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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7 15: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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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팔던 노인]
벌써 5여년 전이다.
내가 갓 레고 입문한지 얼마 안돼서 대구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가는 길에, 완구점으로 가기 위해 남대문 근처에서 일단 지하철을 내려야 했다.
남대문 근처 완구점에서 올드 레고를 파는 노인이 있었다.
7191 X-Wing을 한 세트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스타워즈 한 세트 가지고 에누리 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박스 손상 안되게 포장이나 잘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포장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싸는 것 같 더니,
저물도록 이리 완충재를 넣고 저리 테이핑을 하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싸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 시 간이 빠듯해 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싸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싼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요』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 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포장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레고 박스란 제대로 포장해야지, 싸다가 그만두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싸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파이프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박스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포장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가야 하는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남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된 셈이다.
집에 와서 레고 박스를 내놨더니, 아내는 또 레고를 사왔다고 야단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받은 것보다 포장은 잘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외 구매한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을 들어 보니, 완충재 뾱뾱이가 너무 많으면 겉 포장지에 짓눌려 박스 중간이 찌그러지고 부피가 커져 같은 무게라도 들기가 힘들며, 완충재가 너무 부족하면 박스 가장자리가 상처 나고 박스가 많이 흔들려 스티커가 구겨지기 쉽단다.
요렇게 잘 포장한 것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올드 레고 박스들은 이중으로 박스 겉면이 있어 내부의 스페셜 부품을 한분에 알아볼 수 있고, 내부에 트레이가 있어 부품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고, 스티커가 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요새 레고는 쓸데없이 박스만 크고, 부품들이 뒤섞이고 스티커와 인스가 구겨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대형 레고 박스를 개봉할 때에는 다리미를 미열로 하여 수건을 대고 박스에 있는 본드를 가열하여 박스를 열면 상처 없이 박스를 개봉할 수 있다.
개봉한 부품들은 면장갑을 끼고 종류별로, 색깔별로, 크기별로 구분해 둔다. 이것을 조립전 부품분류라 한다.
물론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대충 뜯어서 바로 조립한다.
부품을 찾다가 금방 지친다. 어느새 허리도 아프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것을 몇 시간씩 걸려 가며 부품 분류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레고 중고만 해도 그렇다. 레고는 중고를 사면 박스 있는 것은 얼 마, 없는 것은 얼마, 값으로 구별하고, 1회 조립 후 봉인한 부품 상태 완벽한 것은 훨씬 비싸다. 눈으로 봐서는 다섯 번을 조립했는지 열 번을 조립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말을 믿고 사는 것이다. 신용이다.
옛날 레고 그룹은 매출은 매출이요, 수익은 수익이지만, 제품을 만드는 그 순간만은 오직 아름다운 명작을 만든다는 그것에만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레고 랜드 시리즈를 만들어 냈다.
이 박스 포장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노인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장사를 해 먹는담 』 하던 말은
『그런 노인이 나 같은 젊은이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미스박 포장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노인을 찾아가서 하나 남은 마지막 미스박 직선레일이라도 구입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5년 후 일요일에 상경하는 길로 그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그 노인이 있던 가게에 미스박은 남아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미스박이 있던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근처에 남대문도 불타고 없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구입할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맞은편 남대문의 가림막 지지대를 바라다보았다.
푸른 창 공에 날아갈 듯한 추녀 끝으로 흰 구름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그때 그 노인이 저 구름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포장하다가 우연히 추녀 끝의 구름을 바라보던 노인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히 「레고는 있을 때 질러라!」
레고계의 절대 격언이 새어 나왔다 .
오늘, 집에 들어갔더니 아들놈이 인디아나 존스 미스박을 뜯고 있었다.
전에 8458 실챔 미스박을 다리미로 살살 가열하여 뜯던 생각이 난다.
미스박 구경한 지도 참 오래다. 요새는 기차 돌리는 소리도 들을 수 없다.
「7740 레일 타는 소리」니, 「6399 모노레일 돌리는 소리」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문득 5년 전 레고 팔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