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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3 2015-02-01 21:25:53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그런 논리로 보신다면 고려군은 더할나위 없는 오합지졸이라 봐도 좋겠군요, 조선도 마찬가지 이고 말입니다, 통계적으로 여진, 고려, 왜구 등 여러 해적들에게 더이상 대응이 불가할 정도로 밀리고 밀려나가 결국 해안을 포기한 고려나 군정의 폐해로 전략을 수정해야 햇으나 그 마저도 임진왜란과 2차례의 호란 등에 있어 별다른 효용성을 보이지 못하고 폐퇴해야 했던 조선의 상황을 놓고 본다면 말이지요.

지금 논리를 보면 전체적인 승패를 놓고 오합지졸을 평가할 여지가 충분하다 하시는데, 전쟁의 승패를 모은 것과 전투의 승패를 모은것 별 차이가 없어보이그리고 는데 말입니다, 이 둘이 왜 다른지요? 똑같이 승패를 놓고 통계적으로 평가를 하는데 말입니다, 대체 어디에 차이가 있습니까? 전투? 전쟁?

언급하시는 거시, 미시의 관계가 특정한 크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3462 2015-02-01 21:19:19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답글을 다는 사이에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단 한번의 패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를 거둔게 여진 정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어떠했습니까? 통계적으로 볼때 이 전쟁이 어떻다고 보이시는지요?

말씀하시는 거시적인 결과물은 실패 그 이상 이하도 아닙니다, 승승장구하며 막대한 전과를 올렸습니다만 그 어떠한 이득도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재정적 인적 자원을 소비하며 큰 부담으로 남았지요,
3461 2015-02-01 21:17:41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지금 올리신 글이 이런겁니다, 이렇게 성공 실패 와 같은 수치적인 이야기만 반복할뿐 거시적으로 그 사건이 어떠한 배경에서 어떠한 조건에서 벌어지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그 어느 것도 없고 오로지 실패가 많으니 오합지졸이라는 결론을 내리시지요, 이게 말씀하시는 왜곡이라고 보이는데 말입니다, 대체 왜 오합지졸이라고 평가받아야 하는지 알수 없지 않습니까?
3460 2015-02-01 21:16:11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tynet 님.. 언급하신 논조로 보면 충분히 성공적인 원정인데 말입니다, 기록을 보면

12월 1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 도착 일단 대기합니다, 이 날 완안부의 사신 일행과 갈라전 즉 함경도 일대의 추장 등 400여명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이다 모두 죽여버립니다,

12월 14일 여진의 영역으로 진입, 대내파지촌에 도착하나 여진인들은 모두 도망가고 가축만 들판에 넘치고 있습니다.

같은 날 윤관의 본군이 무내니촌과 동음성에서 여진의 촌민들의 저항에 직면하나 수월하게 진압, 여진인들은 패주합니다.

같은해 12월 15일 좌군이 석성에 도착 여진인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나 거부 당하여 공성전을 시작합니다, 이때 척준경이 적진으로 돌격 추장 2~3명을 참살한 것을 시작으로 전 군이 돌격하여 성안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버립니다.

12월 15일 부터 24일까지 총 136개촌 정벌, 4,940명 사살 포로 1,030명 획득하였고 같은해 12월 24일 여진족 추장 요을내가 부족민 3,200명을 이끌고 항복합니다,

이듬 해 1월 윤관 오연충이 8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동중 적의 매복에 걸려 패퇴했지요,

같은 달 여진 추장 가로환이 403명의 부족민을 이끌고 윤관의 군진에 투항하였고 여진 남녀 1,460명이 정벌군에 투항합니다,

2월 11일 여진족 수만이 옹주성을 포위하자 성문을 열고 일전을 벌여 사살 90에 전리품 다수의 대승을 거두는 한편 야간을 틈타 척준경이 포위망을 돌파하고 지원군을 불러와 적을 크게 물리칩니다.

3월 28일 영주성 밖에 여진인들이 진을 치자 출격하여 패퇴를 시키고 말 8필의 전리품을 얻는 한편 적 20명을 사살했습니다.

이러한 성공적인 전과를 거둔 여진 정벌이 말씀하신 거시적인 결과를 놓고 볼때 어땠나요?
3459 2015-02-01 21:10:02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사실 간단한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면 고려에서 여진 정벌을 나섰을때 승리를 거듭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 여진 정벌이 성공적일까요? 또한 요동 정벌은 어땠습니까? 한때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전체적으로 어땠는지요? 지금 말씀하시는 수치적 나열은 이러한 미시적인 부분만을 언급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닌데 말입니다.
3458 2015-02-01 21:07:20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tynet 님.. 논점 이탈이라고 하신다면 이미 답글에서 논점을 이탈하셨다고 봐도 좋을텐데 말입니다, 다른 국가가 그러니 조선은 별게 아니다 라는 논조로 설명하신것과 IS의 예시가 뭐가 다른가요?

또한 전체적으로 보면 알수 있다 하시지만 위에서 토츠카님이 말씀하신 것 과 같은 내용의 부재는 충분히 우려하고 계시는 왜곡을 낳고 있는데 말이지요, 당장 코린토스 전쟁을 언급하시면서 그 들이 얻게된 것들은 왜 넘어가시는지요? 헤일로타이 반란이라던가 그리스 및 페르시아에서 제공한 함대 즉 수적인 열세는 제하시는지요?
3457 2015-02-01 21:01:52 2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말씀하시는데로 조선의 세금이 가벼워 백성들이 부유하며, 형벌이 결코 가열하지 않다 라고 주장하신다면 앞에서 언급드린 이자 문제로 불거진 백골징포와 같은 수많은 폐단들을 설명하셔야 하며, 형법체계에 있어 악용되기 충분한 요소들이나 묵인되기 쉬운 부분들에 대한 타당성을 이야기 해주셔야 하겠지요, 왜 노비라고 해서 천민이라 해서 대로변에서 두들겨 맞아 죽어도 도리어 살인자가 칭송을 받아야 하며, 이유없이 머리에 피가 솟구칠 정도로 기둥에 머리를 잡고 후려 박아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야 하나요? 이게 가벼운 형벌이고 또 아무렇지 않은 당연한 부분인가요?
3456 2015-02-01 20:59:00 2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엉뚱한 이야기를 하시는데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조선의 형벌이나 세금은 결코 무겁지 않다 라고 주장하시면서 그 논거로 다른 국가도 그러지 않느냐 하시는 것을 두고 그러한 논거는 적절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IS에서 신성을 이유로 사람을 죽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도 그래도 되는건가요? 극단적인 예이지만 지금 말씀하시는게 딱 이겁니다, 다른 국가의 세금이 무겁고, 다른 국가의 형벌이 혹독하다 그러니 조선의 그 것은 결코 무겁다 볼수 없다, 이게 어떤 타당성을 지니는지요?
3455 2015-02-01 20:51:44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그게 오합지졸이라고 평할만한 이유인가요? 그러한 패배로 인하여 어떠한 영향을 끼쳤고 당시 국제적 관계에 있어 어떠한 상황에 놓여졌는가 정도는 봐야 하는거 아닌가요? 단순하게 게임 처럼 숫자를 늘어놓고 평가한다 해서 거기에 어떠한 외교적 관계나 군사적인 성공을 논할수 있을까요?
3454 2015-02-01 20:50:08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tynet 님.. 답글을 다는 사이에 글을 써주셨는데 다른 국가도 그랫으니 조선은 별게 아니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자의 문제로 백골징포니 하는 문제로까지 가는 상황이 결코 저렴한 세금을 의미한다고 볼수는 없지요,

마찬가지로 다른 국가도 그랬으니 우리는 뭐 대단한게 아니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만으로도 형벌이 약하다고 볼수는 없는 걸요.

끝으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결코 문화 수준이 낮다고 하실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당시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여느 국가들보다 우수한 인적 자원 수급에 힘을 쏟았고 토지 개혁에 앞장섰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왜 스파르타의 문화적 수준이 저열하다 평하시는지요?
3453 2015-02-01 20:46:02 1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끝으로 여담이지만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들을 제하고 무조건 패배했으니 오합지졸이다 라고 보기는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코린트 전쟁 당시에는 아테네의 사주로 벌어진 헤일로타이 반란이 있었지요, 아테네로 주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또한 파우사니아스의 실정이나 대지진을 빼놓을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승리한 전투들이 가지는 가치를 생각해 본다면 단순하게 수치적으로 패배를 더 많이 했다 하여서, 그게 곧 스파르타는 곧 오합지졸이라 볼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물론 300이 마초적인 영화는 맞습니다만 페르시아 전쟁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동원된 병력의 수 외교적인 관계 등 스파르타가 오합지졸이고 약하다 보기는 어렵지 않아 싶습니다,
3452 2015-02-01 20:38:33 0/4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그리고 문화 수준이 낮다 라고 하시는데 문화 수준의 기준은 무엇이신지 궁금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사서삼경을 외우고 과거제도가 존재해야 문화적으로 보다 우월한 집단인가요? 스파르타의 문화적 수준이 낮다고 단언하시지만 리쿠르고스 제도를 생각하면 그러한 교육이 문화적으로 저열하다 단언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 말입니다.
3451 2015-02-01 20:34:03 1/4
역사는 어디까지 왜곡될 수 있을까? -오합지졸 스파르타- [새창]
2015/02/01 19:52:07
조선의 세금이 적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지방 재정을 절대적으로 환곡 등 자가적인 수급으로 해결해야만 했던 행정의 구조적인 문제를 간과 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는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걷잡을수 없는 폐단을 낳아 끔찍한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형벌 역시 약하다 라고 하시지만 천민들은 사람 대접 자체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인데다 비단 양민들이라 해도 법률의 구조적 결함을 악용한 폐해를 절절히 겪어야 했으니 약하다 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합니다,
3450 2015-01-31 23:48:09 0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중 평민 비율은 40~50% [새창]
2015/01/22 08:22:35
아 인조때의 공사견문록에서 나온 이야기였던가요? 슬슬 어디서 나온건지 헷갈려 고민이었는데 지적 감사드립니다.

말씀 나누면서 여러모로 깊지는 않지만 아는 바를 다듬고 정리를 새롭게 할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서로간에 유익한 대화가 될수 있었던 것 같아 다행이고 또 감사드립니다.
3449 2015-01-31 23:40:38 0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 중 평민 비율은 40~50% [새창]
2015/01/22 08:22:35
네 제 답글에서 말씀드린게 그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지만 신분제를 놓고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품계를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요, 앞서 언급해주시고 또 제가 언급드린 세종의 경우만 놓고 보더라도 규정된 바는 품계이지 신분이 아닙니다, 신분이 어찌되었든 품계에 따라 겹줄로 서야 했고 같은 돗자리에 앉아야 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품계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문제를 야기하고는 한게 사실입니다, 효종때의 정확한 서적은 찾아봐야 겠습니다만 아무튼 관련된 기록을 보면 인평대군의 부인 오씨가 서녀인 옹주보다 아래의 직급이나 적서의 법도가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녀보다 아래에 앉지 못하겠다고 시비가 붙은 내용이 있습니다,

즉 신분을 떠나 품계로 상하를 결정짓고 있었다는 말로서 이러한 부분이 여러 불만을 낳은 것은 사실이겠으나 내외명부의 법도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닙니다, 면천이 되었건 아니건 어쨌건간에 내외명부에 들어온 이상 가인례 즉 집안에서 통용되었던 적서의 예법, 신분의 법도는 더이상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마 문제는 제가 실수를 범한 부분도 있는데, 제가 말한 것은 평교자가 아니라 옥교 그러니까 뚜껑 달린 가마를 이야기 한 것으로 이러한 옥교의 경우 당상관의 어머니, 여식, 처 등만 가능하나 당하관의 처인 윤씨가 탔다는게 말씀하신 사건의 이유입니다만 사실상 이는 유명 무실한 규칙을 두고 벌인 정쟁에 가깝습니다, 쉽게 말해 꼬투리를 잡고 벌인 일로 기녀 등도 당시 조선시대에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미덕등에 의하여 이용이 가능하다면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개방되어 있는 가마인 교자 즉 남여와는 사정이 좀 다르지요,

그리고 장신구와 의복 등은 품계에 따라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분이 아니라 말이지요, 내외명부에 속한 이상 더이상 이러한 것은 의미가 없는게 사실입니다, 밖에서 양반이었든 천민이었든 모든 나인은 축일에 열댓명씩 묶어 비누소두 2홉 6석을 받아야 했고, 모든 빈은 발유차 진유 1승과 비누 소두 1두 1승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복 역시 개구리 첩지에 금도금을 어디다 얼마나 하는지도 승은을 입은자와 그러하지 못한자들에게 세세하게 분류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것과 다르게 예법과 상관없는 것들은 문제될게 없습니다, 당장 무의미해진 옥교의 제약이라던가, 뱃놀이라던가 하는 것들은 과소비로서 지적될수 있겠습니다만 어울리지 않는다 하여 할수 없는게 아닙니다, 규정된바를 어긴다면 모를까 그 외의 경우는 시쳇말로 눈꼴시려서 개인적으로 어떻게 할수는 있겠습니다만 하지 말라고 강제할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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