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난생처음보는 이러한 너무나도 엄청난 유물, 유적에 대해 모두 하나같이 무엇에 홀린듯하였으며, 마치 외계인의 세계,외계인의 무덤을 발굴하고있는듯한 느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유물들을 확인하면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을 했었는데, 작업 3일째되던날 대충 7할정도 파악, 작성된 상황이었고 이날 오후쯤에 이를 당시 발굴 단장이던 모 교수에게 중간 보고하자 그분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이런말을 했어요, “이 유적은 우리 화하족유물이 아니라 조선인들의 유적이다... 중화역사 이전의 조선문명이야! "라고 말하면서 큰일이다!.. 일단 당국에 보고 한 후에 다시 지시를 받아야 하니 지금까지 발굴을 모두 중단하고 유물들은 모두 그자리에 두고 일단,오늘은 그만 나가세!" 라고 말하여 모두 발굴을 중단한채 나와 숙소에 있게 되었는데, 그날 밤 발굴중단과 동시에 철수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우리 발굴단원들은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곧 그 유적이 우리의 유적이 아니기때문이라고 이해하였고 일행은 그 곳에서 떠나기에 앞서 숙소에서 현지공안에게 이곳에서의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였고, 그렇게 돌아온 이후, 그 피리미드들에 관해 더이상 들은적은 없습니다. 그게 그 피라미드에 대한 저로써의 마지막이었고 제가 아는 다 입니다"
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ㆍ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교활하게도 한국사람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1922년 총독 사이토가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말하기도 했다.
"이달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이 글자는 <고전>을 모방한 것이로되, 쪼개면 초성ㆍ중성ㆍ종성이 되지만, 이 셋을 합쳐야 글자(음절)가 이루어진다. 무릇 중국 한자나 우리나라 말이나 모두 능히 쓸 수 있으니, 글자가 비록 간결하지만 요리조리 끝없이 바꾸어 쓸 수 있고, 이를 ‘훈민정음’이라 일컫는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해당 문서의 감정은 첨단과학감정원의 '양자문물연대측정기'라는 기계를 통하여 감정하였으며 2017년 처음 개발되고 2018년 중국에서 '북경천감양자과기유한공사'가 설립되면서 사용되는 기계를 첨단과학감정원이 도입하여 측정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측정기의 정확도에 대해 검증해보고자 연대가 적힌 여러 유물을 테스트한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