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파쇼권력의 건물을 점거하라!
최성식이 노려보고 있다. 전경 버스 안의 선풍기도 멈춰있다. 최성식이 꺼버렸다. 사우나 목욕탕을 방불케 하는 더위를 전경들과 사복체포조들이 느낄 틈도 없다. 다들 의자에 등을 기대지 못하고 잔뜩 군기가 들어 허리를 곧추 세우고 있다. 그들 손에는 소주가 한병씩 쥐어져 있다. 아무 말 없이 부하들을 무섭게 쳐다보고 있던 최성식이 천천히 입을 연다.
“지금 저기 있는 상계동 주민들은 주민이 아니야, 아시안 게임 개최라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빨갱이야. 그런데 니들은 저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방패를 내려?! 그리고 대학생 새끼들은 우리를 적이라 여기고 죽자 살자 덤비는데 사복들은 쫓아가다 말고 포기하고 더위에 힘들지?”
말을 할수록 최성식의 말투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해진다.
“야간에 철거반원들과 합동으로 철거 들어간다. 이번에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면 니들 다 죽인다. 지금부터 소주를 한번에 다 마신다. 실시!”
최성식의 명령에도 몇몇은 소주 한 병을 한 번에 마시지 못한다. 그러자 최성식이 지휘봉으로 그런 전경과 사복체포조들의 어깨 죽지를 내리친다.
“이번에 다 마시지 못하는 새끼는 내가 직접 아가리에 처넣는다. 실시!”
모든 전경들과 사복 체포조들이 소주를 입에 들이 붓는다. 그걸 확인한 최성식이 만족스럽게 미소까지 지으며 명령한다.
“잘했다. 나가자!”
낮에 방패를 내렸던 양심있는 전경들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다. 김용수가 그런 전투경찰을 보니 피부에 소름이 끼친다. 밖에서 기다리던 철거반원들이 전투경찰 방패 뒤로 선다. 곧이어 최성식이 전경들에게 밀어붙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명령과 동시에 전투경찰들이 한손에는 곤봉을 빼들고 철거민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철거민들에게 곤봉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사복체포조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1980년 5월 광주를 방불케하는 진압이다.
상계동에서 늦은 밤 시간에 폭력적인 진압이 자행되고 있을 때, 이정훈과 김영철만 단둘이 비밀 아지트에 있다.
“영철아, 이번,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택은 지난번에 말한 코카콜라 이글 작전의 예행연습이라 할 수 있어, 그동안 가두시위에서 싸워온 노하우로 큰 그림을 그리자.”
“예, 알겠습니다!”
이정훈은 후배 김영철을 누구보다 신뢰한다. 잠시 후 조직 후배들이 도착한다. 후배 중에 유난히 몸이 허약한 ‘이호은’이 있다. 키는 멀대 같이 큰데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다. 거실 벽에 부착된 커다란 전지에 이정훈이 글씨를 쓴다. ‘민정당 중앙 정치연수원’이라는 글씨에 후배들 얼굴이 굳어진다. 다른 곳도 아니고 현 대통령 전두환이 소속된 집권당 건물을 점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훈이 민정당 중앙 정치연수원 약도를 매직펜으로 그린다. 너무나 엄청난 점거농성이기에 아무도 이정훈의 미술적 재능에 칭찬의 말을 못 하고 쳐다만 보고 있다.
“이번 택은 지금까지 우리가 벌여온 가두시위와는 다른 차원인 점거 농성이야.”
“정훈이 형 그나저나 민정당 중앙 정치연수원이 어디 있는 거예요?”
“송파구 가락동에 있는데 거기 본관 건물을 점거할 거야.”
“점거 택이면 퇴로가 없는 *자살 택인데요?”
* 자살 택 : 퇴로가 없어 도망칠 곳이 없는 택. 이것은 시위 참가자가 곧장 구속됨을 말함
후배의 질문에 이정훈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경찰 헬기도 출동할 거야. 그러면 10분 이상 버티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구속자가 많을 수도 있어. 희생을 각오하자고. 그 대신 대국민 선전·선동 효과가 클 거야.”
“그런데 정문에서 어떻게 건물까지 들어가죠?”
“내가 가봤는데, 연수원 정문 입구에서 본관 건물까지 들어가려면 잘 뛰는 남학생이 달려도 1분은 걸려.”
점거 택의 어려운 상황에 후배들이 마른 침을 꿀컥 삼킨다.
“시위 물량도 갖고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죠?”
“건물에 미리 주동이 들어가 숨어있으면 좋을 텐데 경비가 삼엄해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시위물량을 갖고 뛰기에는 너무 먼 거리야. 그런데 내가 가서 보니깐 좋은 무기가 있더라고.”
이정훈의 ‘좋은 무기‘라는 단어에 후배들 눈이 반짝인다.
“좋은 무기라뇨?”
“연수원 건물 각층 마다 생수통이라는 게 있어.”
“생수통이 뭐에요?”
“생수는 약수라고 생각하면 돼, 거기 있는 사람들은 수돗물을 안 먹고 생수라고 따로 커다란 통에 담겨있는 물을 먹나봐, 플라스틱 통 크기가 이만해.”
이정훈이 양팔을 벌려 생수통 크기를 알려준다.
“아~ 생수라는 게 미국 사람들이 돈 내고 사 먹는다는 그 물이군요?”
“그런 거지, 이 생수통을 밑으로 던지면 위력이 거의 바위 수준이야.”
“우와, 그거 진짜로 좋은 무기네요.”
“그런데 문제는 연수원 정문 통과해서 건물까지 들어가는 거야. 달랑 몸만 뛰어도 벅찬데 화염병, 현수막, 유인물까지 챙겨서 뛰는 건 너무 힘들어. 생각 같아서는 차를 몰고 정문을 통과하면 최고로 쉬운데 혹시 우리 중에 차 운전할 줄 아는 사람 있을까?”
이정훈이 후배들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본다.
“면허증도 없는데요”
그런데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이호은이 손을 살짝 들고 수줍게 말한다.
“제가 운전할 줄 알아요.”
“호은이, 니가?!”
“재수할 때 택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 그러면 호은이가 운전하는 차에 화염병, 유인물, 각목, 플래카드 다 싣고 주동 태우고 멋지게 들어가자!”
이정훈이 결론을 내리자 사람들이 이호은을 대견하게 쳐다보는데, 정작 본인은 쑥스러워한다. 민정당 중앙연수원 점거 택 회의를 마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이정훈이 남아있는 김영철게 말한다.
“호은이가 운전할 줄 알아서 천군만마인데, 걔 몸 상태 어때?”
“최근에 몸이 안좋아서 병원에 갔더니 폐결핵이래요. 본인은 약 먹어서 괜찮다고 하는데 제가 봐도 걱정이에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니…….”
“집이 우리들 보다 더 어려운 거 같아?”
“얘기 들어보니깐 아예 집에서 돈이 안 오는 거 같아요. 지난 학기에도 후배들 장학금 받은 걸로 자취방 월세 냈어요.”
“모두가 힘들게 운동하는구나. 그렇지만 영철아 힘내자!”
“네에!”
추석을 앞두고 비밀 아지트 잠실 연립주택 위로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떠오른다. 이정훈과 김영철이 지금 비록 몸과 마음이 힘들지만, 저 달을 바라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다시 한번 다진다.
* 주: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점거 농성은 1985년 11월 18일에 있었다. 점거 농성자 191명이 전원 구속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