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입니다. | 육아노동일기
마중물샘 2012.10.30 16:40 http://blog.daum.net/dreamdriver/269
블로그 오랜만이다.
입덧하느라 블로그는 커녕 일상생활이 모두 정지되었다가 풀려났으니.
입덧은 몇 주 전에 끝났고 이젠 잘 먹는다.
벌써 배가 불렀고
곧 태동도 시작될 거라고 한다.
어제 산부인과에 가서 아들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철없는 이 엄마는 뱃속의 아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 기분에만 빠져서 울었다.
서운해서.
딸을 원했기 때문에..
사실 아들이라고 해도 담담하게 기뻐할 줄 알았는데
나 스스로도 놀랄만큼 서운하고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이쯤 되니
왜 이렇게 나는 그토록 딸을 낳고 싶었는지에 대해 하루종일 고심하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자로 사는게 얼마나 고되고 화딱지 나는 일인지를 떠올려보면 오히려 아들을 원해야 하는데
난 내 자식마저 그 차별과 억압을 당하기를 바란 거였나....
남녀평등에 대한 민감성이 자꾸만 커져가는 요즘이었다.
특히 결혼하고 나서부터..
명절이나 제사의 문화, 며느리의 지위와 역할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문제라고 인식하는 주제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성차별적인 관습들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아빠의 성을 따르는 것부터
처제와 처형과 대조되는 아가씨나 도련님의 불평등하고도 불편한 호칭.
심지어는 학교에서 남학생은 학급번호가 1번으로 시작하고, 여학생은 51번으로 시작하는것까지도 문득 문득 거슬렸다.
그랬던 나이기에
아들이라는 말은.
나의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이를 연상시키기 보다
남자지배구조인 이 세상에 '남자' 하나를 더 세상에 내놓는 일처럼 더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혐오하는 '남자'는 생물학적 모든 남성이 아닌데.
제도와 관습에 세뇌된 불평등한 성역할에 대해 한치의 의심이 없으며,
본인의 성에게 유리한 구조에 대한 각성없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남성들.
심지어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성들을 비난하는 남성들.
어머니를 착취해왔고, 아내에 대한 착취를 자연스럽게 바라는 남성들.
아무런 성찰없는 남성들.
그들에 대한 혐오인 것인데..
그것이 모든 남성에 대한 혐오로 어느새 확대된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성찰하고 각성하는 의식있는 남성으로 키우면 된다.
위에서 나열한 무지하고 이기적인 남성으로 키우지 않으면 된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답이 나왔다.
나는 바로 그것이 자신이 없고 두려웠던 것이라는.
여성이 불리한 사회구조에서
딸을 당당하고 실천적인 여성으로 키우는것은,
아니, 그렇게 같은 여자로서 딸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자신도 있었고 각오도 되어있었으며, 기대감도 컸다.
그런데 아들에게 여성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각성하고 실천하는 남성으로 키울 자신은...사실 없다.
일단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여지가 크다.
인류의 문제이고, 사회의 문제이고, 가정의 문제인데
남자들은 본인이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성의 문제를 외면한다.
내 아들을 나 혼자, 혹은 우리 가정에서만 키울 것이 아니기에 더 문제가 된다.
이 병든 사회가 같이 키워야 하니까.
그렇게 건강하고 의식있는 남성으로 키울 수 있을까
두렵다.
하지만 내 아들이 자라서
스스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여성억압적인 사회구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체화한다면
그것도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갑자기 불편하고 거북스러워진다.
그냥 딸이면 좋았을텐데..
하지만 이 마음을 돌려야 한다.
아기에게 더이상 미안한 마음 품어서는 안될테니까.
아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니까.
그저 사랑스럽고 귀한 내 아이일테니까.
아.. 이 복잡한 생각을 거두라.. 제발.
아이씨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