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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0 16:5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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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동일
안창호(1878~1938)
명연설가이자 신사…“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민족을 위해 먹고 잤다.”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외교·실력양성파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국력배양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상경해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를 설립하였다. 1905년 11월의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907년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중국과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임시정부 살림을 책임졌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이시영·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를 제창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출옥하여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사건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 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