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한밤중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을 꾸었기 때문이다.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막연하지만 확정적인 불쾌하고 묘한 느낌.
현재 시각은 새벽 3시경. 도저히 다시 잠이 들 수가 없어 형광등을 켰다. 책상 위엔 어젯밤 먹다 남은 바게트와 와인이 있었다. 전혀 식욕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집어 먹었다. 핸드폰을 켜보니 엄마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괜찮니? 이상한 꿈을 꾸었단다. 문자 보면 연락해주렴.」
문자가 도착한 시간은 고작 5분 전이었다. 이 밤중에 연락하시다니 게다가 엄마도 나처럼 악몽을 꾸셨단 말인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고 통화를 할까 말까 고민을 했다. 평상시라면 나중으로 미뤘겠지만, 지금은 내 안에 불안감이 통화를 부추겼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금세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영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이상한 꿈을 꿨어.”
“엄마, 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주무세요.”
본심과는 다르게 나는 엄마를 위로하고 있었다. 엄마를 걱정시키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내 성격인 탓이다.
“아니야, 뭔가 느낌이 안 좋아서 그래. 정말 괜찮아?”
“엄마, 진짜 괜찮다니까. 늦었는데 일단 자고 내일 연락해요.”
“혹시 너 쫓아다니던 그 전 남자친구가 무슨 해코지 하는 건 아니지?”
“엄마, 걔는 연락 안 한 지 6개월도 넘었어. 괜찮아.”
“내 꿈에서 걔가 나왔어. 지영아 안 되겠다. 엄마가 갈 게 같이 있자.”
나는 진심으로 엄마가 내 옆에 있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본심과는 다르게 자꾸 엄마에게 딴소리했다.
“어휴, 엄마!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왜 와 힘들게.”
“걱정되니까 그렇지.”
“됐어. 괜찮으니까 일단 자고 내일 다시 통화해.”
나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미쳤나 정말, 난 왜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지금 떨고 있잖아. 엄마는 내가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는 걸까.
「엄마 지금 갈게. 오늘 밤엔 같이 있자.」
엄마는 끝끝내 우리 집에 온다고 문자를 보냈다. 정말 세상에 믿을 사람은 엄마밖에 없구나. 가슴에 사무치는 안도감이 불안감을 덮어버렸다.
「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올 때 아이스크림 사 오고.」
나는 싸가지 없는 딸답게 문자를 보냈지만, 어느새 마음에 여유를 찾고 있었다. 엄마가 우리 집까지 오는 데는 길어도 10분이면 충분했다. 편의점에 들렀다가 와도 15분 안이면 도착한다는 얘기다. 나는 다시 이부자리에 앉아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나저나 엄마가 꾼 꿈은 어떻기에 저렇게 불안해하시는 걸까. 내 전 남자친구가 나왔다면 꽤 악몽이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꾼 꿈만큼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내 꿈을 생각했다.
칠흑 같은 어둠이 잠식한 고요한 밤바다. 아니 밤 호수라고 해야 할까. 끝도 없는 무아지경의 어둠의 호수 위에 검은 대청마루가 마치 뗏목처럼 적요하게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내가 앉아 있다. 대청마루 구석에는 얕은 불의 등잔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하얀 한복을 차려입고 쪽 찐 머리를 한 얼굴 없는 여인이 앉아서 뭔가를 바느질하고 있다. 여인은 얼굴이 없었지만 느낌으로 엄마라는 걸 알았다. 가까이 다가갔더니 얼굴 없는 엄마가 꿰매고 있는 건 바로 나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검은 호수 위의 대청마루에서 내 얼굴 가죽을 꿰매고 있던 얼굴 없는 엄마의 잔상은 다시 생각해도 소름이 끼쳤다. 그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편의점도 안 들리고 빨리 달려온 모양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칼을 든 전 남자친구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네. 보고 싶었어.”
사람이 죽기 전에는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고 했던가. 그 새끼를 보는 순간 나는 불현듯 죽음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27년의 인생이 필름처럼 머릿속에 영사되었다.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영상이었다. 그중 가장 슬펐던 건 아빠의 장례식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것도 슬펐지만 엄마가 우는 모습은 더 슬펐다. 내가 죽으면 엄마는 도대체 얼마나…… 그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싫은 풍경이었다. 나는 살기로 결심했다.
머릿속 인생 필름을 되돌려서 초등학교 때 다니던 합기도인지 태권도인지 가물가물한 영상을 찾았다. 관장님은 나에게 위기 상황 시에는 오른발로 남자의 고환을 가격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맨발인 데다 그 새끼는 다리를 붙이고 있어서 도저히 찰 수 있는 각이 안 나왔다. 조금 더 기억을 더듬어 보니 관장님은 주먹보다는 팔꿈치가 더 강하다고 얘기해 주셨다. 그리고 며칠 전에 피부미용실에서 얼굴 마사지를 받다가 원장님이 내 관자놀이를 주물러 주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관자놀이를 어찌나 세게 눌러주시던지 눈에서 불똥이 튈 뻔했던 그 아련한 기억. 3만 원짜리 인줄 알고 받았는데 알고 보니 30만 원이라서 원장님과 싸울 뻔 했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니 감사해요 원장님. 사람의 급소를 그렇게 정확하게 알려주셔서요. 하지만 그래도 30만 원은 좀 비싸긴 했네요.
이 모든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 간 건 현관문을 열고 그 녀석과 마주한 지 1초 남짓한 사이.
나는 오른팔을 접고 팔꿈치로 그 녀석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둔탁한 파열음이 들렸다. 필시 그 녀석의 관자놀이든 내 팔꿈치든 둘 중 하나가 파열된 것이 틀림없으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후자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른팔이 전기에 감전된 듯 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에 침을 바를 시간도 없이 나는 발을 들어 그 녀석을 문밖으로 차버렸다. 왼손으로 현관문을 닫으려는 순간 그 녀석의 칼이 불쑥 들어와 내 손목을 그었다. 손목에서는 피가 튀었고 본능적으로 오른팔로 왼팔을 감싸 쥔 순간, 그 녀석이 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왔다. 왼팔과 오른팔을 모두 쓸 수 없는 상태였지만 내 안에서 강렬한 소리가 나를 움직였다.
‘살아야 해’
그 소리에 용기를 얻어 나는 그나마 성한 오른쪽 어깨를 축으로 그 녀석에게 몸통 박치기를 했다. 녀석은 균형을 잃고 현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 와중에도 온몸으로 현관문을 막고 있었다. 그 틈에 탈출한 곳을 찾았지만, 원룸 옥탑방에 사는 나에겐 도저히 현관 말고 나갈 곳은 없었다. 급한 대로 일단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문을 잠갔다. 걸려있는 수건으로 왼팔 손목을 묶었다. 수건 위로 피가 계속 스며들었다. 화장실은 창문도 없는 완벽한 밀실이다. 핸드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어떡하지.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그러나 제대로 생각할 시간도 없이 전남자친구는 화장실 앞까지 들어와서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렸다.
“지영아, 얘기 좀 해. 나 너 사랑한다고.”
사랑해서 칼 들고 찾아왔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잠시 후에 엄마가 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하지.
“미안해. 내가 잘 못 했어. 다시 기회를 줄 수 없을까. 나 이번엔 정말 잘할게”
저 미친 새끼는 어떻게 저런 헛소리를 태연하게 잘하는 걸까. 3개월 동안의 짧은 만남 동안에도 항상 저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항상 똑같은 폭력을 당했었지. 개 같은 새끼. 만약 엄마가 지금 들어온다면……
“꺅!”
엄마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그 녀석이 달려가는 소리도. 화장실 안에는 도저히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지만 급한 대로 벽걸이 거울을 떼서 나도 문을 열고 나갔다. 엄마와 그 녀석은 현관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나는 거울째로 그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거울은 와장창 깨졌고 그 녀석은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엄마 괜찮아!”
엄마는 아직 쓰러져 있었고 그 녀석은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이 개 같은 빌어먹을 새끼.
나는 책상으로 달려가 와인병을 집어 들어 그 녀석의 관자놀이에 정통으로 후려쳤다. 와인병은 산산조각이 났고 그 자식의 몸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녀석의 두 다리 사이를 아래서 위로 강하게 후려 찼다. 녀석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완전히 기절한 걸 확인하고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어떡해.”
엄마에게 다가가 얼굴을 쓰다듬으며 안색을 살피자 엄마가 눈을 뜬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지영아 괜찮니”
“괜찮아, 엄마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
엄마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 속에 있는 아이스크림 통 속엔 그 녀석의 칼이 깊숙이 꽂혀있었다. 엄마를 일으켜 세운 후 같이 아래층에 주인집으로 내려가서 경찰과 소방서에 신고했다. 주인아저씨는 내 집으로 올라가 그 새끼를 결박해 두셨다. 주인집 안에서 경찰과 응급차를 기다리면서 나는 엄마에게 안겨 울었다.
“엄마 사실 나도 악몽을 꿨었어.”
“어쩐지 되게 걱정이 되더라고.”
“응, 사실은 너무 무서웠어.”
“이젠 괜찮아.”
“응, 미안해”
“괜찮아.”
그렇게 악몽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