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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싫다 너무
[새창]
2024-10-24 11: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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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평화나 전쟁을 떠나서
통일이란 거 자체가 될지도 의문이지만
그나마 평화롭다면 흔히 말하는 숙청이란 건 찾아보기 힘들 테고..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그런 건 없을 겁니다
친일파들 후손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전두환은 천수를 누렸고, 독재자에 부역했던 이들은 정치, 경제, 사회에 주요한 위치에 자리잡았습니다..
부정부패 혐의로 갔던 전직 대통령들은 금방 풀려났고
재벌들은 엄청난 범죄를 저질러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며..
법조인은 기소되기 힘든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누가 누구를???
56
미국인들의 반응 때문에 충격받은 한국인들이 많았다는 사건
[새창]
2024-09-27 16: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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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잉크//님이 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 때린 것이 정당한 것처럼 쓰셨는데
REDRRR빨간달걀님이 지적하신 위에 자료에도 올라와있지만
윌 스미스가 촬영장에서
마고 로비 딥페이크 포르노를 동료들과 보면서 웃었습니다
본인 가족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되고.. 다른 가족은 되는 겁니까?
아니면 TV 방송같은 공적인 자리는 아니라서
그건 괜찮은 건가요?
그 기준이 가족입니까? 공적인 자리입니까?
그리고 나라마다 기준,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견해는 다를 수도 있다라고 생각은 듭니다만
제가 언급한 것은
커뮤니티마다 처음에는 압도적으로 윌 스미스를 두둔하는 글들이 많았는데
현재는 그 반대가 된 글이 많았다는 겁니다
갑자기 한국 문화가 바뀐 것도 아닐 텐데...
55
미국인들의 반응 때문에 충격받은 한국인들이 많았다는 사건
[새창]
2024-09-27 16:2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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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잉크//그럼 웃지나 말던지...
웃다가 갑자기 정색해서 때린다?
본인도 유머라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눈치보더니 앞으로 나가서 폭행
저런 상황에서 기분이 나쁘면
뒤에서 언질을 하던가
그것도 아니면 경고를 하면 되지..
사람을 때린다?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서양권에선 인종, 종교, 성별, 외모 등으로
언급하는 게 흔한데다가...
아무리 공적인 자리에서 가족 얘기했어도 (심각하게 아픈 환자도 아닌데다가.. 한국에도 머리 얘기는 흔한데머리 얘기가 흔한데..)
폭행이 정당화되는 나라, 문화권이 존재하는지나 묻고 싶군요
그리고 한국인들도 겉으로만 점잖은 척할뿐...
조선시대와는 달리 현재는 온갖 욕들이 많고
일반인들도 지나갈 때마다 욕설이 기본이고..
인터넷과 게임에선 혐오, 차별, 가족에 대한 패드립이 난무하는데...
그건 공적인 자리가 아니니까
괜찮은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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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의 반응 때문에 충격받은 한국인들이 많았다는 사건
[새창]
2024-09-27 11: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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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윌스미스도 웃었었죠..
그러더니 아내 눈치보더니 갑자기 폭행...
한국인들은 이것을 아픈 아내를 비하하는 게
선을 넘느니...
폭행은 정당했다는 글들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알고보니 큰 병이 아니라 탈모증 (그런데 심각한 병이 아니란 게 드러났어도..... 탈모증은 병이 아니면서 때리는 게 당연하다는 글들이...)
그런데 압도적으로 폭행을 지지하던 한국인들이
어느순간 윌 스미스가 더 나쁘다...라고 여론이 바뀌더니
이젠 커뮤니티마다 윌 스미스 욕들이....
53
한국어와 드라비다어 헉 이렇게 같을수가 ??
[새창]
2015-06-30 07: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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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님께서
환단고기 언급 자체를 금하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여기서도 환빠타령하면서 비하하기 바쁘니... 참 대단들 합니다.
인도 타밀어와 한국어와 유사하다는 건
현지인들과 인도에 있는 한국인들이 줄곧 해오던 말입니다.
언론에서도 가끔씩 소개되곤 했었고, 다큐에서도 몇 번 나왔었습니다.
한국어의 직계조상인지 누군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늘 이동을 해왔고,
그들의 문화, 말, 관습 등을 가져오고, 가져갔을 겁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간 것처럼...
한국어의 직계조상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인구의 이동경로를 보듯이 여러집단들이 여러 언어를 가져왔고,
그 언어들이 서로 섞여서 비슷한 언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언어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국의 선조들은
인도, 알타이, 중국북동부 등의 여러 사람들의 말이 섞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ctjpark&logNo=220251786754
남인도 동해안및 스리랑카 북부에 살고 있는 타밀인들이 동남아시아와 중국남부를 휘젓고 다니면서 마침내 한국 및 일본과도 교류했다는 증거는 한국어와 일본어 형성에 스며든 타밀어의 영향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조선 고종의 외교고문이자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는 1905년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어의 비교 문법’이라는 저서에서 “두 언어가 유사한 것은 한반도에 정착한 선주민이 최소한 일부 지역이라도 남방에서부터 이주해왔음을 입증해주는 누적된 증거의 고리” 라고 주장했다.
강길운(姜吉云) 전 수원대교수도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1990년)에서 드라비다어와 우리말이 무려 1천여개 어휘가 같다면서 드라비다족이 한반도에 이주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원로 언어학자 오노 수수무(大野晉, 86세) 학습원대학 교수는 ‘일본어와 타밀어’(2000년) ‘야요이 문명과 남인도’(2004년)등 일련의 역작을 통해 타밀인들이 기원전 수세기에 이미 일본열도에 집단 거주, 타밀어와 유사한 일본어 단어가 5백개가 넘는다고 강조했다.
필자는 이를 확인, 추적하기위해 3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토론토 거주 타밀인들가운데 교수, 교사, 힌두교 성직자, 타밀인 협회 간부, 여성단체 관계자등 전문가 수십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언어와 습관등에서 우리와 유사한 것이 적지않음을 발견했다.
첫째, 현대 타밀어에서 우리말과 똑같은 말이 속속 포착되고 있다
1."바나깜(반갑다)" "아빠(아빠), 암마(엄마), 안니(언니)" 등 가족관계 명칭들
2. "빨(이빨)" ," 무크(코)", "깐(눈깔)", "코풀(배꼽)", "궁디(궁덩이의 경상도 사투리)" "찌찌 (자지)" "불(불알)" "보지( 고대 타밀어로 '보지') "등 신체기관의 명칭들
3."난(나), 니(니)" " 난, 우람(난, 우람하다)""난, 닝갈비다 우람(난, 니보다 우람하다)""난, 비루뿜(난, 빌다)" " 난,서울꾸 완담(난, 서울로 왔다)" )"
"니, 인거 바!(니, 이거 봐!)""니, 인거 와!(니, 이리 와!)" " 못땀(몽땅)" "니, 못땀 다!(니, 몽땅 다오!)"등 상호 호칭과 소통의 대화들
둘째, 동물과 식물이름및 농경사회의 용어들이 우리말과 고대 타밀어가 너무나 똑같다.
우리말의 비단, 삼, 길쌈, 벼, 풀 등은 고대 타밀어와 그 발음과 뜻이 완전히 일치한다.
세째, 농경 사회에서 발생한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의 형태와 명칭이 타밀의 그것과 일치한다. 새해 첫 날 우리들이 즐기는 윷놀이, 제기놀이(또는 제기차기), 쥐불놀이, 팽이놀이 등 민속놀이도 당시 타밀어로 각각 '윷노리(Yuddh, Yuth Nori)', '제기노리(Jegi Nori)', '추불노리(Chupul Nori)' ' 팡이노리(Pamgi Nori)'로 불리며 그 형태도 완전히 똑같다. '놀이'는 고대 타밀어로 '노리(Nori), 또는 노루(Noru)'로 불렸으며, 현재 타밀어로는 '빌햐야들(Vilaiyattu)'로 불리고 있다.
우리 전통에 어린이가 밤에 잠자다 오줌을 싸면 그 다음날 아침 키를 머리에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소금을 얻어 오는 관습이 있었다. 타밀도 똑같은 관습이 있다. 그 키는 고대 타밀어로 Ki 또는 Chi라고 했으며, 소금도 옛날 타밀어로 Sogum('소금', 또는 '소흠'으로 발음)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현대 타밀어에선 키(winnow)는 "sulagu, muram, thada" 등으로, 소금(salt)은 "uppu"라고 불린다.
네째, 타밀인들이 수천년 동안 믿어온 힌두교와 관련된 것들이 우리 역사서에 등장하는 것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중략...
마지막으로, 타밀인들이 한반도까지 도달했던 또 다른 증거는 벼농사, 난생신화,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巨石文化) 등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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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8 01:4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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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선 신화취급하지만 중국은 고구려, 고조선에 이어
단군신화도 노리고 있습니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810929
<기획탐구> 중국, 단군신화까지 노린다
관변학자 "황제(黃帝)집단의 곰토템서 기원" 주장
"모든 동북아 민족은 황제족의 후예"식 논리 일관
단군신화 등 참조 잃어버린 여신신화 복원도 주장
국내학계 "곰문화는 고아시아족 것..황제와 무관"
동북아지역 여러 민족의 전래 곰토템신화는 중국인들의 공동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黃帝)집단에서 기원했으며 단군신화의 뿌리도 황제집단의 곰토템이라는 주장이 중국 관변 연구기관의 한 신화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장본인은 중국 국무원 산하의 종합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 비교문학연구중심 주임 겸 문학연구소 교수인 예수셴(葉舒憲.53). 중국신화학회 회장, 중국문학.인류학연구회 부회장, 중국비교문학학회 상무이사이기도 하다.
그의 주장은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신화를 "한(漢)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문화의 반응"으로 폄하한 동북공정, 신화ㆍ전설시대를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중화고대문명탐원공정, 고대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요하(遼河) 일대를 황제의 판도로 못박으려는 요하(遼河)문명론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은 현재 비교문학연구소를 통해 소수민족의 신화 및 구비문학 연구를 중점과제로 삼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고고연구소와 역사연구소,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 등을 통해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한 각종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 "황제집단 곰토템이 단군신화의 뿌리" = 예수셴은 최근 출판한 저서 '곰토템(熊圖騰)-중화조선신화탐원(中華祖先神話探源)'에서 전통적인 문자훈고, 출토된 갑골문.금석문, 여러 종족의 민속은 물론 정식 고고발굴 및 민간의 구비전승 등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며 곰토템의 황제집단 기원설을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곰토템은 유웅씨(有熊氏)라는 별명을 가졌던 황제집단에서 시작돼 우순(虞舜) 시대와 하(夏)나라 시대로 이어졌고, 곰을 조상으로 삼는 신화는 전욱(顫頊)을 거쳐 진(秦)나라, 조(趙)나라, 초(楚)나라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승됐다.
...중략...
◇ "단군신화는 황제족과 한민족의 연결고리" = 예수셴은 일부 학자들의 '중원(中原) 퉁구스인 가설'과 '홍산(紅山)문화 황제족문화 가설'을 동원, 이들 가설이 단군신화의 발생 배경을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즉, 황제족을 비롯한 중화문화의 주류민족과 상고시대에 중원 및 북방에서 활동했던 퉁구스인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 '동일한 주체'였고, 따라서 황제족과 곰토템의 관계, 단군신화와 곰의 관계를 동일한 퉁구스인들의 문화원류 범위 내에 포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곰토템 신앙과 신화의 기술 내용은 황제-화하(華夏)민족을 조선-한민족의 상고시대 문화기억과 연결시켜 주는 공동의 끈"이며 "이는 의외일지 모르지만 당연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중략...
◇ 단군신화로 황제족 곰토템신화 '복원'? = 중국 고고학자들은 당초 홍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동물 모양의 옥제품이 돼지를 닮은 것으로 보아 '옥저룡(玉猪龍)'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그 특징이 곰에 더 가깝다며 '옥웅룡'으로 바꾸고 웅룡이 용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예수셴은 이 옥웅룡을 또 하나의 증거사례로 들어, 중국의 고문헌에는 황제족의 곰토템과 관련된 기록이 없지만 그 실마리는 남아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의 신화를 참조하면 황제족 곰토템신화를 복원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중략...
◇ 중국 학계의 곰토템 논란 = 예수셴은 지난해 발표한 한 논문에서 염제(炎帝)와 황제를 공동조상으로 받들고 용을 으뜸 토템으로 삼는다 하여 '염황자손', '용의 후계자(龍的傳人)'로 자칭하는 중국인들의 중요한 일부분은 '곰의 후계자(熊的傳人)'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하량유적을 포함한 북방에서의 고고학 발견을 통해 용의 원형이 돼지, 사슴, 곰 등 실제 동물들인 것으로 확인됐다면서, 그 가운데 황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동물은 우하량 여신묘 발굴을 통해 상고시대인들의 숭배 대상이었던 것으로 드러난 곰이라고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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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8 01:3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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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붙여넣기만 해서 너무 죄송하군요.,,
특히 다른분들께..
원래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보통 링크를 걸면 늘상 돌아오는 대답이
'귀찮아서 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되버렸군요.
위에 썼다시피 중국사, 일본사도 오류가 많고,
조작도 하는 상황인데
그것으로 교차검증이니 하는 게 말이 안됩니다.
중국사 자체도 신뢰하지 못하는데
그리고 왜 환단고기에서 어느 정도 확인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환빠가 되버리는군요.
.
미효2 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현대어가 나오는 것은 위의 블로그에서 나왓듯이
현대에 편집된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국어, 국사 교과서를 보고 왜 한자로 쓰여져있으니
앞으로 국어,국사 교과서는 무조건 모두 위서..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런 용어가 있었따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설득력이 약합니다.
오히려
편집된 사서인데 왜 현대어가 나오느냐고 묻는 게 더 이상한 것이기도 합니다.
전 일본에 맞서서 민족주의를 고취시킬 목적으로 몇 안되는 사서들을
재편집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알기가 어려운데
그것이 맞는지 진위여부는 당시로선 알 수가 없었겠죠.
.
밥좀먹고 님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들어와서 그런지 칭찬과 반대가 안되네요.
예전에 다큐에서 중국 상나라(은나라)에도 단군신화가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
작시님..
한국에 있는 유물이 정확히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유물인지
명확하게 구분되는 건 얼마나 될까요?
사실 모르는 게 많습니다.
그냥 어느 지역에 있었으니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이렇게 붙입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유물과 유적이 나오기도 하는데
그냥 그 문화...에 포함되는구나..라고 넘어가죠.
그런데 가기도 힘든 중국과 북한에 유물과 유적의 확실한 것을 찾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그 드넓은 중국에서..
중국과 일본조차 왜곡된 역사가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동북공정을 외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된 독자적인 문명들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중국사를 수정하고, 한국사도 포함되게 되버린 것이죠.
50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8 00: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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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9121018/4789394
▲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의혹
한에 투항하여 후(侯)에 책봉된 사람은 모두 5명인데 3명은 수명을 다하고 죽었으나 후사가 없어 작위가 업어지고 2명은 조선(朝鮮)과 내통했다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여기서 조선(朝鮮)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漢)을 격파하고 요하 동쪽 지역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한(韓)조에 '위략에 이르기를 우거가 멸망하기 전에 조선 상 역계경(歷谿卿)이 우거에게 간했으나 우거가 말을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 辰, 番, 莫의 三朝鮮의 통칭)으로 가니 그를 따르는 자가 2천여 호나 되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진국(辰國)은 위만조선의 동쪽인 요하 동쪽에서 진조선(辰朝鮮)을 이어 받은 북부여(北夫餘)를 말하는 것이다. 그 북부여의 일파인 동명 고두막이 한에 저항하여 한을 격파하고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이상의 요동을 중심으로한 정세 기록을 본다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4군(四郡)을 설치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한사군(漢四郡)의 진상
한사군은 한이 위만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세웠다는 군현으로 중국측에서는 매우 자랑스러운 중국의 역사다. 그런데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에는 한사군(漢四郡: 樂浪郡, 玄菟郡, 眞番郡, 臨屯郡)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니 실제 한사군이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첫째 이유다.
왜냐하면 만일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면 한무제 당시의 인물이었던 사마천이 쓴 그 당시의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가장 권위 있는 사기(史記)의 기록에 누락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후한서(後漢書)는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친 시기보다 120년 후에 저작된 것으로 사기에 비하여 신빙성이 떨어지며, 무능서(茂陵書)를 쓴 사마여상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치기 10년 전인 원봉 6년(BC 117년)에 죽은 사람이니 10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한서지리지(漢書地理誌)에는 진번과 임둔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가연전(賈捐傳)에는 '무제가 갈석(碣石)을 지나 낙랑과 현도로써 군을 삼았다'고 하여 여기에도 진번군과 임둔군이 나오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아예 설치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의 요동태수에게서 재물과 병사를 얻어 그 옆에 있던 진번과 임둔 두 고을을 쳤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한무제가 위만을 정벌하기 전의 일이다.
이상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다스리기 위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을 설치하였으나, 번조선의 후예 동명 고두막이 그를 따르는 번조선의 유민들을 이끌고 한의 군사를 격파하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요하를 건너 졸본지역에 새로운 나라 졸본부여를 세운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으나 다시 요하 서쪽까지 팽창하였는데 혹시 이 때 진번군과 임둔군을 일시적으로 설치했으나 사기(史記)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되지 못하여 기록되지 않았거나, 후의 중국 사가들이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
또 일제는 이러한 애매모호한 기록들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의 대륙침략 목적에 유용하도록 한사군에 대한 역사조작을 강행하였으며 당시 조선인 사학자들이 이의 주구(走狗) 노릇을 한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확실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의 설치이며, 그 위치는 요하 서쪽 번조선-위만조선이 위치했던 왕검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지 결코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의 중북부가 될 수가 없다.
이렇게 역사기록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나라 사학계는 그들이 일조해 온 일제 식민사관하에서의 역사조작을 뒤집지 못하고 연연하고 있으니 우리 민족으로서는 더 없는 불행이요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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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00:5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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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위치와 유물 조작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평양에서 나왔다는 소위 낙랑군 유물은 죄다 일제 시대에만 나오고 전부 조작된 것이며, 소위 평양 낙랑 유물이라는 것은 일제 시대 이전이나 그 이후에는 단 하나도 나온 것이 없다는 것이 일제 조작설을 아주 잘 뒷받침해준다.
평양에는 그 낙랑군이라는 것이 존재한 사실조차 없다.
일제와 그 주구(走狗)들의 낙랑군(樂浪郡) 위치와 유물 조작 작태
●일제의 역사조작의 목적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에 걸친 서세동점(西勢東占)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서양제국주의에 굴복하여 먼저 개화(開化)의 눈을 뜬 일본은 그 스스로 서양제국주의를 본 따서 그들의 세력 확장 야욕이 대륙을 향하니 자연히 그 제1의 목표는 지리적으로 대륙에 이르는 통로가 될 한반도일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대륙 특히 한반도 침략의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역사 조작을 착수한 것이다. 역사 조작은 그 기록과 역사적 유물이 희소한 상고사에 손을 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조작한 역사가 한사군의 위치 조작과 임나 일본설이다.
그들은 '한반도 조선은 상고시대부터 자립하지 못하고 중국과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민족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며 이 시대에는 그 보호자가 일본이라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 역사 조작의 목적이었다.
평양지역과 황해도 일원에서 많이 출토된 낙랑국(樂浪國)과 대방국(帶方國)의 유물들을 그들은 중국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樂浪郡)과 한(漢)의 대방군(帶方郡) 유물로 조작하여 조선은 이미 고조선 때부터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의 역사 조작에 동원된 유물들은
① 대동강 남쪽 구두진에 있는 토성(土城),
② 평양지역에서 70여 개나 집중적으로 수집된 봉니(封泥),
③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粘제현신사비),
④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된 동종(銅鐘)
⑤ 왕간묘(王旰墓)에서 출토된 칠기(漆器)
⑥ 정백리 1호 고분에서 출토된 화폐 화천(貨泉)
⑦ 사리원 부근과 고분에서 출토된 벽돌 장무이전(張撫夷塼)
⑧ 재령군 부덕리에서 나온 좁은놋창
⑨ 옥도장, 벽돌, 칠기묶음, 막새기와
●역사조작 과정
▲ 식민사관 사학자의 조선사에 대한 관심
- 1887년에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1889년에 독일의 실증사학의 거두인 랑케(Ranke)의 제자 리스(Riess)를 주임으로 초빙하여 사학회(史學會: 회원40명)를 조직하고, 사학회잡지를 발간하였는데 이 잡지에 요시다, 하야시, 스가, 나까, 시라도리, 쓰보이, 시데하라 등이 한국 관련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 1907년에 일본의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일본 정부의 명령에 따라 「만주역사지리조사실」을 만들고 동경제대 교수 시라도리, 쓰다, 센나이, 마쓰이, 이나바, 이게우찌 등을 참여시켜 「만주지리역사연구」,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등을 간행하였는데 이 들은 하나같이 한민족의 주체적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대륙사에 부속시킴으로서 한국사의 타율성만을 강조하는 만선사(滿鮮史)를 주장하였다.'
- 1909년 동경제대 교수 도리이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에 파견하여 이들의 활동 결과「남만주조사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한사군(漢四郡) 유물 조작작업
- 한편 조선통감부는 동경공대 교수 세끼노에게 조선의 고적조사를 의뢰하여 「고구려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지역 고분 2기를 발굴하였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한대 낙랑유적 학술조사'를 끝낸 도리이의 제언에 따라 총독부는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 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고 평양지역의 고분을 2차로 발굴하여 벽돌로 쌓여진 현실(玄室)내에서 한 대(漢代) 양식의 동경(銅鏡), 칼, 창, 도기 등을 얻었는데 이것이 평양지역의 유물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유물'로 조작하는 시초 작업이었다.
- 1911. 10월 세끼노가 황해도 사리원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대방군(帶方郡)지역이라 주장하고, 1912. 4. 9 사리원 부근 고분을 발굴하였다.
- 1913. 9. 23 세끼노는 대동강변의 고분지역 중앙 강 언덕의 구두진(狗頭津) 부근에 '토성'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답사해 기와 파편을 채집하였는데 그들은 이 토성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치소(治所)라고 주장하였다.
- 1913, 9, 30 조선총독부 촉탁인 이마니시가 5회 고적조사 때 편남 용강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로써 용강이 낙랑군 소속의 점제현(粘제縣)이라고 주장하였다.
- 1915년 조선총독부는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3월에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고, 1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였으며, 1916. 7월에 「고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919. 2월에 조선총독부 명의로 「조선금석총람」을 발간하였다.'
* 봉니(封泥)와 관련된 행적
- 1920년 야마다는 봉니(封泥)에 대한 그 가치를 강조하기 시작하더니,
- 1921년 가을에 세끼노는 야마다가 수집한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 조사하였으나 단 한 점의 봉니도 더 얻지 못하였고,
- 1922. 10. 30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낙랑태수장'이란 봉니를 150원의 고가로 매입하였고,
- 1923년에 평양법원 검사장 세끼구찌가 토성리 부근에서 촌부로부터 '조선우위'라는 봉니를 얻었고,
- 1926년 평양경찰서 경부보 우시무라와 상공회사 기사인 모리오가 등이 완전한 봉니와 파편 및 여러 개의 단편을 입수하였으며,
- 1931.1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이라는 봉니를 100원에 사들이고,
- 1934. 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은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는 봉니를 100원에 사들였다.
▲ 본격적으로 조선역사 조작작업
- 제사화 석유환인의 '본격적인 조선역사 조작작업'과 동 -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 유물조작 비판
▲토성(土城)
1913년에 세끼노가 대동강 남쪽 구두진에 있는 토성을 답사하고 "토축(土築)의 성벽이 위요한(圍繞: 둘러싼) 흔적이 완연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12년 후에는 "과연 토축의 성벽이 상존할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한(漢) 식(式)의 기와 수십개를 채집하였고---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고 앞뒤가 모순되는 말을 하면서 마치 이 곳이 한의 낙랑군(樂浪郡)의 치소(治所)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조선 역사의 맥을 고조선-위만조선-낙랑군으로 엮음으로서 낙랑의 치소는 곧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치소인 왕검성으로 조작하였으나 다음과 같은 많은 모순이 있다.
(1) 역사서에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 하였는데 만약 대동강을 패수로 본다면 그들이 낙랑군의 치소로 조작한 토성은 패수(대동강)의 남쪽에 있어서 왕검성이 될 수 없다.'
(2) 역사서에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 하였는데 이 토성은 물이 얕고, 나즈막한 구릉에 위치하여 적의 공격이 용이하다.
(3) 이 토성은 동서 709미터, 남북 599미터, 면적 396,650평방미터(약 만평)인데 기록에 의하면 낙랑군 치소는 가구가 62,812호이고, 인구가 406,748명이었다 함으로 이곳은 이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좁다.
이상의 제 이유로 이 토성은 한(漢)의 낙랑군 치소가 아니라 어울동토성(평남 온천군), 운성리토성(황해 은율군), 청산리토성(황해 신천군), 소라리토성(함남 영흥군) 등과 함께 BC3-2세기경의 것으로 BC1000년경의 전반기 고조선문화(비파형동검문화)를 계승한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의 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특히 이 토성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있었던 막조선(莫朝鮮)과 낙랑국(樂浪國)의 유적으로 한(漢)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은 낙랑국이 멸망당한 후(고구려 대무신왕 20년, AD37년) 고구려가 생포한 한인(漢人) 포로수용소로 사용된 때문인 것으로 보고있다.
* 고조선전반기의 문화로 보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1) 요서지역-하북성 북경과 당산지역, (2) 내몽고 동부와 요녕성 서부지역, (3)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지역에 넓게 출토되는데 세형동검(細形銅劍)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지역(3)에서만 출토되는데 이는 목축을 위주로 하는 (1)과 (2)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하므로 비파형(琵琶形)의 '자르는 칼'이 필요한데 고조선 후기-부여로 이어지는 BC 3-2세기는 철기문화가 시작되면서 동검이 사라졌으나 농경정착생활을 하는 (3)에서는 보병을 위주로 하므로 세형(細形)의 '찌르는 칼'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유독 이 곳에서만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한 것으로 보고있다.
▲봉니(封泥)
봉니는 한인(漢人)들이 물건이나 문서를 넣고 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나무를 깎아 글을 적은 후 덮개를 대고 노끈으로 묶은 다음 촛농을 붓고 채 굳기 전에 그 위에 인장을 눌러 봉한 것이다. 따라서 글을 받은 사람이 봉한 것을 열면 봉니는 부서지게 된다.
평양지역에서 70여개씩이나 봉니가 집중적으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이를 이곳이 한(漢)의 낙랑군이라고 조작하는 중요한 단서로 삼았으나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1) 봉니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중국 본토의 옛 군현지역에서도 이렇게 많은 양이 나타난 곳은 없다. 그 것은 글을 받은 군현의 수령이 봉니를 열면 부서져 버리기 때문에 개봉하지 않은 채 봉니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
(2) 모든 속현이 군의 태수부로 문서를 올리고, 태수가 상부(자사), 인접 군, 그리고 속현(屬縣)에 문서를 내릴 때 봉니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태수부에 태수의 인장이 찍힌 봉니가 나올 수 없는 데 소위 그들이 말하는 낙랑군 지역에서 '낙랑태수장'이란 봉니가 나타난 것.
(3) 또 낙랑태수는 상부인 유주자사(幽州刺史)와 다른 군(郡)으로부터 받은 봉니는 한 점도 없고 오직 속현의 봉니만 나온 것.
(4) 문헌에 없는 현의 이름이 찍힌 봉니가 다수 나왔다는 것.
(5) 2천여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었던 봉니가 그 형태가 완전하고, 인영(印影)이 갓 찍은 것처럼 선명하다는 것.
(6) 그들이 봉니를 수집할 당시 그것이 매우 비싸게 팔리는 것을 알자 이 지방 사람들이 전력을 다해 채집에 열을 올렸다는 것.
(7) 봉니는 그 주조와 그것이 묻힌 토질에 따라 색깔이 다른 법인데 모든 봉니가 거의 동일하다는 것.
(8) 후한 광무제 때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인장에 새긴 글씨가 서로 달라 이것을 하나로 획정하기를 청한 기록이 있는데 이곳 봉니에 찍힌 인장의 글씨는 한사람의 솜씨처럼 같다는 것.
(9)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은 전한 때 사용한 지명을 거의 다 바꾸면서 낙랑(樂浪)은 낙선(樂鮮)으로 바꾸고, 태수(太守)는 대윤(大尹)으로 바꾸었는데 '낙랑대윤(樂浪大尹)'이란 봉니가 나왔다는 것.
(10) 한대 중국의 큰 현에는 영(令), 승(승), 좌위(左尉), 우위(右尉)가 각 1인이 있고, 작은 현에는 장(長), 승(丞), 위(尉)가 각 1인이 있다. 「遂 ○ 長印」,「 ○ 成 ○印」,「○ 成 ○尉」로 적힌 3개의 봉니의 첫째와 둘째는 「수성장인(遂成長印)」으로 풀이하여 작은 현이 분명한데, 셋째 봉니 「수성좌위(遂成左尉)」또는 「수성우위(遂成右尉)」로 풀이되는데 작은 현에는 좌위(左尉) 또는 우위(右尉)가 없다는 것.
(11) 한서 예문지에 「동시령(東Ɦ令)」이란 직책이 나오고 있어서 동시는 큰 현이 분명한데 수집된 봉니 중에는 작은 현을 나타내는 「동시장(東 Ɦ長)」이 있다는 것.
(12) 영변(寧邊)에서 임회태수(臨淮太守)의 인장이 나왔다고 하는데 어느 기록에도 영변을 한(漢)의 임회군(臨淮郡)으로 기록된 것은 없다는 것
이상의 제 사실들은 이곳에 수집된 봉니는 고의로 조작했거나 이 지역 사람들이 돈벌이 목적으로 만들어 비싼 값으로 판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점제현신사비
1913년 이마니시가 용강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신사비가 1915년 3월에 「조선고적도보」제1호에 3매의 사진이 나왔는데 2매의 사진에는 1행이「○○○○○ 十粘單 ○○○」로 되었고, 동경공과대학장이라 된 1매는 1행이 年, 四, 月, 戊, 4자가 추가되어「○年四月戊十粘單○○○」로 되어 있었다.
그후 일제 식민사관 사학자들은 이 3매의 사진을 근거로 하여 漢, 章, 帝, 元, 和, 二, 6자를 추가하여 「漢章帝元和二年四月戊午粘제 ○○○」라 해석하고 이 비를 발견한 용강이 바로 낙랑군 속현 점제현이라 주장하였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모순과 조작 의혹이 있다.
* 낙랑군 속현으로 밝혀진 현: 누方(누방), 長岑(장잠), 海溟(해명), 朝鮮(조선), 沃沮(옥저), 樂浪(낙랑), 黏제(점제), 含資(함자), 渾彌(혼미), 提奚(제해), 東日施(동시), 帶方(대방), 遂城(수성), 增地(증지)
- 위 3매의 사진 중 동경공과대학장으로된 것과 나머지 2매를 비교 해 보면 6행 3번째 글자 ' X '와 7행 3번째 글자 '出'자가 서로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어서 이는 당시 식민사관의 거두이며 동경공과대학장인 세끼노가 사진 기술을 동원하여 제3의 사진을 조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정인보선생의 해석에 의하면 2행의「○ 建丞屬國會(건승속국회) ○○○○○」는「 ○建丞屬國攘烏冠遼西(건승속국양오관요서)」로 보았고, 4행의「 ○○山君德配岱嵩(산군덕배대숭) ○○○○」「 ○○無山君德配岱嵩(무산군덕배대숭) ○○○○」으로 밝혀 전체적인 해석은 '오환이 요동(또는 요서)을 쳐들어 오니 점재의 장, 위, 승이 군사를 모아서 구원 해 물리쳐 몰아낸 후 의무려산을 지나가는 길에 신사에 풍요를 빌었다'는 뜻이다.
* 무산(無山): 요서지방에 있는 의무려산(醫無慮山)을 말함.
덕배대숭(德配岱嵩): 덕이(또는 크기가) 태산과 숭산에 짝한다.
이 글의 문맥으로 보면 용강이 점제현이라는 것은 전혀 맞지 않으며, 설사 그들이 주장하는 이 비의 건립연대를 원화(元和) 2년을 믿는다 해도 이는 AD 85년으로 후한시대가 되는데 평양지역의 낙랑은 고구려 대무신왕 20년, AD 37년에 멸망하였으니 이 또한 맞지 않는 것이다.
실제 점제현(粘單縣)은 동부 낙랑군지역으로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에 있었던 한의 낙랑군 속현이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발견된 비석을 그들의 목적 '낙랑군 위치가 평양지역이었다'고 조작하기 위하여 은밀히 옮겼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 동종(銅鐘)
1910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고구려고적조사사업」을「한대낙랑군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고 2차로 평양지역 고분 발굴작업 때 제9호 고분에서 동종(銅鐘)이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그 동종에는 전한 원제때의 연호 영광(永光) 3년(BC41년)으로 되어 있으며 효문묘(孝文廟)에 있던 것으로 평양지역이 전한(前漢)의 강역에 속했었다는 주장이다.
- 전한의 문제(文帝)의 시호가 효문제(孝文帝)이고, 묘호(廟號)는 태종묘(太宗廟)이므로 '효문묘(孝文廟)'란 말은 성립이 안된다.
- 중국에서 군국묘(君國廟)는 그 황제가 임행한 곳이라야 세울 수 있는데 낙랑군에 황제가 임행했다는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전한의 군국(君國)의 총수는 103개인데 군국묘(君國廟)가 설치된 곳은 68개소로서 낙랑군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 원제 영광4년(BC40년)에는 군국묘가 모두 폐지되었으니 동종이 출토된 곳이 낙랑군의 효문묘라면 이는 영광 3년(BC41년)에 설치하여 다음해에 폐지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 칠기
왕간묘(王旰墓)에서 출토된 칠기에 '永平 十二年' (영평 12년, AD 69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있고, '蜀郡西工(촉군서공)'에서 만든 칠기도 있어 한의 낙랑군 지역이라는 주장이다.
- 이 고분에서 수집한 목재의 방사선 탄소연대 측정 결과 AD 133년 것으로 밝혀졌으니 칠기가 AD 69년에 만들었다는 것이 모순된다.
- 당시 평양지역의 낙랑국 귀족들은 한(漢)나라의 값진 물건들을 무역을 통해 입수하여 소유하면서 호화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이 고분에서 출토된 중국의 '촉군서공'에서 만들었다는 칠기도 무역을 통해 입수한 것을 낙랑국 귀족이 소유하고 있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화천(貨泉)
평양지역 고분 중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밝혀진 정백리 1호고분에서 전한을 멸망시킨 왕망(王莽) 천봉(天鳳) 원년(AD 14년)에서 왕망의 몰락시(AD 23년)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화폐인 화천(貨泉)이 출토되었다.
- 그러므로 정백리 1호고분을 비롯한 평양지역의 고분군의 조성연대는 왕망이후 즉 후한시대인 것으로 밝혀진 셈이니 이들이 한(漢)의 낙랑군 유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장무이전(張撫夷塼)
1912년 10월 15일 세끼노가 황해도 사리원역 동남방 1.5Km 지점에서 '漁陽張(어양장)'이란 명문이 있는 벽돌조각을 여러 개 얻었고, 그 부근 고분을 발굴하여 현실(玄室, 북쪽방)을 구축하고 있는 벽돌 중에 '帶方太守 張撫夷 (대방태수 장무이)'라 적힌 벽돌이 발견되어 그들은 이를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을 실었고, 그 해설에는 그 전편(全片)의 3개 문장을 실으면서 이를 근거로 황해도 일대가 한(漢)의 대방군(帶方郡) 지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① 「天人小人 供養君子 千人造塼 以葬父母 旣好旦堅 典覺說文 使君帶方太守張撫夷」
(천인소인 공양군자 천인조전 이장부모 기호단견 전각설문 사군대방태수 장무이)
하늘이 소인을 낳으시와 /군자를 공양하게 하였도다./
천명의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어 /부모로 장사지내나이다/
이미 좋고 또한 견고하니 /이에 글을 새겨 예를 밝히노라./
사군대장태수장무이시여
② 「哀哉大人 奄背百姓 子民憂戚 夙夜不寧 永則玄宮」
(애재대인 엄배백성 자민우척 숙야불녕 영칙현궁)
슬프다 대인이여 /문득 백성을 버리셨도다. /백성들이 슬퍼하여 /아침저녁 편안하지 못하나이다. /길이 현궁 곁에서 원통한 마음을 다할 바를 모르나이다.
③「趙主簿 令塼 懃意不臥○」
(조주부 영전 근의불와○)
조주부가 명령하여 이 벽돌을 만드니 은근한 뜻을 마지 아니 하도다
-③번 문장의 '주부(主簿)'는 그 당시 중국에는 없는 관직이며 고구려의 5등관의 하급관직명이다.
이러한 고구려 하급관리의 명에 의하여 천명의 인부가 무덤 축조에 쓸 벽돌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방태수 장무이가 고구려의 포로가 되어 있다가 죽은 것이고, 벽돌을 만든 사람들도 포로들이었을 것이다.
- 좌씨전(左氏傳)에 따르면 양공 25년에 '최씨가 장공(莊公)을 북곽(北郭)에 매장(側)하였다가 정해(丁亥)일에 사손이란 마을에 장사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서 '側(측)'은 장공이 시해를 당했기 때문에 예(禮)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임시로 그 곁(側)에 두었다는 뜻이다.
②번에서 '則(칙)’ 역시 장무이도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구(柩:시체)를 북쪽 방(玄宮) 한쪽 곁(側)에 묻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대방태수 장무이가 자기가 다스리던 대방군에서 정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이역 땅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죽었기 때문에 예를 갖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리원을 비롯한 황해도 지방이 장무이가 다스리던 한(漢)의 대방군이 있던 곳이 아니라 장무이를 비롯한 한의 천 여명의 군사들이 고구려에 포로가 되어 이 곳에 수용되었다가 장무이가 죽자 이곳 수용소의 고구려 관리 조주부가 명하여 포로 천여명으로 하여금 위 3개 문장을 새긴 벽돌을 만들어 고분 현실(玄室:세끼노가 발굴)을 쌓고 이곳에 곁 붙여 묻어주었던 것이다.
▲ 좁은 놋창(細形銅矛)
황해도 재령군 부덕리에서 「○○皇朝用(황조용)」이란 명문(銘文)이 새겨진 좁은 놋창(細形銅矛)가 나왔는데 이는 '좁은 놋검(細形銅劍)'과 함께 중국의 한족(漢族) 문화권에서는 볼 수 없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것인데 비파형동검에서 이어 받아 발전시킨 고조선 후기 문화의 소산인 것이다.
▲ 옥도장, 벽돌, 칠기묶음, 막새기와
① 토성동(토성이 있는 마을)의 귀틀무덤에서 국왕 또는 그와 대등한 신분을 말해주는 '永壽康寧(영수강녕)'이란 길상어(吉祥語)가 새겨진 옥도장이 나왔고,
② 마주 놓인 벽돌 무덤에서는 '大王(대왕)'이란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수집되었으며,
③ 정오동 5호 및 왕광무덤에서는 '巨王(거왕)'이라 쓰여진 칠기 묶음이 나왔으며,
④ 평양의 토성에서는 '樂浪禮宮(낙랑예궁) 樂浪富貴(낙랑부귀) 千秋萬歲(천추만세)' 등이 새겨진 막새기와가 나왔다.
- 이러한 유물들은 한(漢)시대 먼 변방의 태수(太守) 정도로는 감히 쓸 수 없는 王(왕)급을 표시하는 유물로서 평양, 황해도 지역에는 지방 군현이 아니라 국가수준의 권력기구와 통치체제를 갖춘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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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00:5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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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쥬엔류 //
뭐만 하면..조작이고, 팩트타령이고..
아니면 편승이죠. 오히려
★ nital 님이 쓰신 글은 침묵하고 있는 게 님과 같은 부류죠.
http://honeycast.kr/bbs/board.php?bo_table=tip&wr_id=1173
주류사학계에서도 한사군 낙랑유물의 증거능력 상실 인정
고대사학계의 만병통치약, 낙랑 유물
평양에서 발견된 낙랑군 유물이 있다.
이는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두 가지 뼈대의 근원적인 뿌리이다.
주류 고 대사학계는 한사군, 특히 낙랑군이 한반도 내부에 있었다는 전제하에
모든 한국 고대사의 시간과 공간을 배치시 킨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 낙랑 유물 유적이다.
평양에 존재하는 낙랑 유물유적은 대부분 일제하 일본 관변학자들이 발굴하고 정리했다.
일본인들은 당시 낙랑 유물이나 유적을 아주 명확한,
즉 <삼국유사> 같은 역사서를 바꿔 쓸 수 있을 만큼 분명한 유물 유적이라고 주장 했다.
그들 말만 들으면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이 유물 유적들은 이미 신채호 당시부터,
특히 정인보 같은 학자 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아 왔다.
하지만 일본인 학자들과 그들을 이어받은
이병도 이하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는 이런 의심들 따위는 개의치 않았 다.
그도 그럴 것이
신채호 이하 정인보 같은 강력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 통에 사라졌고 남은 재야사학자들은 주류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낙랑 유적 유물을 절대시하는 일본인 학자와 이병도 및
그 의 제자들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난도질하며
멋대로의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북한의 연구를 시작으로 1980년대에 이를 정리한 윤내현에 이르면서
낙랑유물 유적은 더 이상 거론하기도 창피할 만큼 철저하게 비판되었다.
일부가 위조인 것은 물론 위조가 아니더라도
낙랑군이 있었다는 증거로는 쓸모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윤내현은 이 사실을 빈틈없이 논증했다.
2009년의 (주류사학자인) 박선미의 논문에서 발췌한 단락 가운데
“고고학적으로는 평양에서 발견되는 한나라의 유물을 한 낙랑군 설치의
결과물로 보며” 라는 문장을 보라.
이 말은 낙랑 유물이 송호정의 대동강 중심설을 증명해준다는 주장을 여러 견해 가운데 하나로 본다는 이야기이며,
이 주장을 수용하지 않은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대大고조선론을 표방하는 윤내현의 <고조선의 강역>에서 발췌...>
<소小고조선론을 표방하는 송호정의 <아 그렇구나 우리 역사>에서 발췌. 왼편그림에서는 고조선의 영역이
지금의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있다.(2005년 여유당출판사의 개정판에서는 이 지도를 삭제하고 다른 지도로
대체했다.) 오른편 그림은 한사군의 위치를 송호정 입장에서 그린 것이다...>
송호정, 노태돈마저 증거능력을 주장 못하는 애물단지
1980년대까지는 소小고조선론의 확고부동한 근거였던 낙랑 유물 유적이
주류 고대사학계 내부에서조차 주변화 된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이 낙랑유물유적을 절대시하는 학자는 하나도 없다.
위의 송호정이나 노태돈 마저도 도망치듯 슬며시 한마디하고 넘어가는 게 전부다.
다음으로 평양의 토성동 일대 지역에서 채집되었다는 봉니의 문제에 있어서, 그중 일부는 돈을 목적으로 위조
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일찍부터 지적된 바이다. 그러나 모두가 위조되었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럴
경우 봉니의 위조를 처음 하게 된 동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노태돈, <단군과 고조선사>, 2000년, 49쪽)
노태돈은 위의 인용 같은 방식으로 모두 위조가 아니라는 어설픈 변명 한마디만 짚었고 슬쩍 넘어갔다.
위 인용 외에 다른 얘기가 없고
그 밖의 어디서도 노태돈은 낙랑 유물을 이 이상으로 주장한 적이 없다.
낙랑 유물은 이 정도의 천덕꾸러기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부 위조’ 라는 말마저도 안 하면
낙랑 유물 유적이 증거 능력 없는 쓰레기이자
오히려 일본인들의 가증스러운 역사 왜곡의 흔적일 뿐이라는 사실과,
이 수치스런 오물을 보배 나 되는 양 받들어왔던
자신들의 한심한 모습을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역겹고 죄 많은 낙랑 유물의 사연을 정확하게 반성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까 저렇게 구렁이 담넘어가듯 슬그머니 지나가는 것이다.
한사군의 증거로 보고된 낙랑 유물
앞서 낙랑 유물 유적은
일제 관변학자들과 이를 이어받은
이병도, 이기백 이하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의 만병통치 약이라고 말했었다.
이 엉터리 고고학적 증거들로
일본인 관제 식민사학자들과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는 100년을 먹고 살았다.
일단 윤내현의 비판 사례를 확인해보자.
이러한 학계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지금의 평양 지역에서 중국식의 유적이 발견, 발굴되어 서
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하였던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일 것으로 보고됨으로써 그것은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는 데 적극적인 고고학적 근거가 되었다.
일본 관변사학자들의 위조
첫째로, 봉니가 있다. 평양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200점이 넘는 봉니가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봉니가
한 곳에서 수집된 예가 없으므로 처음부터 그것들이 모두 진품일 것인지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 의문점은
이미 정인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지적된 바 있는데 필자는 평양에서 출토된 봉니 전부를 위조품으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 위조품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싶다.
예를 들면 ‘낙랑대윤장’ 이라는 봉니가 있는데 대윤은 왕망시대의 관직이다. 서한시대에는 군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을 태수라 하였는데 왕망시대에는 이것은 대윤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대윤이라는 관직명에 따르면 이
봉니는 왕망시대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망시대에는 서한시대에 사용하던 모든 군명을 개명하였는데
낙랑군은 낙선군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봉니가 왕망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낙선대윤장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봉니는 군명과 관직명이 일치하지 않은 것으로 진품일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든 이 봉니들은 토성 부근에서 수집되었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는 낙랑태수장, 낙랑우위, 염
감인장 등이 있다. 서한과 동한의 관직을 보면 태수가 있었고, 큰 현에는 승과 좌, 우 도위가 있었으며 작은 현에
는 장이 있었다. 그리고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낙랑군에는 25개의 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현과
염감현이 있었다. 따라서 낙랑태수장, 조선우위, 염감인장 등의 봉니는 지금의 평양 지역에 낙랑군 조선현, 염감
현의 치소가 있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봉니는 공문서를
보낼 때 봉합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봉니가 출토되는 곳은 봉니의 주인이 보낸 공문서를 받은 곳이 된
다. 그러므로 낙랑태수장, 조선우위, 염감인장 등의 봉니가 진품이라고 하더라도 평양지역은 낙랑태수, 조선우
위, 염잠장 등으로부터 공문을 받았던 곳이 되는 것이며 그들이 거주하던 곳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윤내현, <한국고대사신론> 25-27쪽)
윤내현의 비판의 핵심은 이
것들 전부가 낙랑이 설치되었다는 시기보다 몇 백 년 이상 후대의 유물들이며
그나마 그 일부는 명백히 위조임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10쪽에 걸친 윤내현의 비판을 읽고 나면 낙랑 유물 유적이라는
것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진다.
사실 윤내현은 지나칠 정도로 점잖고 예의 바르게 비판했다.
예를 들어 윤내현은 봉니를 모두 위조품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나
정황으로 보면
이 모든 유적 유물의 본질은
대량 위조에 마음대로 논리를 갖다 붙인
당시 일본 관제사학자들의 어거지 견강부회가 틀림없다.
이것은 침략에 눈이 먼 일본제국주의 학자들의 역사에 길리 남을 학문적 파렴치와 죄악의 흔적이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는 커녕 일본 역사학계의 만대에 남을 수치의 증거이다.
(김상태,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201-202쪽, 239-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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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00:3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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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엔류 //
님이 교차검증이 하는데
중국사서 자체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고,
한사군도 여러 오류가 나오는 상황에서
교차검증이라는 게 도대체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한사군의 실증유물은 얼마나 나왔나요?
그건 중국사서니까 100% 믿어야 하고,
한국사는 무조건 실증사학이어야 합니까?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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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00: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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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엔류 //
에휴.. 종북,좌빨,전라도 타령하는 것 같군요.
제가 환빠입니까?
제가 환단고기를 맹신했나요?
제가 환단고기가 100% 맞거나 옳다고 주장했습니까?
저는 틀린 게 많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위에 썼다시피 사서도 거의 없었고, 있다고 해도 어떤 게 진실인지
우린 알 길이 없는 상황이니
그것이 옳으니..이걸 믿어라..라는 건 말이 안됩니다.
종교 자체도 옳지 않다고 보는 입장인데..
사서를 믿어라??
님과같은 사람들은
뭐만 하면 다 조작,,뭐만 하면 팩트타령...하지요.
중국에서 황하보다 오래된 유물과 유적이 나와서 당황스러우니
중국인들이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고,
자연스럽게 고조선부터 고구려 등 한국사로 믿어진 것들이
중국사가 되버린 겁니다.
조금있으면 그 환빠니 비하하는 모든 역사들이
이젠 중국사가 되버릴 테고..
우리도 중국인의 후예가 되버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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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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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18 00: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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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엔류 / 다 거짓말이야..다 조작이야..
꼭 누구 보는 것 같네요.
그럼 그들이 멸망시킨 나라는 뭘까요?
설마 한사군이 멸망해서도
계속해서 통치했다는 걸 주장하시는 건 아니실 테죠?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458
<사기 조선열전>의 본말과 한4군의 허구
식민지 한사군은 허구이고, 한반도 북부에 업었다.
한나라 무제(BC 156 ~ BC 87)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했다는 <사기> 권115 ‘조선열전’만큼 우리나라 고대사의 핫이슈가 되고 있는 것도 드물다. 한사군의 설치경위와 존재여부, 위치, 존속기간 그리고 이를 해석하는 국내외의 사관(史觀) 등이 2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의 동북공정과 영토문제 등 국제관계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과 소위 한4군이 설치되게 되는 경위를 살펴보자.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선 먼저 한(漢)나라의 개국과정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병술로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했다’는 지략가 장량(張良 ? ~ BC 168)의 행적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장량이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동이(東夷) 즉 북부여의 결정적인 도움 때문이었다. 이는 <사기> 권55 ‘유후세가(留侯世家)’편과 <한서(漢書)> 권1 ‘고제기(高帝紀)’에 보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북부여와 연나라 눈치 봐
‘유후세가’에는 “장량은 일찍이 회양(淮陽)에서 예를 배웠다. 동으로 창해(倉海)의 임금을 알현하고 무게 백 20근 철퇴를 휘두르는 역사(力士)를 만나 동유중인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같이 저격을 하였으나 적중을 하지 못하고 부거(副車)를 박살냈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창해의 임금’은 <사기>를 주해한 많은 학자들이 밝혀 놓은 것처럼 진시황의 군현에 속한 것이 아니며 동이의 군장이고 이곳은 예맥국의 땅이라 하였으며 예맥은 고구려의 남쪽에 있으며 신라의 북쪽에 있고 동쪽으로 큰 바다에 이르는 곳이라 하였다. 이 창해 지역을 현 한반도 강원도 어디쯤으로 여긴다면 큰 오해이다. 장량이 찾은 창해는 현 하북성과 산동성 부근으로서 옛 고조선과 북부여 강역 안에 있었다.
장량은 북부여의 제후국인 창해에서 역사 여홍성(黎洪星)을 만나 진시황을 저격하였으며 훗날 병법의 대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창해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유방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밀려 지금의 하남성 낙양 근처의 영양(滎陽)을 항우에게 바치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북부여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유방은 한나라를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 한서> 권1에 “북맥(北貉)과 연(燕)나라 사람이 와서 날래고 용맹한 기병으로 한(漢)을 도왔다(北貉燕人來致梟騎助漢).”라고 하여 북부여의 실체와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방에 대한 북부여의 이러한 군사적 지원은 중원의 주도권을 북부여가 쥐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 세워진 한나라는 북부여와 연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 건국 후 20여년이 지난 기원전 195년에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에 망명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연나라의 위만(衛滿)이 상투를 틀고 추수(溴水)를 건너 번조선의 준왕(準王)에게 가서 항복을 하자 준왕은 위만을 믿고 아껴서 박사(博士)로 임명을 하고 100 리의 땅을 봉지로 주고 서쪽 경계를 잘 지키도록 하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연(燕), 제(齊), 조(趙)에서 많은 사람이 번조선으로 망명을 해오자 위만은 그들을 이용하여 준왕을 배신하고 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에 준왕은 해(海) 지역으로 망명을 하였다. 이렇게 번조선을 빼앗고 왕이 된 위만과 그 손자 우거(右渠)까지 약 87년의 기간을 보통 위만조선이라 칭한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 즉 단군조선과는 전혀 별개이다.
위만조선, 고조선(단군조선)과는 전혀 별개
위만조선의 세력이 커지면서 북부여와 한나라와도 경쟁관계를 형성하였다. 위만조선을 다시 탈환하기 위하여 기원전 128년 북부여의 고해사 단군은 몸소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남려성(南閭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관리를 두었다. 이 사건을 두고 중국 사서인 <사기>와 <한서>에서는 “원삭 원년(BC 128) 동이의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이 항복을 하여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았다.”라고 하였으며,
<후한서>는 “예군 남려 등이 우거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서 내속되니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마치 창해군이 한나라에 속한 군현으로 착각이 들게 하고 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아무런 설명 없이 2년이 채 안되어 “원삭 3년(BC 126) 봄 창해군을 파하였다.”라고 하여 어리둥절하게 한다.
앞서 창해는 장량과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강역이라 설명하였다. 창해는 곡창지대이며 한나라 수도로 직격할 수 있는 거점이기 때문에 한나라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한나라의 사람도 위만조선으로 망명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점차 세력이 커지자 이에 불안을 느낀 한무제가 기원전 109년 우거에게 섭하를 보내 중재를 하려고 하였으나 우거왕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섭하는 배웅하러 나온 조선의 비왕을 살해를 하고 달아나서 한무제에게 보고하니 한무제가 잘했다며 섭하를 요동동부도위로 임명을 하였다. 이에 분노한 우거왕이 군사를 내어 섭하를 죽이게 된 것이 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의 시발이 된 것이다.
한무제는 순체와 양복을 장수로 삼아 수만 명의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왕검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위산과 제남태수 공손수를 보냈지만 별 소득이 없자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대치는 왕검성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 반란세력들이 우거왕과 끝까지 저항을 하던 성기(成己)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우거왕과 성기를 죽인 재상들은 봉토를 받고 제후에 임명되는데 반해 조선정벌에 나섰던 한나라의 장수 순체는 기시(棄市,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에 처하였으며 양복은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한나라가 승리하였다면 장수들이 그 공으로 제후가 되거나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현도.낙랑, <사기>에 나오지도 않는 지명
그런데도 조선을 배신하고 항복한 조선의 다섯 사람을 획청후(澅淸侯), 추저후(萩苴侯), 평주후(平州侯), 기후(幾侯), 열양후(涅陽侯) 등으로 각각 제후로 봉하였다. 다섯 제후가 임명된 지역은 현 중국의 산동성, 하북성, 산서성, 하남성 등이다.
이로 보면 위만조선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으며 내부 반란으로 한나라에 항복을 하여 다섯 명이 제후로 임명이 되는데 그 지역이 모두 현 중국 화북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한반도에 있지 않았으며 설령 한4군이 있었다 하더라도 한반도는 아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遂定朝鮮為四郡)”라고 하나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 ‘현도’, ‘임둔’, ‘진번’의 4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후대에 편찬된 <한서>에 “원봉 3년(BC 108) 여름 조선이 그 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을 함으로써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4군의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4군 중에 ‘진번’이라는 이름은 이미 진시황 이전에 있었음을 ‘조선열전’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현도’와 ‘낙랑’이라는 이름은 <사기> 전체를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한서> 권73 ‘위현전(韋賢傳)’에 "동으로 조선을 정벌할 때 현도와 낙랑의 군대를 일으켜 흉노의 왼팔을 끊도록 하였다(東伐朝鮮 起玄菟樂浪 以斷匈奴之左臂).”라고 하여 처음으로 현도와 낙랑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을 정벌하는데 현도와 낙랑을 이용하려 했다면 현도와 낙랑은 위만조선 내에 속하지 아니한 별도의 지역 또는 국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북부여, 위만조선, 진번, 현도와 낙랑 등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모두 북부여와 관련이 있는 지역이다. 따라서 <사기>에서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부분과 <한서>에서 “그 땅을 낙랑, 임둔, 현도, 진번군으로 삼았다”라고 한 내용은 사실과 다르며 위만조선이 항복하여 4군을 설치한 것이 아니며 ‘조선 5후’가 있었을 뿐이다. ‘조선 5후’가 있었던 지역도 지금의 한반도 북부 지역이 아닌 앞서 말한 화북평원을 중심으로 한 유역이다.
한(漢)4군 대신 항복한 위만조선 5제후가 실재
한4군 문제를 풀기 위해선 한무제의 통치를 기록한 <사기> 권12 ‘효무본기(孝武本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마천은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등 모두 130편으로 나누어 <사기>를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기 중의 맨 마지막 편이 ‘효무본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썼던 당시의 한나라의 왕이 유철 즉 한무제다.
그런데 ‘효무본기’를 보면 여러 가지로 이상한 점이 눈에 많이 띈다. 첫 번째로 사마천이 살아있는 왕을 ‘효무’라 칭하고 기술할 수 없다는 점과 두 번째 ‘효무본기’는 다른 본기와 달리 봉선(封禪)에 관한 일만 주로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효무본기’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원봉 원년(BC 110) 태산으로부터 다시 동으로 바다를 따라 순행을 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요서로부터 북변 구원(九原)을 거쳐 감천(甘泉)으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던 것이 <한서>에는 한술 더 떠서 한무제가 백일 동안 순행한 거리가 만 8천 리라는 것이다. 이 기록을 본 송나라 때 공평중(孔平仲)은 그의 저서 <형황신론(珩璜新論)>에서 “오호라! 그 황당함이 심하도다(嗚呼其荒唐甚矣)”라고 하였다.
기원전 110년이라면 위만조선 문제로 골칫거리였고 곧 이어 기원전 109년부터 전쟁이 시작되는데 만 8천 리나 되는 지역을 그것도 북부여와 위만조선의 강역을 다녔다는 것은 황당함의 극치이다. 이는 한나라가 세워진 뒤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던 한무제를 진시황과 견주어 미화시키려 나온 이야기이며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후대의 지리개념으로 맞춰진 것일 뿐이다.
위서(魏書, 삼국지 위지) 권13 왕숙전(王肅傳)에 “한무제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다는 말을 듣고
‘효경기(孝景紀, 한무제의 아버지를 기록한 본기)’와 자신의 본기를 본 뒤 크게 분노하여 책을 찢어 던져버렸으며 오늘에 이르러 ‘효경기’와 ‘효무기’는 목록만 있을 뿐 글이 없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지금 볼 수 있는 <사기>는 사마천이 직접 쓴 것이 아닌 후대에 임의로 두 본기를 <사기>에 삽입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기> ‘조선열전’의 내용이 정작 ‘효무본기’에는 전혀 없다는 것은 ‘조선열전’ 또한 후대에 개작 또는 가첨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이는 <사기> 전체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후대에 많은 개작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제는 한4군에 대한 논쟁을 끝내야 한다.
더 이상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와 일본의 식민지 지배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한4군 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있지도 않았던 한4군의 악령에서 벗어나 올바른 역사 정립이 절실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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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8 0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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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만요잠시 /
전 저 사서가 틀린 부면도 많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만 일본, 중국사도 많다고 생각...
일단 대부분 중국, 북한에 있고, 중국, 북한과 교류하기도 어렵고,
그들은 공동연구도 어렵습니다.
아무튼 실증사학 자체는 일본에서 나왔고, 그것이 옳던 그르든 간에
님이 하시는 여러 유물은 이미 많이 나왔습니다.
위에 신문을 링크했습니다.
중국에 여러 문화, 문명이 발견되었고,
이는 황하보다 오래되었습니다.
중국역사는 이것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를 더 오래두기 위해
모두 중국사...라고 규정짓고 따라서
이같은 궤변으로 한국의 역사도 중국사가 되버리게 된 겁니다.
다만 이것이 명확히 어느 나라의 어느 민족의 유물이다..라는 건 찾기 힘듭니다.
그리고 고조선 유물은 많이 나왔습니다.
또 철제없이 농사를 못지었다??
아메리카의 아즈텍, 마야문명은 철기문명인 줄 아시나요??
43
오유는 환단고기를 절대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새창]
2015-06-18 00: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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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삭제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401553.html
‘제5의 문명’ 요하는 ‘중화’역사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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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시원, 만주]동방 르네상스를 꿈꾸다 (1)
용 옥 토기 주거지 등 중국문화 최초 상징 뿌리
BC 6천년 한반도-요하 단일 문화권, 유물 증거
최근에 요하문명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한국방송 ‘역사스페셜’(<제5의 문명 요하를 가다> 2009년 8월29일 방영)이 방송된 뒤에 많은 사람한테 전화를 받았다. 어떤 역사 교사가 전화를 해서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쳐야 되느냐”고 묻더라. 아직 역사 교과서에는 단군이 신화로만 나오는데, 단군의 실체에 대해 학생들이 물어보고, “요하문명이 우리 문화와 연결돼 있는데, 왜 우린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교사들도 혼란스럽다고 한다. 이제까지 아무도 모르고 어떤 기록에도 없는 새로운 문명이 발견되었으니까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 500년 앞선 하모도문화 발견에 중국이 난리 나 기원론 수정
우리는 지금까지 교과서를 통해 황하문명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배웠다. 중국문명뿐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의 시발점이 황하문명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73년에 장강하류에서 하모도문화라고 명명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새롭게 발견된다. 이 하모도문화는 기원전 45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앙소문화(황하문명의 중심적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최소 500년에서 1천 년이 앞선다. 중국 전체가 난리가 났다. 그래서 이를 장강문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부터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은 황하문명에서 출발했다는 단일기원론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장강문명 두 곳에서 시작됐다는 다기원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두 군데에서 문명이 시작됐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모도문화권에서 어떤 유적들이 발굴됐을까? 그때 이미 물을 가두어 농사를 지었다. 논둑을 만들어 물을 가두고 씨를 뿌렸던 것이다. 모를 길러서 심는 이양법을 제외하면 현재 우리가 하는 논농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유적이 대규모로 나온다. 그것이 기원전 5천 년까지 올라가는 하모도문화다. 이것은 황하문명과는 다른 문명이다.
■ ‘오랑캐 땅’의 앞선 문명인 옥기시대에 중국 더 큰 혼란…세계도 깜짝
장강문명이 새롭게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중국학계의 혼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어차피 중국 땅에 있으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리장성 밖은 다 야만인의 세계로 보았다. 실제로 만주 일대에서 변변한 문화 유적이 발견된 적도 없었고, 새로운 유물이 발견되면 모두 황하문명 지역에서 전파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1980년 초 만리장성 북쪽 요서 지방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신석기 유적이 무더기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게 요하문명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기원전 7천 년까지 올라가는 소하서문화가 가장 이른 시기인데, 그보다 더 이른 시기의 유적과 유물이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인식 속에 요동, 요서, 만주를 생각하면 말 달리던 선구자 생각나고, 수렵·목축하는 유목민을 떠올리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마어마한 새로운 신석기 유물이 계속 나오니까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홍산문화(紅山文化·기원전 4,500~3,000년) 단계에 오면 이미 초기 문명단계, 초기 국가단계에 진입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문명이라는 말은 아무 데나 붙이는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고 불릴 정도라면 그 문명단계가 성립할 대표적인 유물과 유적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청동기가 나오든지, 문자가 나오든지, 권력분립이 일어났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징표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요하문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홍산문화 시기에서는 청동기나 문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나 문자가 없는 문명단계, 국가단계는 세계 역사에서 많다. 단적인 예로 몽골제국은 전세계를 제패한 대제국이었지만 문자가 없었다. 제국 형성 이후에 필요에 의해서 새롭게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국학자들은 이제까지 우리가 서양의 역사를 중심으로 시대를 구분했던 타제석기,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 구분은 동북아시아에서 적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동북아시아의 경우에는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마제석기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청동기 중간에 옥기시대를 새롭게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 모순에 빠진 중국이 역사 재편 작업 들어간 것이 동북공정
이렇게 신석기 문화를 발견한 것까지는 좋은데, 발굴하고 나니까 중국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오랑캐의 땅이라고 했던 지역에서 황하문명보다 시기도 더 앞서고, 문화의 발전수준도 더 높은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니까 기존의 역사학계에서는 난감했던 것이다. 오랑캐의 땅에서 중화문명의 중심인 황하문명보다 앞선 유적들이 나오니까….
결국 중국은 요하문명의 발견과 더불어서 상고사에 대한 전체적인 재편 작업에 들어갔다. 중화문명은 요하문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은 “요하 일대는 원래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황제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황제가 활동하던 곳이고, 황제가 여기서 문명을 건설하고 내려오면서 또 중원에서 문명을 이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유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소수 민족은 모두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중국의 일부 학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수많은 논문들이 요하문명을 전설적인 인물인 황제와 연결하고 있다.
최근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한 동북공정 때문에 말이 많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공정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진짜 의도는 동북지역의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를 전부 중국사로 만들려는 것이다.
신화부터 시작해서 요하 일대에서 기원한 고조선, 단군, 해모수, 주몽 전부 다 황제의 후예라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황제의 후예인가? 단군의 후예인가? ‘그래 너희는 단군의 후예인데, 단군이 바로 황제의 후예다.’ 이런 논리로 가고 있다. 지금, 요하문명 때문에 중국의 상고사와 고대사가 모두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요하문명 세력이 진짜 중국 황제의 후손이었나?
자 그럼 이 지역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지, 사진 자료 중심으로 보여주겠다. 그 문명의 주도세력은 누구였는지? 진짜 황제의 후손이었는지 확인해 보도록 하자.
요하문명은 요하를 끼고 형성된 문화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요하 상류는 내몽고자치구의 동북쪽에서 랴오닝성 발해만에 이르는 큰 강으로 수많은 지류를 지니고 있고, 이게 발해만으로 흐르는데 ‘ㄱ’자 모양이라고 보면 된다. 요하를 중심으로 신석기 문화인 △소하서문화(기원전 7,000~6,500년) △흥륭와문화(기원전 6,200~5,200년) △사해문화(기원전 5,600~) △부하문화(기원전 5,200~5,000년) △조보구문화(기원전 5,000~4,400년)가 형성되었다. 홍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신석기시대(기원전 4,500~3,500년)로 출발해 후기에 석기와 청동기가 혼재된 문화(동석병용시대·기원전 3,500~3,000년)로 발전하였다. 홍산문화 후기에 들어 초기국가단계로 진입한다.
동석병용시대는 소하연문화(기원전 3,000~2,000년)에서도 발견되었고, 이후 초기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기원전 2,000년부터)를 거쳐 고급 문명사회로 발전하게 된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유물이 최초로 발견된 지역의 지명을 따 붙인 것이고, 지금도 수없이 많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홍산문화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발견된 지역이 500곳이 넘는다. 한 예로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적봉시 인근 오한치박물관에 가면 하가점-하층문화가 발견된 지역만 2천 곳이 넘는다.
■ 중국 본토에선 없던 고조선 상징 비파형동검, 한반도에선 무더기로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홍산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다. 홍산문화는 요하문명의 꽃이다. 요하문명이라고 하면 소하서, 흥륭와, 사해문화 등을 모두 포함하지만 문명단계로 진입하는 시기가 홍산문화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게 친다. 홍산문화가 요하문명의 꽃이라면 우하량 유적지는 홍산문화의 꽃이다. 여기서 제단터와 여신상 등 홍산문화를 상징할 유적과 유물이 쏟아졌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학자가 하가점-하층문화가 고조선과 연결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지역에서 고조선의 상징인 비파형동검이 대량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요서지역에서 폭넓게 발굴이 되었고, 산둥반도에서 1~2개가 나온다. 그 다음 한반도에서 무더기로 나온다. 중국 본토나 다른 곳에선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요하지역 중요 신석기문화 지역에서 발견된 주요 유적들을 시기별로 살펴보자.
■ 세계 최초 요하 옥기와 비슷한 유물 전남 여수에서도 발굴
흥륭와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옥기다. 이 지역에서 옥결(옥 귀거리)이 인골과 함께 출토되었다. 기원전 6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까 세계 최초로 인간이 가공한 옥기다. 그런데 흥륭와문화와 같은 모양의 옥결이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문암리유적에서 나왔다. 기원전 6천년까지 올라간다고 보고 있는 유적이다. 2007년에 전남 여수에서도 비슷한 옥결이 인골과 함께 발굴되었다. 모양이 흥륭와문화 옥결과 똑같다. 이들 유물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흥륭와에서 나온 옥결이 중국 내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연구한 사람이 있다. 홍콩 중문대학의 등총교수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옥기 전문가다. 그의 논문을 요약하면 이렇다. “기원전 6000년께 요서지역 흥륭와문화에서 시작된 옥결은 기원전 5000~4000년께 장강유역에 전파되고, 기원전 2500년께 중국 광동성 광주 근처 주강유역까지 퍼졌다. 옥결은 기원전 2000년께 더 남쪽인 베트남 북부까지 전파되고 기원전 1000년께 운남성 일대와 베트남 남부까지 시간 차를 두고 확산되었다.”
한반도에도 비슷한 시기에 옥결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흥륭와 옥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직선거리로 400km 떨어진 랴오닝성의 수암이라는 지역에서 생산된 옥으로 밝혀졌다. 수암에서 조금만 더 가면 압록강이고 두만강쪽으로 동해를 타고 내려오면 문암리로 연결된다. 흥륭와 일대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도 문암리 유적에서 똑같이 나온다. 이게 뭘 의미하느냐? 기원전 6천년에 흥륭와문화 단계에서는 한반도 북부지역과 요서, 요동 지역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었다는 이야기다.
■ 역사적 상식을 깬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
흥륭와문화지에서 눈여겨볼 또 하나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단 주거지역인 ‘화하제일촌(중국 전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집단 주거지)’이다. 이 주거지는 놀랍게도 해자 혹은 환호(외적이나 맹수의 접근을 막으려고 주거지 주변을 빙 둘러서 참호를 판 것)가 있는데, 폭이 4m, 깊이가 2m나 된다. 여기에서 150여 가구가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 주거지가 흥륭와 일대에서 3곳이 발굴되었다. 해자나 환호는 적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주거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이때부터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기초적인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불에 탄 조와 기장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는데,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다. 야만인의 땅이라고 믿어온 만주일대에서 기원전 6000년에 집단 거주지와 농경문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 상식을 깨는 것이다.
■ 기원전 6천 년 이미 인공적인 치아 수술 흔적
위 사진은 흥륭와에서 발견된 치아 수술 흔적이다. 중국, 일본 학자들이 이것을 발굴하고 4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진짜 수술 흔적 같기는 한데, 기원전 6천년 흥륭와문화 시대에 치아 수술을 했다는 것이 도저히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이 이 유골을 가져가서 4년간 집중연구를 해 2008년 2월 정식으로 기자회견을 했다. 틀림없이 인공적인 치아수술 흔적이라는 것이다. 두개골이 그대로 나왔고, 치아에 뚫린 구멍의 직경이 모두 같고 도구를 이용한 연마흔적도 발견되었다.
현미경 사진을 찍어봤더니 나선형 연마흔적을 발견했고 이것은 인공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구멍을 뚫은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충치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은 것이다. 그래서 정확한 수술 흔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두개골 수술은 유럽에서 기원전 5천 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었고, 중국에서도 기원전 2,500년 두개골 수술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치아 수술 흔적이 발견된 것은 흥륭와 유적지가 유일하다.
사해문화는 흥륭와문화 보다 시기는 조금 뒤지지만 연대는 거의 비슷하다. 두 문화가 비슷해서 보통 사해-흥륭와문화 또는 흥륭와-사해문화라고 함께 부르기도 한다. 사해유적 가운데 대표적인 곳이 요하제일촌이다. 이 집단 주거지가 발견돼 사해문화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여기도 해자 혹은 환호가 있고, 100여 가구가 살았다.
이 유적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용 모양의 조형물이다. 주먹보다 조금 큰 돌을 쌓아서 용 형상물을 만들었다. 길이가 19.7m, 폭이 넓은 곳은 2m, 좁은 곳은 1m다. 중국학자들은 ‘중화제일용’이라고 부른다. 사해유적에서는 용문 도편도 나온다. 뱀이 똬리를 튼 그림이 새겨진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게 용에 대한 최초의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조보구문화 시대에는 최초의 봉황이 등장한다. 기원전 5,000년께 새 형상 그릇이 발견되었는데, 중국학자들은 이를 ‘중화제일봉’이라고 부른다.
■ 채색 토기, 황하문명은 서역 전래설…요하문명은 독자적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보구의 채도(채색으로 장식한 토기) 존형기다. 그릇 형태가 특이하고 매우 정교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앙소문화에서 채도는 아주 넉넉하게 잡아도 기원전 4,500년인데, 조보구의 채도는 앙소문화보다 최소한 500년이 더 앞선 것이다.
앙소문화의 채도는 단순 기하문이거나 고기나 사람 얼굴을 그렸다면 조보구의 채도는 디자인이 훨씬 뛰어나고 정교하다. 채도를 평면으로 펴보면 현대적 디지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거기에 사슴, 돼지, 새 등의 머리를 한 용이 그려져 있다. 녹수룡, 저수룡, 조수룡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조보구문화 시대에 신성시 했던 주요 토템 동물들일 것이다.
채도 존형기가 의미하는 것은 요하문명이 독자적인 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황하문명을 대표하는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방에서 전래했을 것이라는 ‘채도서역전래설’이 세계 고고학계의 상식이다. 앙소문화 채도와 거의 똑같은 것이 서남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에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발견된다. 지금까지는 채도가 서방에서 들어와 앙소문화 지역을 거처서 요서 지방 일대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보구 채도가 그릇의 모양도 다르고 500년이나 앞서 있는 것을 보면 새로운 유입 루트를 상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오늘날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최초의 옥, 최초의 용, 최초의 주거지, 최초의 토기, 최초의 치아 수술 흔적 등이 모두 요하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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