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적에 맞춰서 대학에 입학했는데 기대보다 나오지 않는 성적에 스트레스 받고 있다는 간호학과 대학생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저는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제 고민이 스님께 너무 사소하게 느껴질까봐 걱정이 되지만 저는 요즘 이 문제로 너무 힘들어요. 고3 때 대입 원서를 넣을 때까지 뚜렷하게 가고 싶은 학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적에 맞춰서 과를 썼고, 합격한 국문학과와 간호학과 중에 취업이 쉽다는 간호학과를 선택했어요. 열심히 하면 적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공부가 너무 어렵고 재미없고 의욕이 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졸업을 해서 백의의 천사라는 간호사가 될 수 있을까요?
벌써 2학년인데 시간이 가는 게 무섭습니다. 그렇다고 그만둘 용기도 없고요. 왜냐하면 그만둔다고 해서 제가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게 없는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부모님께도 죄송하고요.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앞날이 걱정됩니다.”
“예, 걱정이 많겠어요. 그런데 제 조언은 그냥 다니는게 좋겠다는 거예요. 간호학과 말고 뚜렷이 꼭 해야 되겠다거나 죽어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이 없으니까 이럴 때는 하던 일을 그냥 하는 게 좋습니다. 저도 스님 생활이 딱히 재미는 없어요. 저는 이게 좋아서 하는 줄 알아요? (모두 웃음)
40여 년을 해 왔는데 이제 와서 그냥 그만두기에는 좀 그렇잖아요? 그렇다고 이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무 재미도 없어요. 그렇다고 이것을 놔놓고 다른 것을 뚜렷하게 할 것도 또 없고요. 그러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제가 고등학생 때는 공부할 때 참고서도 많이 있고, 공부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거든요. 물론 공부가 재미없었지만 그래도 공부를 하려면 할 수가 있었어요. 성적도 올릴 수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 대학교에 올라와보니까 교수님들은 수업을 책을 읽으시면서 그냥 진도를 나가시고, 저는 그 내용을 다 공부해서 시험을 쳐야 되는데 그 방식이 저한테는 너무 버거운 거예요. 그리고 과 특성상 외워야 되는 의학 용어가 많은데 제 머리가 안 좋은 건지 외우면 까먹고, 외우면 까먹고... 너무 성적이 안 나오니까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때 공부 못하는 애로 보는 것 같고...”
“못하는 게 사실이잖아요.” (모두 웃음)
“너무 자존감이 떨어지는 거예요.”
“괜찮아요. 지금 꼴찌해요? 중간쯤 해요?”
“저 정말 못하는 것 같아요.” (모두 웃음)
“학과에 정원이 몇 명이에요?”
“320명이에요.”
“그 중에 320등이에요?”
“아니오...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제가 잘못 해요.” (모두 웃음)
“그러니까 ‘못 한다’는 게 1등을 못 한다는 건지, 10등을 못 한다는 건지 100등 안에 못 든다는 건지, 중간도 못 한다는 건지, 꼴찌를 한다는 건지, 그 ‘못 한다’는 기준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 말은 질문자의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닌지 확인해 보려는 거예요.”
“제가 느끼기에 저는 꼴찌인 것 같아요. 저는 대전 토박이인데, 대학병원에 취업을 하고 싶거든요.”
“그런데 질문자가 서울대학교 들어가고 싶지만 성적이 안 되면 못 들어가는 것처럼 대학병원에 들어가고 싶지만 성적이 안 되면 다른 병원에 가도 돼요. 꼭 대학병원에 가야 될 이유는 없어요. 병원이면 되지요.”
“그럼 제 능력껏 그냥 가면 된다는 말씀이세요?”
“그렇지요. 그리고 간호학과 4년 다니면 저처럼 아무 것도 안 배운 사람보다는 아픈 사람이 생기면 간호를 좀 더 잘 할 거 아니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아, 그런데 제가 지금 22살인데 2학년이거든요. 1년이 늦어졌어요.”
“그건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래요?” (모두 웃음)
“예. 그 나이 때는 1년이 중요하겠지만 나이 들어보면 1년, 2년, 3년, 5년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저는 1년이 늦어졌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마음이 조급해요.”
“1, 2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에요. 20년도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는데 1년 갖고 난리예요. 나중에 돌아보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1년, 2년, 3년 재수했다고 엄청 늦어진 것 같지만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또 질문자가 잘 못 외운다는 문제도 걱정할 것 없어요. 졸업할 수 있는 수준, 즉 간호사 자격증만 따는 수준이면 돼요. 우수한 성적은 아니더라도 그런 수준은 돼요?”
“예.”
“간호대학 졸업했는데 간호사 자격증도 못 따는 수준이예요? 아니면 간호사 자격증 정도는 따는 수준은 되겠어요?”
“예, 자격증은 충분히 딸 수 있는데, 제가 욕심이 많은 건지, 제 성적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왜 스트레스를 받느냐 하면, 질문자가 스스로를 너무 높이 평가해서 그래요.”
“아, 그럼 저는 그만한 그릇이 안 되는 거예요?” (모두 웃음)
“질문자는 간호사 자격증만 따도 굉장히 기뻐해야 돼요.”
“아, 그러면 저는 대학병원에 취업할 그릇은 안 되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건 안 될 수도 있지만 한번 원서를 내보면 재수 없어서 될 수도 있어요. (모두 웃음) 재수 없어서 되면 다니는 거고, 재수가 좋으면 잘 안 될 거예요.”
“제가 졸업까지 2년 남았으니까 참으면서 졸업을 하면 될까요?”
“참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는 재미있게 다니세요. 참지 말고요. ‘스님 얘기 들어보니까 졸업만 하면 되고, 꼴찌라도 자격증만 따면 되는 거였네’ 라고 생각하세요. 운전할 줄 알아요?”
“못 해요.”
“운전을 배우면 한 번 만에 합격하는 사람이 있고, 열 번을 떨어지고 열한 번 만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누가 운전을 더 할까요?”
“열한 번 만에 된 사람이요.”
“네. 그 사람이 훨씬 안전하게 운전을 해요. 1번 만에 된 사람은 사고가 날 위험이 많고, 열번 떨어진 사람은 사고날 확률이 훨씬 적어요. 왜냐하면 과신을 안 하고 조심을 하니까요. 그리고 일단 열번 떨어졌든 스무번 떨어졌든 합격했으면 운전할 줄 안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거예요?”
“할 줄 안다는 거예요.”
“그래요. 한번 만에 땄느냐, 두번 만에 땄느냐는 게 면허증을 딸 당시에는 굉장히 중요한데, 일단 따고 나면 열번 만에 땄든, 한번 만에 땄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질문자도 1등이 됐든 2등이 됐든 10등이 됐든 꼴찌가 됐든 간호사 자격만 따면 되는 거예요. 자격증 딸 때는 1등이냐, 2등이냐가 중요하겠지만, 일단 자격을 따면 ‘간호할 수 있다’는 자격을 획득한 거잖아요. 여기서 몇 등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성적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그냥 공부하라는 말씀이세요?”
“그래요. 이제 머리가 잘 돌아가네요.” (모두 웃음)
“아하!”
“그러니까 일희일비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목표를 어디에 둬야 된다고요? 졸업에 둬야 돼요. 그런데 간호학과는 졸업을 하더라도 자격증을 못 따는 경우도 있으니까 질문자는 자격증 취득에도 목표를 둬야 해요. 꼴찌로 자격증을 따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현장에 가서 간호를 하다 보면 성적과 아무 관계없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잘 하는 사람이 실제로 중요하지, 많이 아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지식적인 건 아이패드 꺼내놓고 혼자 검색해 보면서 금방 찾으면 돼요. 아직까지는 시험 칠 때 외우는 능력이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다 아이패드 갖다놓고 검색해 가면서 시험을 치게 될 겁니다. 제가 어릴 때는 시험 칠 때 다 전자계산기 없이 암산하거나 계산해서 했는데, 요즘은 다 전자계산기 사용해도 돼잖아요. 그런 것처럼 앞으로 10년만 더 가면 일부러 외우는 건 필요가 없어질 거예요. 앞으로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해 집니다. 간호의 경우 ‘이 사람을 어떻게 치료하느냐?’가 중요하지 ‘이 근육 이름이 뭐냐?’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시대가 바뀔 거예요.”
“그런데 제가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것도 고민이예요.”
“하고 싶은 게 없는 건 굉장히 좋은 소질이에요.”
“아, 그래요?”
“예. 왜냐하면 아무 거나 하면 되기 때문이에요.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그 하나밖에 못하고, 그거 안 하면 괴로운데,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은 이거 해도 되고, 저거 해도 되니까요.” (모두 웃음)
“그런데 제 동생은 뚜렷하게 선생님이 되겠다고 해서 사범대학에 갔거든요.”
“동생은 나중에 임용고시에 떨어지면 굉장히 괴로워할 거예요.”
“그런데 제 동생은 제가 봤을 때 충분히 붙을 거예요.”
“되면 다행인데, 안 될 수도 있죠. 만약에 안 되면 괴로울 거란 말이에요. 선생님밖에 하고 싶은 게 없기 때문예요.”
“그럼 오히려 하고 싶은 게 없는 제가 더 나은 거예요?”
“훨씬 낫지요.” (모두 웃음)
“저는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없으니까 너무 한심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없을 수 있지?’ 하면서요.”
“그런데 그건 학교 선생님들이 자꾸 ‘너는 하고 싶은 게 뭐니? 너가 하고 싶은 걸 해야 된다’ 라고 잘못 교육을 해서 그런 거예요. 마치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은 큰 죄나 짓는 것처럼 됐는데, 토끼도 하고 싶은 게 없는데도 잘 살고, 다람쥐도 하고 싶은 게 없는데도 잘 살고, 노루도 하고 싶은 게 없는데도 잘 사는데, 오히려 하고 싶은 게 있는 인간들만 괴롭게 삽니다. 저도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요. (모두 웃음)
그리고 저는 스님이 안 되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우리 은사 스님 때문에 억지로 됐거든요. 억지로 됐어도 한 40년 하다 보니까 이력이 나서 지금 생각해 보면 스님하길 잘한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제 인생을 망친 것 같았거든요. (모두 웃음)
제가 보니까 질문자는 간호사하면 잘 할 것 같아요. 간호사 옷 딱 입고, 모자 쓰고 하면 얼굴도 괜찮고 하니까 잘 할 것 같네요. (모두 박수)
자격증 따서 갈 데가 없거든 저한테 오세요. 인도에 가면 가난한 마을에 학교도 있고 병원도 있는데, 그 동네는 의료상태가 무척 열악해요. 그래서 결핵환자도 많고, 애 낳자마자 절반 이상이 죽고 그러는데, 저희가 지난 20년간 열심히 해서 유아사망을 거의 멈추게 했어요. 그러니 거기는 보건소 수준이면 돼요. 보건소 수준이라면 의사 없이 간호사만 있어도 되잖아요. 질문자가 간호대학을 졸업한 수준이면 예방주사는 놓을 수 있을 거고, 예방의학 같은 걸 가르칠 수도 있잖아요. 간호대학 졸업해도 그런 거 못 해요?”
“할 수 있어요.”
“그래요. 졸업하고 저한테 오면 제가 병원장을 시켜줄 게요.” (모두 웃음과 박수)
“그러면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제가 스트레스에 정말 약하거든요. 그래서 탈모도 왔어요.”
“그런데 그건 안 돌아가는 머리를 자꾸 돌리려고 하니까 그래요. 안 돌아가는 머리는 가만히 놔놓으면 돼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질문자도 고등학교 때는 성적에 연연했을텐데, 고등학교 때 월말 고사에 수학성적이 90점이 됐든 80점이 됐든 그게 지금 내 인생에 영향을 줄까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러니 공부를 안 하고 일부러 농땡이 치는 건 영향이 있지만, 질문자가 그냥 최선을 다했는데 성적이 나쁘게 나오는 건 아무 영향이 없어요. 지금 질문자가 생각하기에 질문자의 인생에 대학병원 간호사로 취업하면 길이 활짝 열리고, 다른 병원에 가면 안 열릴 것 같겠지만 실제 살아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병원에 간호사로 갈 수 있는데 일부러 가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거기 안 간다고 질문자의 인생에 특별한 영향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절에 들어가서 학교를 그만뒀거든요. 그래도 이렇게 잘 살잖아요.”
“그러면 그냥 그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스트레스 받지 말라는 말씀이세요?”
“생각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생각은 해도 좋은데, 질문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라는 건 뭔가 되고 싶은데 안 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다는 거 아니에요?”
“예.”
“그러니까 ‘안 되도 괜찮다’ 라는 거예요. 성적을 1등 나오게 하려면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스트레스를 받게 되지만 ‘졸업만 하면 된다. 낙제만 안 하면 된다. 꼴찌라도 간호사 자격증만 따면 된다’ 이러면 마음에 여유가 생길 거 아니에요. 그러면 스트레스를 안 받지요.
그리고 탈모는 괜찮아요. 탈모를 막으려면 머리카락을 저처럼 깎아버리면 돼요. 저는 머리카락을 깎아버리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빠지는지, 안 빠지는지,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살아요. 그래서 젊게 살잖아요. 왜냐하면 저는 그런 걱정을 전혀 안하거든요. 질문자는 지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모두 웃음)
“제가 하는 게 쓸데없는 걱정이라고요?”
“질문자가 처음부터 ‘스님 보시기에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지만 저한테는 큰일이다’라고 하면서 질문을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들어보니까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모두 웃음)
그리고 질문자는 공부머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에요. 딱 그만하면 됐어요. 저보다도 나아요.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를 과대평가한다는 거예요. 1등 할 수준이 안 되는데 1등을 목표로 하니까 늘 스스로가 못하는 것 같은 거예요.“
“제가 제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한다는 거예요?”
“예.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데, 현실은 그 평가를 따라가지 못 하니까 스스로가 못난이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아, 그럼 차라리 제 그릇을 그냥 작게 두라는 말씀이세요?”
“작게 두는 게 아니라 원래 작아요.”
“아, 원래 작아요?” (모두 웃음)
“작은 게 좋은 거예요. 왜 꼭 큰 게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왜 사람들이 다 ‘그릇이 큰 사람이 되라’라고 말하는 걸까요?”
“그런 얘기는 다 헛소리예요.(모두 웃음) 그래서 사람들이 사는 게 다 힘든 거예요.”
“아, 그릇이 작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세요?”
“예, 작은 건 좋은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가 자꾸 커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문제가 되는 거예요. 자, 여기에 물병, 컵, 뚜껑이 나란히 있어요. 컵이 물병보다 크기가 커요? 작아요?”
“작아요.”
“그럼 컵이 뚜껑보다는 커요? 작아요?”
“커요.”
“그럼 이 컵 하나만 놓고 봅시다. 이 컵은 큰 거예요? 작은 거예요?”
“몰라요. 기준이 없으니까 큰지 작은지 말할 수가 없어요.”
“맞아요.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데 왜 스스로를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 컵은 원래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이에요. 그러나 뭔가와 비교를 했을 때 작은지 큰지 우리에게 인식이 됩니다. 그러니 이 컵이 크다고 인식될 때도 컵 자체는 큰 게 아니고, 작다고 인식될 때도 컵 자체는 작은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할 때 크다고 인식되기도 하고, 작다고 인식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컵이 이 물병 옆에만 계속 같이 있다보면 이 컵은 계속 작다고 인식이 되게 됩니다. ‘이 컵 자체가 크냐? 작으냐?’ 라고 물어도 ‘작다’라고 하게 되는 거예요. 거의 습관처럼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컵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데 ‘이 컵이 작기 때문에 내가 작다고 인식했다’ 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만약에 컵이 뚜껑하고만 계속 오래 있다 보면 나는 항상 이 컵에 대해서 ‘컵은 크다, 크다, 크다’ 라고 인식하게 돼요. 컵은 뚜껑하고 관계없이 컵 자체가 큰 것이라고 착각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인식 상에서 크다, 작다고 여겨질 뿐이고, 객관적 존재는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닌데, 그 인식이 지속되다 보면 마치 그 자체가 크거나 작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것처럼 질문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잘난 사람도 아니고, 못난 사람도 아니고, 키가 큰 사람도 아니고, 작은 사람도 아닌데,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하고 늘 같이 있다 보면 못하는 것처럼 인식이 되고, 못하는 사람하고 늘 같이 있다 보면 잘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우월감과 열등감은 이렇게 해서 생기는 것이지, 우리의 존재는 그 누구도 우월한 사람도 없고, 열등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전국에서 1등하는 애만 30명을 딱 모아서 한 반을 편성하면 거기에서도 꼴찌가 나오겠죠. 반대로 전국에서 꼴찌 하는 애만 30명 모아서 한 반 편성하면 거기에서도 1등이 나오겠죠. 그러니까 1등이다 꼴찌다 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질문자가 지금 이렇게 자신을 못나게 생각하는 건 기준을 너무 높이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에요. 질문자는 그냥 자기일 뿐이에요. 시험에 떨어졌다고 그게 못난이도 아니고, 시험에 걸렸다고 그게 잘난 이도 아니에요. 기준을 어떻게 정하느냐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질문자가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못난 존재도 아니고, 하고 싶은 게 있다고 잘난 존재도 아니고, 질문자는 그냥 질문자로서 완전한 존재예요.”
“마지막 말씀이 제일 좋아요.” (모두 웃음)
“그 말은 앞에 얘기해준 건 별 볼일 없다는 얘기예요?”
“아니오. 뭔가 확 다가오는 게 앞에서는 없었거든요.”
“그 얘기가 그 얘기지요.” (모두 웃음)
“스님 말씀 듣고 정말 느끼는 게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학교 계속 다닐 거예요? 안 다닐 거예요?”
“다닐 거예요.”
“그래요. 지금 그만 두고 재수해서 또 시험 쳐서 입학하는 것보다 그게 낫지 않아요? 간호사 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그때 간호사 일을 하면서 다른 걸 찾아봐도 되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무직 일을 하게 되더라도, 만약 질문자가 비행기 타고 여행 가다가 어떤 사람이 아프다면 질문자는 간호사 경력이 있으니까 그 사람을 간호해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 간호학은 직업으로 안 써먹더라도 익혀놓으면 좋은 걸까요? 안 좋은 걸까요?”
“좋아요.”
“맞아요. 그러니 간호학은 익혀놓으면 꼭 간호사를 안 하더라도 평생 유용한 기술이에요.”
“예. 정말 모르겠다 싶으면 스님 찾아가서 인도에 스님이 세운 보건소로 갈게요.”
“그래요, 자격증 따서 오세요.” (모두 박수)
질문한 대학생의 해맑은 반응에 청중들은 박수를 치며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궁금한 것을 서슴없이 되묻는 대학생 덕분에 오랜만에 아주 유쾌한 문답이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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