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 의제를 기리는 글이었던 조의제문은, 작성자님께서 알고있다싶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돌려서 비판하던 글이었습니다. 현재 교육과정 상의 교과서에선 무오사화와 인과관계를 가지는 여러가지 조건들 중에서 객관적으로 누가봐도 귀속성을 가진다고 판단하는 상당성을 지닌 것으로 조의제문을 지적하며 가르키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무오사화의 원인 : 조의제문 등등, 객관적 귀속 : 결정적 타를 날린 조의제문. 이런식으로 말이지요.
교과서대로 설명을 드리자면 김종직은 성종 때 정계에 진출하여 중앙 정치에서 사림의 근간을 닦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김종직이 유자광이라는 기성 훈구세력과 감정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으로 유자광이 걸어놓은 현판을 어린아이가 적은 글인양 조롱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1번 더 있으면서 유자광은 김종직에 매우 부정적인 성향을 보이게 되고, 훗날 김종직의 제자였던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왕이 죽은 후 임시로 설치한 실록청에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적어서 남기려 하자 유자광을 위시한 훈구세력들이 이를 빌미로 김종직의 시신을 꺼내어 부관참시를 하고 그의 제자였던 김일손은 능지처참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훗날 정암 조광조(기묘사화의 피해자)의 스승인, 김광필과 정여창은 유배를 가게 됩니다.
1/오유가 식민사관을 옹호한다는 것이 주장이 되고 그 주장이 분란을 일으키므로 비방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식민사관을 옹호한다고 하였으니, 왜 식민사관을 옹호하는 것일까? 라고 묻는 건 당연하고 이에 상호주고받음을 하는 것도 당연지사지요. 보통 주고받음이 있을 땐, 인정할 수 있는 파트와 필드도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평행선을 외치며 교차하는 곳을 애써 지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분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란이 확대 재상산되어 일반적으로 안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인신공격으로까지 퍼지게 되고 결국 비방의 영역으로 만연하게 되는 것이죠,
사족입니다만... 권력의 분배에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집중화되는 시스템을 느긋하게 중앙집권화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면, 현대의 소말리아는 독재와는 또 다른 지나친 권력의 고른 분배에 기인하여 부족끼리 눈치만 보는 상황에 있는 것 같습니다.. 국가의 번영을 이룩함에 있어서 중앙집권화된 시스템은 선택의 문제보단 하늘이 내린 명령이 아닐런지 생각합니다.
1/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개인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옆에서 어떤 충고를 하더라도 마음가짐이 바뀌지 않는다면 변하는 것은 없죠. 이는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과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만 해결하고자 하지만 결국엔 남는 건 고독감과 고통이라는 것을 말이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특히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이 독특한 세상에서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다보니 "스스로, 개인의 탓, 고독감"을 우리 모두 느낍니다. 그리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게 되어 남는 건 나 하나 뿐이고, 다른 이의 고통에 눈을 감게 되는 것이죠. 점점 내 자신은 파편화 되는 것입니다. 우월한 스펙, 학력, 그리고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길까지 다다름에 있어서 합리적인 인간이었을 수는 있어도, 과연 윤리적이었을까? 라고 물었을 땐 그렇다라고 말하기는 모호합니다. 윤리적일 경우에 손해를 보는 집단이 사람들이 선망하는 집단인 경우가 다반사니까요. 하지만 여러 사람들이 윤리적이라면 그들은 윤리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윤리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감화시켜 또 다시 윤리적인 공동체에 통합합니다. 이렇게 선순환 구조를 이루게 될 경우 남는 건 타인에게 눈을 감지 않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조선에서의 자기수양은 곧 권력을 의미했고, 권력의 안정화로 이끄는 수양을 위한 경연은 필수적이었습니다. 더욱이 주희가 말했듯이 희노애락을 겉으로 들어내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죠. 이러한 점이 반영된 조선 임금의 공부방법도 도덕적 수양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성찰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또한, 마키아벨리 같은 경우 종교, 도덕윤리를 정치와 분리하여 하나의 이용가치가 있는 수단으로 인식했으나, 맹자(왕도정치)는 도덕윤리와 정치를 동일시하여 정치를 함에 있어서 도덕윤리를 목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치를 잘한다는 것은 도덕적 교화나 감화를 매우 잘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이 통치이데올로기로 삼은 이것이 경연에 반영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조선을 설계한 자들이 유학자들이었니 말입니다.
비판적 사고는 과학혁명에서 말하는 과학사에서의 패러다임의 전환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갑자기 획기적인 전환을 이뤄서 비판적 사고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축적으로 계발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설령 "비판적 사고"라는 단어가 후대에 생긴 것이라고 하여 그 당시엔 그렇게 불리지 않았을지라도, 그 단어가 가리키는 속성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간에게 꺠우쳐지지 않은 하나의 잠재된 인식능력이라고 생각했기때문입니다.
범신론으로 유명한 스피노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만약 현재가 과거와 다르기를 바란다면, 과거를 공부하라" 작성자님의 문제제기와 문제의식은 그 이전과는 다른 사고의 틀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특정시험을 목적으로 하여 한국사를 공부했지만, 그 과목에서 배울 수 있는 텍스트의 단순암기에서 님께선 맥락을 읽으셨을 것이고 그로 인해 스스로 자문을 하셨겠지요. 그렇게 다들 시작을 합니다. 세상을 향해 자꾸 질문을 해보십시오. 지금 당장 변하지 않겠으나,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비판적 사고를 가진 분들이 모이고 모여 근대가 실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십시오. 근대는 아직 미완성 단계라고 말입니다.
고구려 장수왕 시기(5C)에 나타나는 양상은 다양한 스팩트럼을 보여준다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거품을 물고 쓸어지겠네요. 가야연맹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동부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물질적 증거들이 나오고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전라남도 고흥지역에선 상당한 규모의 고분이 발견되었으나, 상당히 충격적인 건 고대일본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유물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엔 안전한 항로를 경유한다는 전제하에 연안항해를 선호했고, 매장유물과 무덤의 규모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음을 근거로 하여 그 당시엔 그곳이 해안거점이었으며, 그 지역의 주도권을 고대일본계가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마한인이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떠한 양식으로든 한반도 남부지역에 일본계 유물 유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후반기 백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도 지역에서도 일본계로 추정되는 무덤이 일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청도 지역에 무덤이 있다고 하여 이곳에 고대일본의 영토가 존재한다고 볼 가능성은 열어둘 수는 있겠으나, 다른 가설보단 타당도가 떨어집니다. 문헌기록에서도 그렇게 볼만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고대일본에 백제성왕시절 일부 군사를 빌려주어 대신라전에 투입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므로 고대일본본토권력층에 기반을 둔 인물이 백제로 파견을 나오거나 이민을 와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뒤, 마련한 무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예전에도 학계의 유명한 노학자께서 국회에 몸소 나간 뒤, 국회의원들의 매우 공격적인 언사에 심기가 불편하여 국책사업에서 손을 때신 분도 계셨습니다. 또한 단순한 신념에 의거한 주장을, 신념을 근거로 삼지 않는 사람들에게 마구 쏘아 붙이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갈등관계 양상의 본보기입니다. 선출직공무원의 태생적 한계를 이런 형태로 보여주는 국회의원들에게 어느 정도 연민을 느낀 적도 여러번 있었으나, 정약용 선생의 책제목처럼 "삼가고 또 삼가라"를 뇌리에 새겨 놓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