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이른 새벽, 아파트 베란다 창틀에 까마귀가 날아와 앉았다.
까마귀의 울음소리에 남자는 깨어났다.
핸드폰을 켜보니 현재 시각은 4시 44분.
벌써 일어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대였다.
그는 비몽사몽 간에 베란다로 나가 까마귀를 쫓아버리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13층 아파트에 새가 날아들다니 별일이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면서……
다시 눈을 떴을 땐 오전 9시경이었다. 회사의 출근 시간은 9시까지였다.
‘이럴 수가’ 5년간의 회사 생활 중 지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그는 몹시 당황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이었고 그는 프로젝트의 핵심멤버였던 것이다.
머리를 대충 정돈하고 오늘 발표할 때 사용할 USB와 서류 가방 그리고 다이아 반지를 챙겼다.
평소와 다르게 부산스럽게 움직인 탓인지 책상에 올려 있던 연인과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액자는 여자 부분의 유리 쪽은 말끔했으나 남자 부분 쪽이 산산조각이 났다.
세탁소에 맡겼던 양복이 모두 도착하지 안 않기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상갓집에 갈 때나 입는 검은색 양복을 꺼내 입었다.
구두라도 색깔을 달리하려고 갈색 구두를 꺼냈지만 처음 신은 순간 구두끈이 끊어졌다.
어쩔 수 없이 검정 구두를 꺼내 신으니 남자의 차림새는 영락없이 장례식 복장이 되어 버렸다.
핸드폰을 보니 현재 시각은 9시 15분.
한동안 연락이 없으시던 고모할머니에게 걸려온 부재중 전화 4통이 찍혀 있었다.
예전에 무당 일을 하셨던 고모할머니가 유독 자신을 귀여워 해주셨다는 유년 시절 기억을 그는 잠시 떠올렸지만 서둘러서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통화를 미루고 집 밖으로 나왔다.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앞 주차장에 세워놓은 차를 타고 급히 시동을 걸고 전진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타이어가 펑크나 버렸다.
그는 욕지거리하며 차를 다시 주차장에 세워놓고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길거리엔 검은 고양이들이 비를 맞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를 잠시 바라보며 달리다가 그만, 맞은편에 있던 남자와 강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부딪친 남자는 그 충격으로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를 떨어뜨렸는데, 검은색의 그 카메라는 한눈에 봐도 예사 물건이 아닌 귀한 것으로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는 사과하며 카메라를 주워 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손대지 마십시오!”
그 남자는 마치 그처럼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위에 검정 코트와 챙이 넓은 중절모자를 쓰고 검은 우산을 들고 있는 차림새였다.
온통 검정색 차림의 옷차림이었지만 유달리 피부는 창백한 하얀색이라서 더 도드라져 보이는 차가운 인상의 남자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보상해드리겠습니다.”
그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지만 남자는 받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뭔가 기분 나쁜 느낌이 든 그는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지나쳤다.
“조심하십시오.”
검은 옷 입은 남자가 그의 등 뒤에서 차갑게 쏘아붙였다.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 들었지만, 너무 급한 나머지 그는 그대로 회사로 향하고 말았다.
그가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비에 젖어 축축해진 초라한 몰골로 자신의 부서 사무실에 들어가자 모든 직원이 그를 쳐다봤다.
부장님이 일어서더니 호통치듯 외쳤다.
“서 대리!”
“죄송합니다.”
서 대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전 중에 거래처에서 자신에게 걸려올 중요한 전화들도 있었고 오후에는 프레젠테이션에서 발표자로 나서야 하는데 이미 다 망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장님은 서 대리에게 다가와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축하하네 서 대리. 자네가 추진한 거래처 세 곳 모두 거래 성사됐어!”
서 대리가 눈을 떠보니 부서 내 전 직원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지금 사장님도 회사 창립 이래 최고의 성과라고 아주 기뻐하고 계셔!”
서 대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전자부품 유통 전문 중소기업인 그의 회사는 국내 시장에서 작은 거래처 하나를 확보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 보수적인 시장구조 안에서 경쟁하고 있었다.
회사는 작지만 확실한 국내의 소규모 거래처를 공략하는 방식을 고수했었는데, 서 대리는 역으로 해외에 대형 거래처를 세 군데나 개척하는 공격적인 영업 전략을 썼다.
회사는 물론이고 본인 자신도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별로 없었는데, 한 군데도 아닌 세 군데 모두 거래가 성사되다니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성과급과 파격적인 진급이 주어질 것 또한 확정적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모두 서 대리에게 다가와 축하해주었다.
그는 아침에 있었던 불쾌감은 잊어버린 채 그들의 축하에 일일이 화답했다.
“오늘 점심은 제가 사겠습니다.”
제법 비싼 곳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가며 서 대리는 직원들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이야, 서 대리에게 밥을 얻어먹다니 진짜 별일이 다 있네”
“어머, 그러게요. 서 대리님 오늘은 진짜 평소랑 달라 보여요.”
“진짜 오래 살고 볼일이다. 이런 날도 다 오고.”
직원들은 평소보다 더 살갑게 그에게 다가갔다.
사실 서 대리는 평소 직장에서의 평판이나 대인관계가 좋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외모였으나 매사에 무심하고 심드렁한 태도 하며 수시로 업무시간에 졸다가 혼나는 등 은근히 무시당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오늘부로 단 한방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크게 증명해낸 것이다.
그런 서 대리를 은주경 과장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서 대리도 은주경 과장을 보고 살짝 웃어보았다.
어느새 비는 멎었고 어두웠던 하늘은 밝게 개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직원들은 노상에 허름하게 세워진 타로 점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여자직원들은 점집을 보게 되자 흥미를 보이며 몰려들었다.
남자직원들은 별 관심 없다며 먼저 회사로 들어갔지만, 서 대리는 은주경 과장이 점집에 들어가자 슬그머니 그 뒤를 따라갔다.
점술가는 나이를 가름할 수 없는 할머니였는데 검은색 로브에 목걸이, 귀걸이, 팔찌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통일한 복장이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까만 눈동자였다.
서 대리는 그 눈동자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린 시절에 분명 느꼈던 강렬한 기시감, 하지만 더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직원들은 점쟁이 할머니의 타로 점에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너무 잘 맞고 신통하다며 난리도 아니었다.
멀찌감치 뒤에서 구경하던 서 대리도 은주경 과장의 떠밀림에 타로점을 보게 됐다.
장난삼아 연애 운을 물었더니 할머니 점쟁이는 서 대리에게 앞에 있는 놓여 카드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서대리가 고른 카드를 점쟁이가 뒤집자 언덕 위에 큰 태양이 뜬 그림이 보였다.
“자네는 이미 인생 최고의 여자를 만났다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를 잡도록 해.”
점쟁이 할머니는 은주경 과장을 한번 훑어보더니 살짝 미소 지었다.
설마, 자신과 은주경 과장의 관계를 알아차린 건가? 서 대리는 당혹스러우면서도 할머니의 신기에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내친김에 자신의 장래 전망에 대해서도 물었다.
점쟁이는 카드 석 장을 고르라고 했다.
각각의 카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뜻한다는 설명과 함께.
서 대리가 석 장을 모두 고르자 점쟁이는 카드를 한 장씩 뒤집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과거 카드에는 여우 그림이 나왔다.
점쟁이는 무표정하고 거침없이 다음 카드를 뒤집었다.
두 번째 현재 카드는 캄캄한 방 한구석, 어두운 소파에 앉아 고뇌하고 있는 검은 실루엣의 남자가 담긴 그림이 보였다.
검은 남자의 절반가량은 그림자에 가려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짧은 탄식과 함께 점쟁이 할머니의 표정 없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순간 허름한 천막 안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모두, 적확한 이유는 알 순 없었지만, 불길한 어떤 공기를 느꼈던 것이다.
점쟁이 할머니의 눈동자에 더욱 깊은 어둠이 파고드는 것을 서 대리는 놓치지 않았다.
어디서 봤단 말인가 저 눈동자를.
한동안의 무거운 침묵 속, 아직 미래 카드는 뒤집지 않은 상태로 놓여있었다.
저것을 본다면 아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서 대리는 그 카드에 손을 내밀었다.
“건드리면 안 돼!”
점쟁이 할머니가 새된 소리를 내지르던 그 순간.
천막 안에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할머니, 불법영업 행위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이곳에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 덕분에 장내는 잠시 소란에 빠졌다.
그 혼란한 와중에 점쟁이 할머니는 검은 눈동자로 멍하게 허공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서 대리는 마침내 기억을 떠올렸다.
자신의 어린 시절, 무당 일을 하던 고모할머니가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온종일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던 바로 그 눈이었다.
오후 시간에는 예정된 대로의 프레젠테이션을 서대리가 발표했다.
다만 이미 계획했던 프로젝트가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었기에 지금의 발표는 그저 형식상의 진행에 불과했다.
회의에 참석한 직원들의 표정에도 모두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단 한 명, 서 대리 혼자만이 몹시 긴장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는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다이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은주경 과장을 바라보았다.
은주경 과장, 서대리보다 3살 연상인 그녀는 명실상부한 이 회사의 에이스였다.
명문대를 졸업해 해외 유학을 다녀온 수재였으며 예쁜 외모와 날씬한 몸매로 뭇 남자들의 동경과 여성들의 선망 대상이었다.
항상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성품은 모든 직원들에게 사랑받았으며 성실하고 부지런한 태도는 늘 타인의 귀감이 되는 여성이었다.
그런 그녀와 서 대리는 지난 2년간 몰래 사내연애를 하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자신을 왜 좋아해 주는지 이해가 안 됐지만 확실한 건 그의 인생 최고의 행운이 그녀와의 만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도 절반 이상은 은주경 과장의 도움 덕분에 가능했다.
서 대리는 만약 프로젝트가 조금이라도 성공한다면 마지막 프레젠테이션 시간에 공개 프러포즈를 하기로 결심했고, 지금 이 순간 최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서 대리는 주머니 속 다이아 반지를 만지작거린 후, 긴장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 여러분께 진지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 대리는 은주경 과장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은주경 과장도 이 상황을 예감한 듯 상기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회사 사장님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걸어 들어왔다.
“으하하하하, 서 대리! 이 친구 아주! 오늘 운수 좋은 날이야!”
사장은 서 대리를 껴안고 볼에 뽀뽀하며 기뻐했다.
전 직원들은 기립해서 손뼉을 치며 축하해 주었다.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지만 서 대리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장님을 비롯한 전 직원 여러분. 그리고 제가 이 자리를 통해서 드릴 말씀이…”
그러나 성질 급한 사장은 서 대리의 말을 자르고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 그전에 미안한데 지금 서면에 위치한 우리 회사 부산지사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해서 말이야.”
사장은 여전히 서 대리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말을 이어 갔다.
“이렇게 좋은 날 미안하긴 한데 말이야, 부장님이랑 은 과장님이 잠깐 내려가서 문제 좀 해결해주고 와야겠는데.”
“아닙니다 사장님! 당연히 가야죠! 당장 달려가서 차질없이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아부쟁이 부장은 이미 짐을 챙겨서 회의장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안하네, 대신 돌아와서 내일 저녁은 내가 정말 거하게 한턱내겠네 으하하하하.”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고 보니 서 대리는 프러포즈를 내일 저녁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부장님은 벌써 회의장 밖을 빠져나갔고, 은 과장도 짐을 챙겨서 나가려다 서 대리 앞에 와서 악수를 신청했다.
“서 대리님, 오늘 멋있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다 은 과장님 덕분이죠.”
그녀가 싱긋 웃었다.
서 대리는 마주 잡은 손을 놓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은 과장! 빨리 안 갈 거야?”
회의실 밖에서 부장의 닦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지금 갑니다. 서 대리님 다녀와서 또 봐요.”
인사를 하고 멀어지는 은 과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대리는 먹먹한 그리움을 느꼈다.
“저, 은 과장님! 다음 달에.”
“네?”
“사 일 날, 저
랑 같이 파견근무
해 야 하는 거 아시나
요.”
은 과장은 환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저 는 그날
도 저히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요.”
다시금 멀어지는 은 과장의 뒷모습을 서 대리는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아, 서 대리. 무슨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사장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서 대리에게 물었다.
“별거 아닙니다. 내일 저녁 회식 자리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에게 대답하며 서 대리는 아쉬움을 삼켰고 마지막으로 주머니 속 반지를 한 번 더 만져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 저녁.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고 연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 대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버스 안에서 창밖의 비를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반추했다.
생각지도 못한 프로젝트의 성공에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짚이는 건 아침부터 일어났던 불길한 징조들이었다.
평소 미신을 믿지 않고 성격도 둔감한 편인 서 대리였지만 뭔가 꺼림칙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집에 갈 때까지만 조심하면 돼.’
서 대리는 자신을 스스로 다잡으며 버스에서 내렸다.
이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집에 도착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신호등은 파란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급하게 뛰어서 건넜겠지만, 오늘만큼은 안전하게 다음 신호를 기다리자고 서 대리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도로 끝에서 검은색 대형 덤프트럭이 빠른 속도로 빗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서 대리는 신호를 기다릴 동안 팝송이나 들을 요량으로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이어폰 줄에 딸려온 다이아 반지가 바닥 쪽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반지는 대굴대굴 구르면서 도로 쪽을 향해 나아갔다.
반지가 도로에 굴러 들어가기 직전, 서 대리는 황급히 발을 뻗어 반지를 멈췄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안도하며 반지를 손으로 주우려는 순간 서 대리는 보았다.
반대편에서 노란 장화를 신은 네 살가량의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하게 횡단보도를 건너오고 있는 모습을.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만삭의 임신부는 휴대폰을 보느라 잠깐 신경을 못 쓴 듯했다.
아이는 벌써 횡단보도를 반 정도 건넜는데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었다.
그 앞으로 덤프트럭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이가 너무 작고 빗속이라 운전자의 시야에 닿지 않은 듯했다.
아이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고 임신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비명을 질렀다.
서 대리는 순간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이를 구할 것인가, 반지를 주울 것인가.
서 대리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확률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고교 시절까지 했던 농구부에서 항상 에이스였을 정도로 서 대리는 운동신경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라면 높은 확률로 아이를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를 구한 후에 자신이 무사할 확률까진 장담하지 못했다.
불현듯 오늘 아침에 만난 검은 정장 남자의 불길했던 한마디가 뇌리에 스쳤다.
‘조심하십시오.’
그렇다. 오늘은 정말 조심해야 하는 날이었다.
아이는 그와는 상관없는 타인이었으며, 괜히 무리하여 자신의 인생에 불행을 가져올 확률을 높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서 대리는 반지를 향해 몸을 굽혔다.
그 순간 떠오르는 주경 씨의 환한 미소.
‘그래, 선행은 산수가 아니야!’
그는 결심을 굳히고, 총알처럼 도로를 향해 달려나갔다.
아이를 구하지 않는다면 주경 씨에게 당당한 남자친구로 살아갈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아이와의 간격을 단숨에 좁혔고, 번개처럼 아이를 안아 올려 임신부 쪽을 향해 던졌다.
‘정말 내 인생 최고의 어시스트로군.’
그는 웃으면서 생각했다.
덤프트럭은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고 곧이어 들리는 찢어질 것 같은 급브레이크 소리.
서 대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안녕, 주경 씨.’
눈을 떴을 땐 세상 모든 것들이 멈춰있었다.
도로 위의 차들도 사람들도.
움직이는 건 오로지 아침에 만났던 검은 정장의 사내뿐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어서 대리를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서 대리는 깨달았다.
‘저 남자는 나의 저승사자였구나, 결국에 나는 이렇게 돼버렸구나.’
그래,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주경 씨에게 프러포즈하려던 계획이 틀어졌을 때부터, 점심시간에 본 점쟁이 할머니의 눈동자에서부터, 아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처음 까마귀를 봤던 순간부터.
어쩌면 주경 씨를 처음 사귀게 된 그 날부터 마음속 깊은 곳에선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않는 큰 행운에 결국 이런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검은 정장의 남자는 사진을 찍은 후 서 대리를 부축해 일으켰다.
“이왕이면 천국에 보내주세요. 착한 일을 했으니까요.”
서 대리는 저승사자에게 애써 농담을 건넸지만 남자는 말 없이 인도로 그를 이끌었다.
검은 정장의 남자는 그를 인도에 있던 벤치에 앉히며 말했다.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의 말에 서 대리는 의아해하며 답했다.
“저승사자치고는 다정하신 분이군요.”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조선겨레 신문사의 김남우 기자라고 합니다.”
“뭐라고요? 저 죽은 거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간발의 차이로 차가 멈췄어요, 그리고 선생님은 정말 멋진 일을 해내셨고요. 대단하십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샌가 사람들이 서 대리 곁에 몰려들어 손뼉을 쳐주고 있었다.
사람들뿐 아니라 도로 위의 차들도 모두 경적을 울리며 서 대리에게 환호를 보냈다.
임신부 엄마도 아이를 데리고 와서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남우 기자는 서 대리에게 ‘YG 의인상’을 꼭 추천하겠다며 그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축하를 받던 서 대리는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다시 주워 주머니에 넣은 순간에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실감을 하기 시작했다.
내리던 비도 서서히 그쳐가는 저녁이었다.
김남우 기자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사람들의 환호와 아이 엄마의 사례를 정중히 고사하고 나서야 서 대리는 겨우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샤워하고 소파에 앉아 멍하게 휴식을 취하던 서 대리는 문득 아침에 걸려온 고모할머니의 부재중 전화가 생각났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고모할머니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태웅이 아녀, 잘 지내고 있는겨. 백호가 너 많이 보고 싶단다.”
“고모할머니,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전화하셨더라고요”
“그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감 농사가 대풍이라서 곶감 만들었자녀~. 니 엄마 통해서 보냈으니께 맛있게 먹고 잘 지내거라~.”
고모할머니와의 통화를 마치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까 어제 아파트 베란다에 곶감 갖다 뒀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베란다를 나가보니 정말 크고 먹음직스러운 곶감이 세 상자나 놓여 있었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어보니 역시나 달착지근하며 존득한 곶감의 맛과 향이 정말 일품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까마귀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요 녀석, 이게 먹고 싶었던 거로구나.”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곶감 하나를 집어 창틀 앞에 놓아 주었다.
까마귀는 기쁜 듯이 곶감을 물어 들고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가는 까마귀를 바라보다 그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내일은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 될 거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