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hihi해님께 '백년전쟁'을 추천드립니다. 대통령이 되기전까지의 이승만에 대해서 아는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되어있습니다. 이해하기시 쉽게 나레이션=자막 버전으로 링크드립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XAA2ZBmj9jA&feature=share&list=PLe8PqJoXeD8Rb0Wijn_L6wZV8nE5btsoq&index=14
[아시아경제] [이야기가 있는 아침]6.25 초기의 대참사, 한강인도교 폭파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627082208753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6.25 전쟁 초기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피난민들로 가득한 한강 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예고 없이 폭파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차량과 군인, 민간인 800여명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쟁 발발 불과 3일 만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국군은 당황합니다. 이에 따라 한강 다리 폭파는 하루 전인 27일 오전 11시 군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됐습니다.
회의에서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28일 새벽 4로 폭파 시간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계획보다 일찍 다리를 폭파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다리 폭파계획은 군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강 이북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던 우리 국군 4만 명 가량이 퇴로가 막혀버렸습니다.
당시 이응준 5사단장은 폭파 계획을 뒤늦게 알고 중지를 명령해 참모들이 저지 하러 가는 중이었으나 한 발 늦었습니다.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 전 27일 이미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고, 국방부와 국방장관도, 다리 폭파를 명령한 참모총장도 이미 서울을 빠져 나간 뒤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방송에서는 국군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시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까지 했습니다.
결국 서울이 갑자기 고립돼 피난을 못한 12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납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나중에 서울 수복후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부역한 사람들마저 이적행위자로 처벌하였으니 여론이 좋았을리 없었겠죠.
당시 납북된 제헌국회의원 12명의 가족들이 최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폭파는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한편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로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어 냅니다. 명령을 내린 장군(명령자가 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은 그냥 두고 폭발을 담당했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켜 버린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그는 12년 뒤 재심을 통해 무죄 판정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아시아경제] [이야기가 있는 아침]6.25 초기의 대참사, 한강인도교 폭파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627082208753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6.25 전쟁 초기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피난민들로 가득한 한강 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예고 없이 폭파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차량과 군인, 민간인 800여명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쟁 발발 불과 3일 만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국군은 당황합니다. 이에 따라 한강 다리 폭파는 하루 전인 27일 오전 11시 군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됐습니다.
회의에서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28일 새벽 4로 폭파 시간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계획보다 일찍 다리를 폭파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다리 폭파계획은 군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강 이북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던 우리 국군 4만 명 가량이 퇴로가 막혀버렸습니다.
당시 이응준 5사단장은 폭파 계획을 뒤늦게 알고 중지를 명령해 참모들이 저지 하러 가는 중이었으나 한 발 늦었습니다.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 전 27일 이미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고, 국방부와 국방장관도, 다리 폭파를 명령한 참모총장도 이미 서울을 빠져 나간 뒤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방송에서는 국군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시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까지 했습니다.
결국 서울이 갑자기 고립돼 피난을 못한 12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납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나중에 서울 수복후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부역한 사람들마저 이적행위자로 처벌하였으니 여론이 좋았을리 없었겠죠.
당시 납북된 제헌국회의원 12명의 가족들이 최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폭파는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한편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로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어 냅니다. 명령을 내린 장군(명령자가 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은 그냥 두고 폭발을 담당했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켜 버린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그는 12년 뒤 재심을 통해 무죄 판정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아시아경제] [이야기가 있는 아침]6.25 초기의 대참사, 한강인도교 폭파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627082208753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6.25 전쟁 초기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피난민들로 가득한 한강 인도교가 국군에 의해 예고 없이 폭파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차량과 군인, 민간인 800여명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전쟁 발발 불과 3일 만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국군은 당황합니다. 이에 따라 한강 다리 폭파는 하루 전인 27일 오전 11시 군 수뇌부 회의에서 결정됐습니다.
회의에서는 시민들이 피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일부의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28일 새벽 4로 폭파 시간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계획보다 일찍 다리를 폭파시켜 버립니다. 게다가 다리 폭파계획은 군내부에서조차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한강 이북에서 북한군과 교전하던 우리 국군 4만 명 가량이 퇴로가 막혀버렸습니다.
당시 이응준 5사단장은 폭파 계획을 뒤늦게 알고 중지를 명령해 참모들이 저지 하러 가는 중이었으나 한 발 늦었습니다.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 전 27일 이미 대전으로 피신해 있었고, 국방부와 국방장관도, 다리 폭파를 명령한 참모총장도 이미 서울을 빠져 나간 뒤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방송에서는 국군이 서울을 사수한다고 시민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은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내용의 라디오 방송까지 했습니다.
결국 서울이 갑자기 고립돼 피난을 못한 12명의 제헌국회의원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납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나중에 서울 수복후에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북한에 부역한 사람들마저 이적행위자로 처벌하였으니 여론이 좋았을리 없었겠죠.
당시 납북된 제헌국회의원 12명의 가족들이 최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폭파는 고의나 과실에 의한 위법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소송을 기각했습니다.
한편 당시 한강인도교 폭파로 여론이 악화되자 정부는 엉뚱한 희생양을 만들어 냅니다. 명령을 내린 장군(명령자가 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은 그냥 두고 폭발을 담당했던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사형시켜 버린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그는 12년 뒤 재심을 통해 무죄 판정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3월 11일 vfsavafsv님의 베오베 한국 전후 현대사 최고의 사진 甲.JPG 도 추천드립니다. http://todayhumor.com/?bestofbest_152756 원문은 1987년 부산 태극기 사진이고, 댓글에 많은 사진들이 있습니다.
고명진기자 said "셔터 누르는 순간, 내 평생의 특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자구나, 내가 사진기자구나. 사진기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다만 이 사진을 당시 신문에 싣지 못했다. 서글펐다. 자극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사진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큰 것 같다. 내가 사진기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 사진이다."
그리고 2008년 5월 31일밤 ~ 6월 1일 새벽, 서울 종로구 효자동.
(저만 문제인가요? 이 글의 댓글에 사진첨부를 하면, 클릭해도 안먹히네요ㅠ 위에 한강철교 폭파도 사진을 올리려니 안돼서, 링크만 올렸어요)
4. 1950년 6월 25일, 대동강 철교 -> 6월 25일에 대동강? 6월 25일은 전쟁 발발 당일인데, 날짜가 틀린거 아닌가요? 그리고 대동강은 평양에 있는건데, 한강 철교(이승만의 명령으로 국군이 폭파한) 아니면 압록강 철교 사진 아닌가요? 저도 헷갈려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검색해보니, 위 사진은 1950년 11월 4일 미군 폭격으로 폭파된 대동강철교의 사진이네요. http://nasanha.egloos.com/10965336
한강철교는 이미 대전으로 피난간 이승만이 국민에겐 국군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당시 피난민이 다리로 피난을 가는 상황에서 폭파시킨겁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ivamd&logNo=10089374622 1950년 6월 28일 새벽 서울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깜깜한 어둠을 뚫고 시민들은 용산과 노량진을 잇는 한강 인도교로 끝없이 몰려들었다. 북한군 탱크는 남침 이틀 만에 미아리 저지선을 넘었다. '서울 사수(死守)'를 약속했던 대통령과 정부는 27일 새벽 남행 열차를 탔다. 당시 인도교는 한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단 하나의 철교였다.
4000여명의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한 발짝 떼기도 힘들던 2시 30분 무렵, 천지를 흔드는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인도교가 두 동강 나고 그 위에 있던 사람과 차들이 산산이 흩어지며 시커먼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북한군의 추격을 끊겠다며 우리 군이 TNT 3600파운드로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다. 정부도 군도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살겠다는 일념으로 다리를 건너던 양민 500~800명이 까닭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