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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포털사이트에게 6.25란?
[새창]
2012-06-25 17:37:3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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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이란 말이 '축하'나 '경축'의 어감이 있나 싶어 한 번 찾아봤는데..
---
기념 (紀念/記念)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
네이버 국어사전>검색어 '기념'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5575100
---
'기념'의 쓰임
질문]
6·25를 기념하여, 임진왜란을 기념하여, 한일합방을 기념하여, 유영철 살인사건 00년을 기념하여 등등 모두 가능한 표현입니까?
답변]
'6.25를/임진왜란을/살인사건을' 등과 같은 목적어에 대한 서술어로 '기념하다'를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기념(-되다/-하다)'은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함.'의 뜻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기념(-되다/-하다)'은 '결혼 기념/출판 기념/광복절 기념(행사)/결혼 20주년 기념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이것은 선생님을 처음 뵈옵는 기념으로 드리오니 웃고 받아 주소서.≪홍효민, 신라 통일≫/길이 기념되어야 할 거룩한 희생정신/국군으로 전사한 사내들이 그 산에 묻힌다는 것은 어떤 뜻에서라도 기념되는 일이다.≪김승옥, 동두천≫/3ㆍ1절을 기념하다/생일은 한 생명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우리는 장군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탑을 세웠다./그때 모인 모두의 의견이 그 탁월한 한국의 인물을 기념할 만한 책을 내자는 데 일치를 보았다.≪이병주, 관부 연락선≫'와 같은 문맥에서 쓰이는 것이 적절합니다.
네이버국어사전>우리말 길잡이>우리말 바로 쓰기
http://krdic.naver.com/rescript_detail.nhn?seq=611
---
정의 자체에 축하나 경축의 의미는 없습니다만,
그 쓰임상 6.25 등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서술어로 쓰이기엔 적절한 표현은 아니군요.
6.25'기념'일 이라는 표현보다는 6.25'추모'일 같은 표현이 더 적합할 듯 싶습니다.
20
국내 포털사이트에게 6.25란?
[새창]
2012-06-25 17:28:07
4
삭제
한국전쟁이 말 그대로 '기념'할 만한 날은 절대 아닙니다만,
그게 어디 애초에 좋은 일이니 축하하자고 정한 날인가요;;;
우리 민족이 겪은 전란이야 무수히 많습니다만,
당장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
그것도 한민족끼리 서로 죽고 죽였던 비극이니만큼
그 의미를 되새기자는 의미로 정한 날인데......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 그 의미를 다소 악용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좁게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감사에서 크게는 안보나 반전에 대한 재인식까지
오늘날에도 충분히 다시 한 번 기릴만한 가치는 있는 날입니다.
쳇2님 댓글을 보고 '아, 현충일과 의미가 겹치기는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 어찌보면 다시 의미 지을 필요도 있는 전쟁이니.....
통일이 되면... 그러면 별도로 6.25를 추모하는 날이 필요 없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하기 위해 피흘린 수많은 분들을 공식적으로 기리는 날인데
'전쟁의 역사를 뭐하러 챙기느냐(/한방파스 님)'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19
'민비'가 명성황후를 낮춰 부르는 말인가요??
[새창]
2012-06-23 23:07:4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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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비 : 민씨 성(姓)을 가진 비(妃 : 왕의 부인)
명성황후 : 명성(明成)이라는 시호(諡號 : 사후 추증되는 존호)를 받은 황후
사후에는 묘호 혹은 시호로 칭하는 것이 격에 맞는 표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지금이야 이름이면 그냥 본명 하나나 다름없지만
선조들은 누구가를 칭할 때 다양한 이름을 썻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에만 한시적으로 쓰이는 이름인 '아명',
지금의 별명처럼 본인 혹은 타인에 의해 일종의 애칭처럼 쓰이던 '호'
성인이 되어 받는 또 다른 정식 이름이나 다름 없는 '자'
등등 본명이라 할 수 있는 '관명' 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중에 사후에 누군가를 칭하는 호칭으로 시호나 묘호가 있습니다.
시호는 왕가의 일원이나 사대부가 죽은 뒤, 그 공적을 기리는 찬양하여 붙여지는 이름이고,
묘호는 황제나 왕 사후,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쓰는 이름입니다.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세종(世宗)
앞의 긴 이름이 시호, 뒤에 세종이 묘호가 되겠습니다.
시호의 경우 '충무공'의 예에서 보듯이 생전의 공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름인데,
왕의 경우, 극존칭으로 격식에 맞춰 그 공적을 다양하게 표현하다보니 긴 서술이 되버리는 경우가 많고,
종묘에 위패를 모실 때 약칭으로 혹은 그 시호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묘호를 쓰게 된 듯 싶습니다.
'명성황후'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듯 싶습니다.
말 그대로 '민씨 성을 가진 왕비'라는 애매한 호칭보다는
사후 정식으로 추존된 이름인 '명성황후'라는 호칭이 더 정확하고 옳습니다.
시호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도 그렇고,
조선조의 다른 왕비들과의 형평을 고려해도 그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ex.태종-원경왕후 민씨, 세종-소헌왕후 심씨, 세조-정희왕후 윤씨 등)
대한제국의 정통성이나 일제에 의한 비하/정치적 이용 등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평가함에 있어 고려해야할 요소가 더 있을 수는 있겠고,
잇자나요 님도 아마 그 부분을 궁금해 하시는 것 같은데...
한창 장황하게 써 놓고 맥빠지는 말이긴합니다만,
거기까지는 정리할 만큼의 역량이 되지 않는지라..
다른 분께서 추가 정리 가능할 듯 합니다.
어쨋든 다른 모든 것에 앞서서
'호칭' 자체를 놓고 봐서는 '명성황후'가 원칙임에는 분명하고,
'민비'는 그 격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잘못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
/첫번째불꽃
'민비'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민자영'이라는 개인을 칭하는 호칭으로 통용된 이름일 수는 있어도
'정식호칭'이라고 볼만한 근거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전이라면 '중궁' '중전' 등의 호칭이 정식일 것이고, 사후라면 그 시호가 정식호칭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으로 승격되지 않았다면 명성'왕'후 혹은 다른 시호가 추존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현종-명성왕후 김씨 가 이미 계시더군요.)
18
24살,23살 커플인데 아이가 생겼어요.
[새창]
2012-06-08 19:48:5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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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릴 수 있는게 추천 뿐이라......
어려울 때 서로 더 아끼고 사랑하는,
함께 있음으로 더 행복한 부부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 축하드립니다.
17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글 올려봐요.
[새창]
2012-06-06 20:44:2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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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건 종교게시판보단 역사게시판 쪽이 더 적절해 보이는데......
--
당시 미션스쿨 등을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의 활동 자체가
본래 목적인 '선교'만을 위해 이루어졌다는 인식은 좀 곤란합니다.
종교적 열의에 기반한 활동이었겠지만,
인도적 목적, 교육적 목적, 지적 호기심 등 실제에 있어서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로 선교활동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료나 구호와 같은 인도적인 목적의 활동을 펼치기도 했고,
다양한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발달된 서구 문물'을 '미개한 세계'에 전달하여 교화하는 활동도 활발했으며,
수많은 견문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서구 입장에서도 미지에 가까웠던 다양한 세계에 대한 탐구자로서의 역할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지 않겠다면 지식을 주지도 않겠다.' 는 식의 단순한 의도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장은 그 효과가 미미하더라도 서구의 다양한 문물을 전래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독교가 공인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활동했다고 보시면 될 듯 싶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기독교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말이나 외재적인 측면만을 받아들였다는 말이나..
아마 어떤 자료를 보고 하는 말씀이신거 같은데 좀 애매합니다.
1885년의 배제학당이 최초의 미션스쿨이니 19세기 후반인데,
시기상 각종 박해를 전후할 때이기도 하고, 당시가 극도로 경직된 유교사회임을 생각해보면,
미션스쿨을 통한 선교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만,
애초에 '기독교 정신'을 특별히 고차원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느냐도 의문이고,
어차피 미션스쿨을 통한 선교활동 자체가 그 대상자가 한정적인데 그들의 성향을 조선인으로 일반화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미션스쿨에 다녔던 학생들이 과연 신앙보다 지식의 습득에만 주력했었는지는 잘 모르는 부분이니 차치하더라도 말이죠.
그리고 미션스쿨 학생들이 실용적 지식의 습득에 주력하는 성향은
'동도서기와 같은 맥락'이라기보다는 '동도서기론에 기반한 행동'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입니다.
동도서기론 자체가
개화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미션스쿨의 설립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바탕이니,
당시 학생들의 성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겠지요.
16
생활에서 어디까지 신앙을 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새창]
2012-06-05 12:32:13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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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성당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모시라고 하느냐....
이 부분은 제가 냉담자다보니 확언을 드리기는 애매한데
교회보다는 훨씬 덜 딱딱합니다.
교인들간의 여러 종교적 활동 자체가 교회에 비해 활발하지 않은 것도 있고......
미사 참여 여부도 당연히 권장되고 장려됩니다만,
시간대를 옮겨 다른 미사에 참여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도 고해를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도......
뭐 이것도 사람따라 다르고,
단순히 제가 성당 내부 인적 커뮤니티에 덜 민감하다보니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외적인 신앙활동보다 내적인 신앙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조금 더 큰 거 같습니다.
15
생활에서 어디까지 신앙을 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새창]
2012-06-05 12:31:4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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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종교적인 분위기는 아니지만,
어려서 성당을 다녔고, 아무 것도 모른채 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냉담자'입니다.
고해 받은지도 까마득하고 미사에 나간지도 정말 오래됐으니
세례명이 있고 교적에 이름이 올라가 있을 뿐이지 사실 무교나 다름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유교적 가치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보니
종교관이나 기타 생각 자체도 '천주교인'이라고 하기엔 좀 과하게 인본주의적인 성향이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힘들거나 외로울 때는 가까운 성당에 있는 성모상을 찾고,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도 하느님에 대한 감사를 떠올립니다.
'부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는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고..
어찌되었든 전 스스로를 '천주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조언드리자면,
신앙 속에 삶을 놓지 마시고, 삶 속에 신앙을 품으셨으면 합니다.
BLUE 님은 현실의 '삶' 속에서 먹고 자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가며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난 집에서 구원만을 바라고 기도하다 죽은 사람이, 신께 왜 구원을 주지 않았느냐 묻자
방송과 이웃 사람을 통해 대피를 권고하고, 자동차와 보트를 보내 기회를 주었으며, 마지막엔 구조 헬리콥터까지 보냈으나
다 스스로 거부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시는 비유가 있습니다.
관념 속의 '구원'에 갇힌 일부 종교의 행태를 조롱하는 유머이긴 합니다만,
'믿음과 현실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여기고 신앙만을 유일한 가치로 놓는 것은 어리석음일 뿐이다.'
는 비유 본래의 의미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뜻이든 종교적 가치든 은총이든 뭐라고 부르든 간에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다면 그 역시 BLUE님의 삶 속에서 드러나리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이해불능 님께서 '믿음을 선택하라'고 하시는데
'믿음'은 논리적인 판단이나 어떤 목적에 의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주어지는 것'에 가깝고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서 개개인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를 믿는 것만이 가장 중요할 뿐 다른 것을 고민할 필요 없는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그 전지전능함을 인간의 관념과 믿음으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항상 고민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이유로 온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 속에서 항상 평온할지언정 현실에서는 항상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믿음을 가진자에게 약속하신 것은 '현세의 행복'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자에게 고난의 가시밭길을 예고하셨고 그럼에도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 이 말을
현실에서의 가치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역으로 현실에서의 가치를 지나치게 중히 여겨 믿음이 그 현실에 지배되는 것을 경계하신 뜻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생활을 분리해서 신앙을 우위에 놓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오히려 내가 미쳐 신경쓰지 못하는 무언가가 진정한 믿음을 지배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들을 제치고 신학을 배워야 한다.'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어떤 생각이 옳은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를 아는 것, 중요합니다.
스스로의 확고한 믿음과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든 흔들리고 삐뚤어질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신학과 성경을 모든 것의 우위에 놓는 것만으로 올바른 믿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치 않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믿기만 하는 것'은 맹종입니다.
배움에 있어서는 최대한 넓고 깊게 배우고 많이 생각하시고,
생활에 있어서 항상 생각하고 고민하시는게 옳습니다.
진정 내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사례 하나하나에서 내가 가족과 친지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무엇보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앙이라는 관념 자체를 통해 강조되는 믿음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소소한 생활 속에서 스스로 얻어지고 또 드러나는 믿음이 제대로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으로 '믿음' 그 자체만으로 증거되는 주님의 쓰임이 얼마나 독선적일 수 있느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의 사례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의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3:5-9)
제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할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인용하신 빌립보서의 원 문맥을 통해 보면 바울께서 어떤 의미로 한 말씀이신지는 뚜렷해 보입니다.
'배설물'로 여기신 것은 기존에 믿어왔던 유대율법과 그에 기초한 자신의 삶입니다.
바울은 기존 유대교의 입장에서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비방하고 박해하던 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이후 적극적인 포교를 한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BLUE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신학'이외의 모든 배움을 무가치하게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
신앙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는 BLUE님 스스로 찾아가셔야 할 부분입니다.
아예 무가치하다고 여길 수도 있고,
윤리적 판단 및 바람직한 사회적 행동의 기준 정도로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삶의 의지이자 안식으로 자리매김하는 경우도 많고,
모든 것을 넘어 삶 전체를 통해 믿음을 추구하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비슷한 가치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드러나느냐는 사람마다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 앞에 경건하고, 삶 앞에 충실하며, 스스로 그릇되지 않는 하나의 선으로서 믿음을 이해합니다.
이런 저런 현실적인 이유, 혹은 핑계로 신앙에 충실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런 잘못들이 제 믿음의 근본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여깁니다.
이런 제 기준에서 신앙을 모든 것의 우선에 두는 것은
오히려 '신앙'이라는 말에 스스로를 가둔채 그것에 만족하려는 핑계이고 허울에 더 가깝습니다.
교회를 얼마나 자주 가느냐, 성경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스스로의 삶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삶 속에서 다시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제대로 된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다보니 스스로가 한 없이 부끄러워지는데.......
스스로의 신앙을 찾고 삶 속에서 드러날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으셨으면 합니다.
14
종교의 자유는 꼭 지켜져야하나요?
[새창]
2012-06-05 04:06:0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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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불능
'인간세상사의 법으로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표현이 왠지 종교자유 문제를 법적/제도적 측면에서 접근한 제 댓글에 대한 지적이신거 같아서 이어 댓글 써 봅니다.
-----
1. 선결 - 논의의 폭
애초에 학생Ω 님께서 이 글을 올리게 된 배경이
'인문/사회 계열의 수업 중, '종교의 자유'를 주제로 삼아 토론을 해야하는 입장' 인가요
아니면 '(미션 스쿨 등에서) 종교 관련 수업에서 '종교자유'를 주제로 토론하는 상황'인건가요?
전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혹 후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시판도 종교 게시판이고 말이죠.
그런 맥락에서 종교의 자유를 신앙 자체와 관련하여 다룬다면,
이해불능 님과 같은 신학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겟습니다만,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종교 자유를
'유일 신앙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를 용인하는 것이 가능한가'
라고 좁혀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수행평가로 '신앙과 관련한 종교자유'를 논하는게 흔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찬성하는 쪽의 주장과 근거를 찾기는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2. 논의의 의미 - 종교 자유 논의의 사회적 의미(재정의)
교리 자체에 기초해 종교 자유를 판단하는 것은 개인 혹은 해당 종교 차원의 논의일 뿐, 사회적 논의로서의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유일신앙에 바탕한 극도의 원리주의적 종교가 있다고 치더라도,
그 종교가 국교로서 국민 전체를 강제하고 있지 않은 이상,
해당 종교가 종교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해당 신도 혹은 종교 차원의 문제일 뿐입니다.
결국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종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가치관을 기준으로 종교자유를 논하는 것은 원칙과 적용대상의 위치를 뒤바꿔버린 것입니다.
3. 적용 - 유일 신앙과 종교자유
특정 종교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 혹은 위험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부적인 논점과 실제 논의의 경중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유일신앙'이 '종교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위험성이 있음도 사실입니다.
또, 기독원리주의자들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지녔을 때, 종교자유가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타인의 신앙'인 '그들 종교'의 교리를 바꾸라고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니만큼
결국은 그들의 종교적 활동을 어느 영역까지 용인하거나 혹은 제약할 것인가의 문제일 수 밖에 없습니다.
혹, 종교 자유 자체를 부정하고 유일신앙을 강요하는 행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논의나 대응 역시 '종교자유'라는 사회적 제도를 적대하는 행동에 대한 규제.
즉 '종교자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신앙 자체에 대한 판단을 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유일신앙과 종교의 자유'는
'유일신앙을 종교적 자유의 틀 안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다루어야 하느냐'가 핵심인 문제이지
'유일신앙과 종교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놓고 다룰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4. 후결 - 제도로서의 종교자유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사회적 합의와 그 실체화인 제도라는 의미에서 '인간세상사 법으로서의 문제'가 맞습니다.
----
종교 자유를 놓고 '인간사 법의 문제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라.'고 하는 건,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애초에 '기본권'의 하나인 '종교의 자유'를 놓고 '법의 문제'가 아니라니요.
기본권 자체를 다루는 관점이 다양할 수는 있습니다만,
어떤 관점에서라도 '헌법으로 규정할만큼 중요한 사회적 합의의 핵심'임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생활을 실체적으로 규제하는 가이드라인일 뿐 아니라
각종 사회제도를 제도적으로 형성하는 뼈대이기도 하고
사상과 가치의 결정체를 명문화한 가치판단의 규범이 법이기도 합니다.
종교의 자유를 신앙으로만 놓고 보시는 것도 그렇고,
애초에 '법' 자체를 너무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보고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
유일신앙과 종교자유의 양립 불가
유일신앙과 종교자유를 대척점에 놓고 보시는 게 사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근본주의적 이슬람이나 유대교, 중세 카톨릭을 보면 그럴듯 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전 기본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순수한 신앙의 영역이라기보다
기타 현실적인 영역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사회적 혹은 역사/문화적, 종종 현실적 이유로서 경제적)
유일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공존을 천명한 카톨릭
특수한 세금을 내고 이종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던 이슬람
조금씩 한계가 있는 사례들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사례들을 통해 보면,
유일신앙과 종교자유가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이 오히려 지나친 과장 혹은 일반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
써 놓고 보니 뭔가 종교 게시판스럽지 않은 말들이 된 거 같기도 하네요.
뭐 꼭 '신앙' 만을 다루는게 '종교'의 전부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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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환장하는 사람들 국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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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16: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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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답글 하나로 전체가 안 올라가서 분리해서 올립니다.
중간중간 오타 및 수정과정에서 생긴 문맥의 어긋남 등이 있긴한데,
수정해서 올리려면 네 개를 다시 올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또 논리의 전체적 맥락에는 큰 영향이 없어보여 그대로 둡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 '경복궁에 환장한 사람' 도 아니고 '국보에 환장한 사람'도 아닙니다.
제목이 좀 지나치게 자극적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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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환장하는 사람들 국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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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16: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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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 - 역사관
각론적인 부분에 대한 반박보다는 아음아으우아 님의 역사관 자체에 대해서 집어봤습니다.
뭐 이렇게 말하는 저 자신도 다분히 부족합니다만,
아음아으우아 님은 조선에 대해서 또 역사적 가치에 대해서 지나치게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계신 듯 합니다.
애초에 유/무형의 역사를 평가하고 가치부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과거를 통해 오늘날의 우리를 제대로 알고, 그를 통해 미래를 정립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게는 개인의 일상 작은 부분들로부터, 크게는 사회 제도/구조의 근간이 되는 인식과 현실의 토대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이루어져왔으며 어디서 잘못되어 왔는지를 파악하고,
그를 바탕으로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실질적인 자료가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거시적이고 대단한 이유보다는 단순한 재미와 자기만족을 위해 이것저것 읽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만,
어쨋든 최소한 역사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단순히 내가 알고 있는 사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에 맞춰서
이것저것 자르고 비틀어 나가기만 해서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많은 것을 잃고 스스로 갇히는게 너무 당연해 보입니다.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좀 더 폭 넓고 깊게, 또 균형 있게 보려는 노력을 하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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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환장하는 사람들 국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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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16: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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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경복궁 훼손
그리고 일제가 경복궁을 훼손하고 조선총독부를 세운 것(이것 자체를 리폼이라고 표현하신 듯 합니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에서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식민사관에서나 볼 수 있을 수준의 우리 역사 혐오를
어쨋든 '우리 역사의 고귀함을 간직한 역사적 근거물들이 너무 많다.' 고 말하는 사람의 글에서 보게 되다니요.
2.4.1. 식민사관에 대한 기본적 이해
일본을 탈봉건을 통해 역사적 발전을 이룬 위치에 놓고,
조선을 봉건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은 물론 벗어날 의지와 능력 자체가 없다고 단정지은 후,
그 틀에 맞춰 모든 것을 제단하여 평가, 왜곡함으로써
일제의 조선지배를 정당화한 역사관
이게 제가 알고 있는 식민사관의 뼈대입니다.
2.4.2. 식민사관의 폐해
식민지배가 끝난지 60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식민사관'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들 합니다.
전 그 가장 큰 해악중에 하나가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 왜곡된 믿음을 뿌리내리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 얼마나 '조선' 그 자체를 혐오하고 있어야
식민지배를 위한 대형 건축물(조선총독부)을 만들기 위해 훼손을
'굉장히 잘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2.4.3. 역사 탐구 여부에 대한 의문
조선의 정치적 체제 자체를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고 계시는데
구체적으로 조선사회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형성하고 유지해 왔는지,
그러한 가치가 실제 생활에는 어떻게 반영되고 당시 백성(민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선 전체를 통틀어, 혹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었는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깊게 생각해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전근대적인 요소, 봉건적이고 신분제적인 요소, 분명히 있습니다.
지배층의 무능 및 부정부패로 인한 각종 부작용과 문제점.. 역시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착취나 지배, 민중이나 당파 같은 말로 단편적으로 이해할만큼 단순한 사회는 분명 아닙니다.
오히려 강점기를 통해 상당부분 일제의 입맛에 맞게 평가되어 왔고,
광복 이후로도 군사독재, 반공이데올로기 등에 갇혀 제대로된 과거청산과 역사관 정립이 이루어지지 못한만큼
과소 평가되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여전히 많은게 우리 역사 특히 조선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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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환장하는 사람들 국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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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15:5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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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경복궁/위인/국보
2.1. 아음아으우아 님의 역사 및 역사 교육에 대한 인식
아음아으우아 님께서는 어떤 방향성을 전제로 역사를 이해, 해석 및 평가하시는 듯 합니다.
신분제, 계급제를 바탕으로 한 불평등한 사회에서
그 구성원의 실질적인 삶의 질 향상을 보장할 수 있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올바른 역사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봉건적 체제 하에서 하층 신분의 희생을 바탕으로 건립된 경복궁,
단순히 봉건 체제의 상층부만을 교체한 이성계,
역사적 발전과정을 외면한 채 구체제의 수호에 골몰한 정몽주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고,
(이성계, 정몽주는 엄밀히 말하면 '당파싸움'의 주체가 아닙니다만.....;;)
이러한 건축물이나 인물들이 역사적 유산, 존경받는 위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과거의 역사 혹은 구체계를 미화하는 잘못된 역사교육의 결과물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듯 합니다.
2.2. 문제점에 대한 공감 및 문제제기
역사관을 정립하는 것보다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역사 교육의 주인 것도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혹은 봉건적 평가가 주입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공감합니다만,
아음아으우아님의 경복궁 및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서는
그에 못지 않게 지나치게 주관적인 태도, 우리 역사 자체에 대한 식민사관 수준의 부정적인 인식이 보입니다.
2.3. 경복궁
우선 게시물의 제목이기도 한 경복궁..
경복궁은 자본과 노동력이 투여되었으니 '혈세'와 '강제노역'을 통해 지어진 건물은 맞겠습니다만,
'왕족'들이 '놀고 먹기'위해 지은 건물도 아니고 '거대한 모텔'이라고 격하될만큼의 건축물은 더더욱 아닙니다.
2.3.1. 정치/사회적 기준으로 경복궁을 판단하는 것의 부적절성
아음아으우아님은 어찌보면 정치/사회적인 발전에 포인트를 맞춘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글에서도 '조선의 봉건적 신분구조'를 바탕으로 경복궁을 판단하고 있는데,
이런 관점과 그에 기반한 판단이 있을 수 있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치적, 사회적인 관점만을 가지고
'경복궁은 가치가 없는 건축물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뚜렷한 주관을 넘어 자기 주장만을 옳다고 보는 편협하고 독선적인 태도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사회적 기준 외에 미적/문화적 기준에서 경복궁은 충분히 '문화유산'으로 불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3.2. 경복궁의 미적/문화적 가치
우리가 경복궁에 감탄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건물의 배치, 건물들의 기본적인 구조와 각종 부속물, 건물의 기본형태 및 내장된 가구들을 통해서 독특한 조형미를 느낄 수 있고,
그를 통해 당시 조상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오늘날의 사회를 보다 발전되거나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생각의 단초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고 장황하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요약하자면 '기본적으로 아름답고 문화적인 사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2.3.3. 경복궁에 대한 아음아으우아님 판단의 문제점
개인적으로는 '착취를 통해 지어진 건축물'이라는 평가 자체가 옳지 않다고 봅니다만,
어쨋든 그러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것이 않겠습니다.
흔히 'fact'로 분류될만한 평가 대상도
동원되는 사료에 따라서 혹은 기본적인 역사관이나 당대에 대한 현실인식 등에 따라서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평가의 영역이 대상의 '가치'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부분으로 넘어가면 그 폭의 정도는 더욱 넓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실증'만으로 타당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힘들 뿐더러
가치의 영역 자체가 무한히 다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음아으우아님은 정치적/사회적 기준으로 경복궁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
다른 기준으로 판단한 경복궁의 가치 자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착취를 통해 지어진 건축물이기 때문에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들 의미가 없다.' 라고 한 발 양보하더라도
개인의 기준, 그것도 한 영역에서의 판단기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다른 영역의 판단을 재단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평가의 타당성과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다른 영역의 판단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거지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평가 자체를 무시하는 역사관.
아음아으우아님이 부정적으로 보는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을 실증하고 있음에 다름 아닌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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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환장하는 사람들 국보에 환장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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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3 15: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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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사변에 관해서
BESoul님께서 적절하게 비유해주셨습니다만 약간 더 정리하자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야욕이 일국의 왕비를 시해하는 가장 야만적인 형태로 드러났단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행적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말이죠.
이건 너무 정론적인거라 딱히 더 설명하는 게 민망할 정도인데......
애초부터 우리집 주인 행사를 하려는 욕심을 가진 이웃이
야밤에 안방까지 무단침입을 해서 우리 부모님을 죽인 사건인거죠.
아음아으우아 님 생각을 비유에 적용시켜보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어머니였으니 그렇게 죽은 것도 결국 자초한 결과일 뿐, 이웃이 잘못한 건 아니다.' 정도가 되겠네요.
이명박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로 드신건 무슨 맥락인지 애매합니다만,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비판/비난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제한되거나 왜곡된 사실, 불확실한 주장에 근거하여 선동되고 있는 부분도 아니며,
단순히 생명의 가치를 놓고 일본을 비판하고 있는 사항도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만,
제국주의 일본이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은
그들이 저지른 패악 자체 때문인 것이지
뮤지컬이나 드라마 등을 통해 형성된 명성황후에 대한 추모나 애탄 때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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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자유는 꼭 지켜져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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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2 22: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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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상 종교의 자유
제20조 종교의 자유
제1항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제2항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우리 헌법은 일반 규정을 두어 종교의 자유를 명문화하고 있으며, 특히 정교분리와 국교부인을 특별히 규정하였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해석상 신앙의 자유/종교적 행사의 자유/종교적 집회결사의 자유/종교교육의 자유를 구체적인 내용으로 하고 있다.
-----
'종교적 자유를 반대한다'는 주장의 포인트를 잘 잡으셔야 할 거 같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부정한다'는 극단적인 입장은 취하지 않으심이 좋아보입니다.
종교적 자유의 가장 주된 내용은 결국 '신앙의 자유'입니다.
이는 어떤 종교를 믿고 따를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인데,여기에는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와, 개인의 종교적 선택으로 어떠한 불이익도 받지 아니할 자유가 포함됩니다.
내적 영역에 속하는 자유이고 사상의 자유와도 맞물리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하는 것은 논거를 대기도 매우 까다롭고 기본적으로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종교적 자유를 특별히 보장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주장을 정리해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1. 이론적 실체
종교의 자유를 자세히 분석해보시면, 별도의 독립된 내용을 실체로 하는 권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자유도 그렇고, 종교적 행사/종교적 집회결사/종교교육의 자유 등은
말 그대로 '종교'의 영역에서 각종 자유권이 특별히 보호됨을 의미하는 것이지
별도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절차적 보호규정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굳이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보호하지 않더라도,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기본적인 자유권의 영역에서
충분히 보호 가능하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구체적으로는 다소 무리가 있는 구성이 될 소지가 큽니다만,
굳이 종교적 자유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시겠다면 또 못할 것도 없어보입니다.)
2. 역사적 형성 배경
많은 이론적 탐구와 사례 분석를 통해 현대적, 한국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만,
'기본권'은 근대 유럽/미국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온 것을 그 기본틀로 삼아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종교의 자유'라는 기본권 자체가
특정 종교가 강제되었던 서양 중세의 역사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종교'를 독립시켜 특별히 보호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종교적 기본권이 형성되던 시기와 현대사회의 종교적, 사회적 환경의 차이를 정리해 보는 것도 근거가 될 수 있을듯 싶습니다.
3. 현실적 오/남용 (부작용)
'종교의 자유'가 가지는 부작용에 대한 것도 근거삼을 수 있습니다.
비과세 문제, 각종 행정상의 특례, 사이비 종교와 같이 '종교의 탈'을 쓰고 일어나는 각종 부작용 등 자료 찾기는 매우 쉬워보입니다.
'이론상의 종교의 자유'가 가진 타당성과는 별도로
'현실에서 종교의 자유'가 어떻게 악용되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삼아 몇 가지로 유형화 해 정리하신 후,
이런 이유로 종교적 자유를 특별히 보호하는 것은 과도한 특례를 넘어 탈법의 온상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도 상당히 설득력 있을 듯 싶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종교'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기반한 악의적 왜곡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중립적 시각이나 적절 수위의 조절에 신경쓰시는게 필요할 듯 싶습니다.
아무리 토론을 위한 입장이라고 해도 원체 민감한 부분이다보니......
요컨데,
'종교의 자유'란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특정 영역에서 강조된 권리일 뿐,
독립된 실체가 없는 만큼 기본적인 자유권의 권리 구성으로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 권리이며,
종교적 자유권의 남용에 대한 제도적인 보완이 미비한 현실에서 악용될 소지가 크고,
현실에서도 실제 악용되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으므로
'종교의 자유'를 특별히 규정하는 것은 과도한 보호이다.
정도로 주장하시는 것이 가능할 듯 싶습니다.
-----
찬성 쪽 입장에 대한 반론은
찬성 쪽에서 어떤 논거를 가지고 오느냐에 따라 다를거 같습니다만,
어떤 주장을 하든 '종교의 자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자유의 특수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대응하시면 될 듯 싶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사상이나 양심과 같은 사상의 일부로 종교를 이해하는 것도 꼭 불가능하진 않으니 말이죠.
-----
개인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특별히 보호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싶어서 써 본 것이니...
그냥 뭐......도움 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특히 '종교'와 관련된 토론은
내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공격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는거 매번 주의하셨으면 합니다.
토론을 하자는 거지 싸우자는게 아니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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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10: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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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지'라는 말,
(높은 곳에서) '떨어지다' 혹은 (평판이나 입지 따위가) '악화되다'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듯 싶은데,
유행어 정도로 알고 별 뜻 없이 쓰는 분들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주체에 대한 폄하 내지는 조롱의 의미를 지닌 표현입니다.
'운지'라는 말 자체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을 CF에 빗대 희화한 표현임을 조금만 찾아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 투신과 CF상 점프 장면의 '떨어진다.' 는 이미지의 유사성.
2. 퇴임 이후 정치적 부담감을 내려놓은데 대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CF에서의 '나는 자연인이다.'는 카피문구가 함축한 의미의 유사성
(퇴임직후 소회를 묻는 질문에 '홀가분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또 봉화마을에 도착해서 귀향인사를 하면서 '아~ 기분좋다~.' 라고 하신 건 유명하죠.)
이 둘을 바탕으로 '운지'라는 말을 '떨어지다'로 재정의하면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의 이미지를 덧씌운 표현입니다.
일종의 정치적 풍자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희화한 '쥐박이'나 기타 다른 정치적 풍자에 비해
'운지'가 더 악의적이고 저질이다 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 자체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풍자'는 기본적으로 대상의 가치를 깍고 조롱하는 행위입니다.
'죽음'에 대한 '풍자'는 그 사람의 인생 전체에 대한 가치절하와 조롱이 되는 셈입니다.
즉, '운지'라는 표현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삶 전체를 가볍게 여기고 놀려먹는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을 덮고 미화하자는 말도 아니고, '예의'라는 허울로 권위적인 껍질을 만들자는 말도 아닙니다.
평가할 만한 부분은 평가하고, 비판 받아 마땅한 부분은 비판하는게 당연히 옳겠죠.
하지만 이런 식의 풍자는 기본적으로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옳지 않습니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친척의 죽음을 겪어봤다면 아시리리 생각합니다.
죽음 자체를 조롱한다는 건, 쉽게 혹은 가볍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이 부분을 뭔가 논리적으로 정리해보려는데 좀 어렵네요.
다분히 경험적인 근거입니다만, 아마 '죽음'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분이라면 공감하실 듯 싶습니다.
'죽음' 앞에서 겸손해지고 신중해져야 하는 이유가 무언지 말이죠.)
더군다나 고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상황의 해석이나 투신에 대한 평가가 어찌되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운지'라는 말은
정말 생각없는 혹은 악의적인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런 태생적인 이유로 지극히 자극적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크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할 표현입니다.
질문자께서 말씀하신 '오유에서 쓰면 안 되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오유는 '운지'라는 표현의 기원을 알고 그에 내재한 조롱을 감지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공간이고,
또 그 표현의 '비인간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에 더하여,
그 표현을 만들고 주로 쓰는 사람들의 '정치성'에 불쾌감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이는 공간인 듯 싶습니다.
당연히 오유에서 '운지'라는 표현을 쓰는 건, 분란을 조장하는 행동이 되겠지요.
비단 '오유'에서 뿐 아니라 사회에서, 일상 생활에서도 '운지'라는 표현을 안 쓰셨으면 합니다.
비인간적인 표현, 생각이 없거나 악의적인 표현이고, 분란을 조장할 소지가 큰 표현임에는 분명하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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