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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기33님의 댓글입니다.
    번호 제목 댓글날짜 추천/비공감 삭제
    13 인간은 왜 이름을 부여하는가? [새창] 2012-02-07 23:54:51 1 삭제
    사람이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는 이유는 인간이 언어적 동물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째서 인간은 언어적 동물이고 그게 대체 무엇을 뜻하는가 따지는 것은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어서 논외로 하고
    그 행위가 인간에게 주는 현상만을 살펴보면

    1. 사람이 대상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사람은 비교적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2.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대상을 의미화하고 관념화할 수 있다.

    사람은 통상 두 가지 방식으로 외부환경을 인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미지와 언어적 인식인데
    이미지가 잠재적, 비논리적, 무의식적 사고를 주관한다면
    언어는 표면적, 논리적, 의식적 사고를 담당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관념적인 사고를 하며 그것을 의식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대상을 언어적으로 대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명칭을 부여하여 관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12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은 돈이다 [새창] 2012-02-06 02:47:52 0 삭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이 돈이다.
    사실 이게 얼마나 타당한지 설득하고자 글을 쓴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다른 행복을 위한 수단들은 돈과 비교하여 그 영향력이 적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100억을 놓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하는 연인을 선택한 남자는 100억을 놓쳤기 때문에 여자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이미 결정된 문제입니다.

    사랑보다 돈이 더 중요한 이유는 돈보다 더 중요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물론 드물게 사랑하는 연인을 선택한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에고에 불과합니다. 상대도 그것을 알아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을 돈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유는 모두가 이 돈을 넉넉히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걸 단정해 버리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해야 하죠. 그래서 단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생이란게 참 아이러니해서 돈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은 이상하게 행복하지 못 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돈에 집착하면 할 수록 돈에서 파생되는 행복의 가치가 점점 작아지는 거에요.
    이것은 행복을 너무 쉽게 살 수 있어서 나중에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돈을 최고로 여겨서 가족도 버리고 사랑도 버려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돈이 많다고 해서 집착한다고 해서 가족을 등지고 연인을 버린다는 설정은 잊어주십시요. 부자들이 훨씬 정서적이니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불쾌한 기분을 달고 삽니다. 격식이 없으며 자존심이 매우 낮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안정적이면 행복해하고 조금만 편안하면 날아갈 거 같고 조금만 인정해주면 기뻐서 날뜁니다.

    행복의 절대량은 부자에게 있지만 가난한 자들은 티끌만한 행복에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답니다.
    11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에 관한 질문입니다. [새창] 2012-02-04 23:59:31 2 삭제
    마이클슨 몰리의 실험은 빛이 항상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지구는 빠른 속도로 자전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과 자전의 반대 방향으로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상식적 측면에서 갈릴레이 상대론이 적용되어,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의 빛의 속도= 지구의 자전속도+빛의 속도 로 측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측정을 하니까 지구가 자전하는 방향의 빛의 속도=지구가 자전하는 반대 방향의 빛의 속도 로 측정이 됐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내가 고속도로를 100km로 달리고 있는데 나와 같은 방향으로 100km 속도로 달리는 차는 내 입장에서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반대반향에서 100km로 달려오는 자동차는 내가 보기엔 200km로 달려오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상대성을 갈릴레이 상대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빛의 속도만은 이런 상대성이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빛이 100km로 달리고 내가 100km 속도로 따라간다면 빛의 속도는 0 km/s 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내가 아무리 빨리 쫓아가도 항상 100km/s 의 속도로만 움직입니다.
    이것을 빛의 절대성이라고 합니다.

    대체 왜 빛은 상대성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요?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이유를 밝혀 내신다면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가 되겠죠.

    빛이 가진 이러한 절대적 속성때문에 다른 모든 대상은 상대적이게 됩니다. 절대적이라 여겨졌던 시간, 공간 조차도 상대적이게 되는 것이죠.

    빛의 절대적 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물체는 시간이 정지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빛의 절대적 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속도가 빨라지면 공간이 줄어드는 현상도 일어납니다.
    그래야만 빛의 속도가 일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마이클슨과 몰리의 실험을 바탕으로 상대성 이론을 창안했고 이 이론은 빛의 절대성으로 인해 다른 모든 조건들은 상대적으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피츠제랄드가 실험기구가 줄었다고 한 것은 빛의 속도가 유지되는 방향으로 물리현상이 일어나기때문에 공간이 줄어들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게 된 이유도 특수상대론에서 파생된 시공간 개념때문인데, 역시 빛의 속도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변하는 조건들입니다.

    속도=거리/시간 이죠?

    속도를 일정하게 하면서 거리가 줄어들려면 시간이 줄어들어야 하죠?
    이렇듯 속도를 일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함수로 엮어야 하기 때문에 시공간이란 개념이 생긴 것입니다.
    10 생각은 어떤 식으로 전개하는 걸까요? [새창] 2012-02-04 01:57:33 0 삭제
    사고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이 곳에서 얻기는 힘들 거 같습니다.
    생각의 기술 자체가 철학이고 현대철학에서도 그 답을 제시해 주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방법을 알았다면 인류는 생각하는 기계도 만들어 냈겠죠.

    그 보다는 보통 여러분들은 어떤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냐는 의문이 질문의 요지같습니다.

    이 문제의 가장 근접한 해답은 구조주의 철학의 방법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사고의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 구조의 틀로 사고를 한다
    원래 인간은 백지의 상태로 출발하기 때문에 경험을 통해 생각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여겨졌었는데 그렇지 않고 보편적인 구조가 있어서 사고의 틀이 정해져 있다고 보는 시각이 구조주의 철학입니다.

    구조주의 철학에서 파생된 프레임 이론 같은 데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도 일정한 틀에서 범위지어져 있는 것으로 서로 연관된 단어 구조에서 의식이 발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자체가 불특정 확률로 표상되는 게 아니라 어떤 관계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질문자께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우연히, 아무 이유없이, 불특정하게 떠오르는 것은 아닐 겁니다. 어떤 연결 고리에 의해 연상되듯 떠오르는 생각의 구조겠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라고 하셨지만 그것이 우연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어떤 사고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연상된 것입니다.

    참고로 왜 라는 의문은 생각 자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고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이랍니다.




    9 콜로세움이 열릴거 같은 문제 [새창] 2012-02-03 18:31:51 3 삭제
    생각보다 간단하게 풀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문제는 논리상, 상자 위에 서 있는 새의 무게와 상자 안에서 날아다니는 새, 곧 상자에 무게를 추가시키지 않는 새라는 상충되는 상황이 우리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논리란 사실 경험의 축적으로 생기는 사고의 패턴을 몇몇 구조적 방법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검증할 수 없는 전제를 기반으로 구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잘 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는 경우가 흔한 것이죠.

    위 문제와 같이 사고로 추정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 보면 생각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도출된 결과인데도 말이죠. 이것은 우리의 문제풀이 과정에서 실제와는 다른 설정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무튼 위 질문의 정답은 무엇이냐?
    1. 25그램이다
    2. 20그램이다.

    제 생각엔 실제로 측정을 해 보면 1,2 모두 답으로 나오지 않을듯 합니다.
    물론 문제의 의도로 보건대 답은 25그램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측정할 경우 저렇게 나오지 않을 거에요.

    어째서 25그램이 답이 되는지 추론하기 위해서는 대체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힘이 어떻게 생기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새가 날 수있는 힘은 몇 가지 양력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날개를 퍼득일때 공기와의 접촉으로 생기는 반작용으로 공기 유속과 반대로 생기는 양력이 한 가지 이고, 다른 하나는 날개 구조로 인해 위 아래에서 생기는 기압차로 날개가 끌어 올려져 날게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파리가 하늘을 날듯 빠르게 펄럭이는 날개운동으로 공기를 쳐 올려 나는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새가 공중에 날수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새가 공기 중에 있기때문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날 수가 없죠. 반작용이 발생하지 않으니까. 새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새가 오르는 방향과 반대로 공기가 움지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작용반작용에 의해 새가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가 공중에 떠 있어도 상자 무게가 변하지 않는 이유를 따져보겠습니다.

    5그램의 새가 공중에 떠 있기 위해서는 5그램 무게의 공기를 새가 떠오르는 방향 아래로 밀어내야 합니다. 그 공기의 움직임이 힘이 되어 5그램 무게를 추가하게 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울을 힘으로 눌러버리면 무게가 증가하는 걸 아실 겁니다. 무게란 일종의 힘입니다. 날개에 의해 공기가 밑으로 밀어쳐 내는 힘이 5그램정도여서 새가 공기 중에 있어도 무게가 변하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실험을 해 보면 새가 상자 위로 솟구칠 때, 날개가 펄럭이며 몸통 위에 있거나 아래로 움직여질 때, 공기를 밑으로 쳐 내는 힘의 크기가 일정치 않습니다. 아마도 2~8g 정도의 크기로, 하지만 평균적으로 5g 인 힘이 적용되기 때문에 실제 무게는 25g 위 아래로 계속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8 반성과 후회는 시간낭비다. 어차피 저질러질 수밖에 없었다. [새창] 2012-02-03 00:05:14 0 삭제
    제 생각엔 반성과 후회를 시간낭비로 단정하는 태도는 오해받기 쉬운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윗글의 요지가 반성과 후회같은 주관적인 판단은 살아가는 데 아무 보탬이 없고 객관적인 평가가 내가 잘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므로 내가 잘 되려면 반성과 후회같은 주관적 사고에 몰두하지 말고 객관적인 결실을 얻도록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해라 뭐 이런 겁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는 방식대로 돌아가더라를 근거로 주관적 사고가 가치없음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게 내 생각과 상관없이 세상이 돌아가는 거라면 뭐하러 내가 잘되야한다는 주관적 평가로 자신의 행동을 조정하려는 건지 의문입니다. 어차피 저질러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게 좋던 나쁘던 원래 그렇게 되야하는 거니까 설사 내가 잘 되지 않더라도 아무 상관없잖습니까. 어차피 나의 주관은 의미없으니까

    그래서 제가 보기엔 윗 글은 반성과 후회로 자기 자신에 갇혀 실제적으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 하는 자기 자신의 비난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타나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기 때문에 주장의 느낌이 반성과 후회도 않는 냉정한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도 진짜 본의는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7 공산주의에 대한 제 의견 [새창] 2012-02-02 01:26:19 5 삭제
    공산주의 논쟁에 있어 주의할 문제점은 일단 공산주의를 정치적으로 볼 것이냐 경제적으로 볼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유기적인 인간 사회를 분절적으로 나눈다는 게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나 의문이 들 수 있으나 작금의 공산주의 이론은 정치면에서 역사의 심판을 받은 상태이기때문에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으면 더 이상 논쟁의 가치가 없는 낡은 수단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공산주의 사회는 태생적으로 이론적으로 자본주의 경제 말기에 극심한 불평등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맑스가 주장했습니다. 그 방식은 민중혁명이며 우리가 알다시피 의도적인 혁명이 아니라 자연스런 혁명입니다.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의 편중화가 심화되어 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지며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혁명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혁명이기 때문에 누군가에 의해서 주도되어야 하고 그것은 정치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원래 공산주의 이론은 정치이론이 아니라 경제이론입니다. 경제이론이 설명되는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정치론이 추가된 것입니다.

    문제는 공산주의가 진행되는 경제이론에서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제대로 간파했던 반면 정치면에서는 여러가지 모순을 태생적으로 가지게 됩니다.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유산자의 재산을 강탈해서 공유화해야 되는데 그러자니 독재와 억압을 정당화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이 다분히 유토피아적이어서 현실과 동떨어진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죠.

    공산주의 논쟁에 있어 경제론 부분에서는 아직도 많은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부분에서는 역사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질문자께서도 이 부분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지지하는 이론이 과거의 실패한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새로운 방식의 공산주의인지 말입니다.
    6 아름다움이 추악함에서 왔다면 아름다움인지 [새창] 2012-02-02 00:50:32 0 삭제
    추악함에서 온 아름다움이라면 추악한 아름다움이겠죠.
    둘은 상반되어 동일선상에 둘 수 없을 거 같으나 얼마든지 같은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추악함과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하기도 합니다.
    추악함은 아름답지 않음을 도덕적으로 빗댄 단어로서 판단의 기준이 도덕율인데 반해 아름다움은 순수히 지각적 작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둘을 흔히 혼동해서 사용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을 보고 참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름다움을 미학적 판단 이상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도덕율을 제거한 순수한 지각작용으로서의 아름다움도 말합니다. 흔히 미학이라고 부르는데 도덕적 판단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미와 아름다움은 같은 의미이지만 다르게 사용되고 있어서 아름답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건조한 해석보다 노래가 시사하는 의미가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깨닫게 해 주는 바 인간으로써 추구해야할 아름다움의 가치가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5 왜 사람은 자신의 진심을 모르는걸까? [새창] 2012-02-01 12:00:00 0 삭제
    사람은 왜 자기 자신의 마음도 읽을 수 없나는 질문에
    간단한 답변은 인간의 인지력 대부분이 잠재의식으로 인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 사이에 명확한 관계는 드러나지 않고 본심은 복잡한 방식으로 숨어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므로 내 생각을 내가 모르는 것이 이상할 수 있지만 인간은 단순한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도 자신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등에서 하나의 학문으로 다루는 부분이니까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어서 나타나는 현상이 우유부단이고 우유부단은 여러 사회적 환경에 의해 개인이 억압받아 일어나거나 혹은 개인적 성향에 의해 판단이 느린 경우 발생한다고 피력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지만 제 생각엔 아마도 우리가 어떤 구체적 행동을 하는 이유는 경험을 통해 행동을 배우고 그것이 습관화되어 있을 때 일어나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경험이 없는 부분을 선택해야 할 때 우유부단한 행동이 나타나게 됩니다.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먹을 것인지 짬뽕을 먹을 것인지 결정이 어려운 것은 판단에 대한 정보 부족과 습관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나타나는 갈등으로 중국집에 자주 가는 상황이 되면 점차 빠른 선택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렇듯 인간 행동 패턴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 혹은 마음과 큰 상관이 없고 관습과 습관, 흉내내기 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4 악인을 모두 죽여 없앤다면 신세계가 될텐데 [새창] 2012-01-31 23:51:52 0 삭제
    악인이 사라지면 신세계가 올 것이다 는 명제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따져봐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신세계가 어떤 의미인지 한정하면 좀 더 나은 세상, 곧 긍정적 의미의 세계를 뜻합니다. 문맥의 의도와 편의상, 이것을 유토피아라고 정하겠습니다.

    1.사회학적 관점
    선한 사람들의 집합체를 유토피아라고 할 수 있는가?
    악인이 사라진 세계는 선한 사람들만 남은 세상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모여 선량한 행동을 할 것이고 그 행동들이 모여 선한 세상이 온다. 간단히 이런 등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단원자가 모여 고분자가 될 때 단원자와 고분자 사이에 밀접한 등질성이 존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물분자의 성질을 수소와 산소도 같이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사람이 모인 집단이 선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학적 통계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사라진 세상이 유토피아가 될 수 있는지는 매우 불분명합니다.

    2.철학적 관점
    피상적으로 볼 때 악인이 사라지면 선한 사회가 만들어 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선하다는 의미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이란 가치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가치판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하며 이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같은 행동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선하게 판단될 수 있고 악하게 판단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후보자가 당선을 위해 돈봉투를 돌렸습니다. 분명히 나쁜 행동인 것 같지만 정말 나쁜 행동이었다면 이 후보가 당선이 될 리 없지요. 하지만 당선됩니다. 왜 그런가요. 돈을 받는 당사자 중에는 이것을 꽤 배포가 큰 행동이라는 식으로 호의적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은 이렇게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떨 땐 선이되고 어떤 경우는 악이 됩니다.
    이러한 상대성은 선과 악이 떼어낼 수 없는 관계임을 나타냅니다. 선이 되기 위해서는 악이 존재해야 하며 악이 사라지면 선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악을 계속해서 제거해 나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나중엔 방귀를 뀐 사람이 사형을 당하게 되겠죠.

    결론:
    1.유토피아란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2.악은 제거될 수 없으며 판단의 기준만이 바뀔 뿐이다.

    p.s)악이 제거될 수 없다고 해서 불의를 못 본체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의란 악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잣대를 올리는 과정이니까요.



    3 무신론도 믿음일까요? [새창] 2012-01-31 19:27:42 0 삭제
    무신론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신론은 믿는 대상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지 않는가 라고 생각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가 하나 있습니다. 상자 안에는 구슬이 하나 들어있거나 없습니다. 상자 안을 확인할 방법이 없고 구슬의 유무를 판단할 방법이 믿는 방법밖에 없을 때,

    상자 안에 구슬이 들어 있다고 믿는 사람을 유신론자
    상자 안에 구슬이 들어 있지 않다고 믿는 사람을 무신론자로 나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상자 안에 구슬이 들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해당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p.s)우표를 모으는 것은 취미이지만 우표를 모으지 않는 것은 취미라고 할 수 없지 않나 라는 의문에 대해서
    위의 논리를 적용해 보면
    우표를 모으는 것은 취미입니다
    또한 우표를 일부러 모으지 않는 것도 취미입니다.
    그리고 우표를 모을 것인지 말 것인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취미가 없는 것입니다.
    곧 취미란 어떤 취향이나 호기심을 갖고 의도적인 행동을 할 때 붙이는 것으로 꼭 무언가를 수집해야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2 로봇은 이성이 필요할까? [새창] 2012-01-29 01:46:32 0 삭제
    미래의 로봇이 이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로봇에 국한된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이성을 염두에 두신게 아니라 주관을 지칭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란 이성에 의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주관에 의해서 얻는 결과물입니다.
    다만, 주관도 이성에 근거하여 생기는 능력이라고 할 때 의미가 있으므로 과연 로봇에게 이성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로봇에게 이성이 존재할 수 있고 이를 인간이 부여할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한 질문이라고 보면 몇가지 따져봐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대체 이성이란게 무엇이기에 사람도 아닌 로봇이 이를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성이란 뉴런이라 불리는 세포가 연결되고 끊어지는 작용으로 작동할 수 있는 물질 구조의 표현일 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할 수 있나?
    우리가 로봇에게 이성의 필요성을 따지기 전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질문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간단히 로봇만 한정하여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인간의 정체성의 확립이 선결과제인 것입니다.

    로봇이 이성을 가진다는 것은 이성이 2진수로 대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뇌도 따져보면 뉴런의 복잡한 연결로 이루어진 2진수의 디지탈로 표현할 수 있다면 사람과 로봇의 차이란 무엇일까요?

    로봇은 강철로 만들어져 있어서 사람과 다르다? 그렇다면 사람과 흡사한. 인공 장기, 인공 혈액, 근육으로 이루어진 안드로이드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안드로이드에 사람의 뇌를 이식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 복잡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로봇이 자유의지를 갖게 되어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는 우려 이전에 인간 정체성의 파탈이 먼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을 가진 좀 더 효율적인 의미의 로봇의 출현이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에게 영혼이 존재함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1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요 "과연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새창] 2012-01-29 00:58:12 0 삭제
    문맥을 살펴보니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해 달라 요구하신 거 같군요.
    단기님이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해 하신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운명론이 논리적 판단을 결정할 수 없는 애매함을 가지고 있어서 확증이 불가능한 추상어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따질 수 없는 것을 따지려 들때 생기는 의문같은 것인데 예를 들어 공중에 날아다니는 공기를 자를 들고 재려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이런 의문들은 대체로 '인간의 문제는 논리로 모두 해결 가능하다'는 잘못된 전제에 의해 파생됩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속시원한 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논파하시길 원하시니 그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1. 운명은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한 대상인가.
    2. 운명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더라도 근사적 방법으로 해결 가능한가.
    1의 설명
    초반에 밝혔듯 운명은 논리적 방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어서 입니다.
    갑이라는 사람이 모월 모일에 차에 치어 죽을 운명이다라고 했을 때 갑이 이를 알고 모월 모일 차가 없는 무인도로 가서 살아 남았다라고 합시다. 이것은 갑이 차에 치어 죽을 운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지 않은 걸까요 아니며 운명을 바꾼 걸까요?
    이는 전자도 아니고 후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둘은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차에 치어 죽을 운명은 분명 미래에 발생할 사건인데 이것을 사전에 결정하고 미래를 조작해서 살아남는 것은 논리적으로 배리가 됩니다. 죽을 운명과 살 운명을 논리적으로 같은 범주에 집어 넣고 따지려 드니까 모순이 되면서 논리적으로 아무 의미 없는 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자의 본래 의도인 논리적으로 운명의 변역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2의 설명
    그렇더라도 썩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혹은 연역적으로 설명은 되지 않지만 귀납적으로 설명 가능한가 하는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귀납적 방식의 대표적인 방법론은 실험적 연구 결과입니다. 흔히 과학적 사고라 일컬어 지는 것으로(실험 결과로 도출된 결과를 논리와 혼동하지는 마시고요)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하면 예측 가능한 미래는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죽어야 할 운명이 선명해지면 해질수록 죽지 않는 운명의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것으로 역시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이론입니다. 다만 실험적으로 그렇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를 운명과 대비해 보면 운명을 알면 알 수록 운명은 맞지 않는다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얻게 됩니다.
    나의 관상은 이러저러하니까 나는 이러저러한 삶을 살게 될거야 라고 단정하면 할 수록 나는 이러저러한 삶을 살지는 않게 된다. 일종의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죠.

    결론

    과연 운명은 바꿀 수 있나 라는 문제는 모순을 포함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하다. 양자 역학적 방식에 의하면 운명을 단정하면 할 수록 운명은 맞지 않는다.

    첨언) 운명이란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본래의 단어적 의미로는 운명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랍니다. 알 수 없는 없는 것을 아는 척 단정하는 것은 교만한 인간의 습성일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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