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네요. 어제는 경기도 양평에 사는 형네 집에 다녀왔어요. 형 차를 타고 양평역으로 나오는 길에 한적한 마을 도로변에 서 있던 단풍나무를 봤는데, 바알간 단풍잎이 참 예쁘더군요. 생각해보니 올 가을엔 제대로 단풍을 구경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가뜩이나 길어진 여름과 겨울 탓에 롤러코스터를 타듯 봄가을이 휙휙 지나가버리잖아요. 단풍을 보기 위해서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시간을 내야 하는 건데... 우리네 생의 아름다운 것들은 왜 이다지도 빨리 사라지는 것일까요.
사라지는 것들을 뒤로 하고 지금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요. 싫든 좋든 써야 할 것이 제게는 있거든요. 원래 저는 소설을 써야 할 운명의 사람은 아니었어요. 대학 학부랑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했거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공부를 해서 학위도 받고 대학 강단에 서고, 나름 훌륭한 역사책을 쓰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소설을 쓰고 있죠.
학술적인 글쓰기와 문학적 글쓰기와는 정말이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우선 논문이나 학술서에는 저자의 개성보다는, 지식과 정보의 전달이라는 목적에 맞게 이상적이고 표준화된 형태의 글쓰기의 모범이 존재하거든요. 예를 들면, 서론에서는 그 글을 왜 쓰는지 저자의 문제의식이 들어가야 하고, 해당 주제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자신의 연구는 그와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등등, 거의 반드시 서술되어야 하는 항목들이란 것이 존재해요. 문장이나 문단의 구성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건조하고 간결한 형식을 선호하고요. 그렇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죠. 상징과 비유, 형식적 실험과 파괴가 자유롭고... 그밖에 또 많은 차이가 있겠죠?
이처럼 큰 차이를 넘어서 제가 소설을 쓰게 된 것은 말이죠, 제 의지였다기보다는 어떤 우연의 산물이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시발점은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던 작년 8월이었어요. 당시 저는 신촌 근처에서 살 자취집을 열심히 찾고 있던 중이었어요.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종일토록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다가 기진맥진할 무렵에, 어느 부동산을 통해 지금의 집을 소개받게 되었어요. 어느 동네인지는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주변 시세보다 좀 싸게 나온 편이더라고요. 층마다 두 세대씩, 4층 건물로 되어 있는 다세대 주택이었어요. 제가 소개받은 집은 맨 꼭대기 층의 402호였지요.
주택가라 조용하고 깔끔한 편이었고, 교통 편의성도 좋아 맘에 들어서 계약을 하고 입주하게 되었어요. 제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옆 집 401호에도 새로 이사를 오더군요.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가구며 가재도구를 나르던 모습을 봤어요. 이삿짐 가운데 책이 많더라고요. 저도 책이 많은 편이라 아는데, 이삿짐 센터에서 제일 기피하는게 책 많은 집이래요. 워낙에 부피 대비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그분들께는 고역인 거죠. 어쨌거나 그렇게 같은 층에 이웃이 생기게 되었지요.
이 집에 이사 왔을 때가 한 여름이었던 데다가, 집에 에어콘도 없어서 전 하루종일 선풍기를 틀어놓고 지내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인가였죠. 저녁에 집에 들어오는데, 현관문을 열고 보니 바닥에 뭔가 희끗한 게 보였어요. 불을 켜고 자세히 보니 노란색 포스트잇이더군요. 누가 현관문 밑으로 밀어넣었나 봐요. 포스트잇에 펜으로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어요.
“창문을 잘 닫아 주세요.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네요.”
어랏, 순간 얼굴이 화끈해지더라고요. 제 집에는 복도로 난 창이 하나 있어요. 같은 층이 공유하는 복도로 난 창. 복도라고 해봐야 비만 들이치지 않도록 가림막만 설치되어 있어서 바깥과 통해요. 그런데 그 창 쪽은 평소엔 사람이 거의 안 다니거든요. 건물 계단과는 반대 방향이어서. 그래서 날도 더우니 평소에 방충만만 끼고 창을 열어놓고 지냈어요. 실내에선 사각팬티만 입고 지내면서. 아마, 누가 우연히 그쪽을 지나다가 저를 봤나 보죠. 저야 뭐 그 정도 벗고 있는 거 누가 본다고 해도 별로 신경 안 쓰긴 하는데, 아마 보기가 불편했었나 봐요.
누가 쪽지를 남겼을까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옆집 401호 같더군요. 그러면... 옆집에 사는 젊은 여자가 우리 집 창을 통해 내 벗은 몸을 봤다는 말...? 물론 쪽지 어디에도 자신이 젊다거나 여자라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하지만 글씨체가 예쁜 것이, 글을 쓴 사람이 왠지 젊은 여자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어요.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옆집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누군지 되게 궁금했었거든요. 가끔씩 들었을 법한 대화소리 한번 못 들은 것을 보면 혼자 사는 것도 맞는 것 같았고요. 어쨌든 옆집 사람이 민망해서 글을 남긴 것이니 전 미안했죠. 이 창 쪽엔 어쩌다 왔는지 모르지만, 뭐 못 오게 막아둔 것도 아니니까요. 제가 좀 더 주의를 할 수밖에요.
그래서 그 뒤론 그쪽 창은 줄곧 닫아두고 지냈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였어요. 밤에 집에서 전공서적을 읽고 있는데, 나지막하게 웬 여자의 책 읽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무슨 말인지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젊은 여자의 목소리라는 것과 그 중에도 예쁜 목소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죠. 유인나 씨 목소리랑 비슷한 느낌이라면 아실까요. 약간 하이톤에 맑으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 허스키가 섞여 있는 음색. 그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하더군요. 귀를 기울이게 하는 목소리. 옆집 쪽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옆집 여자가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살고 있는 402호와 옆집인 401호는 모두 복도 쪽 말고 맞은 편 건물 쪽으로도 난 창이 있는데 아마 그 창문을 열고 책을 읽는 것 같았어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저는 그 소리가 전혀 거슬리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기분좋게 빠져 있었죠. 다행히 옆집 여자는 점점 더 낭독의 재미를 발견했는지, 책을 읽는 날이 많아졌어요. 밤에 집에 돌아와 자기만의 시간을 책을 낭독하면서 보내는 듯 했어요. 보통 밤 10시에서 12시 사이 정도에 책을 읽더군요. 저는 원래 잠을 늦게 자는 편이어서, 자는데 방해받을 일도 없었고, 그 시간이 되면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었어요. 그 소리가 안 들리는 날이면 왠지 듣고 싶고 자꾸 기다리게 되더군요.
몇 주 동안 그렇게 목소리만 듣다 보니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무척 궁금해지더군요. 그렇지만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었어요. 마주친 적도 없고, 언제 집에 들어가고 나가는지를 알 수 없었죠. 그렇다고 무작정 그 집 벨을 누른다던가 할 수는 없잖아요. 며칠을 생각하다 저는 그 여자가 저한테 했던 방법을 쓰기로 했어요. 그 길로 작고 예쁘장한 붉은색 선인장이 담긴 화분을 하나 샀어요. 선인장이 물도 안 줘도 되고 키우기 쉽거든요. 그리고 포스트 잇을 하나 뜯어내서 정성스럽게 글을 썼죠.
“402호입니다. 지난번에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그때 일로 미안하다고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통 기회가 없네요. 선인장은 사과의 표시입니다. 이웃인데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쓴 포스트잇을 한참을 망설이다 옆집 401호 현관 밑으로 밀어넣었어요. 그리고 현관문 손잡이에는 선인장 화분이 담긴 바구니를 걸어두었어요.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집을 나가다 보니 옆집 현관문에 걸어두었던 선인장이 안 보이더군요. 그 집 여자가 가지고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어요. 괜시리 스르륵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면서 얼굴이 화끈해지더군요. 한편으론 너무 유치한 짓을 한 게 아닌지, 상대가 오히려 더 나를 불편해하고 경계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막 들더군요. 그래도 뭐 이미 저지른 일이었지만요.
그런데 그날 저녁 늦게 누군가 현관문 벨을 누르더라고요. 누굴까 하면서 나가보니 웬 남자가 서 있었어요. 머리는 덮수룩하고 덕지덕지 난 수염은 며칠은 안 자른 것처럼 보이는 큰 키의 홀쭉한 남자였어요. 그 남자는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어요. 손에 들린 것은 그 전날 401호에 남겼던 선인장과 포스트잇이었어요.
“이거 잘못 놔둔 것 같은데예.”
남자는 경상도 사투리로 무뚝뚝하게 말했어요. 저는 너무 당황했죠. 분명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선물과 쪽지를 남긴 것인데, 웬 남자가 와서 그걸 되돌려주니 말이에요. 낭패다 싶은 순간, 뭐라 말할지도 잘 생각이 안 나 저는 그냥,
“아,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해버렸어요. 남자는 그대로 돌아서서 옆 집 401호로 들어가더군요. 제 머릿속은 금새 복잡해졌어요. 남자한테 화분과 쪽지 선물을 한 셈이니 엄청 쪽팔리기도 했고, 너무 조용해서 혼자 사는 집인 줄 알았는데 젊은 부부가 사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남의 부인한테 집적거린 셈이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찌 됐건 저의 짧은 로맨스는 그렇게 끝이 나는구나 생각했어요. 저는 방에 들어와 책상 서랍을 열어 옆집 사람이 남기고 간 쪽지를 다시 꺼내보았어요. 노란색 포스트잇에 만년필로 쓴 글이었어요. 검정색 잉크가 살짝 배어 있는 부분이 있었지요. 저는 그 점을 얼마간 바라보다 푸우 하고 한숨을 쉬고는 쪽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어요.
다음 날 저녁, 집에 들어오는 길에 주인집 아주머니를 만났어요. 지방에서 사업을 하면서 이 집 임대도 같이 하고 있어서 지방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한다는, 주인집 아주머니는 저에게 쓰레기 분리수거를 잘 해야 한다며 일장 연설을 하셨죠. 따로 관리인이 없는 다세대주택이니 세입자들이 알아서 잘 관리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훈계가 길어질수록 하루의 일과로 피곤해진 몸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어요. 저는 중간 중간 대충 예, 예 하면서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대꾸했지요. 그러다 아주머니의 말이 끝날 때쯤에야 갑자기 아주머니에게 물어볼 말이 생각났어요.
“아주머니, 그런데 있잖아요. 401호에 사는 젊은 부부는 통 얼굴 보기가 힘드네요?”
아주머니는 눈을 껌벅하더니,
“401호? 401호에 사는 총각은 결혼 안 했는데?”
그 말을 듣자 저는 약간의 희망이 생기는 듯 했어요. 적어도 그 쪽지의 주인공이 401호 사는 남자의 부인은 아니라는 거잖아요.
“아, 총각이구나. 그럼 그 총각이 여동생이랑 같이 사나 봐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이상하다는 듯이 절 쳐다보면서,
“아닌데. 그 총각 혼자 사는데. 맨날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게임만 하느라 온 집안을 어지럽혀 놔서 누구 들어와 지낼 공간도 없는데 뭘... 으이구, 내가 어쩌다 저런 사람을 받아 가지고. 계약 끝나면 바로 방 빼라고 해야지, 원...”
그렇다면 그 쪽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싶었어요.
“네? 그럴리가요. 밤마다 옆집에서 젊은 여자가 책 읽는 소리가 들리던데요? 창문 열어놓고 책을 읽는 것 같던데...”
제가 그렇게 말하자, 주인 아주머니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당혹감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어요.
“뭐라고?”
“책 읽는 소리가 들린다고요. 뭐, 시끄럽거나 한 건 아니니 그건 괜찮은데요, 그냥 옆집 사는 사람인 것 같길래 궁금해서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얼굴을 더욱 찌푸리더니 무언가 생각하는 듯 했어요. 그러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더니 나의 눈치를 살피는 거예요.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하면서 말이죠. 나는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에게 뭔가 말 안하는 게 있는 건가?’ 저는 고개를 돌린 아주머니의 팔을 붙잡고 말했어요.
“아주머니, 뭐 저한테 숨기시는 것 있으세요? 왜 말씀을 안 해 주세요?”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보는 아주머니 눈빛엔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 있었어요. 그때는 바로 알지 못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마 두려움이었던 듯 해요.
“총각, 미안해. 사실은 내가 말을 못했었는데...”
주인 아주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어요. 제가 이사 오기 전 제 집에 살았던 이는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 작가 지망생이었다는군요. 특이하게도 그녀는 항상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썼는데, 밤 늦은 시각이면, 창가 책상에 앉아 자신이 쓴 원고를 차분히 낭독을 하곤 했대요. 밖에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집안에서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는데, 이따금씩 대문 옆에 글씨가 빽빽한 두툼한 원고지 뭉치가 여러 개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대요. 분명 자기가 썼던 글들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겠죠.
“그럼 그 작가 지망생이란 여자가 저 들어오기 전까지 살다가 나갔다는 거예요?”
그렇게 저는 아주머니의 말을 끊어야 했어요. 뭔가 불안한 예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 예감이 맞지 않길 바라면서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렇지만 아주머니의 대답은 저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어요.
“아니, 그 여자 올 봄에 죽었어. 402호 여자, 집에서 약을 먹고 자살했어. 미안해요, 총각. 진작에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그치만 아무래도... 누가 죽은 집은 사람들이 좀 꺼려하니까... 다른 층 세입자들도 그 뒤에 싹 다 바뀌었거든.”
그 말씀을 듣자 슬몃 소름이 돋더군요. 그러면서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하고요. 내가 사는 집에 전에 살던 사람이 자살을 했다니 그래서 집이 싸게 나왔었나 보다 싶은 거에요. 그렇다고는 해도 그 책 읽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란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그렇게 비상식적인 사람은 아니였거든요. 설마 죽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는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아주머니도 제 눈치를 잠시 살피더니 당황해 하는 표정을 애써 지우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사실은 총각이 아까 그런 말을 해서 많이 놀랐어. 402호에 살던 여자 생각이 나서... 그래서 그 여자 이야기를 하게 됐네. 하지만 총각이 잘못 들었을 거야. 목소리가 들렸다는 401호에는 남자 혼자 살고 있으니 거긴 아니고... 그 아래 층인 301호랑 302호에 여자들이 총 두 명 살고 있거든. 301호는 젊은 부부, 302호는 여자 혼자. 그러니까 어쩌면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를 총각이 착각했을 수도 있지.”
듣고보니 착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죽은 여자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찝찝하긴 했지만 소리라는 게 원래 벽을 타고 울리기도 하고 전달되다 보면 근원지를 알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자고 마음을 먹기로 했어요. 그리고는 일단 알았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렇지만 아주머니에게 그런 사항은 계약 전에 미리 얘기해줬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집값이 좀 싸게 나왔다고는 하지만, 세입자에게 집에 관해 충실히 알려주지 않으면 계약이 무효가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쏘아붙였지요. 아주머니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더니 대신 수도세는 안 받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래봤자 그거 뭐, 한 달에 만 원 정도밖에 안 하는 거였지만요... 어쨌거나 주인 아주머니와의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 했죠.
“총각, 아무튼 미안해요. 그리고 방금 전에 내가 한 얘기는 401호랑 다른 층 사람들에겐 비밀로 좀 해줘요. 괜히 사람들 기분 나쁘게 할 필요 없잖아. 다세대주택이라 집에 안 좋은 소문 나면 입주자들 자꾸 항의하고 골치 아파. 에휴, 예전에 그 아가씨 살 때는 또 그렇게 웬 스토커 한 놈이 찾아와서 기분 나쁘게 하더니만... 자꾸 그 집 복도에 난 창을 밖에서 슬쩍 열어서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더래, 글쎄. 그래서 나중엔 그 아가씨가 창문을 아예 열 수 없게 고정을 시켜놨더라고. 내가 총각 들어오기 전에 그거 다 떼어내고 창문도 새로 달았잖아. 이제는 그 아가씨도 죽고, 그놈도 안 찾아오니까 망정이지...”
아주머니의 말을 뒤에서 들으며 계단을 오르던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멈춰서야 했어요. 머릿 속에는 현관문 안쪽 바닥에 떨어져 있던 쪽지의 내용이 떠올랐어요. “창문을 잘 닫아 주세요.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여요.”라던 글귀... 그 때 저는 어린 시절 공포영화 따위를 보면서 배웠던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에 처음 사로잡혔었죠. 진정한 두려움이었어요.
지금껏 이야기는 길게 풀어놨는데 제가 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지 아직까지 말씀을 못 드렸네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그간의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저는 못 버틸 것 같았어요. 저 요즘 너무 힘들거든요. 더 이상 마음 속에만 담아둘 수는 없었어요. 아마 이 글은 내일 오후에나 올릴 수 있을 거예요. 이미 밤이 깊었거든요. 오늘은 이 글을 마무리짓고 한동안 아무 것도 못할 테죠. 언제나처럼 말이에요. 그러다 새벽이 되면 깊은 잠에 빠지겠죠. 그래도 짧게나마 잠들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지도 몰라요.
402호에 살았던 그녀... 그녀는 말이죠, 굉장히 열정적인 작가 지망생이었어요. 언젠가는 당당히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작가가 되려고 무던히 노력했대요. 그리고 사랑하던 남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남자가 그녀를 배신했대요. 자세한 내용은 저도 몰라요. 야망과 성공을 위해 내버려지는 순수한 사랑이란 건 드라마에서 언제나 보듯 흔해빠진 이야기잖아요. 그런 것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성공을 찾아 떠나서 가정을 이룬 뒤에도 그녀를 만나러 그녀 집에까지 여러 번 찾아왔었대요. 무슨 염치였을까요, 그것은.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남자의 방문을 받아 주지 않았어요. 대신에 더욱 더 자신의 세계 속에 침잠했어요. 그녀는 매일같이 만년필로 써내려간 수십 장의 원고를 밤마다 읽고 눈물을 흘렸대요.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하고 자신을 자책하고 또 자책했던 거죠.
그녀는 자신의 글을 미워했지만 또한 사랑했어요. 그녀가 자기 원고를 불태워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죠. 대신에 그녀는 거리에 아무도 없을 새벽녘에 조용히 자신의 원고를 가지고 집을 나와서는 계단을 내려와 대문 밖에 버리고 가곤 했어요. 검정 글씨 가득한 수백 장의 원고는 그렇게 버려졌지만, 그녀는 혹시라도 누군가 그 글을 읽어주기를 바랬는지도 몰라요. 그 글을 읽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를 바랬는지도요. 자신을 인정해주고, 너는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너에게 깃든 불행을 털고 일어설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랬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국 그 원고들은 모두 쓰레기차에 실려 떠나갔을 뿐이에요. 그리고 그녀도 결국 그렇게 떠나갔죠.
그녀의 이야기를 제가 어떻게 알았냐고요? 물론 모두 그녀가 직접 말해준 것들이에요.
지금 시각은 밤 열 시... 제가 이 글을 마무리 지어야만 하는 시간이에요. 그녀의 목소리 있잖아요. 처음엔 옆집에서 나는 소리였던 것으로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요, 우리집 벽 속에서 나는 소리였어요.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제 뒤에서 나기 시작했죠. 언젠가부터 킥킥거리는 웃음과 함께 제게 말을 걸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제 곧 그녀가 나타날 시간이네요. 그녀는 여느때처럼 축축하게 젖어있는 검고 긴 머리칼을 제 목덜미와 귓가에 늘어뜨리고 제 뒤에 서 있을 거에요. 제가 그녀의 외모에서 기억나는 것은 그 머리칼 밖에는 없어요. 그녀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거든요. 아니, 단 한 번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워서 심장 속에서 온통 달그락거리고 달그락거렸던 마음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질 만큼 감정이 메말라 버렸지만요, 그녀의 얼굴만큼은 한 번도 볼 생각을 못 했어요. 내가 돌아보면 어떤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을지... 차마 생각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녀는 이제 사그락거리는 발소리만을 내면서 제게로 걸어오겠죠. 그리고 제 뒤에 서서 제가 쓴 글을 읽을 거예요.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예전에 그녀가 자신이 쓴 원고를 소리내 읽었던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말이죠, 내가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차라리 내가 미쳐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그렇겠죠? 그러니까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이겠죠? 나는요, 그녀가 불쌍해요... 그런데 나도 불쌍하잖아요... 나는 안 불쌍한가요?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것이에요. 그녀를 대신해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제가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에요. 오늘은... 그녀가 제가 쓴 글을 맘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