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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고 심심하니 옛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중학교 때 합기도 도장을 다녔습니다. 그냥 남자애들 태권도 한 번 배우는 것처럼 그 정도였습니다.
좋아하던 누나도 다니고 있었는데 한 살 차이였습니다. 제가 중3이 되자 누나는 고등학생이 됐는데, 공부 때문인지 운동 시간을 열한 시 반으로 옮겼습니다. 저도 학원에 다니느라 불편했지만 같은 시간대로 옮겼습니다.
얼마 안 가 누나는 그만뒀습니다. 그래도 전 계속 그 시간에 운동했습니다.
아, 간지러운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열한 시 반 부라고 불렀는데 한 시쯤 운동이 끝났습니다. 마지막 차례인 거죠. 바쁜 직장인들을 위한 시간대인데 풍경이 좀 이상했습니다.
특공무술 도복을 입은 젊은 사범님, 유도를 오래 했다는 조직원들, 먹을 것을 사 들고 오는 영화 무술 감독, 가끔 태권도복을 입고 오는 강력계 형사.
지금 생각해도 관장님 발이 참 넓었던 거 같네요.
관장님은 다른 일도 많아서 저나 다른 사람이 도장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어른들과 친해지며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토요일은 도장이 쉬는 날이었습니다. 제겐 열쇠가 있어서 혼자 운동하다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는데 집에 가려고 불을 끄고 있었습니다.
“어? 동훈이었네? 불 켜져 있길래 누군가 했다.”
“오셨어요.”
술을 좀 드신 관장님이 들어왔습니다.
“언제 온 거야? 사무실에서 좀 쉬었다 가.”
사무실 안에는 쿵후 도복을 입은 젊은 관장님 사진이 걸려 있었습니다. 저는 그만두겠다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우물거렸습니다. 막상 사무실에 관장님과 둘이 앉아 있으니 서로 말이 없었습니다. 저는 망설이고 있는 말 대신 중학생다운 질문을 했습니다.
“관장님은 싸워서 져 본 적 있으세요?”
“그게 궁금하니?”
관장님이 허물없는 웃음을 지었습니다. 전 성격은 밝았지만 말수는 적었고, 그도 마찬가지여서 서로 사적인 얘길 나눈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너 계속 운동할 수 있겠니? 보통 집에 가면 두 시지? 부모님은 뭐라고 하셔?”
“아버지가 많이 싫어하세요.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래. 편하게 얘기해. 짐작은 했다.”
빈 도장의 사무실은 참 조용했습니다.
“저 이제 못 나올 거 같아요.”
“그래. 네가 삼 년 정도 됐나? 아쉽네. 열심히 했는데.”
그가 담백하게 말했습니다. 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창피해서 눈곱을 떼듯 닦아냈습니다.
“에이, 좀 이따 가야겠다.”
그가 찌뿌둥하다는 듯 목과 어깨를 움츠렸다가 펴고는 음료 냉장고에서 캔 맥주와 사이다를 꺼내 다시 소파에 앉았습니다.
“많이 아쉬웠나 보구나.”
“그냥, 전 재밌는 게 이거밖에 없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지, 이제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감정이 세차지는 것을 누르며 띄엄띄엄 말했습니다.
“왜 못 봐. 운동도 나중에 다시 하면 되고. 그냥 놀러도 자주 오고 그럼 되지.”
“네.”
전 유리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신문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동훈아, 나 싸워서 한 번 져 봤어.”
그가 맥주를 시원하게 한 번 들이킨 뒤 말했습니다.
“너, 가장 무서운 사람이 무슨 운동한 사람일 거 같니?”
“권투요? 킥복싱?”
저는 엷게 웃고 사이다를 마셨습니다.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바꾸는 그가 고마웠습니다. 삼 년 동안 봐온 관장님의 모습은 항상 진중했습니다. 그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권투? 킥복싱? 에이, 다 별거 아냐. 농담이고,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다 비슷해. 그 사람이 중요한 거지. 그래도 어떤 운동을 한 사람이건 내가 다 눕혀 봤지. 진짜 무서운 건 말이야.”
어느새 그의 말투가 빠르고 가벼워졌습니다.
“레슬링이야. 만일 시비가 붙었는데 상대 귀가 이상하게 생겼잖아? 그럼 그냥 자존심 다 버리고 사과해. 아무리 덩치나 키가 작은 사람이어도 말이야. 진짜 죽을지도 모르니까.”
저는 그와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레슬링이요? 넘어뜨리는 게 다 아니에요?”
“야, 레슬링 배운 사람이 싸울 때 레슬링만 할 거 같니? 넘어뜨리고 때리지.”
“아. 거기까진 생각 못 했어요. 그럼 그 사람한테 진 거예요?”
지금이야 UFC 같은 종합 격투기가 생겼고 주짓수와 레슬링 같은 운동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만 제가 어릴 때는 몰랐습니다.
“아니, 이겼지. 가장 무서운 상대였다는 거지.”
“그럼 한 번 졌다는 건 언젠데요?”
“어떤 군인한테.”
“군인이요?”
“응. 군인.”
그때 관장님의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어, 형. 지금? 나야 괜찮지. 얼마나 걸리는데? 어. 아니, 동훈이도 있어. 알았어]
통화를 마친 그가 말했습니다.
“너 근데 집에 안 가도 되니? 내일 학교 가야지.”
“내일 일요일이에요. 그래서요? 군인한테 왜 졌어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동훈아, 내가 재밌는 얘기 해 줄 테니까 자주 놀러 오겠다고 약속해줄래?”
“네. 좋아요.”
흔하지 않은 이야기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파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그래, 잠깐 여유도 있고 하니. 집사람 말고 이 이야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
그가 빙긋 웃고는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어. 폭력적이고 어머니와 나를 괴롭혔지. 그래봤자 다 변명이지만, 난 화가 가득한 사람으로 자랐단다.
매일 싸우고 시비 걸고 그랬어. 소질이라면 소질인지 내가 남들보다 잘하는 게 있긴 하더라. 약한 사람을 괴롭힌 건 아냐. 어쨌든 자랑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관장님한테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게 상상이 안 가요.”
관장님은 삼십 대 초반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삼십 대인데 그때 제가 느낀 어른의 그는 사십 대 같았습니다.
“그러니? 부끄러운 기억이지. 사춘기가 지난 뒤엔 맞아본 적도 없고 운동이란 운동은 다 배우고 다니면서 아주 거만했어. 운동선수나 주먹으로 유명한 사람과도 싸우고 그랬거든.”
그가 빈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며 조금씩 구겼습니다.
“아까 한 번 졌다고 했지? 고3 때 친구랑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군인하고 몸을 부딪쳤어. 그 사람은 젊은 여자와 같이 있었는데 군복이나 모자가 일반 군인은 아니었지.
그 사람은 예의 바르게 사과했어. 나는 트집 잡고 욕하며 계속 시비 걸었고. 난 누군가와 싸우고 싶었거든. 참 양아치였지. 그러다 내가 주먹을 날렸거든? 그 사람이 피하면서 나를 밀친 거까진 기억이 나는데. 병원에서 일어났어.”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가 뜸 들이자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뒤돌려차기 맞고 기절했다더라. 그 군인은 내 친구와 같이 택시를 잡고 병원까지 날 업었다고 했고.”
“한 대 맞으신 거예요?”
“어.”
“와.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었나 봐요. 그래서요? 또 만났어요?”
전 얘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나중에 만나긴 만났는데.”
관장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닫고는 소파에 다시 앉았습니다.
“아니다, 어차피 이따 술 마실 건데. 이야기 재밌니?”
“네. 엄청 재밌어요.”
“지금 몇 시니?”
“여덟 시 반이요.”
“왜 안 오지? 금방 온다더니. 너, 도장 사람들한테 이 얘기하면 안 된다.”
“네, 알겠어요.”
그가 다시 이야길 이었습니다.
“그날부터 뭔가 변화가 생겼어. 정신 차렸달까. 좀 늦었지만 대학도 갔고. 제대 후엔 닥치는 대로 일하며 돈도 꽤 모았어. 그러다 아버지 같은 분을 만나서 얼음 가게에서 일했지.”
“얼음 가게요? 지나가다 본 기억은 있는 거 같은데 생소하네요.”
전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가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어. 그땐 많았어. 내 아버진 나 스무 살 때 돌아가셨거든. 내가 얼음 장사를 배우려는 건 아녔지만 그분이 좋았어. 근데 가게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문을 닫았어. 난 월급도 밀려 있었고 그분한테 돈도 빌려드린 상태였는데 연락이 끊겼어. 행방도 알 수 없었고."
“네. 힘드셨겠어요.”
아버지 얘기를 듣자 조금 무거워졌습니다.
“힘들었지. 매일 술 마셨어. 세상이 날 버린 거 같았지. 근데 얼마 지나고 술에 취한 채 집에 가다가 길에서 그 사장을 봤어. 난 예전 양아치로 돌아갔지.”
“때리셨어요?”
“어. 그때 내 인생 가장 큰 실수를 했지. 눈이 뒤집혀서 죽어버리라고 때렸어. 사장은 누운 채 움직임이 없었어. 갑자기 정신을 차렸지. 내가 정말 사람을 죽인 건가 살펴봤는데 젊은 여자가 누워 있었어.”
“여자요? 사장이 아니라?”
“어. 나도 모르겠다, 왜 젊은 여자를 늙은 남자로 봤는지.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나도 이해가 안 돼. 너무 그 사람 생각만 해서 미쳤었나 봐.”
많이 놀랐습니다. 옛날얘기라 해도 관장님이 순간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바로 둘러업고 택시 잡아서 병원으로 갔어. 나도 너무 무서웠어. 이제 학생도 아니었고 사람을, 여자를 때리다니.
몇 시간 지나고 보호자가 왔는데 누구였는지 아니? 전에 봤을 때보다 수척하게 마르고 갑자기 늙은 거 같은 모습이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 그 군인이었어.”
“군인이요? 관장님 기절시킨 그 사람이요?”
“응. 그 남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무릎 꿇고 빌었어. 죄송하다고 어떤 처벌이든 다 받겠다고.
진심이었지. 눈물이 멈추지 않더라. 평생 울 걸 그날 다 울었어. 여자분은 내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거든.
그 남자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날 일으켜 세우면서 한마디밖에 안 했어.”
“뭐라고 했어요?”
“열심히 사세요, 라고.”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습니다. 가끔 태권도복을 입고 오는 형사님이었습니다. 형사님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라 했지만, 마지못해 몇 번 말했을 뿐 보통 아저씨라고 불렀습니다.
“야, 미안. 내가 좀 늦었지? 동훈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가던데 가실 거죠? 동훈이도 밥 먹고 가. 고기 사 줄게. 불 다 끄고 차단기 내리고.”
밤이었지만 가로등과 상가 불빛으로 밖은 환했습니다. 낮은 아파트 단지와 식당들이 주로 있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셋이 걷고 있었는데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습니다.
관장님이 형사님에게 말했습니다.
“형, 우리 또 언제 모여요? 와이프가 형수님 보고 싶대요. 우리 다음 달 지나기 전에 캠핑 갈까요?”
형사님이 말했습니다.
“그래, 알았다. 가자. 야, 동훈아. 나 며칠 전에 서에서 소매치기하다 잡혀온 애 봤는데 너네 학교인 거 같더라. 너 호석 중이지?”
“네. 맞아요.”
“넌 그런 거 하지 마라.”
“할 줄도 몰라요, 그런 거.”
“일진 놀이 같은 거 하면서 애들 때리는 거 아냐?”
“에이, 그런 것도 할 줄 몰라요.”
관장님이 형사님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형, 저 열심히 살고 있죠?”
“뭔 소리야, 갑자기. 너? 너, 사람 됐지.”
형사님이 관장님과 제 쪽을 보고 웃었습니다. 입가에 주름이 몇 개 생겼습니다.
관장님이 오늘 기분 좋다, 라고 크게 말하고는 제 어깨에 팔을 둘렀습니다. 키 차이가 크게 나서 팔이 가슴까지 내려왔습니다. 관장님이 제 귓가에 작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야, 그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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