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여 답하라!
대통령 선거를 며칠 앞두고 강남의 고급 룸살롱에 경찰청 핵심 수뇌부와 국회의원 권민수가 술을 함께 마시고 있다. 경찰 핵심 수뇌부에는 최성식도 포함되어 있다. 권민수가 최성식을 대놓고 칭찬한다.
“최성식 서장은 어떻게 컨테이너 박스로 바리케이드를 쌓아서 시위대 접근을 차단할 생각을 했어요? 아주 대단해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영광입니다. 의원님!”
최성식이 권민수 잔에 술을 성심성의껏 따라 준다. 사실 최성식이 아이디어를 낸 컨테이너 박스 바리케이드 작전은 예전 1986년 이정훈이 가리봉 오거리 시위에서 선보인 공사장 판넬 바리케이드에서 최성식이 영감을 받은 것이다.
“우리 최성식 서장은 차기 경찰청장 감이야. 전투경찰 소대장 시절부터 시위진압엔 아주 타고난 전술을 선보였어요. 그나저나 전술이 영어로 뭐더라?”
경찰청장의 물음에 최성식이 바로 답한다.
“택틱스(Tactics)입니다”
“맞아. 맞아. 이제 나이가 드니깐 영어 단어도 까먹네.”
둘의 대화에 권민수가 끼어든다.
“그래서 학생운동권이 시위 전술 짜는 것을 ‘택’짠다고 했잖아요.”
“우리 권의원님은 예전 미국 대사관 시위를 주도했던 유명한 학생 운동권이시잖아요?”
학생 운동했던 게 무슨 훈장인양 어깨에 힘을 주는 권민수의 비위를 최성식이 맞추고 있다.
“제가 그 당시 서대문서 기동타격대 소대장이었는데 미국 대사관 시위 대단했습니다. 시위 주동자들은 정의감에 불탔습니다. 권의원님 같은 분들이 나중에 크게 한 자리하실 줄 저는 그때도 알았습니다.”
최성식의 아부에 권민수가 거드름을 피운다.
“아~ 다 지난 옛날 이야기인데요, 그러고 보니 여기 계신 최성식 서장을 비롯해 경찰 분들이 우리 운동권 때문에 고생 많이 하셨죠? 제가 학생운동권을 대표해서 사과합니다.”
“어이쿠, 사과는요! 다 시위 학생들 덕분에 나라가 민주화되고 발전한 거죠. 그나저나 권민수 의원께서 도와주셔야 최성식 서장이 쭉쭉 뻗어나갑니다.”
경찰청장의 부탁에 최성식이 바로 권민수 앞에서 무릎 꿇는 자세까지 취한다.
“알겠습니다”
“의원님, 분위기도 띄울 겸 노래 한곡 하시죠?”
최성식이 권민수에게 마이크를 공손히 전해준다. 권민수가 마이크를 잡자 룸 안에 있는 즉석 연주밴드가 연주한다. 권민수가 운동권 가요 ‘광야에서’를 와이셔츠 단추까지 풀어헤치고 부른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우리 어찌 가난 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호스티스들이 권민수 옆에서 탬버린을 치며 흥을 돋우고 있다.
이날 같은 시간, 5월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앞두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 대형 철탑 구조물이 설치되고 있다. 그 대형 철탑 구조물을 긴장되게 쳐다보는 50대 중반의 남자들이 서 있다. 그 남자들 중에는 김용수, 전칠성이 있다. 그들 바로 옆에는 가리봉 오거리 시위를 주동했던 노동자 김진철도 함께 있다. 김용수가 등에 배낭을 메고 있다. 1986년 겨울, 이정훈이 미국 대사관 점거할 때 모습과 흡사하다.
“용수야, 고생해라.”
고등학교 동기 전칠성이 김용수를 꼬옥 안아준다. 이 남자들이 15미터짜리 대형 철탑 구조물로 다가간다. 김용수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그곳에 있는 관리인들에게 말을 걸면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린다. 그러자 김용수가 재빠르게 철탑 구조물로 올라간다. 그제서야 철탑 관리인들이 김용수를 끌어내리려 하지만 늦었다. 데이트 나온 남녀가 이런 모습을 신기한 듯 구경한다. 김용수가 철탑 구조물 난간을 잡고 올라간다. 한발 한발 떼면서 올라가는데 이정훈이 분신자살한 미국 대사관 건물이 눈에 보인다. 김용수가 잠시 멈춘다.
“이정훈 열사의 뜻 이어받아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고 이제 내가 여기를 올라간다”
김용수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가 저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철탑 맨 위에 올라간 김용수가 부처님 모형이 들어설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부처님, 죄송합니다. 부처님 자리에서 제가 농성 좀 하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김용수가 합장 기도를 살짝 한 후 메고 왔던 배낭에서 현수막을 꺼내 아래로 펼쳐 내린다. 그리고 손나발로 구호를 외친다.
“해고는 죽음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우리 같이 살자!”
김용수의 외침에 밑에 있던 전칠성, 김진철 등 동료 노동자들이 같이 구호를 따라한다. 높은 곳이라 불어오는 바람에도 구조물이 휘청거린다. 24시간 꺼지지 않는 서울 시내 화려한 조명 불빛이 김용수를 어지럽게 만든다. 자기 몸에 벨트를 묶어 철탑 구조물에 연결한다. 혹시라도 있을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곧이어 경찰 수송버스가 나타난다. 거기서 내린 경찰들이 소방용 안전 매트리스를 철탑 구조물 주위에 깔기 시작한다.
“짭새 놈들. 죽을 때까지 니들 냄새를 맡는구나!”
김용수가 한마디 내뱉는다.
다음 날 아침, 방송사에서 나온 기자가 시청 앞 철탑구조물 바로 밑에서 생방송으로 상황을 보도하고 있다.
“신흥전자 해고 근로자 김용수 씨가 해고자 전원복직을 요구하며 현재 시청 앞 석가탄신일 행사용 철탑구조물 위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5월이지만, 새벽 기온은 턱이 돌아갈 정도로 온도가 떨어져 추위가 심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철탑 구조물 위에서 덜덜 떨면서 밤새 잠을 못 이룬 김용수가 웅성거리는 소리에 선잠을 깬다. 작은 공간에 있다보니 온몸이 구겨진 것 같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고 김용수가 일어나 밑을 향해 구호를 외친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부당해고 철회하라!”
경찰 병력이 배치된 시청 앞 광장으로 시민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전칠성과 노동자 동료들이 그 밑에서 김용수를 지켜주고 있다. 전칠성이 김용수를 향해 라면상자를 들어서 보여준다.
“김용수, 밥은 먹고 해라!”
예전 1986년 가리봉 오거리에서 전칠성이 시위를 할 때 사복 체포조였던 김용수가 친구를 걱정하며 소리쳤던 말이다. 김용수가 위에서 줄을 내린다. 전칠성이 사발면이 들어있는 라면상자와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을 그 줄에 달아준다. 위에서 김용수가 줄을 당긴다.
곧이어 반가운 얼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980년대 이정훈과 함께 시위전술 택을 짜며 시위를 주동했던 학생들이다. 이제는 50대 중반의 아저씨들이 왔다. 남대문 시장 시위를 주동했던 박창식은 의사 가운을 입고 왔다.
“김용수씨, 몸은 어때요?”
“끄떡 없습니다!”
김용수가 의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농성 중인 김용수를 촬영하는 카메라가 보인다. 대한극장 시위를 주동했던 경제학과 학생은 독립영화 감독이 되어 김용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가 옆에 있는 카메라맨에게 주문을 한다.
“위에서 김용수씨가 구호를 외칠 때 퀵 줌으로 들어가 주세요.”
청량리 로터리에서 끝까지 구호를 외치며 메가폰을 놓치지 않았던 시위주동자는 가족들과 왔다. 투쟁기금 모금함에 성금을 한다. 그리고 김용수를 향해 가족들과 함께 손을 흔들어 준다. 봉고차 한 대가 시청 앞 도로에 정차한다. 이 차를 운전한 사람은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때 차를 몰았던 몸이 허약했던 이호은이다. 그 차의 조수석에서 한 사람이 내린다. 다리를 저는 50대 남자는 이정훈과 함께 세운상가에서 시위 전술 택을 짰던 소아마비 학생이다. 둘은 차 안에서 모포와 1인용 텐트를 꺼내 철탑 구조물로 갖고 간다. 이정훈의 대학 서클 ‘사회문화연구회’ 후배들의 모습도 보인다. 이정훈의 친구들, 후배들이 철탑 농성을 하는 김용수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며 힘내라고 손뼉도 쳐준다. 그러자 이에 응답하듯 김용수가 주먹을 불끈쥐고 팔을 내어뻗는다.
“해고는 죽음이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우리 같이 살자!”
예전에 가두 시위주동을 했던 이정훈의 친구들이 오른팔을 높이 치켜들고 함께 구호를 외친다. 동조하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자 경찰병력이 긴장하며 철탑 밑 접근을 적극적으로 막기 시작한다. 이때 시청 광장 앞을 지나가는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있다. 그 안에는 남대문 경찰서 서장 최성식이 타고 있다. 철탑구조물 위에서 농성하는 모습을 보고 최성식이 지껄인다
“미친 새끼들! 너희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할 거 같냐?!”
서울시청 건물 2층에서는 이화여대 시위 주동자였던 여자공무원이 철탑 농성 시위를 보고 있다. 김용수가 계속 외치는 구호가 귀에 들려온다. 여자 공무원의 여린 눈빛이 변한다. 가녀린 손에 힘이 들어간다. 주먹을 힘껏 쥐고 여자공무원이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린다. 그의 입은 비록 움직이지 않지만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수많은 민주 인사와 학생들을 고문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은 현재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로 변했다. 세운상가 건물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김수근의 또 하나의 작품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라는 게 밝혀졌다. 이에 대해 김수근의 유가족은 어떤한 입장도 표명하지 않고 있다. 이해가 된다. 한국은 친일파 세력을 척결하지 못하고 그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늘날까지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학생들을 고문할 건물을 지은 것을 귀찮게 반성까지 하랴,
그렇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민중이 주인되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거리에서 전투경찰들과 싸우며 고문을 당하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그 분들의 고귀한 꿈을 실현해야 하는 게 살아남은 우리들의 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