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같은 우울한 밤이다. 고양이 글루미는 죽은 사내의 싸늘한 손가락에서 피를 맛있게 핥는다. 북유럽 신화의 젖소 아우둠라가 니블하임의 얼음을 핥는 걸 본 이가 있다면 이와 똑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우둠라로 인해 이미르와 부리가 태어나듯이. 이내 글루미는 어미의 젖을 빨던 때처럼 잭의 손가락에 흐르는 피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빨아댄다. 그러더니 이젠 흥미가 다 떨어졌는지 문에 살짝 나 있는 개구멍으로 집을 빠져나간다.
잭이 죽은 이야기는 이틀 전으로부터 시작된다. 스모그가 가득 찬 길거리에는 만취한 사내가 쓰러질 듯 말 듯 비틀비틀 길을 거닐고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잭. 건실한 은행원이었지만 모종의 사유로 해고돼 실직자가 됐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겨우 돈을 금고에 넣었다, 뺐다 하는 것뿐인 데다가 수학 쪽으론 상당히 머리가 있는 남자지만 그것을 빼면 아무 것도 없다. 돈 몇 파운드 있던 것은 술집에서 이미 다 써버린 지 오래. 그런 잭의 뒤를 귀여운 고양이가 졸졸졸 쫓아다닌다.
“어이쿠, 너 참 귀여운 녀석이구나?”
잭은 고양이를 낚아챘다. 밤이 되니 고양이 특유의 흑진주 같은 동공이 열렸다. 그러고는 몇 십 미터를 걸어가더니 고양이가 괴롭다는 사인을 보낸다. 잭은 자신이 쓰고 있던 볼러를 벗어다 고양이를 넣어 안아들고 다시 길을 간다.
“너도 참... 넌 왜 나 같은 남자를 졸졸 쫓아오고 그래? 하필이면 이런 우울한 날에... 아니, 낮이 아니니 밤이구나. 아무튼 네 이름은 글루미(Gloomy)로 하자. 우울하니까...”
몇 분 후, 잭은 자신의 집에 도착해 골아 떨어졌다. 글루미는 자는 잭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그러더니 잭의 몸에선 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더니 이내 글루미의 입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잭은 목이 죈다. 넥타이 때문이다. 너무 꽉 맸나? 꿈에서 잭은 교수형을 당한다. 판사 옆에는 옛 애인 글로리아가 글루미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미소 짓는다.
“헉!”
잭은 꿈에서 깬다. 그러곤 시계를 본다. 아침 9시. 직장에 다니던 때라면 간단한 빵 조각과 함께 티 포트에서 홍차를 따랐을 시간이다. 글루미는 옳다꾸나 하고 잭의 품에 파묻혀 가르랑 거린다.
‘설마... 이 녀석이 날...’
잠시 그렇게 생각하더니 이윽고
‘아니야. 꿈은 반대라잖아? 별 거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글루미는 더욱 더 격렬하게, 습기 찬 방안에도 정전기가 생기도록 비벼댄다.
“하하, 밥이라도 줄까?”
잭은 찬장을 뒤져가며 겨우 먹다 남은 병조림을 발견한다. 그러고는 내용물을 꺼내 글루미에게 먹인다.
“냐옹.”
병조림의 고기는 사람이 먹기에도 꽤 짠 정도였지만 고양이는 본래 사람보다 염분을 많이 섭취해도 별 탈이 없다. 글루미는 고기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잭은 어떻게든 일을 구해보려고 집을 나서 시장거리로 간다. 하지만 정육점에서도, 야채가게에서도 그를 받아주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계속해서 떠돌아다니다 해가 지고 말았다. 그렇다. 잭은 오늘도 허탕을 쳤고 자연스레 환락가로 향했다. 그러다 꿈에 나왔던 옛 애인 글로리아와 마주친다.
‘글로리아... 설마 그 꿈이...!’
글로리아는 의외로 잭에게 살갑게 말을 건넨다. 그러다가 둘은 술집에 들어가고, 몇 시간 후 만취한 상태로 술집을 나와 십 몇 분 거리에 있는 교외의 집으로 향한다.
글루미는 나무로 된 문을 앙증맞은 발톱으로 박박 긁고 있었고 문이 열리자 글로리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글루미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글루미는 씨익 미소를 짓더니 이내 책장 위로 올라가 고요히 잠이 든다.
글로리아는 잭을 안락의자 위에 앉혀놓고 단검으로 목젖을 찌른다. 목소리를 낼 수 없다. 한적한 교외니까 큰 상관은 없지마는 이러는 쪽이 안전하긴 하다.
두 번째로 팔의 핏줄을 끊어놓는다. 손과 팔이 모두 새빨갛게 물들고 잭은 점점 죽어간다. 그러는 통에 글로리아에게선 하얀 연기가 솟구쳐 나왔고 잭의 것처럼 글루미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하하... 이 봐 잭? 정신이 몽롱하지? 그래, 그럴 거야. 아무렴. 그래야지. 그 약도, 그 술도 얼마짜린데.”
글로리아는 중국 상인에게서 산 약을 싸던 주머니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바람피운 것 가지고 헤어지는 것도 찌질해 죽겠는데, 통장까지 빼앗다니... 난 빈털터리가 돼서 여기저기 주정뱅이들한테 몸이나 대주는 여자가 됐는데. 그런데 넌 헤어지고도 은행 일 잘하더라? 그래서 은행장을 잘~꼬셔서 널 자르게 만든 거야. 하하... 어때? 넌 내 맘 잘 알겠어? 그건 그렇고 ‘우리’ 저축통장에 돈 있던 거, 가져간다? 하하하! 너도 나처럼 빈털터리로 살아보라구~! 잘 있어~”
글로리아는 그렇게 말하곤 통장을 들고 냅다 도망쳤다. 아편에 취해 옷에 피가 잔뜩 튄 것도 모르고. 글루미는 피를 핥다가 집을 나왔다. 그러곤 런던 골목길 담벼락 위에서 내일 모레 쯤 참수당할 글로리아의 피 맛을 생각하고는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