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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5 17: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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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윤형 선생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설립하였다. 같은 해 일본을 방문하여 일제 고위관리들과 여러 차례 회담하면서 일제의 자치제 제안을 반박하고 즉시 독립을 주장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며, 김구·이승만·안재홍·송진우 등과 만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하였다. 11월에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5월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여운형 [呂運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도 사회책에서만 잠깐 봤던분인데. 사회주의를 넘어서서 민족통일을 위해 일하셨던 분이라는걸 오늘 알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