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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br />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br />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br />
<br />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br />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br />
<br />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br />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 것은 지난달 21일.<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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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br />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다.<br />
‘그리스도왕의 수녀회’ 소속인 두 수녀는<br />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줬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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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 />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br />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br />
보육과 자활정착 사업에 헌신했다.<br />
<br />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br />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br />
<br />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br />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겼다.<br />
<br />
이들은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br />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br />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는데<br />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br />
<br />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br />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br />
이 편지로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br />
<br />
<br />
김명호(56)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br />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br />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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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g2.ruliweb.daum.net/img/img_link7/802/801869_2.jp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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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봉사 접고 말없이 떠난 소록도 두 천사<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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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의 한센병 환자·주민들이 열흘 넘게<br />
성당과 치료소에 모여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br />
43년 동안 환자들을 보살피다 지난달 21일 귀국한<br />
오스트리아 수녀 두 분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별의 슬픔을 누르는 기도다.<br />
<br />
마리안네 스퇴거(71), 마가레트 피사렉(70) 수녀는 주민들에게<br />
헤어지는 아픔을 주기 싫다며 ‘사랑하는 친구·은인들에게’라는<br />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새벽에 몰래 섬을 떠났다.<br />
<br />
두 수녀는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br />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할 때”라며 “부족한 외국인이<br />
큰 사랑을 받았다”고 오히려 감사했다.<br />
<br />
<br />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는<br />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br />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다.<br />
두 사람은 섬에 발을 디딘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br />
'마리안네 & 마가레트' 라는 표찰이 붙은 방에서 환자를 보살폈다.<br />
<br />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br />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다.<br />
오후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들고 마을을 돌았다.<br />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br />
꽃다운 20대는 수천 환자의 손과 발로 살아가며 일흔 할머니가 됐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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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br />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는 베품이<br />
참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다.<br />
<br />
10여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br />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다.<br />
병원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다.<br />
<br />
월 10만원씩 나오는 장기봉사자 식비도 마다해<br />
병원측이 "식비를 안 받으면 봉사자 자격을 잃는다"고 해<br />
간신히 손에 쥐여줄 수 있었다.<br />
<br />
두 수녀는 이 돈은 물론,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br />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br />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다.<br />
두 수녀의 귀향길엔<br />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만 들려 있었다고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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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 src=http://img2.ruliweb.daum.net/img/img_link7/802/801869_3.jpg><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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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초 두 수녀를 찾아 인스브루크로 향했다. 마리안 수녀가 사는 곳은 인스브루크 시내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인 마트라이라는 작은 마을. <br />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물어물어 집을 찾았다. 마리안 수녀는 다행히 집에 있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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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전달받은 소록도 주민들의 편지를 전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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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할매, 작은 할매, 감사드립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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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곱던 젊음을…, 소록도 사람들의 손발이 되어 평생을 보내신 할머니 두 분께 충심으로 감사합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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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 수녀는 편지를 읽으면서 “눈을 뜨면 한국 생각이 나고 소록도 꿈을 아직도 꾼다”고 한국말로 말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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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수녀는 송별식을 요란하게 하는 것이 싫어 광주대교구 주교에게만 자신들의 뜻을 알렸다. <br />
그러고는 비행기에 실을 수 있는 짐 20kg만 들고,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소록도를 떠났다. <br />
<br />
두 수녀가 돌아오자 가족들은 반색을 했다. 마리안 수녀의 여동생은 집 3층에 언니를 위한 보금자리를 꾸몄다. <br />
마가레트 수녀의 형제들도 작은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해 줬다.<br />
<br />
두 수녀는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지는 섬과 쪽빛 물결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br />
20대 후반부터 40년을 넘게 산 소록도는 ‘고향’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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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오히려 오스트리아가 '낯선 땅'이다. 마리안 수녀는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 적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br />
주민등록 신고도 새로 하고, 친지와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얼굴을 익히고 있단다. 아직도 저녁 식사는 한식으로 한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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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평 남짓한 방 안은 한국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장식품으로 가득했다. 방문에는 붓글씨로 쓴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문구도 붙어 있었다. <br />
"평생 마음에 담아 두고 사는 말"이라고 마리안 수녀는 설명했다. <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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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은 이 좌우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소록도를 찾은 것은 1962년. <br />
처음부터 평생 소록도에서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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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갔을 때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됐고. 약도 없고, 돌봐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br />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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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했다. 약이 부족하면 오스트리아의 지인들에게 호소해 오스트리아, 독일, 스위스에서 실어 날랐다. <br />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을 위해 영양제며 분유도 부지런히 구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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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에도 소록도에선 계속 아이들이 태어났다. 한센병 환자인 부모들과 함께 지낼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해 두 수녀는 보육원을 세웠다. <br />
가난한 살림살이라 옷은 직접 해서 입혔다. 아이들이 여섯 살이 돼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으면 육지의 보육원으로 보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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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 지천이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 두 수녀는 가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전했다. <br />
마가레트 수녀의 언니 트라우데 미코스키(73) 씨는 "소록도에선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한다고 들었다"면서 "마가레트가 언젠가 재로 변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고 말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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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도 있었다. 3년 전에는 마리안 수녀가 대장암 진단을 받아 한국과 오스트리아를 오가며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br />
"많이 아팠어요. 그래도 소록도 사람들이 기도해 준 덕분에 나았지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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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졌다.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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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우리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지요. 40년 동안 함께 일한 한국인 간호원장이 은퇴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가레트와 함께 이제는 한국을 떠나도 되겠다고 결심했답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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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 수녀를 만난 뒤 마가레트 수녀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수녀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br />
마가레트 수녀의 아파트뿐 아니라 남동생, 언니의 집을 계속 찾아갔지만 결국 언니를 만나 근황을 듣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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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 수녀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의 손에 알사탕 몇 개를 꼭 쥐여주었다. 밥을 못 차려 줘 미안하다는 말도 했다. <br />
그러고는 소록도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내비쳤다.<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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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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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루리웹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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