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간 6인의 영웅,기억해 주세요”… 이희완 대위
해군 이희완(29) 대위에게 6월은 아픈 달이다. 생의 즐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나눌 줄 알았던 전우들을 푸른 서해바다에서 잃어야 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자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이 어느 때보다 더 아프게 가슴을 누른다.
“어떻게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까. 늘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그 얼굴들을…”
이 대위는 2002년 6월29일 오전 10시25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북한 경비정의 기습적인 집중 공격을 받고 예인 중 침몰한 우리 경비정 참수리 357호정의 부정장이었다. 북한 경비정의 공격에 처절하게 대응하다 스러져간 전우들을 그는 서해교전의 영웅들이라고 부른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6월이면 푸른 하늘만 봐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기쁜 일이 있으면 도리어 죄스럽다. 이 좋은 세상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전우들에 대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 대위는 “양은 냄비에 라면을 같이 끓여 먹고 세수도 못한 채 꼬질꼬질한 얼굴로 대북 경계근무에 나섰다”며 “함께 식사했던 전우들이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해교전후 1년간 그는 살아 있다는 것이 괴로웠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함정을 지휘했던 정장 윤영하 소령과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적함을 향해 대응사격을 했던 조천형 중사,22㎜포 사수 황도현 중사,M60 사수 서후원 중사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40일 뒤 끝까지 타기(舵機)를 놓지 않고 참수리 357호와 운명을 같이했던 한상국 중사의 시신이 인양되자 그는 목놓아 울었다. 3개월 뒤 그는 쓰러진 전우를 치료하다 부상을 입고 투병생활을 하던 박동혁 병장의 죽음을 맞아야 했다. 그는 “세상이 정말 싫었고,한쪽 다리를 잃고 장애인으로 살아갈 일도 막막했다”고 토로했다.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이들에 대한 홀대였다.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여중생들에 대해서는 대대적인 추모물결이 이어졌지만 NLL을 사수하기 위해 꽃다운 생명을 내던졌던 장병들에 대해서는 냉랭하다고 느껴질 만큼 관심이 작았다. 행여 햇볕정책에 누가 될까 우려한 일부 정부 관계자는 유족들에게 “조용히 있어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건만 죄인같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이 대위는 “많이 아쉬웠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쯤 시원하게 말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군인의 목숨도 다른 이들의 생명만큼 소중한데 서해교전 뒤 과연 우리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 곰곰이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참수리 357호정 승조원은 모두 27명이었다. 서해교전으로 6명이 전사했고 부상으로 군생활을 계속할 수 없거나 복무기간을 마치고 전역한 사람들은 14명,8명만 남아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다.
올해는 응어리졌던 그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초라하게 치러젔던 1·2주기 추모식과 달리 지난달 29일 있었던 3주기 추모식에는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뭐하고 뒤늦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인지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오른쪽 다리에 포탄이 박혔던 이 대위는 서해교전 후 1년간 경기 분당 국군수도병원에서 9번에 걸친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결국 의족을 사용해야 했다. 이 대위는 계단만 보면 머리가 혼미해졌다.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한 발 한 발에 실리는 삶의 무게가 너무나 버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면 살과 의족이 부딪쳐 피와 땀이 엉겨 있기 일쑤였다.
이 대위는 2003년 6월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 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복귀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복직할 수 있었고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 잘 걷고 있다”며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대위에게 희망을 줬던 것은 결혼이었다. 그는 지난해 10월10일 영어강사였던 서하라(28)씨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를 존경한다”며 “결혼 후 좀더 성숙해진 것 같고 또 살아가는 일에 자신감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더이상 군함을 탈 수 없다는 것과 전우들이 옆에 없다는 것 외에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제 세상에 없는 전우들이지만 항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어려울 때면 그들에게 힘을 달라고 호소한다.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종종 “당신은 7명의 남자와 사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다.
이 대위는 올 3월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위탁교육을 받고 있다. 심리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바람은 국민들이 서해교전시 스러져간 동료들을 오래 오래 기억해주는 것이다. 이 대위는 “2002년 6월 하면 많은 분들이 월드컵 4강 진출을 떠올린다”며 “그러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 바친 6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최현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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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photo/hread.php?hotissue_id=169&hotissue_item_id=16886&view=all&page=1 효순이 미순이 사건에선 대대적인 추모물결..
하지만 이 사건은.. 월드컵때문에 파뭍혀진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