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부모님께서 목욕을 잘 시켜주지 않아서 냄새가 난 꼬질꼬질한 아이에, 소지품은 늘 너덜너덜한 더러운 아이였으니 놀릴만한 것들이 많은 아이였다.
주변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욕을 듣는 일은 쓸쓸하지만 견딜만 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묵묵히 견디면 견딜수록 왕따가 심해졌다. 심지어 내 물건이 부셔져 있거나 없어지고, 알게 모르게 버려지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는 내게 상당히 치명적인 일이었다. 특히 교과서는 찢어져도 쓸 수는 있지만 없어지면 정말 큰일이다. 필사적으로 괴롭히던 아이에게 매달려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런 필사적인 모습에 ‘뭐꼬, 기분나쁜 쉐끼. 개처럼 달려드네.’라고 비아냥 거릴 뿐이었다. 물건이 없어지는 것은 무서웠다. 실내화 같은 것은 맨발로 있으면 괜찮지만 교과서는 없으면 수업을 들을 수 없다. 더군다나 교과서를 부모님에게 잃어버렸다고 말 할 수는 없었다. 나에겐 왕따를 당하는 것 보다 부모님께 꾸지람을 듣는게 더 무서웠다. 그 아이는 날 비웃으며 집에 가버렸고, 나는 필사적으로 학교안을 뒤졌지만 내 교과서는 어디있는지 통 보이질 않았다.
우짜믄 좋노. 이카믄 내일 수업 도 몬들을낀데...
이대로 라면 부모님께 혼나는 수 밖에 없다. 무릎꿇고 빌어서 라도 책을 찾을 용기로 그아이 집으로 갔다. 날 맞이하러 나온 것은 그 아이의 어머니셨다. 날 괴롭힌 아이 집의 밥내음이 좋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소름끼친다.
그 아이 어머니 “어? 땡코친구가?” 나 “안녕하세요. 저 땡코있스요?"
불려 나온 땡코는 뜨뜻한 목욕탕에서 막 나와서 귀여운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눈물이 줄줄 새나왔다. 뭔가 깨는 듯한 땡코놈의 집 앞에서, 현관에서 무릎을 꿇은채로 “교과서는 좀 돌리주이소. 제발 부탁입니더...” 라고 흐느끼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읭?” 하며 땡코를 보자 그녀석은 시치미를 뗀다. 땡코 “점마 와카노. 난 모른다.”
애초에 막대라는 것은 특정 원자 또는 분자들이 전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임. 원자나 분자는 전자기력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 질량이 있으므로 중력도 있음.
회전운동의 문제점.
회전운동은 물체가 부러지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성립한다. 즉, 물체가 정지상태에 있을때 정지하려는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력 vs 물체의 결합력 순간적인 가속을 한다고 전제하면, 관성력이 물체의 결합력보다 커지는 순간 막대는 부러질것임. 이는 쉽게 이해 할 수 있는게... 긴 장대를 휘저으면 장대가 휘는것을 볼 수 있음.
색원료 분자가 특정 색만 반사하고, 파랑과 빨강이 섞이면 상호 흡수하기 때문에 아무색도 안남아야 하는부분에서 궁금한점은 색 원료 분자가 조밀하지 않을수록 보라색이 나타나지 않나요? 조밀한 정도에 따라 다르겟지만 쉽게말해 큰원료 분자덩어리가 남아 있으면 파란색의 역할을 할것이고, 큰 원료 분자가 주변 원료의 흡수에 비해 충분히 반사역할을 한다면, 잉크젯 프린터의 미세한 점들로 보라색이 표현 되지 않습니까?
반대로 생각하여, 과연 파동성과 입자성을 구분지을 필요가 있습니까? 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자에 대한 의문점으로 A일땐 a일 확률이 높고, B일땐 b일 확률이 높은채로 그냥 존재 할 뿐인것이죠. 말 그대로 그런 성질 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 합니다.
애초에 입자라는 것의 정의를 파고들다 보면 운동량과 위치를 정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뉴턴 역학으로 부터 시작된 존재에 대한 관점, 쉽게 말해 우리는 어떤 목표의 기준에 따른 변화를 바라보는것이 한계이기 때문에 (마치 입자를 공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가치는 수학적인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한계가 공, 아니면 진동처럼 보이는 어떤 움직임 뿐이고, 거기다가 여지껏 자연을 잘 끼워 맞춰 왔으나, 양자의 세계에서는 어려움에 도달 했고, 아- 이분법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초세계적인(=수학적인) 개념으로 수용하고, 밝혀가야 겟구나 하는 것이 지금의 한계라고 생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