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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설명 할 수 있나요?
[새창]
2014-06-21 22: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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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명령"이라는 말의 뜻 자체가 "다른 이유가 조건으로 붙지 않는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정언명령에는 따라야 할 다른 이유가 없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무가 됩니다.
물론 그런 정언명령의 개념은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약간 억지스럽다거나 말 짜맞추기처럼 느껴질 수 있는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비판을 할 수도 있구요. 다만 칸트가 왜 이런 소리를 했는가, 의 관점에서 추적을 해보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명령은 가언명령이죠. "배가 고프다면, 밥을 먹어야 한다"와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뭐든 이유가 있게 마련이라는게 상식적이니까요. 그러나 모든 것에 이유가 있다면 이유에 또 이유를 달고 그 이유에 또 이유를 다는 식으로 무한히 반복될 수 밖에 없겠죠. 따라서 이 무한퇴행의 사슬을 끊기 위해 더 이상 이유를 달 수 없는 어떤 궁극적인 명령의 개념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정언명령의 개념이죠.
정언명령을 조건이라는 논리적 측면에서 보면 위와 같은데, 정언명령이라는 의무를 우리가 왜 따르는가, 라는 동기의 차원에서 보게 되면 또 다른 개념이 나옵니다. 그게 칸트의 유명한 "선의지"죠. 애초에 선한 의지가 없이는 의무고 뭐고 그냥 자극에 반응하는 아메바처럼 충동적이고 야만적으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무를 의무로 인식하는 능력을 인간이 가지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인간에게 선의지가 먼저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라는게 칸트의 논증입니다. 따라서 의무를 의무로 인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선의지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선의지가 없이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며, 다만 인간의 탈을 썼을 뿐 동물이나 미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297
선과 악이란게 실재 할까요?
[새창]
2014-05-14 07: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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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는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사이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천이성비판의 논증을 근거로 선의 개념을 말해볼 수 있습니다.
일부에게는 좋고 일부에게는 좋지 않은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선이냐 악이냐? 라는 물음은 그 자체로 모순적입니다. 일부에게 무엇이 "좋다"고 말하는데에 이미 하나의 좋고 나쁨의 기준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좋음을 사유할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죠. 따라서 좋음은 어떤 대상의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사유의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이 관념이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가지게 되면 플라톤을 끌어올 수 있겠지만, 관념이 다만 관념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한에서, 우리에게 사유되는 그 관념의 내용만을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296
공인의 가족의 의무에 대해...
[새창]
2014-04-25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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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부터가 법적인 맥락에서였으나 맨 처음에는 그것이 명확하지 않았을 수는 있었겠군요. 혼동의 소지를 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권리가 성립이 되는지"를 질문하셔서 바로 부연설명을 하였으니 그 부분은 미리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법적인 맥락 밖에서 "권리"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법적인 맥락에 포함되지 않은 권리가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면, 그 권리는 마땅히 법적인 맥락으로 편입되어야 하나 아직 법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실정법의 한계를 말하는 것일 뿐, 엄밀히 말해서 법적 정당성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권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저로서는 저의 시각이나 주관적인 의견으로 한정되어야 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해서 말하려고 신경쓰고 있습니다. 고깝게 들리실 수 있겠으나 관점의 다양성을 전제하고 이야기할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이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언론의 본질은 무엇이다, 라는 문제는 다소 전자에 해당한다면 합법적인 것은 합법적이다, 와 같은 경우 후자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 외에 태도나 어투에 관한 부분은 어떤 의견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굳이 논박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소모적이 될 것 같으니 굳이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논박은 다만 내용에 관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295
공인의 가족의 의무에 대해...
[새창]
2014-04-25 06: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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헙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할 합법적 권리를 가졌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동어반복입니다. "합법적인 것은 합법적이다"라는 수준의 말입니다만...지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은 저 문장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맥락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회윤리나 언론의 역할 같은 것 말이죠. 그 맥락에서는 충분히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 계속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맥락이 합법성보다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다고는 말한 바가 없습니다.
294
공인의 가족의 의무에 대해...
[새창]
2014-04-24 20: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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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실관계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러므로 언론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어떤 보도든지 할 (합법적) 권리를 가졌다"는 것일 뿐, 언론의 도덕적/윤리적/사회적 의무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언론윤리에 대한 판단은 당연히 다를 수 있으며 이는 언론의 본질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투원투원님은 "이익"이라는 다소 모호한 가치를 말씀하셨는데 보도를 통한 이익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혹은 보도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이익이 무엇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모호해지는 것이죠. 한국의 연예인들이 가장 많이 타는 자동차 브랜드가 무엇인지를 보도하는 것의 이익은 무엇일까요? 영국의 왕세자비가 홍차에 무엇을 넣어 먹는지를 보도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 "언론"이라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는 셈입니다. 그 점을 중심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지요.
293
공인의 가족의 의무에 대해...
[새창]
2014-04-24 11:4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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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댓글에서 제시하신 기준은 긍정적인 기준입니다.
"~~~하다면, 보도를 해도 된다"라는 형태죠.
제가 제시한 것은 부정적 기준입니다.
"~~~하지 않다면, 보도를 해도 된다"라는 형태입니다.
제시하신 긍정적 기준은 이익이 손해보다 큰 경우에만 가능하다라는 것이고, 제가 말씀드린 기준은 정당하고 적법한 절차에 의해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주장이 아니라 사실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기준을 비교하자면 굳이 한쪽이 더 엄격하고 한쪽이 더 관대하지는 않습니다. 손해가 더 크더라도 정당하고 합법적인 경우와, 이익이 더 크더라도 합법적이지 않은 경우를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292
공인의 가족의 의무에 대해...
[새창]
2014-04-24 09: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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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이 시건을 보도할 권리가 있느냐?라면 물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당사자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말이죠.
반면 언론이 이 사건을 보도할 의무가 있느냐?라면 얘기가 조금 복잡해집니다. 정몽준의 책임 여부를 떠나 정몽준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의 일부에 반영될 여지가 있는 내용이므로 알리는 것이 공익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이를 일부러 보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치부의 은폐로 간주될 소지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언론은 패리스 힐튼의 애완견이 어떤 사료를 먹는지, 강호동이 입은 옷의 브랜드가 무엇인지까지 보도하기도 합니다. 언론이 신속함과 정확성,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언론의 보도 범위를 정의하는 문제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게 마련입니다.
291
공인의 가족의 의무에 대해...
[새창]
2014-04-24 03: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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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먼저 정몽준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들의 발언 내용에 동의하지 않음 --> 자신과 자신의 아들은 해당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
아들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했다 -->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켰다면 아들은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졌을 것이다
즉, 자식이 부모와 다른 입장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부모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뜻은,
여기서 "제대로 된 교육"이라는 것이 교육자가 대상이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지도록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부모는 자식이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얘기가 되죠.
이를 뒤집어서 공인의 가족이 가져야 할 의무라는 개념을 여기에 가져오게 되면,
공인의 가족은 해당 공인의 입장에 동의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2. 1의 결론은 통념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가족 내에서도 가치관, 특히나 정치색이 판이하게 다른 경우는 몹시 흔하고 이것을 한쪽의 책임이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몽준의 아들이 무슨 입장을 가지는지 자체는 전적으로 아들의 자유이므로 아들에게도 의무가 없고 정몽준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때, 소위 "제대로 된 교육"이라는 것은 여기서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이 때에는 입장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해서 "아들이 자신 나름의 자유로운 의견을 가지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표현 방식이 옳지 못했다"는 정도로 말해보는 것이 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할 경우에는 저 학생의 발언 내용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태도나 표현, 어휘, 전달방식, 매체의 선택 등만을 문제 삼는 것이 됩니다.
3. 결론적으로, 만약 발언의 내용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라면 책임이나 의무를 말할 수 없고, 책임이나 의무를 말하려면 오직 내용 외적인 것에 대해서만 지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도한 책임/의무를 부과하면서 자유를 침해하게 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책임이나 의무를 묻는 차원에서의 얘기일 뿐, 이 사건으로 미루어 정몽준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리거나 그의 가치관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며 그것은 그 나름의 근거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자식의 자유로운 발언에 대해 실질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고 그의 아들이 단지 정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권리를 제한받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290
논리 구조를 새롭게 정의내리고자 합니다.
[새창]
2014-04-23 10: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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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에서 인용하신 구조는 논증 (argument)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서 알파벳으로 지칭된 각 요소들은 각각 하나의 명제 (proposition)입니다.
반면 아래에서 제시하신 구조는 명제의 구조입니다. 해당 구조는 하나의 명제를 구성할 때 최대한 유의미하고 명확하게 구성하는데만 관여할 뿐 그 명제가 참인지 아닌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리고 범주와 기준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서로 성격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위 구조는 다만 범주가 두개거나 기준이 두개인 경우를 나타내고 있을 뿐입니다. 술어논리학으로 간단하게 표현이 가능한 내용이니 한번 참고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고로 술어논리학으로 표현하게 되면 범주, 기준, 결론이라고 표현하신 세 요소 모두 각각 하나의 술어 (함수)로 정의됩니다.
또 첨언하자면 "19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라든지 "수소의 원자번호는 1이다"라든지 "만약 어제 비가 오지 않았다면 저 나무는 젖지 않았을 것이다"라든지 "모든 까미귀는 검다"라든지 "하얀 까미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든지 "2+3은 5이다"라든지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남자다"와 같은 명제들을 예시로 염두에 드고 생각해보시면 논리학/논리철학의 과제와 문제의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288
히읗님에게 질문입니다.
[새창]
2014-04-17 20: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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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이데아는 초월자가 아니라 실재라는 점에서 신학적 해석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피안의 세계 저 편 너머로 지연된 것으로서의 이데아가 아니라 참된 실재로서 당장에 직관의 대상으로서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앎의 성취를 내적인 초월로 표현하는 것에 어폐가 있는 것은 현상계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빛을 보는 과정일 뿐 인간에서 인간 아닌 무엇으로, 즉 인간의 밖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이성의 사유 속에서 이데아를 직관하는 지평은 더 이상 "나'와 "나 아닌 것"의 구분에 매여 있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의 근원이 내 밖에 있지 않다고 해서 진리의 근원이 "나"라는 어떤 주관주의적 자아라고 말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이데아가 동질의 것이라는 개념에서 볼 때에 그러한 주관-객관 내지는 자아-초월의 구분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 지평이 되는 것이죠.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철인치자만이 인간다운 인간이고 다른 계층들은 그에 미치지 못한 열등한 존재라고 보는 것 또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이 해석은 마치 모든 사람이 철인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기계적 평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에서 플라톤은 통치자가 구두장이보다 구두를 잘 만들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으며, 구두장이가 구두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까지 통치자가 일일히 지시하고 간섭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성취하는 것과 인간의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점은 기본적으로 조화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미시적 차원에서 한 인간 개체 (정확히는 인간 영혼)의 보편적인 인간다움을 논하는 것과 거시적 차원에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각 인간의 역할을 논하는 것을 기계적으로 일치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에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는 부분은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만약 플라톤의 철학이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이상 보편적인 타당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유에 있어서도 플라톤의 그러한 보편적인 사유가 제기하는 문제들과 관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력의 법칙이라는 것이 지구라는 환경에 친화성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라 지구를 비롯한 질량이 있는 모든 것을 다 구속하는 타당성을 가지는 법칙으로 말해지듯이 말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역사적/계보학적으로 접근해서, 기독교가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고대희랍철학으로부터 깊게 영향을 받고 수용/동화되는 과정을 거쳤다면 애초에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관계를 말하기 이전에 "기독교"라는 것의 아이덴티티 자체가 이미 고대희랍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유교와 한국의 관계를 두고 유교가 한국의 정체성과 친화성을 가진다기보다는, 애초에 한국의 한국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유교에 근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역학관계의 순서가 애초에 선제적인 것일 수 있다는 뜻이죠.
287
히읗님에게 질문입니다.
[새창]
2014-04-17 04: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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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와 이데아의 세계가 도달할 수 없는, 마치 칸트가 말하는 물자체의 개념처럼 우리의 유한성 밖 닿을 수 없는 저 편 멀리로 넘어가 버린 것으로 여기는 한 그 "다다를 수 없음"은 극복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물론 헤겔은 "한계에 대한 사유는 항상 한계의 안과 밖 양쪽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 그런 유한성의 사유 자체가 모순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꼭 헤겔식의 변증논리에 호소하지 않더라도 절대성/완전성을 분명히 간취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는 관점이 적어도 플라톤의 때에는 분명히 존재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플라톤에서는 이데아와 현상이 모방 혹은 모사라는 개념으로 연결되고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실체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형상론으로 이를 보다 현상 중심적으로 전개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오직 이데아의 세계가 실재의 세계이며 현상은 다만 모방일 뿐이므로 현상계는 어차피 불완전하며 어차피 의미도 없다는 식으로 실지 플라톤을 단순히 신비주의나 피안주의로 취급하는 것 또한 정당하지 않습니다. 실지로 플라톤은 모방이나 모사 외에도 "분유"라는 독특한 개념 또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상계 중심적인 성향이 이미 플라톤에서부터 나타나 있음을 증거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만약 플라톤이 단지 신비주의적인 입장이었다면, 동굴 밖으로 나아가 태양을 마주하는데서 동굴의 비유는 끝났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태양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시금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태양이고 그 진리를 찾아내 직관하였음에도 거짓과 모방, 불완전함의 세계인 동굴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플라톤에서 칸트적 계몽주의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을 등한시하고 천국만을 바라보는 듯한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전체주의의 선조라는 것보다도 기본적으로 전체주의를 문화/정치/역사적 맥락이 아닌 순수한 이론적 논리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당연히 위에서 이야기한 "참의 절대적임"에 가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전체주의를 전체주의로 만드는 것은 절대적 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외에도 그 절대적 참을 무엇으로 놓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은 말살되어야 한다" 혹은 "동성애는 용서될 수 없는 죄악이다"라는 것을 절대적 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와 "인간은 단순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절대적 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아예 절대적 참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할 수도 있겠으며, 그것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소피스트 비판에서 잘 다루어지고 있지요. 개인적으로는 절대적 참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보며, 다만 절대적 참을 어떤 양상으로 이해하느냐의 차이만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286
히읗님에게 질문입니다.
[새창]
2014-04-17 04: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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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데아에 비해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은 완벽을 추구할지언정, 완벽에 다다를 수는 없기 때문"이라는 논변은 가위나 나무에는 어느 정도 해당될 수 있겠는데, 결국 "절대적으로 완벽한 가위"라는 것이 애초에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느냐 라는 점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가위나 나무와 같은 사물에 대해서라고 "결국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고자 했던 것은 아니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사물의 경우를 일단 논외로 하더라도, 적어도 인간의 경우에는 완전해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으리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완전함이라는게 결국 상대적인 정도의 차이를 재는 척도 이상이 될 수 없는게 아니냐는 논변은 그렇기에 플라톤의 인간론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참인 것은 온전히 참이지 어느 정도 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 첨언하자면 이데아와 현상의 관계를 "분리" 내지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피안의 세계 정도로 이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물론 근대 이후 이는 쉽게 받아들여지는 입장이라고 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기에 완벽함 내지는 완전함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비현실적인, 피안에 속한 무엇, 초월적인 무엇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는 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결국 도달할 수 없는 무지개와도 같은 정점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기만 하는 인간의 유한함, 그러한 유한한 세계의 속한 인간의 한계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미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이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레고맨님의 비판은 그 자체로 정당하고 유효한 비판이기는 하나 이는 플라톤에 국한되는 비판이라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대부분의 철학에 전부 적용되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참인 것은 절대적으로 참인 것이며, 더 참인 것과 덜 참인 것 같은 식의 상대적 층위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더 참인 것 혹은 덜 참인 것이라는 것 또한 절대적 참이라는 기준이 있을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표현이며, 완전한 참이 아닌 이상 다만 절대적 참에 비추어 그 대상의 참임을 말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절대적이고 완전한 참된 이상의 개념 없이는 아예 불완전한 참이라는 것도 사유될 수 없다는 논리이며 그것이 플라톤을 비롯한 근대까지의 철학에 전해진 소크라테스 및 고대희랍철학의 유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짧게 말해서 이 절대성 혹은 완전성은 플라톤에서 "다다를 수 없음"이라는 식으로 사유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절대성/완전성이 사유된다는 것 자체가 그것에 다다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직 영혼의 최상위의 능력인 순수한 이성의 사유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하면 사유를 통해서는 분명히 다다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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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읗님에게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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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6 0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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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좀 늦게 보게 된지라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별다른 감정으로 남은 것은 없으니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일단 짧게 답변하자면 플라톤은 아레테를 성취불가능한 목표처럼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는가? 결국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완전한 이상은 닿지 못하는, 무지개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맥락에서 질문을 제기하신 것인데, 이 질문은 사실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죠. 어찌보면 이 맥락에서 플라톤의 철학 자체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구요. 특히나 인간을 타락한 존재 혹은 (낙원에서) 추방당한 존재로 묘사하게 되는 유대교적/기독교적 사상의 맥락에서는 그러한 문제제기가 더욱 강한 힘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그런 종교적 맥락에서도 "그러니 인간은 어차피 안된다"는 식으로 체념을 가르치지는 않죠. 특히 기독교적 사상의 맥락에서는 신의 은혜와 긍휼, 더 정확히는 죄사함/구원과 같은 개념을 통해 인간의 그러한 불완전함을 다시 완전함의 영역으로 (신의 은혜 안으로) 끌어올리는 논리를 설파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력으로는 불가능하고, 신의 초월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묘사가 되죠.
아주 거칠게 플라톤과 이런 맥락을 연결시켜 보자면 플라톤에서는 거기서 신의 은혜와 같은 어떤 초월적인 무엇을 밖에서 끌어올 필요 없이, 인간의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완전성의 달성이 가능한 셈입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크게 육체의 능력과 정신의 능력으로 나누고, 그 정신의 능력을 다시 욕망, 기개, 이성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나눈 뒤, 이성에 그러한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레테를 일반적인 대상 - 가위나 의자, 소, 나무 - 등에 적용할 때는 그것들이 제 기능을 하는, 그것들 본연의 탁월함을 가리킨다는 점은 아레테와 이데아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위의 이데아를 가장 완벽한게 구현하는 가위가 가위의 아레테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아레테는 무엇이냐? 이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앎 (에피스테메; episteme)입니다. 진정한 앎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고 이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서부터 물려 받은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대체 앎이란 어떤 것이고, 또 무엇에 대한 앎이어야 하는가? 플라톤이 말하는 앎은 실재 (reality)를 직관하는 앎이며 실재라는 것은 결국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 어떤 것을 보더라도 그것의 표면적인 불완전함을 꿰뚫고 진정한 그것의 본연의 이데아를 직관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모든 것의 아레테를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모든 것의 아레테를 아는 것이 인간의 아레테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는 인간이 가진 이성의 능력, 그 중에서도 최상위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플라톤에서 인간의 영혼은 물질에 속박되어 있는 현상계가 아닌 참된 이데아들의 세계인 실재계에 속한 것이라고 여겨지며, 이러한 현상-실재의 이분법은 모방-이데아, 육체-영혼 등에 전반적으로 투영되어 있습니다. homoiomeres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같은 것이 같은 것에 알려진다"는 것으로, 영혼과 이데아는 서로 동질의 것이므로 이데아가 영혼에 알려질 수 있다는 식의 논리를 말합니다. 이는 영혼은 원래 모든 앎을 가지고 있으나 이 현상계에 태어날 때 육체와 결합되는 충격으로 그 앎을 다만 망각하였을 뿐이라며, 앎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잊어버렸던 것을 다시 기억해내는 것일 뿐이라는 상기 (recollection)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상기론과도 깊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 메논 (Meno)에서 보면, 메논의 노예를 데리고 문답을 통해 이를 증명해보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문답을 통해 노예가 어떤 간단한 기하학적 정리를 스스로 유도하도록 함으로써 이 정리는 질문자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노예가 스스로 깨우쳐낸, 더 정확히는 "상기해낸" 것이라고 논증하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약간 한 발 물러서서 말하자면 플라톤이 아레테와 이데아에 대해서 길게 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은 아레테와 이데아를 직관하고 있으며 따라서 아레테를 성취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로 소크라테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간주되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는 부정적 화법을 통해 기존의 가치나 상식, 지식들을 파훼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는 반면 중기 대화편 이후로는 이것이다 저것이다 와 같은 긍정적 화법으로 단정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그러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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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5 07:5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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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시뮬라크르 이론은 현대 소비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고안된 이론입니다. 시뮬라크르화는 당연히 원래 부정적인 의미로 고안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차츰 사회철학보다는 형이상학으로 변질되면서 보드리야르는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역사의 전개라는 듯한 자조적 진단의 모습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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