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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여름방학이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늘 그 시기가 찾아오면 고민과 고뇌의 나날을 보냈다. 왜냐하면 ‘다음 학기에도 학교를 다닐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비가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학비를 모두 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집안이 넉넉한 아이들은 ‘해외여행이다’, ‘피서계획이다’ 두 달을 즐겁고 알차게 보내겠지만, 나처럼 삶이 혼수상태인 가난뱅이들에게는 ‘이번에는 무슨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나?’ 초조함의 시작이었다. 최저시급이 올랐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터무니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시급을 많이 주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그것이 비록 더럽고 위험한 일이라도, 근무 시간이 엄청나게 길지라도 말이다.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에 공부나 더 하라며 학자금대출을 권하지만,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섣불리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미 집에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시점에서 ‘또 다른 빚’이란 마음의 족쇄였다. ‘여름방학 아르바이트’는 그런 학자금대출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었다.
당시에는 휴학을 하지 않고 학교를 다니고 싶었다. 매년 오르는 학비를 감당할 자신도 없고,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졸업한 청년들을 기업에서 원한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말고사가 시작 될 무렵,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며 매일 일거리를 찾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곳은 가정용 폐기물을 수거하고 처리하는 업체였다. 일당 10만원에 일이 끊이질 않고 넘쳐난다는 이야기에 당장 승낙했다. 이후 걱정 없이 기말고사를 끝내고 곧 바로 합류했다.
처음에는 운이 좋았다. 의뢰인이 가구, 장판, 타일 등을 정리하여 집밖에 내어놨기에 단지 그것들을 트럭에 싣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앞으로 모든 일이 그럴 것이라 생각해서 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력이 무너져갔다. 찌는 날씨에 머리부터 온 몸을 뒤덮는 위생용 작업복은 고문에 가까웠으며, 폐기물에서 나오는 먼지나 냄새로부터 호흡기를 보호하기 위한 마스크는 오히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했다. 무엇보다 처음과 같은 일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 대부분이 집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 폐기물을 수거하고 청소하는 일이었다. 의외로 대한민국에는 가정용 쓰레기가 엄청나게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일째 되던 날, 봉천동에 위치한 원룸에서 갑작스런 의뢰가 들어왔다. 20대 남자가 월세를 오랫동안 내지 않더니, 급기야 쥐도 새로 모르게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집주인은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에 청소를 하러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시궁창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도저히 치울 용기가 나지 않은 집주인은, 결국 우리 업체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원래는 연락한 순서대로 방문하는 것이 맞지만, 비용을 두 배 정도 더 준다는 말에 서둘러 나갔다.
남자가 떠난 자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답답해서 벗어 놓은 마스크를 다시 썼다. 음식물 쓰레기와 곰팡이 등 온갖 악취들이 뒤섞인 불쾌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신발장에는 온갖 플라스틱 용기들이 가득 쌓여있었고, 그 사이에 컵라면 용기로 높은 탑을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는 치킨박스, 피자박스, 택배박스를 비롯한 쓰레기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더미들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불은 또 왜 이렇게 누렇게 색이 변했는지 눈살이 찌푸려졌다.
쓰레기더미들을 먼저 처리해야만 했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이라서 꽤 애를 먹었다. 5층을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하니,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도무지 줄어들지 않는 남자가 남긴 흔적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것일까? 20대 중반이 무엇 때문에 집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떠난 것일까? 집세도 꽤 오랫동안 밀려서 버티고 버티다가 나간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 역시도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패자 새끼, 넌 끝났다. 장담하건데 앞으로도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힘들겠다.”
그렇게 혼자서 모르는 남자의 삶을 비평하며 쓰레기더미를 치우다가 생활용품들이 하나, 둘 발견되었다. 값비싼 구두에 명품으로 보이는 옷들이 몇 벌이 보였다. 꽤 깨끗이 보관이 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뜯지도 않은 새것이었다. 버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써 본적이 없는 물건들이 소리 없이 강하게 유혹하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김실장이 어깨를 툭하고 쳤다.
“어혀, 상자에 담아라. 가지면 안 되는 물건이여.”
김실장은 사사로운 마음 하나 없는 듯 보였다. 그것들을 상자에 담은 뒤,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나중에 주인이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신발, 옷, 시계 등 귀중품을 넣은 상자에 스티커를 붙이고 날짜, 업체 명, 내용물 내역 등을 적었다. 남자의 귀중품은 경찰서에 맡긴 뒤 신고를 할 예정이라 했다. 스스로도 모르게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지라, 머쓱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하던 일을 계속해서 진행했다.
그러던 중 남자가 모아둔 우편물들을 발견했다. 카드 값부터 핸드폰 요금청구서까지 돈 달라고 독촉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이미 뜯어진 종이의 내용이 얼핏 보였다. 카드 값은 이백삼십 몇 만원이었고, 핸드폰 요금도 삼십칠만 몇 만원이었다. 필히 뜯지 않은 청구서에는 더 많은 빚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카드사가 달랐으니깐 말이다.
탕진잼의 말로가 겨우 도망이라니, ‘노답인생’을 사는 도망간 남자를 비웃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될 것을 이렇게까지 사치를 하며 살 이유가 있나? 남자는 분명, 자기 분수에 맞지 않게 살았음이 틀림없다. 명품으로 치장한 뒤 클럽에서 한번 비벼 볼 심정이겠지, 허세와 허풍으로 살다보니 결국 골로 가는 것은 본인이겠지,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의 삶은 남자의 삶 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남자의 흔적을 모두 치울 때 즈음, 김실장이 말했다.
“참말로 불쌍한 사람이여,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원래 김실장이란 사람이 마음씀씀이가 착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가끔 보면 오지랖이 넓어서 나와는 맞지 않았다. 비난 받을 녀석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다니, 절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그렇게 불쌍한지 벽지를 뜯어내며 한 숨을 쉬었다.
“집세 때먹고 도망간 남자 말이야, 아마도 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야. 살 마음이 있었더라면 비싼 신발이며, 옷들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아마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저렇게 비싼 물건도 버려두고 떠나지 않았을까, 싶네?”
함께 일하던 몇몇은 동조했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어휴, 아저씨들 웬 오지랖이에요? 그냥 일이나 하세요. 어차피 인간 안 될 놈이었어. 어디 가서 또 그렇게 살겠지.’
바로 그때, 사장님이 다급하게 올라왔다.
“잠깐 중지, 경찰이 찾아왔어. 아마도 도망간 남자가 자살을 했나봐.”
그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이 얼어버렸다. 마치 군대에서 야간 경비를 서다가 미확인 물체를 발견한 것처럼 혼돈에 휩싸였다. 태어나서 그렇게 놀라본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죽기를 바라고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괜히 고인(故人)에게 실례를 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마음을 움켜잡았다.
잠시 후, 경찰들 서넛이 들어와서 남자의 물건을 찾았다. 주인집 아줌마가 올라와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듯 했으나, 한다는 소리가 집세가 밀린지 3개월이 넘었다며 밀린 돈은 못 받는 것이냐며 하소연 했다. 사람이 죽었는데,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아줌마를 진정시키고 남자의 신원이 맞는지 확인부터 했다.
“권도영씨, 27세 맞습니까?”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서 ‘카카오톡’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대해서 경찰들에게 보여줬다.
“정말 이 사람이 맞나요?”
경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의 동공이 심하게 팽창되었다. 사진 속에 있던 환하게 웃던 인물은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의 선배였기 때문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재빨리 핸드폰을 열어서 선배가 맞는지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아줌마가 경찰에게 보여준 프로필 사진은 학교선배 ‘권도영’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처음 경험했다. 한때 친했지만 함께 조별과제를 준비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은 뒤, 사이가 멀어졌다. 졸업 후에는 보험회사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따로 연락하거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나 살기도 바쁜 마당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왜 그제야 ‘권도영’이란 이름이 생각났는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방을 청소하며 나온 무수한 우편물에 ‘권도영’이란 세 글자를 봐놓고도 왜 그리 무심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선배는 왜 목숨을 끊었을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던 선배, 아니 도영이 형은 사치를 하거나 신뢰를 저버릴 위인이 못 되는 인물이다. 그 역시도 집안이 어려워서 검소하게 살아왔지만, 자신의 생활비를 아껴가며 후배들 밥을 사주는 사람이었고, 조별과제 때 온갖 핑계를 대며 참여 하지 않는 새끼들까지 챙기며 궂은일을 묵묵히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참여도 안한 놈들도 점수를 받는다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며 반대하다가 형에게 대들었다. 무른 형이 싫었다. 과제를 끝내는 동안 형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성적에서 'A+'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형과 대화하기 싫어서 내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 형에게 모질게 했던 것이 하나 둘 생각났다.
“형은 바보야? 그렇게 살다가 뒤통수 크게 당하지. 세상에는 좋은 사람은 별로 없어. 과제하기 싫어서 온갖 핑계 대는 저 새끼들이 이런다고 고마워 할 것 같아? 어차피 어려운 처지에 우리 둘만 학점 잘 받고 장학금 받으면 될 것을...”
내가 화를 낼 만큼 착한 형이었다. 그 성품이 어디 가겠나? 취업을 한 이후에 동기 놈이 어디론가 같이 가자고 했지만, 왠지 도영이 형이 부른 것 같아서 거절했다. 까칠하게 대하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사실, 투정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이후 정말 도영이 형을 볼 수 없었다. 졸업식 때 본 형의 모습이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며, 이런 방식으로 형의 죽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끔찍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경찰에게 다가갔다.
“죽은 권도영씨의 학교 후배입니다만...”
경찰과 대화 중에 형이 한강에 뛰어들어 익사(溺死) 한 것을 알게 되었다. 부검 결과 죽은지는 3일 정도 되었다고 했다. 문제는 유서도 핸드폰도 없어서, 단서라도 있을까? 집으로 찾아 온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혹시 모아 둔 쓰레기 속에 증거라도 있을까봐 사장님께 부탁했다. 사장님은 흔쾌히 허락했다.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를 경찰들과 정신없이 뒤졌다. 그런데 놀라운 점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쓰레기봉투마다 내용물들이 모두 달랐다. 어떤 봉투에서는 스타킹이나 생리대처럼 여성용품이 나왔고, 어떤 봉투에서는 다른 호수에 사는 사람의 우편물 조각들이 나왔다. 각기 다른 집의 쓰레기로 보였다. 내가 아는 한, 형이 쓰레기를 수집하는 그런 요상한 취미는 전혀 없었다. 그제야 뭔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 의심이 들었다. 월세가 그렇게 밀렸는데 돈이 어디 있어서 배달음식을 시켰을까? 이 사실을 경찰에게 알렸다. 단지 형의 유서를 찾기 위해 온 경찰들이 일이 커지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순식간에 본청에 연락을 했다. 이후 경찰은 형의 집에서 나온 쓰레기가 증거가 될 수 있다며 자신들이 보겠다고 했다.
나는 형의 죽음을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던 중 도영이 형과 친했던 형들에게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영이 형은 보험회사에 들어가면서 가족부터 온갖 친척들에게 부탁을 하며 영업전쟁에 뛰어들었으나, 곧 한계에 부딪혔다. 아무도 형에게 보험을 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적이 내려가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동기들과 교수님을 찾았다. 그러나 캠퍼스로 맺어진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보험이라는 이야기에 모두 난색을 표한 것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이자, 도형이 형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초짜인 형을 가르친다며 이것저것 지적을 했다고 말했다.
“도영씨, 지금 자신을 좀 봐. 누가 도영씨한테 보험이나 자산관리 상품을 들겠어? 행색이 그렇게 초라한데?”
그 사람들은 형에게 치장도 하고, 고급스럽게 보여야 한다며 명품을 구입하라고 재촉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같은 업종에 있으면서 수준이 맞지 않는다며 비아냥댔다.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명품 구두를 시작으로 양복과 시계를 연이어 구입한 형은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것을 갚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녀석들의 꼬임에 빠진 것이다. 명품으로 치장을 한다고 상품을 잘 파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영업이란 일은 형에게 맞지 않았다. 고객을 구워삶아서 뭐라도 팔아야 하지만, 아마도 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지 못 한 것 같다. 하지만 취업이 안 되는 마당에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을 많이 팔면 팔수록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달콤한 덫에 걸려버렸기 때문이다.
권도영의 동기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난 뒤, 한 동안 머리가 복잡했다. 주인 없는 형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웃고 있어?”
사실 처음에는 주인집 아줌마가 돈 때문에 형을 어떻게 한 줄 알았다. 그래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일을 꾸몄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알리바이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원룸 건물 한 채에서 월 2,400만원을 버는 아줌마가 고작 3개월간 집세가 밀린다고 살인을 저지른다는 건 평탄한 인생을 흔들어 놓는 리스크(risk)가 아니겠는가? 물론 독촉은 했겠지만, 보증금에서 까면 그만이었다. 이미 그 사실을 주인집 아줌마도 알고 있었다.
경찰이 CCTV를 확인한 결과 형이 스스로 물에 빠졌다는 단서가 나왔다. 빚 독촉에 허덕이다가 견디지 못한 ‘자살’로 수사종결을 했다. 그렇다면 주인이 다른 쓰레기더미는 무엇이며 빚에 허덕이면서 온갖 배달음식의 흔적은 무엇인가? 501호 남자가 찾아와서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권도영의 죽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실적이 바닥을 내려치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같은 원룸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탁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여유가 있다면 좁은 원룸에 살지 않았겠지. 그래서 ‘명의’만 빌린 뒤에 자신이 보험료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가입을 권유 할 예정이었다. 대상은 권도영과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자주 인사하며 서로 안면이 익숙해지자, 권도영은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친해지기를 시도했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결과, 5층에 있는 사람들 모두와 친해졌다. 권도영을 포함한 8인이 함께 식사도 하고 농담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권도영은 왠지 자신의 생각대로 되는 것 같아서 이참에 실적도 올리고, 경험을 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임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서 더욱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자, 권도영은 보험상품을 가입해달라는 권유를 부탁했다. 그러나 역시 형편이 썩 좋지 않은 7인이라, 거절을 하고 말았다. 당연히 그럴 줄 알고 준비한 플랜B를 꺼내어 연이어 진행했다. 명의만 빌려 달라고 말하자, 이전 반응과 다르게 꽤 고민을 하며 시간을 좀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사람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가입한 뒤 일, 이 년 뒤에 해지를 해도 상관없었고 자신의 돈이 드는 것도 아니었으며 권도영이 알아서 잘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혹시나’라는 변수가 문제였을 뿐이었다. 매일을 얻어먹고 신세를 진 것이 있었고, 그래서 함부로 거절 할 수 없는 요인도 작용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간 동안 권도영은 열심히 노력했다. 그들의 집에서 나온 쓰레기까지 치워가며 어떻게든 부탁을 했다. 그 결과 7인의 동의를 모두 얻어낼 수 있었다. 고마움의 대가로 앞으로 쓰레기는 자신이 대표해서 버릴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내뱉었다.
“바보...”
처음에는 부담스럽게 느끼더니, 어느 순간 5층에 있는 사람들은 1층까지 내려가기 귀찮아졌다. 권도영의 말도 있었고, 자신들이 권도영의 은인이라 여긴 나머지 도영의 말대로 집 앞에 쓰레기를 놓아두었다. 권도영은 두 말 없이 그것들을 치웠을 것이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에 자주 밥도 사줬을 것이다. 하지만 권도영의 삶은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빚은 점점 쌓여만 가고 또 다시 상품을 팔아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같은 회사에 있는 누구는 ‘보험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며 한 달에 ‘억’ 소리 날 만큼 돈을 버는데, 겨우 보험 7개를 자신의 돈으로 등록한 스스로가 초라했을 것이다. 누구보다 바쁘고 노력하며 살지만 그것이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위기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카드빚을 비롯한 집세, 학자금 대출 등을 갚아야 했다. 특히 일곱 명 분의 보험료를 매달 자신의 돈으로 납부하는 바람에 생활비가 빠듯했다. 어느 하나 쉽사리 돈을 갚을 처지가 못 되었다. 신용불량자는 되고 싶지 않았겠지, 평생 신뢰로 살아온 자존심 때문에 집세는 미룰 수 없었지,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내는 것은 사치일까? 분명 이런 고민을 했을 터이다.
더욱이 문제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터졌다. 같은 층에 사는 7인이 권도영에게 ‘밥을 사라줘라’, ‘간식을 사줘라’하는 행위가 정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점점 그들은 쓰레기뭉치를 권도영의 집에 가져왔고, 은인이라는 명목으로 바라는 것들이 많았다. 일곱 명 전체의 부탁이 되기도 했고, 개인의 부탁이 될 때도 있었다. 그런 생활이 길어지자 권도영의 삶은 피폐해졌을 것이다. 특히나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성격 아니던가? 권도영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층에 있던 사람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보험을 해약하게 되면 환급금을 자신들에게 달라는 말이었는데, 그것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으나 멘탈이 붕괴 된 상황에서 그런 말은 메마른 마음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어느 덧 정신을 차렸을 때는 쓰레기가 가득 쌓인 아수라장이었다. 카드빚이며 월세며 어느 하나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계약 한 건 따내지 못했기에 수입이 없었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고,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칼날을 내미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여전히 7인은 한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고 쓰레기를 집 안으로 넣어두고 있었다. 결국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나머지,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봐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었다. 기본급여도 없고, 퇴직금도 없고, 4대 보험도 불가한 직업을 선택한 권도영의 실수였다. 하지만 그런 실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권도영에게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발...”
더 이상 권도영, 아니 도영이 형의 죽음을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럴수록 스스로가 비참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날에 아르바이트를 갈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피곤했다.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다음 날에도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유난히 2013년 여름방학은 잔인하고 무섭게 느껴졌던 시절이었다.
출처 | 브릿G에서 연재하는 문화류씨공포괴담집도 많은 사랑부탁드립니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s/?novel_post_id=46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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