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빠져나갈 수 없는 자살 ‘택’을 짜다
1986년도 한해도 이제 막바지다. 새해까지 남은 날이 열흘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직장인들이 퇴근시간, 바쁘게 오가고 있다. 이 시간, 김영철 열사가 고문치사 당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이 있는 지하철 남영역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이정훈이다. 퇴근 길 에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교통 혼잡이 예상될 정도로 많은 양의 눈이 쏟아붓기 시작한다.
‘시위 주동자들을 위해 택을 짜주던 내가 이제 시위를 할 택을 짠다. 영철이가 죽은 장소에서 시위를 할 것이다. 전술은 기습 시위 방식이 아니라 공개 시위다. 그러면 이곳 남영동으로 서울 시내 전투경찰 병력이 총집결할 것이다. 이제 파쇼정권과 한판 대결을 할 시간이다. 절대 서로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어떤 식으로든 나는 성공시킬 것이다.’
굳은 결심을 하며 이정훈이 대입 재수 학원들이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남영동 거리를 살핀다.
‘차도가 너무 넓다. 양쪽 에서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기에는 위험하다. 차량의 속도도 빠르다.’
이정훈이 건물에서 나와서 금성극장에서 시장 쪽으로 걸어가다가 높은 건물을 발견하고 거기로 들어간다. 건물 옥상에서 남영동 일대가 훤하게 보인다. 전체 지형을 살피기에는 옥상만큼 좋은 곳이 없다. 이정훈이 망원경을 꺼내 지형물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다. 강추위에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망원경을 잡고 있다. 손이 무척 시리다. 그러나 이건 이정훈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이정훈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서울역 쪽 고층 건물에서 망원경으로 거리 동태를 파악하고 있다. 이정훈의 망원경이 그쪽을 향한다. 그러다가 서로의 신분이 확인된다. 최성식이다. 김영철 열사 사망 이후 남영동에서 대규모 가두시위가 벌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에 최성식이 지역 탐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훈이 최성식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망원경으로 서로의 얼굴을 본다. 최성식이 한 손을 슬쩍 내려 허리춤에 차고 있는 무전기 스위치를 켠다. 이정훈이 알아채지 못하게 입술을 작게 움직여 무전을 한다.
“금성극장 시장 쪽 방향 박카스 광고판 있는 건물 옥상에 수배자 출연.”
실룩거리는 최성식의 입 모양을 간파한 이정훈이 ‘니가 꼼수 부리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손까지 한번 들어준다. 이에 당황한 최성식이 망원경을 밑으로 내린다. 그러다가 다시 올려 보는데 이정훈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날 점심시간 무렵에 강남의 우면산을 산행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등산복 차림은 아니지만 나름 등산을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같다. 이정훈과 조직의 후배들이다. 겨울철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드문 약수터에서 후배들과 가두시위를 모의하고 있다.
“다들 이해했지?”
“네, 알겠어요. 그런데 미국 대사관 건물에는 미 해병대가 상주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들어가면 총을 쏘지 않을까요?”
“그거야 들어가 봐야 알겠지?”
“우리가 점거에 성공하더라도 특수부대가 투입되는 거 아닐까요? 헬기 타고 날아오는 거 있잖아요.”
“그것도 나중에 고민할 문제겠지.”
이정훈이 낙관적인 대답만 한다.
“그런데 정훈이 형, 미국 대사관 점거 택은 퇴로가 없어요. 퇴로가 없으면 *자살 택이에요.”
* 자살 택 : 빠져나갈 곳이 없어 100% 체포를 각오한 시위전술
“걱정하지 마. 퇴로는 내가 현장에서 만들 거야.”
오늘따라 이정훈 얼굴이 편해 보인다.
“우리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약수나 한잔하자.”
이정훈이 먼저 플라스틱 바가지로 약수를 받아 마신다.
“야호는요?”
“야호는 내가 수배 중이니깐 이번엔 참자. 그 대신 다음에 꼭 하자.”
이정훈과 모의를 끝낸 후배들이 ‘야호’외치는 건 생략하고 산을 내려간다.
최성식이 경찰서 내무반에서 자기 소대 사복 체포조들에게 선심 쓰듯 얘기를 한다.
“이번 주말 남영동 대공분실 근처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다. 수배 중인 이정훈이 나타날 것이다. 꼭 체포해서 현상금도 받고 승진도 하기 바란다.”
그런 최성식을 보며 김용수는 입맛이 쓰다.
우면산에서 내려와 각자 뿔뿔이 헤어지는 이정훈과 후배들. 잠실지역 비밀아지트가 적들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수배 중인 이정훈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여관은 경찰의 불심검문 때문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 그래서 주로 심야 영업을 하는 만화방에서 밤을 보낸다. 이정훈이 거리를 걷다가 공중전화를 발견하고 고향 집에 전화를 건다. 어머니의 가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 여보세요?
이정훈이 치아를 앙다문다.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매서운 겨울 칼바람에 이정훈의 눈동자가 비수가 꽂히듯 아려온다. 이정훈이 흔들리는 어깨를 진정시킨다. 어머니가 본능적으로 아들의 전화임을 알아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정훈아, 우리 아들 정훈이 맞지? 정훈아, 밥은 먹고 다니는 거지?
이정훈이 혹시 있을 전화 도청으로 자기 위치가 파악될까 봐 서서히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이정훈이 슬픔을 떨쳐내려는 듯 입술을 깨문다. 붉어진 눈이 빨간색 공중전화를 한동안 쳐다보고 있다.
민주화 운동 단체에서 공표한 ‘김영철 열사’ 시위 날이 밝아왔다. 12월 맹추위가 기세등등하다. 남영역, 숙대입구역이 폐쇄됐다. 사람들이 이 역에서는 아예 타지도 내리지도 못한다. 지하철이 그냥 통과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남영동 대입 재수학원가, 성남 극장, 금성 극장 앞 버스정류장에는 시민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사복 체포조들만 우글거린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진입하는 길은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쳐서 아예 차량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남영동 일대에 학생들은 커녕 지나가는 시민도 몇 명 보이지 않는다. 검찰의 얼마전에 발표한 시위 참가자 전원 구속 엄포에 시위대가 위축된 것이다.
그래도 남대문시장 쪽에서 집결한 시위대가 차도로 뛰어들어 스크럼을 짜며 서울역 고가도로 밑으로 해서 남영동으로 향한다. 시위대 등장에 남대문 경찰서 앞에 주차해있던 전투경찰 버스에서 전경들과 사복 체포조들이 내려온다. 곧바로 전경들이 쏘아대는 최루탄에 학생들이 화염병은 커녕 돌멩이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고 있다. 기세등등해진 사복 체포조들이 시위대를 향해 달려오자 시위대 스크럼은 깨지고 남대문 시장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최성식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오합지졸 같은 놈들, 이게 바로 우리의 힘이다.”
남대문 시장으로 도망쳤던 시위대가 다시 서울역 쪽으로 집결하여 구호를 외치고 사복 체포조들이 달려오며 뒤로 밀려가는 양상을 반복한다. 이 와중에 시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주동 급 학생들이 조용히 시위대에게 다른 오더를 전한다.
“삼백에 미 대사관.”
이건 3시에 미 대사관으로 집결하라는 뜻이다.
“동선 파악 안 되게 다들 개별적으로 천천히 빠져.”
학생들이 남영동 쪽에서는 시위를 벌이지 않고 서울역 광장 앞에서 전투경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전술만 반복하고 있는데 시위대의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이런 시위 전술을 눈치 못챈 경찰은 시위대 전원을 몰아내려는 듯 페퍼포그 가스 차량까지 동원하여 지랄탄을 쏘아댄다. 서울역 앞 고가 도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최루가스에 가려졌다. 오늘따라 겨울바람도 불어오지 않아 그 연기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최성식이 방독면을 낀 상태로 진압장면을 보고 있다가 불길한 생각이 든다.
“누가 봐도 오늘은 큰 싸움인데 너무 고요하다. 여수 앞바다 태풍이 오기 전, 잔잔한 물결을 보는 기분이다. 혹시…….”
최성식이 예전 학생운동 세력들이 신설동 로터리에서 가두시위를 안하고 치안본부를 기습적으로 타격 당했던 때가 떠올랐다. 손이 떨린다. 추위때문이 아니다. 최성식이 무전기로 현재 상황을 상부에 긴급히 보고한다.
“시위대 숫자가 줄어드는거 같습니다. 서울역 앞 시위대 움직임 부탁합니다. 서울역 시위대 움직임!”
잠시 후, 치안본부에서 날아온 경찰 헬기 한대가 서울역 도로에 모여있는 시위대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