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울산 출생. 1929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1년 학생 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이듬해 3월 병보석으로 가출옥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 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이런 그를 ‘여자 사회주의자 중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고 있었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남편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후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6년 6월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만에 풀려났다. 1927년 5월 근우회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병 보석으로 출감한 박헌영과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했다.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중국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던 중, 박헌영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박해를 받았다. 광복이 됐지만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인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