가
    1911년에 저술되었다고 해서 후세의 ‘위작’이라고 비판받지는 않는 것이 정당하다면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받은 비판은 부당한 것이다.
    이상룡, 박은식, 신채호가 그랬던 것처럼 계연수도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시킬 목적의 하나로
    선교 계열의 고서류를 참고해 《환단고기》를 저술한 것이다.

    계연수는 당시까지 전해 내려온 고서류 가운데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등을 수집하여 《환단고기》를 편찬했을 것이다.
    이런 고서류들이 그때까지 완전한 상태로 전해졌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예를 들어 1363년에 편찬된 <단군세기>는 <환단고기>가 편집되는 1911년까지
    5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전란 등의 국난을 겪으면서 불탔거나 없어져
    일부만 전해진 것을 여러 구전 등을 참고하여 재편집 되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11년 당시에 사용했던 용어들이 첨삭된 것이지
    계연수가 의도적으로 소설을 쓴 것은 아니다.

    또한 계연수는 이상룡이나 박은식, 김교헌이 그랬던 것처럼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이상룡, 김교헌 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관에 따라
    고서류를 참고하여 고대사를 서술한 것처럼 하면 되지,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교헌 등이 지은 고대사는 《환단고기》와 그 기본 논지가 일치하고
    있음에도 위서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간
    《환단고기》에 가해진 비난이 과도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환단고기》의 신봉, 비판 여부가 마치 전문 연구가와
    재야 사학자를 가르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듯한 현재의 폐쇄적․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학계의 연구 풍토를 개방적인 것으로 바꾸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34 에네스 카야 아내의 글을 읽은뒤 한 피해자가 올린 글입니다 [새창] 2014-12-11 15:01:05 5/9 삭제
    위에 공인 얘기가 나와서
    댓글을 달자면..

    공인이라 함은 공적인 일을 하는 걸 뜻하는데..

    연예인, 스포츠 선수 등
    흔히 말하는 유명인의 생활, 일 등은

    공적인 일과 무관합니다.

    흔히 이들에게 공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미디어에 노출이 많이 되어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를 들고는 합니다.

    ...

    이게 공인의 이유라면

    유명하지 않은 배우, 가수, 코미디언, 스포츠 선수 등은
    공인일까요? 아닐까요?

    그리고 연예인, 선수가 아니더라도
    유명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럼 그들은 공인일까요? 아닐까요?

    ..

    유명세로 공인을 규정짓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으며

    이게 공인이 된다면
    유명세의 영향이 어디까지인지도 불분명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 연예인이 아무리 영향을 끼친다고 하더라도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남미 등의 연예인만할까요?

    미국의 연예인, 유명인들은
    한국보다 더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데

    이 사람들은 공인으로 부르던가요??

    ...

    한국은 참 이상하게도

    한국사회, 정치를 책임지는 진짜 공인들은
    부정부패와 거짓말, 성희롱, 망언, 투기와 탈세, 부정입학, 이중국적, 논문표절, 병역특혜, 위장전입, 수많은 공약을 뒤집고, 친일매국노적인 행위 등을 해도

    대수롭지 않은 분위기이며,

    연예인, 선수, 유명인에게는 공인의 잣대를 대고 있습니다.

    ...

    저 저 사건이 무엇이든 간에
    과연 현재 정치,사회,경제의 주요 현안보다 중요성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사건이든
    결론이 나온 뒤에 비난해도 늦지 않습니다
    33 너무너무 화가나요 [새창] 2014-10-29 00:31:39 1/5 삭제
    수선// 외국을 비교하시는데

    모두 역사청산을 했던 나라들인데
    한국은 했습니까? 부터 묻고 싶군요.

    지구상 유일무이한 친일 매국노를 반인반신으로 숭배하고, 찬양하는 나라...
    그 딸은 대통령이 된 나라...

    그런데 이럴 때만
    외국과 비교하나요??

    위에 썼다시피
    스포츠 경기 때마다
    매번 기미가요 나오고,

    반일감정이 심한 중국조차
    쑨양이 기미가요가 거북하다고 하자
    중국에서 쑨양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평상시엔 역사에 무관심하더니
    이럴 때만 애국자인양..
    우루루 달려들고,
    금방 식어버리지요.
    32 너무너무 화가나요 [새창] 2014-10-29 00:16:53 1/9 삭제
    쨘쨘짜라라//

    어휴.. 왜 자꾸 왜곡하는지..
    밑에 오유에서 다른 분이 하신 유투브 영상입니다.

    http://youtu.be/9ExDA3TVssQ

    http://youtu.be/1FMHpjrNK30

    스킵되지 않았고,
    모두 그냥 나옵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국가(國歌) 나올 땐
    그 나라가 국가(國歌)가 끝날 때까지 침묵합니다.

    역대 모든 스포츠 경기가 다 그렇게 해왔고,
    아시안 게임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원래 기미가요 자체가 학살을 부추기거나 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기미가요의 원곡은 일본의 일반 대중들이 부른 것이고,
    이걸 헤이안 시대 때
    <고금화가집>에 나온 단본입니다.

    가사의 뜻은 천황이 아니라
    "당신의 세상이 천대까지 팔천대까지,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인데

    일본극우가 당신을 천황으로 해석하게 해서
    현재 천황으로 연상하게 되버린 겁니다.

    그리고 음악은 대한제국 시절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었던
    프란츠 에케르트란 독일인으로
    고종 황제의 부탁을 받고,
    대한제국의 애국가를 만들어서
    태극 3등급 훈장을 받았습니다.

    즉 음악적으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그걸 제국주의 시절에 이용한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가 큰 문제가 되었다면
    역사청산을 했던 중국, 대만, 북한, 베트남 등
    일제에 피해를 당하면서 반일감정이 있는 나라들 특히 중국이
    이것에 대해 언급을 했어야 했는데..

    아무런 말도 없지요.
    그냥 국가(國歌)로 여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기미가요를 두둔하는 건 아닙니다)

    그리고 비정상회담은
    일제시절 두둔하는 프로도 아니고,

    매회 게스트가 나오고,
    가끔씩 외국인 패널이 빠질 때면
    대체자로 다른 외국인 패널이 오는데

    그때마다 그 나라의 국가(國歌)가 방송됐습니다.

    한국인 게스트 나오면
    애국가도 나옵니다.

    모두 그 나라의 상징이고, 대표자라고 여겨서 나온 겁니다.
    31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10-28 23:52:52 2/4 삭제
    yhj0326ak//처음 나온 건지 관심이 없다뇨?

    지금 비난의 대부분은
    방송사에서 최초로 나왔다입니다..

    그런데 역대 스포츠 경기에 매번 그냥 나왔습니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연상하게 하고 비난이 된다면
    하켄크로이츠나 욱일기처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될 겁니다.

    지금부터 깨달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역사 청산을 했던
    중국, 북한, 대만,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모두
    그것에 일일이 지적한 건 보지 못했습니다.

    쑨양이 일본국가에대해 비난했을 때
    쑨양의 태도를 비판한 건 중국언론이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기미가요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정말 아무것도
    시도조차 하지 않은 나라이고,

    매국노가 지배하는 세계 유일 무이한 나라이며,
    애국가조차 매국노들이 만든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나라입니다.

    뭐가 부산물...큰 거 작은 거...얘기를 하시는 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순서와 비중은 바뀌었고,
    대응도 이상합니다.
    30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10-28 23:39:30 3/4 삭제
    먼상//지금부터 청산이요?

    다른 나라에서 살다 오셨나요??

    현재도 축소되고, 식민사학에 물든 교과서임에도

    뉴라이트가 지배해서
    일본 후쇼사보다 왜곡이 심한 교학사를
    국정교과서로 만드려는 상황인데?!!

    김대중, 노무현 때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을 만드는 것도
    조중동과 한나라당, 여론에 반대해서
    누더기가 되어서 겨우겨우 완성된 겁니다

    역사청산이 아니라 명단만 간추린 데도
    엄청나게 힘들었는데.. 뭘 한다구요??

    도대체
    무슨 청산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앞뒤가 안맞는 건 님 아닙니까?
    일본을 어쩌고 하기 전에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일본부터 비난하는 게 순서가 맞는 겁니까??

    .

    yhj0326ak//
    순서와 비중을 언급한 것이지요.

    큰 것은 그냥 침묵하거나
    칭송해왔으면서
    작은 것들만 열심히 비난하는 게
    과연 제대로 된 사고인지 모르겠습니다.

    평상시엔 독립운동이나 후손들엔 개무시하고 살다가
    이런 문제가 나올 때면
    독립운동 운운하는 것도
    그렇게 좋은 태도도 아닐 겁니다.

    그냥 부산물로 썩은 것이라면
    왜 그동안의 기미가요는 그냥 침묵으로 일관해왔는지를 물은 겁니다.

    위에 썼다시피 국제경기 땐
    국제경기니까 대표성이니 상관없다고 넘아가면서

    예능에서 그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나온 것은
    매국노적인 행위니 사과하고, 폐지하라?

    사실 님이 언급하신 독립운동하시는 분들이
    과연 예능과 스포츠에서 나온 기미가요에 더 화를 내실지
    아니면

    매국노들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
    더 화를 내실지 누가봐도 답은 나오는 겁니다.
    29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10-28 23:24:04 1/13 삭제
    만상// TV 방송 한번도 안보셨나요??

    방송사에 그냥 나옵니다.

    밑에 다른 분이 하신 유투브 방송인데

    http://youtu.be/9ExDA3TVssQ

    http://youtu.be/1FMHpjrNK30

    둘다 기미가요 그대로 나오죠.
    뭐가 최초인가요??

    스포츠 할 땐
    매번 그냥 나왔는데.

    기미가요가 그렇게 민감하고 때려죽일 것이었으면
    일장 전범기처럼 국가적으로 대응을 해야죠.

    그런데 한일 축구 친선전, 올리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모두 기미가요가 송출됩니다.

    방송사에서 스킵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고 있습니다.

    밑에 님이 안나온다고 하셨죠?
    모두 나옵니다

    아시안게임 한일전 때
    기미가요 나왔습니다.

    또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순서와 비중의 문제입니다.

    남을 뭐라고 하려거든
    자기부터 비판해야 하는 겁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남부터 비난하고, 비판하는 건 순서가 잘못된 겁니다.

    한국인들은 흔히들
    일본정부에게 독일처럼 역사청산하라고 하고 있지만..

    정박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독일, 중국, 대만, 북한...
    모두 매국노를 처단했기 때문에

    그 비판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28 너무너무 화가나요 [새창] 2014-10-28 23:11:30 9/19 삭제
    그럼 스포츠 경기 때
    매번 기미가요가 나오는 건

    왜 가만히 있나요?
    방송사마다 다 스킵하고,
    귀를 막고 있어야지.

    저 방송이 일베처럼 왜곡하거나
    일본을 찬양한 것이었다면
    페지해야 마땅하지만..

    11화 이집트인부터 12화 이탈리아인, 13화 미국인 일일 패널 올 때마다
    그 나라의 노래들을 틀어줬고,

    매회 한국인 게스트 나올 때마다
    애국가 틀어줬습니다.

    평화스러운 대한민국이 독립을 위해 싸운 분들 덕이라고 했습니까??

    이승만부터 친일매국노가 득실거리며,
    박정희와 그의 딸이 지도가 되어서 절대적 불변의 지지율을 달리고 있고...

    그분들 후손들 최하층민으로 폐지를 줍는 상황에서
    평상시엔 개무시해왔으면서

    이럴 때만 애국자 타령입니까???
    27 원 게시글이 삭제되었습니다. [새창] 2014-10-28 23:04:11 3/16 삭제
    yhj0326ak//

    안일한 역사의식하는 게 웃기는 게
    밑에도 썼지만..

    한국은 단한번도 역사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이고,
    친일파와 손잡은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로..

    혈서를 쓴 박정희는 국가경제를 살렸다면서 칭송하고
    (실제로는 세계 4위의 빚더미로 쑥대밭)

    그의 딸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글마다 댓글 반대를 누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데
    무슨 역사의식.. 타령하나요?

    기미가요 틀어준 것과
    역사청산 못하고, 친일 매국노들이 정치인이 된 것과
    어느 것이 더 비중이 있나요?

    위안부 할머니가 어느 것을 더 고통스럽게 생각할까요?
    예능에서 기미가요 나온 거?

    아니면 친일매국노들이 만든 애국가를 부르고,
    친일 매국노들이 역사청산 못하게 방해하면서
    지금까지 역사를 왜곡하는 것??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될 것이었으면
    역대 스포츠 경기에는 왜 모두 기미가요가 나왔죠?

    그건 스포츠라서 괜찮고..
    예능은 문제가 되나요?

    그 예능이 일제를 찬양하고, 일본을 칭송하고, 역사를 왜곡하던 것이었습니까?

    폐지 운운하는 것도 이상한 것이..
    각국 대표로 패널들에 대해

    이집트인,미국인,이라크인,독일인 등등
    모두 틀어줬습니다.

    이유는 각국의 대표단이라는 상징성 때문이죠.

    고문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예를 드시는데..

    고문과 죽음..생각하면
    현재 정치, 경제, 사회가 친일파가 지배하는 건엔
    왜 침묵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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