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4선 국회의원, 전남지사 등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 곧은 성품과 따뜻함 갖춘 인물, 내각 수장으로서 역할 기대」
문재인 대통령이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이낙연(65) 전 전남지사를 선택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4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변인, 국회 농림수산식품 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원내대표, 전남도지사 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자랑한다. 국회의원 4번과 전남지사까지 5번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고배를 마신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5월 12일 오전 전남도청 왕인실(王仁室)에서 이 국무총리후보자의 전남지사 퇴임식이 열렸다. 이 후보자는 국무총리직 수행을 위해 전남을 떠나는 자리에서 잠시 목이 메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제가 어디에 있든, 전남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돕겠습니다”를 읽다, ‘전남’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한동안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이 모습에 참석자 일부는 낮게 소리 내어 흐느꼈다.
왜 울음이 나왔을까. 전남도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 후보자는 2014년 7월 낙후된 고향 전남을 “청년이 돌아오는 땅으로 만들겠다”며 4년 임기의 전남지사직을 시작했다.
퇴임식을 마치고 페이스북에 “‘어머니’ 얘기만 하려 해도 눈물이 나오는 것처럼, ‘전남’ 생각만 해도 목이 멥니다”라고 적은 것은 이 후보자의 당시 심정을 전해준다.
그에게 전남은 곧 어머니였다. 낳아주고, 길러준 그리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가야 할 길을 알려준 나침반이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았지만 전남지사직을 떠난다는 건, 어찌 보면 홀로 계신 어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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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을 모르겠거든 큰길로 가라”
이 후보자는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성장했다. 위로 두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가난했지만 어머니가 농사일과 채소 장사를 하며 이 후보자를 뒷바라지한 덕분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 후보자는 영광 삼덕초-광주북중-광주제일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21년간 재직했다.
그는 정치부 기자 시절 동교동계를 담당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김 전 대통령이 1987년 6·29 선언으로 사면복권되자 밀착취재를 담당했다. ‘최대한 가까이 붙으라’는 회사의 지시에 24시간 함께했다. 심지어 김 전 대통령이 차에 오르기도 전에 이 후보자가 먼저 타 있곤 했다.
김 전 대통령은 DJ-YS 후보단일화 실패 배경, 대선 패배 예상 등 차 안에서 모든 얘기를 해줬다. 그만큼 이 후보자를 신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후보자의 팩트 중심 보도와 분석력을 높이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89년부터 총선 출마를 권유했다. 이 후보자는 계속 고사하다 2000년 16대 총선에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세 차례 더 배지를 달았다.
정계입문 후 이 후보자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16대부터 19대까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승리했다. 2004년 당시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참여했다가 총선에서 참패했을 때도 당선됐다. 19대 국회의원 재임 중 도전한 전남지사 자리도 거머쥐었다.
그는 ‘5선 대변인’이란 별명처럼 대변인으로 맹활약하며 주가를 올렸다. 간결하고 절제된 논평으로 ‘대변인 문화’를 새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시절 논평을 모은 책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는 훗날에도 여야 대변인실에서, 농식품위원장 시절의 축사 등을 모은 책 <농업은 죽지 않는다>는 지방의원 등에게 참고자료로 활용될 정도다.
대변인으로서 명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잘 나타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을 앞두고 취임사 준비위원회에서 만든 취임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취임식을 이틀 앞두고 당선인 대변인이었던 이 후보자에게 취임사를 손보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후보자가 쓴 취임사를 극찬하며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보자의 문장력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2년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 시절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는 당내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을 향한 논평은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파고든 메시지란 평가를 받았다.
이 후보자는 국회의원 시절엔 합리적이고 충실한 의정활동으로 여야를 넘어 호평을 받았다. 적을 만들지 않는 유연한 성품을 갖고 있어 ‘젠틀맨’으로 불렸다. ‘국회를 빛낸 바른언어상’ 가운데 ‘으뜸상’의 초대 수상자 선정이 말해주듯 기품 있는 말과 글을 사용했다. 상냥하면서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아 대인관계가 좋았다.
재치와 유머감각도 남다르다. 2005년 한 TV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그를 포함해 의원 100여 명이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이 후보자는 이때 “정치인의 장기도 받아주느냐”고 말해 화제가 됐다. ‘정치가 썩었다’는 인식을 비틀어 던진 유머였다. 이 한마디가 이날 서약식을 상징하는 ‘어록’이 됐다.
노 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 대변인을 맡았지만 친문(친문재인)은 아니다. 2002년 대선 직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할 때 이 후보자는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친노(친노무현) 인사들과 여러 번 정치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