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동주를 보고 왔습니다. 시인 윤동주를 푸르고 시린 청춘으로 그려놨더군요. 일제가 아니라 구조 자체에 매몰당한 그의 청춘을 보면서 우리 청춘의 현재를 생각했고, 또 내내 울컥했습니다. 이를 리뷰에도 담을 만큼 글솜씨가 안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즐겁게 읽어주세요^^ |
▲ 별을 헤아리는 시인에게 일제강점기의 세상은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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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서정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과 고통을 외면화시키는 것이 시다.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 수백만 명을 몰아놓고 학살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면, 그 참혹한 내면을 대체 어떻게 시어로 표현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에 시인의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엄혹한 세상과 무력한 시를 부끄러워하며 펜을 꺾거나, 그 부끄러움마저 시의 재료로 삼아 어찌됐건 시를 쓰거나.
몽규의 세상과 동주의 세상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의 관계를 통해 윤동주의 선택을 재구성한다. 두 사람은 사촌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서 서로 관계하며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영화가 소개하는 윤동주와 그의 선택에는 언제나 송몽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시인 윤동주'나 '윤동주'가 아니라 <동주>다. 누구보다 애정을 담아 그를 '동주'라고 부르는 몽규를 이해하지 않으면 동주도 이해할 수 없다.
몽규는 동주에게 부끄러움이다. 영화 속에서 동주는 세상이 시로 바꿀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행동하지 않고 시를 써야만 한다는 사실에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발표하지도 않은 시 속에 은밀히 적었을 그 부끄러움이 영화에서는 몽규와의 대조를 통해 외면화한다.
몽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매사에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 또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문예지를 만들고 산문을 쓰지만, '인민의 의식을 고취'시키지 못할 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영화는 이 때 몽규가 이중스파이 이웅을 암살했다는 픽션을 덧대는데, 영화가 그의 손에 쥐여준 권총은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시만 쓰는 동주의 부끄러움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몽규는 동주에게 권총을 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독립운동에 좌절하고 지쳐서 돌아올 때마다 창밖에서 동주를 찾는다. 세파에 지친 몸은 집 안에 들여놓지 않은 채 "동주야" 하고 밖에서 부른다. 나아가 동주가 "너는 왜 나한테는 (독립 운동 하러)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느냐" 물어도 끝내 동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이 대비는 몽규가 조선인유학생들을 규합해 무장봉기를 계획하던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몽규는 함께 가겠다는 동주를 떼어놓고 조선인유학생들의 회합 장소로 떠나지만 곧 일본 경찰들의 습격을 받는다. 가까스로 몸만 빼낸 그가 하숙방 창문 앞에서 다시 동주를 불렀을 때, 동주는 "너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인 친구 쿠미(최희서)가 영어로 번역해준 자신의 시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께 도망칠 수 없다. 국가가 국가를 수탈하고 민족이 민족을 핍박하는 몽규의 세상과 동주가 시를 쓰는 세상은 이처럼 끝내 다르다.
시는 전체를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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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와 몽규는 평생 바로 옆에서 살아가지만, 그만큼 경계도 뚜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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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의 시는 정말 틀린 것이었을까. 영화 <동주>는 동주의 짙은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영화를 끝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시를 긍정하고 있기도 하다.
동주는 개인주의를 억누르는 전체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조선 민족을 억누르는 세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동주는 개인을 억누르는 모든 폭력과 제도에 저항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 몽규가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신윤주)과의 인연을 독립운동 자금줄로 이용하려 하자 동주는 반감을 드러낸다. '민족을 위해' 개인의 감정을 이용하고 매몰시키는 것 역시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주가 부끄러움을 고백하면서도 끝끝내 시를 쓰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시는 산문처럼 '인민의 의식을 고취'시키지는 못하지만, 개개인을 제 안으로 침잠케 함으로써 전체를 해체한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에롤 페트리지(숀 빈)가 예이츠의 시집을 읽다가 죽어가는 모습은, 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인을 구원하는지를 알게 한다. 동주의 시 역시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전체'라는 망령을 몰아내고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독립을 부르짖는 과정에서 각 진영이 강조했던 '민족'과 '이념'은 독립 후 분단의 단초가 됐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유대감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일본인들에게도 하지 않은 잔인한 학살을 민족 간에 일삼았다. 일껏 일본의 전체주의를 해체했더니 '둘 이상의 전체'가 생겨나 상반된 이상향을 제시하며 도처에서 개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그 때 이 땅은 어디 하나 가릴 곳 없이 아우슈비츠였다.
너는 시를 쓰라
결국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앞서 동주는 '시가 가능한 세상이라야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막을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그는 시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야심찬 시인이었다. 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펴낸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도 <병원>이었다. 영화 <동주>가 묘사한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이 일제강점기를 다룬 그 어떤 이야기보다 처참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바닷물 주사로 추정되는 주사를 맞는다.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에게 일본인 의사가 산수 문제가 적힌 종이를 던져준다. 임상실험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전체주의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개인을 찾아내려던 문재(文才)는, 일제의 알량한 실험을 위해 정신이 마비된 가운데 숫자를 헤아리면서 죽어갔다. 식민지 조선의 에필로그이자 분단 조국의 프롤로그로 기록된 뼈아픈 야만이었다.
그 야만에서 헤쳐나왔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오늘, 동주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헤아렸던 몽규처럼 담담하게 한 마디 전하고 싶어진다.
동주, 너는 시를 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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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의 그림자였던 두 사람의 인연은 사물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흑백 영화 속에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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