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으로 쓴 소설입니다. 시간이 있으시면 읽고 평가해주세요.
세상 밖으로
‘당신의 무관심이 누군가를 맨발로 다리 난간에 서게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 무죄인가.’
시간을 잘못 봤을까? 강의 시간이 다가 오는 강의실 복도에서, 영일은 초조한 듯 연신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그가 항상 푹 눌러 쓰고 다니는 가짜 MLB 모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띈다. 유행이 한참 지났을 법한 체크무늬 남방 또한 신경에 거슬린다. 오늘 아침에는 미처 mp3플레이어의 배터리도 챙기지 못해서 영일이 귀에 꽂고 있는 이어폰에서는 음악조차 나오지 않는다. 영일은 초조한 듯,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복도를 두리번거린다. 그리고는 멀리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이내 뭔가 읽는 듯, 학과사무실에서 복도 게시판에 붙여놓은 공고문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렇게 영일은 사람들이 등 뒤로 지나가는 것을 느끼고도, 애써 게시판 쪽을 집중한다. 낡은 압정에 꽂혀있는 것들이라는 게 어차피 그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더욱 이미 공고 기간 또한 지나버렸다. 하지만 영일은 시선을 돌릴 생각이 없다. 애초에 게시물 따위는 관심도 없었으니까……
오늘은 영일이 꽤나 큰 실수를 한 날이다. 그에게 있어 순조로운 하루의 시작이란 건 강의가 시작하는 아홉시가 조금 지나, 교수가 출석을 부르기 시작할 때 쯤 강의실에 도착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늦은 듯 헐레벌떡 뛰어와서 빈 구석자리에 앉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강의실에 너무 빨리 도착해 버려서 강의 시간까지 영일은 이렇게 복도 한 귀퉁이에 뿌리 내린 식물이 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가끔 이렇게 계획대로 안 될 때는 mp3플레이어의 볼륨을 크게 높이고 주위에서 하는 말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오늘은 그나마도 할 수 없게 됐다. 그렇다고 강의실에 눈치 없이 앉아 있었다가는 서슬 퍼런 여학생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다. 사람을 하나하나 핀셋으로 벗겨내며 조롱하는 듯한 그녀들의 눈초리는 온 몸의 신경을 뒤틀어 놓는 것 같다. 영일은 시간을 때워 볼까하고 화장실도 갔다 왔지만, 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그 사이에도 연신 핸드폰을 꺼내서 시간을 확인한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문자를 보내는 시늉을 한다. 우연히 착․발신 번호를 확인해 보지만, 며칠사이 걸려온 전화라곤 엄마밖에 없다.
화장실에서 나와 복도 끝 창쪽에 자리를 잡은 영일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리듬을 타는 듯, 발장단을 맞추며 고개까지 살짝 끄덕이고 있다.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린다. 이런 식이면 웬만해선 말을 거는 사람이 없다.
‘이제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까?’
그가 조금 긴장을 푸는 순간,
“오빠 뭐 들어요?”
갑자기 수아가 그의 한쪽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더니 자신의 귀로 가져간다.
‘빌어먹을…… 알거 없잖아.’
영일이 순간적으로 이어폰을 뺏는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뻔하다.
‘제길 하필이면……’
하지만 영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시선을 창 밖으로 옮기며, 담배 한 가치를 빼어 문다. 그녀가 무안한 듯 살짝 미소를 보이며 강의실로 들어가고 나서야, 영일은 온 몸을 휘감는 모멸감에 헛기침을 몇 번하다가, 구토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화장실로 달려간다. 더러운 변기 앞에 무릎을 꿇고, 심장이라도 뱉어낼 듯 토악질을 해보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영일은 뭔가 토해내야 한다는 듯, 헛구역질을 계속해댔다. 뱉어 낸 것도 없는 데 입가에서 악취가 난다.
‘젠장.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악취 때문이야.’
며칠 전부터 영일의 집에서는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하고 며칠을 그냥 지냈는데 오늘 아침에는 역겨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악취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 뛰쳐나오다시피 집을 나오다보니 아침부터 이 꼴이다. 전에도 빨랫감이 쌓인다던가, 밥솥에 밥이 썩는다던가 해서 집에서 냄새가 난적은 있었다. 하지만 지난 며칠 사이 집에서 나는 냄새처럼 못 견딜 정도의 악취는 처음이다. 지난 번 어머니가 해놓고 간, 불고기가 썩은 게 틀림없다.
‘그러게 그냥 가라니까……’
영일은 세면대에서 입을 헹궈낸다. 아무리 씻어내도 입에서는 계속해서 악취가 나는 듯하다. 좀 전의 일은 지우려, 아무리 머리를 흔들어도 기억은 계속해서 또렷해지기만 한다. 머리를 들어 거울을 보니, 자기 자신과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가여운 사내가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스스로의 역겨움에 잔뜩 얼굴을 찌푸린 거울 속 사내가 빤히 영일을 쳐다보고 있다. 그를 향해 냉소라도 던지는 듯, 입꼬리가 삐죽이 올라간다.
영일은 화장실을 나오면서 이대로 집으로 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제 와서 강의까지 빠진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하다. 내키지는 않지만,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용히 구석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찾는다. 어디서나 어렵지 않게 눈에 띄는 그녀……
‘웃고 있다. 무슨 얘기를 저렇게 재미있게 할까. 내 얘기인가. 정말 조금 전 내 얘기일까.’
머릿속에서 온갖 것들이 뒤섞이며, 깔깔거리는 그녀들의 비웃음이 고막을 찢어 버릴 듯 귓가에 맴돈다.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다.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강의 시간 내내 자리에 엎드려 자는 시늉을 한다. 강의가 끝나는 소리가 들린다. 영일은 한풀 체념한 채로 조용히 몸을 일으켜 나설 준비를 한다.
‘이제는 또 어디로 가야하나.’
다음 수업은 세 시간 후에나 있다. 보통은 곧장 만화방으로 가서 환타지물을 읽거나, 가까운 게임방에서 온라인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인지, 허기가 찾아와서인지 속이 쓰리다. 일단은 속부터 채워야겠다고 생각한 영일은 학교를 벗어나 골목의 한 허름한 중국집으로 들어간다. 물론 급하다면 학교 식당에서 혼자 먹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처럼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 식당에서는 혼자 밥을 먹는 다는 것만으로 수십명의 시선을 끌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혹시나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밥을 먹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곤욕이다. 반면 중국집은 배달위주라서 홀에는 거의 손님이 없다. 하지만 영일이 굳이 이 집을 맘에 들어 하는 것은 늘 혼자 오는 그에게 말 한번 붙이지 않는 주인의 배려다. 오늘도 역시 주문만 받아갈 뿐, 싸구려 미소 한번 띠지 않는다. 참 좋은 가게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영일은 꾸역꾸역 밥을 뱃속에 끌어넣는다. 자동차의 속도계 옆, 붉은 주유기가 반짝거리면 자동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차는 가까운 주유소로 향한다. 누구와 함께 갈 필요도 없으며, 혼자 간다고 해도 쳐다보는 이 하나 없다. 오늘도 영일은 혼자 단골 주유소에서 사천원 어치 기름을 뱃속에 채워 넣는다. 아무런 생각 없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그릇을 비워낸다. 주섬주섬 옆자리에 앉혀놓은 가방을 일으켜 세우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낸다. 주머니에서 동전하나가 떨어지면서 성가신 소리를 낸다. 동전을 주우려 테이블 밑으로 몸을 굽힌다.
‘여러 가지 속 썩이네. 그냥 두고 가버릴까.’
‘????!!!!!’
순간 영일은 뭔가 뒷덜미를 잡아채는 섬뜩함에 온 몸이 굳어버린다. 웃음소리. 분명히 귀에 익은 웃음소리다. 하지만 지금 돌아볼 수는 없다. 지금 고개를 돌린다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영일은 동전 줍는 것 따위는 잊어버리고, 테이블 위에 음식값을 던지듯 올려놓고 가게를 빠져나온다.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까지 뒷덜미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영일은 달리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린다. 영일은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는 듯,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맴도는 웃음소리. 분명히 수아의 웃음소리다.
수아는 학기 초에 동아리에서 알게 된 후배다. 인원이 적은 모임에서는 사람과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몇 번 참가했었지만, 역시 낯선 이와의 만남은 쉽지 않았다. 영일과 달리 수아는 무척 활동적이어서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그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어떤 얘기든 대화를 할 때면 동그란 눈으로 영일을 바라보며, 조그만 농담에도 언제나 큰 웃음으로 대답하는 그녀는 영일에게 꽤나 매력적이었다. 영일은 아무런 매력 없는 자신에게조차 편견 없이 다가서는 수아가 세상 밖으로 나가는 이정표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영일은 그녀가 세상 밖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고 여겼고,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창문 밖으로 자신을 데리고 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일의 그런 바람은 그녀가 동아리 회장과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무너져 내렸다. 물론 그 다음부터 동아리방을 찾는 일은 없었다.
허파가 폭발할 것만 같다. 두 다리는 제멋대로 움찔거린다. 온 몸의 피가 뇌로 쏠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펄펄 끓는 몸에는 이상하게 식은땀이 난다. 도망치듯 달리다보니 어딘지도 모를 한 외진 골목이다. 다리가 풀린다. 두 손을 전봇대에 기대고 고개를 숙여, 턱까지 차오른 숨을 이기지 못하고 구역질을 한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코를 찢어 내는 듯한 악취에 눈을 떠보니, 쓰레기가 있던 자리에 썩은 물이 고여 있다.
‘빌어먹을 썩은 내. 도대체 이유가 뭐야.’
고개를 돌리며 구역질을 해댄다. 영일은 갑자기 뱃속에 더러워진 것들을 모두 뱉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지를 목구멍에 쑤셔 넣고 연신 구역질을 한다. 눈물까지 토해내며 한참을 계속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지친 영일은 담벼락에 기대 앉아 담배를 빼어 문다. 새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사이로 희뿌연 담배 연기가 자연스레 섞여 날아간다. 날씨가 참 좋다.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나자, 영일은 깜짝 놀라 얼른 자리를 일어난다. 퉁퉁 부은 눈을 숨기려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쓴다. 아래를 보니 바지며 셔츠며 흙이 잔뜩 묻어있다. 영일은 털어 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6층을 꾹 누른다. 엘리베이터 양쪽 벽면에 붙은 거울이 오늘 따라 신경에 거슬린다.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끝도 없는 행렬이 영일을 바라보고 있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또 다시 무표정한 사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영일은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고 싶지만, 거울 속 그 누구도 웃지 않는다.
‘딩동~ 6층입니다.’
항상 고마운 아가씨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주섬주섬 키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영일은 자신의 방으로 향한다. 땀에 쩔은 옷을 벗어 놓고, 컴퓨터를 켠다. 오늘 일을 얘기할 만한 상대라고는 온라인상의 사람들 밖에 없다. 그들은 영일을 잘 알지도 못하고, 영일 또한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 하지만 싸구려 위로라도 아쉬울 때면, 괜찮은 방법이다. 이를테면 일회용 위로인 셈이다. 한번 쓰고 부담 없이 버릴 수 있고, 필요하다면 다음에 또 다른 위로 상대를 찾으면 된다. 영일의 글을 읽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싸구려 위로를 뱉어 낸다. 하지만 곧 모두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온라인상의 만남이라는 건 언제나 이런 식이다. 아무도 타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건 그냥 ‘내가 들어 줬으니, 이번에는 네 차례다.’ 식의 무언의 거래이다. 결국 있을지 없을 지도 모르는 타인을 통해 모두들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꾸며진 사연과 쓸데없이 과장된 위로만이 존재할 뿐, 그곳에 진짜 세상은 없다.
이럴 때는 진짜 사람을 만나고 싶다. 소주 몇 잔에 말없이 어깨를 빌릴 수 있는 진짜 사람이 그리워진다. 영일에게도 룸메이트가 하나 있긴 하다. 하지만 같은 집에 산다고 해봐야, 얼굴 보기도 힘들고, 집구석에 하루 종일 처박혀 있는 녀석에게 위로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밑바닥에게 위로 받는 것 자체가 위로 받을 일이다. 해가 넘어 갔는지 커튼 너머로 어둠이 밀려온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선명한 기억들을 지워내기 위해 영일은 침대에 몸을 눕힌다.
‘……’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들기는 했던 걸까? ‘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 평소에는 들으려 해도 들리지 것들이 예리한 바늘이 되어 영일의 귀로 날아든다. 잠들려고 노력할수록, 정신은 점점 또렷해진다. 날카로워진 이성은 이내 한 장면으로 이어진다. 아무것도 없는 새까만 머릿속 캔버스에 하나하나 장면이 그려진다. 푹 눌러 쓴 모자. 여드름이 잔뜩 난 얼굴. 유행 지난 남방. 더러운 신발. 게다가 나오지도 않는 이어폰을 꼽고, 온 몸에서 악취를 풍기며 서 있는 역겨운 사내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웃고 있다. 점점 자신과 닮아 가는 사내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영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래. 수면제를 먹자. 녀석에게 수면제가 있었지.’
갑자기 룸메이트인 은형이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 썼다던 수면제가 떠올랐다.
영일이 은형을 만난 건 전적으로 집세 때문이었다. 영일이 아파트 전세를 얻고, 건넛방에 세를 주어 관리비라도 내야겠다고 사람을 구하던 중 찾아 온 게 은형이다. 사실 은형에게 쉽게 방을 내어 준 것은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자신과 비슷해서였다. 성격 때문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다는 말에 약간 측은한 면도 있고, 말벗이라도 있으면 영일자신도 조금은 덜 외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일의 기대와는 달리 은형의 상태는 병적인 것이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은형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은둔형 외톨이였다. 은형이 그 말을 병적으로 싫어해서, 영일도 직접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은형은 어지간해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은형은 영일과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학교에 가는 일은 본 적이 없다. 대게 중요한 일을 영일에게 부탁하고, 식사의 경우 시켜먹는 것이 대부분이다. 같은 집에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영일조차 며칠동안 얼굴 한번 못 보는 일은 다반사여서, 영일도 이제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이번에도 며칠 전, 서로 심하게 다툰 후로는 마주친 적조차 없다. 그날도 혼자 밥을 먹고 들어온 영일이 자신도 가끔 같이 사는 사람과 밖에서 밥 한번 먹어보고 싶다고 한 말이 은형에게는 꽤나 상처가 되었나 보다. 그런 지금, 녀석에게 신세지는 건 싫지만, 잠시나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건 이 방법 밖에 없다. 어떻게든 잠들어야 한다.
‘지금쯤 녀석도 자고 있을 테니, 조용히 가져오자.’
거실로 나서는 방문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삐걱거린다. 거실을 지나 녀석의 방문 앞에 선다. 떨리는 손으로 녀석의 방문손잡이를 조심스레 돌린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위쪽으로 살짝 들어 올리며, 천천히 밀어 연다. 순간, 집안 전체를 떠다니던 악취가 온 몸을 휘감는다. 역겨움으로 움찔거리는 목구멍에 마른 침을 삼키며, 조금 열린 문틈으로 잔뜩 몸을 들고 까치발로 들어간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악취가 머릿속을 파고든다. 마치 사람을 쫓아내는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을 찾아보라고 손짓하는 듯한…… 그건 아마도 이 세상의 냄새가 아닐 거라고 영일은 생각해 버린다.
‘더러운 녀석. 아예 청소도 안하고 사는 건가.’
영일은 지포 라이터를 켜고, 한 손으로 빛이 새어나가는 걸 막는다. 그리고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은형은 아랑곳 않고, 수면제를 찾기 시작한다. 영일의 생각과 달리 방 안은 깨끗하다. 오히려 너무 깨끗해서 이상하다. 텔레비전, 컴퓨터 책상, 책꽂이, 옷장, 온 방안을 조심스레 돌아다니던 시선은 은형의 머리맡에 멈춘다. 안경, 스탠드 그리고 물병 따위와 함께 보이는 새하얀 약병. 영일은 조용히 라이터의 덮개를 닫고, 은형이 깰 새라 조금 전 봤던 기억을 더듬어 어둠 속에서 약병이 있는 곳으로 손을 침대에 올려놓고 조금씩 옮겨간다. 침대를 더듬는 손이 왠지 모르게 싸늘하다. 어렵지 않게 약병을 잡은 영일은 뚜껑을 열기 위해 다른 손을 가져간다. 열려 있다. 손을 펼쳐 약병을 기울인다. 비어 있다.
‘제길…… 다 처먹어 버렸잖아.'
팽팽히 당긴 활시위가 어이 없이 끊어지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영일의 실망은 인간에 대한 배신감으로 커져간다. 잔뜩 맘 졸이고 있던 심장은 그제서야 터질 듯이 뛰기 시작한다. 인형을 깨워 내려는 듯, 심장소리가 온 방안을 가득 채우자,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잡고 있던 영일은 인형의 머리맡에 약병을 올려놓고 방을 나온다. 그 깜깜한 방의 악취도, 냉기도 뒤로 한 채…… 자신을 잠재워줄 무언가를 찾아서…… 그 방을 나온다. 영일은 이미 악취에 취해 의식이 아득해져갔다.
‘어떻게든 잠들어야 한다. 되도록 깊게,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깊은 잠을 자야한다.’
※
“혹시 아드님이 이은형이라는 학생과 같이 살았나요?”
“아뇨. 우리 영일이는 낯을 많이 가려서 혼자 살았어요”
“마지막으로 아드님 집에 들르신 게 언제죠?”
“사흘 전에 왔을 때도 아무도 없었는데……”
“이지나씨 되시죠? 경찰서입니다. 혹시 서영일씨 아시나요?”
“글쎄…… 이름은 낯이 익긴 한데, 잘 모르겠는데요. 왜 그러시죠?”
“그 학생 며칠 전 자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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