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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4 2013-02-13 00:08:51 0
박종우 선수 동메달 추카 합니다 [새창]
2013/02/12 23:52:07
늦었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입니다.
2123 2013-02-13 00:05:15 3
도플러효과.masato끼 [새창]
2013/02/12 23:51:59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122 2013-02-12 23:52:49 12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과 싸웠보기라도 했지.. [새창]
2013/02/12 20:26:46
1 우리 측 사상자가 대거 발생한 2차 해전에선 당일 북측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결과물인 ‘핫라인’을 통해 “현지에서의 우발적 사고다.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남측 정부는 공개적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요구했고, 북측은 이를 수용해 7월25일 정세현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낸 전화통지문에서 유감을 표명했다. 8월 12~14일 서울에서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이 개최되면서 사태는 원만히 마무리됐다.

라는 내용이 있네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01817065&code=910302
2121 2013-02-12 23:37:49 214
흔함 소방관의 뒷태 [새창]
2013/02/12 23:26:51

머요? 우리나라 소방관 등근육이 뭐 어떻다구요?
2120 2013-02-12 23:32:00 64
김정은 한달 후.jpg [새창]
2013/02/12 22:56:51
1 난 이정희 저 표정만 보면 눈이 썩을 것 같음. 조롱하는건 좋은데 좀 혐오스런 것 좀 쓰지마요;;;
2119 2013-02-12 23:29:51 11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과 싸웠보기라도 했지.. [새창]
2013/02/12 20:26:46
기획팀님, 어디가 진실인가요

나는 우선 해군 장병들의 희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유가족에 대해서는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 조치를 취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강경한 대북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확전 방지 및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등 냉정한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국방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했다.
북측은 약 4주 후인 7월 25일에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내온 전통문을 통해 정식으로 유감의 뜻을 표했다. 이것이 북측이 우리 정부에 보낸 최초의 사과 문서가 되었다. 북의 사과를 확인하고 나서 예정대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햇다. 분당 국군수도병원 영결식장에는 박지원 비서실장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분당 국군수도병원 영결식장에는 박지원 비서실장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정부관계자가 조의를 표하러 갔었군요. 한명도 안갔었다니요.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부상당한 장병이랑 전사자 유가족들 챙긴걸로 자료가 있네요.

그리고 선제공격과 관련된 말은 저도 꺼낸 적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도 그 부분은 좀 아쉽긴 합니다.
2118 2013-02-12 23:12:42 1
김정은 한달 후.jpg [새창]
2013/02/12 22:56:51
썅 개놈들ㅠㅠ
2117 2013-02-12 23:11:24 5
김정은 한달 후.jpg [새창]
2013/02/12 22:56:51
11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면 됨
2116 2013-02-12 23:08:35 6
아나.. 진심 미친.. [새창]
2013/02/12 23:06:36
아오...
2115 2013-02-12 22:59:17 13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과 싸웠보기라도 했지.. [새창]
2013/02/12 20:26:46
생각하는동물님,

언론은 이를 훗날 제2차 연평해전이라 이름 붙였다. 한반도 전체가 월드컵 축제 열기에 휩싸여 있을 때 북이 왜 그런 도발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참히 패한 제1차 연평해전의 복수를 노리고 기회만을 엿봤던, 계획적인 도발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곧바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 나는 우선 해군 장병들의 희생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 유가족에 대해서는 정부가 할 수 있는 모든 지원 조치를 취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강경한 대북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확전 방지 및 재발 방지 대책을 세우는 등 냉정한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국방부 장관이 성명을 발표했다.
“묵과할 수 없는 무력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는 엄중 항의하며 북한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를 강력히 요구한다.”
북한은 신속하게 응답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남북 정상 회담 이후 개통된 핫라인으로 긴급 통지문을 보내왔다.
“이 사건은 계획적이거나 고의성을 띈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아랫사람들끼리 우발적으로 발생시킨 사고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다시는 이러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북한의 사과는 더 이상의 사태 악화는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사과문은 당시에는 공개할 수 없었다. 우리 측은 다시 공개 사과하고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보장을 요구햇다. 북측은 약 4주 후인 7월 25일에 통일부 장관 앞으로 보내온 전통문을 통해 정식으로 유감의 뜻을 표했다. 이것이 북측이 우리 정부에 보낸 최초의 사과 문서가 되었다. 북의 사과를 확인하고 나서 예정대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햇다. 분당 국군수도병원 영결식장에는 박지원 비서실장을 보내 조의를 표했다.

-김대중 자서전

어느 부분에서 연평해전 도중에 월드컵을 보러 갔다고 써있나요? 교전 도중에 월드컵을 보러 갔다는 증거가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게다가 노무현도 보러 갔다고 하시는데 그리 선동하는게 일베의 수준인가 보네요. 잘 봤습니다ㅎㅎ
2114 2013-02-12 22:42:41 3
정부의 대북지원 및 대북송금 내용 (자료) - 사견... [새창]
2013/01/07 12:53:01
111 이명박이 잠잘 때 새우잠 잔다는 설이 있다.
증거 있냐고? 그냥 들은 얘기야.
이거랑 뭐가 다르냐

'박정희는 김일성과 내통했다'
'박근혜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개인적으로 김정일을 만나러 갔다.' 같은 확실한 사실을 가지고 와라 인석아.
2113 2013-02-12 22:35:32 0
치킨 젓가락으로 먹는분 추천좀해주세요 [새창]
2013/02/12 22:24:17
양념 묻은 손은 씻어도 깨끗한 느낌이 안나서 그냥 젓가락만....
사실 그냥 손 씻기 귀찮아서 젓가락 쓰는거에요ㅠㅠ
2112 2013-02-12 22:31:08 22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과 싸웠보기라도 했지.. [새창]
2013/02/12 20:26:46
이하 다른분께서 퍼온 댓글...
한번 읽어보시지요.

"전임 두 대통령 때 북한에 건넨 돈이 결국 핵무기가 되어 돌아왔다..."
는 주장은 비단 보수계층 뿐 아니라 젊은 층에게도 광범위하게 먹히고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때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공세를 펼치면서 톡톡히 재미를 보았는데,
이명박 정부 역시 위기 때마다 몇 번 써먹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면 2009년 9월 MB가 해외에서 "북한에 준 지원금이 핵무기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국내 언론들이 얼마를 퍼줬네~ 하면서 맞장구 쳤지요.

시간차를 두고,
한국경제 2010. 1. 31 자 기사 <" 北, 경협자금 70억달러로 핵무기 만들었다"…美의회 조사국 보고서 >에서는
심지어 북핵전문가 래리 닉시의 미국 의회 조사국 보고서 (CRS)를 인용하여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핵개발용 퍼주기설을 증명하려 합니다.
닉시의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과 2001년 있었던 김대중 정부의 현대그룹을 통한 자금지원 때문에
북한의 우라늄 관련 수입이 가속화했고 결론적으로 "북한의 핵무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실제로 찾아서
래리 닉시가 2010년 1월에 작성한 CRS 보고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외교 (North Korea’'s Nuclear Weapons Development and Diplomacy)' (33p)를
살펴보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일지,
그리고 자금원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전혀 다른 스토리가 나옵니다.

핵무기 생산 시설
-1960년대 소련이 영변에 실험용 원자력반응로 설치해줌
“The U.S.S.R. provided North Korea with a small research reactor in the 1960s”
-1984년부터 영변, 태천에 건설 시작한 원자력반응로 두 개
-1987년에 완공된 원자력반응로 하나 (위치 언급 없음)
-플루토늄 재가공 공장 하나 (연도 언급 없음)
-1990년 작성된 소련 KGB 리포트는 북한이 핵폭탄 제조 장비 하나를 완비했다고 보고

인력
-1991년 소련 붕괴 때까지 소련에서 북한 핵과학자들이 훈련
“North Korean nuclear scientists continued to receive training in the U.S.S.R. up to the demise of the Soviet Union in December 1991”
-1990년대 러시아와 동독의 과학자들이 북한에 있었음
“East German and Russian nuclear and missile scientists reportedly were in North Korea throughout the 1990s”

재료확보와 재료 가공 기술/장비
-1989년 12~24kg의 플루토늄 추출 추정 (CIA, DIA 12kg, 한국 정부 7~22kg, 일본 정부는 16~24kg 추정)
-1990~1991년 20kg의 플루토늄을 추출 추정 (러시아 국방성 추정)
-1993년 러시아로부터 플루토늄 56kg을 밀수 (독일의 Stern지 보도)
-1993년 러시아에서 우라늄 밀수
-1993~2003년 파키스탄의 압둘 카디어 칸(A. Q. Khan)이 13차례 방문하여 고농축 우라늄 기술 전수.
-1996년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기술의 맞교환 합의 (황장엽 박사 증언 인용)
-1998년부터 고농축 우라늄 제조용 부품과 장비 수입 시작, 그 이후로 수입이 증가하는 추세
-1999년부터 중국 기업이 미사일 프로그램 관련 재료와 부품 공급
-2003년 25kg의 플루토늄 추출 추정 (지그프리트 헤커 박사 보고)

발사기술(이 부분은 네이버 백과사전도 참조했음)
-1970년대 초부터 탄도미사일 개발
-1980년대 스커드 미사일 업그레이드하면서 단계적으로 사정거리를 늘림-한국이 사정권에 포함됨
-1993년 노동 1호 첫 번째 시험발사 - 노동호 시리즈는 일본이 사정권에 포함됨
-1998년 대포동 미사일 첫 번째 시험 발사. 대포동 시리즈는 괌이 사정권에 포함됨
-2006년 시험 발사하고 실패한 대포동 2호는 미국 서부 지역도 포함
-2009년 대포동 2호 2차 실험 발사했으나 미국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되었음. 그러나 2006년 미사일보다 발전했다는 평가.

DJ, 노무현 정부 때 일어났던 일이 바로 미국을 사정거리에 둔 발사기술 테스트였습니다.
그리고 2006년 지하에서 핵폭탄 실험했지요. 2차 실험은 2009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80~90년대에 원료 모으고 기술 배우고 시설 짓고 우리나라까지 도달하는 미사일 기술 개발해 놓고
실질적인 핵개발 거의 다해놓은 마당에
DJ, 노무현 정부 때 북한에 들어간 현금이 핵개발의 주요원인인 양 하는 건 억지 지요.

다음은 가장 논란이 되는 북핵의 자금원입니다.

자금조달 소스
-1993년 이란과 핵 공동개발 협약. 미 CIA 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이 북한의 핵 개발 자금을 지원하고 나중에 기술전수 받기로 함.
래리 닉시가 제공한 소스: Economist Foreign Report 1993. 4. 22, 연합뉴스 1993. 1. 26, 1994년 KBS-1 라디오 네트워크 1994. 2. 24
-1993년 미국 하원의 보고서(Republican Research Committee 작성)에 따르면, 이란이 북한에게 핵을 공동으로 개발해주는 댓가로 주는 자금은 5억달러, 한화로 5천억원.
래리 닉시가 제공한 소스: US News and World Report 1993. 3. 29. 연합뉴스 1993. 7. 16
-1990년대 북한은 스커드 미사일과 노동 미사일을 파키스탄, 이란, 예멘, 시리아, 이집트에 수출 (가격은 명시되지 않음)
“In the 1990s, North Korea exported Scud and Nodong missiles to Pakistan, Iran, Yemen, Syria, and reportedly Egypt.”
중동 뿐 아니라, 남아시아 국가에 수출
“The fourth level of North Korea’'s missile program has been the export of missiles to other countries in the Middle East and South Asia and joint collaboration in the development of missiles with Iran and Pakistan.”
1997년 시리아에 핵반응로 공사 (이란 자금으로)
2000년대에도 복수의 중동국가와 북한의 무기 협력은 계속되며 일본 산케이 신문 등에서 보도됨

즉, 래리 닉시 보고서에서는 90년대 중동, 동남아시아 쪽 국가들과의 무기 및 핵기술 거래가
80~90년대 집중된 북한 핵개발의 주된 자금원으로 언급 되며
한국 정부의 자금 지원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한나라당과 보수신문이 주장하는 김대중, 노무현의 핵무기용 퍼주기설,
현대그룹의 대북지원금이 원인이 되었다는 얘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황적으로 보아 80년대 소련과의 거래 혹은 소련으로부터의 지원,
90년대 중국과의 거래 혹은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됩니다.

위에 언급한 한국경제신문의 기사를 읽어보면,
래리 닉시 보고서에서 딱 한부분만 발췌해서 그게 전부인양 하고 있지요.
바로 우라늄 관련 수입이 2000~2001년 경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60년대부터 시작되어 80~90년대에 거의 완료되었다는 큰 그림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요...
2111 2013-02-12 22:24:21 14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과 싸웠보기라도 했지.. [새창]
2013/02/12 20:26:46
1 마치 북한이 국내 지원금 없었으면 핵실험 못했다는 말로 들리는데,
국내 지원금이 더 큰지 해외 지원금이 더 큰지부터 알아보시고, 90년대 개발완료된 핵은 누구덕에 가능했는지 알아보고 오세요.
2110 2013-02-12 22:19:35 16
김대중, 노무현은 북한과 싸웠보기라도 했지.. [새창]
2013/02/12 20:26:46
1 무슨소리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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