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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기를 맞이했지만, 딱히 변한 것은 없던 시절이었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별 문제가 안 된다는 어른들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열다섯 살, 중2병에 걸렸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문제로 피곤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18년 전, D중학교에는 ‘허보’라는 녀석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녀석은 어린 시절부터 또래보다 덩치가 훨씬 컸고, 힘도 좋아서 학교의 통이 되었다. 아이들은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가끔 허보가 기분이 언짢은 일이 생기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몇몇은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만 했고, 몇몇은 주머니를 털어서 맛있는 것을 사다가 바쳐야만 했다. 하루하루 녀석의 횡포에 몸과 마음이 지쳐가던 날이었다. 학급 반장도 녀석의 졸개가 되었고, 선생님도 녀석만큼은 부담스러운지 눈감아 주거나, 외면했다.
한 날은 진호라는 녀석이 참을 만큼 참다가, 허보에게 덤빈 적이 있다. 처음에는 선빵을 날리고 기선제압을 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허보의 두꺼운 손에 멱살을 잡혔다. 어찌나 악력이 강하던지,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두꺼비 펀치로 진호의 얼굴을 후려 패는데, 자비란 없었다. 이후 진호는 허보의 ‘리모컨’이 되어 온갖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하였다. 진호는 허보의 기분을 기상청 직원처럼 감지했지만, 워낙 변덕이 심해서 하루에 한 번은 꼭 싸대기를 맞았다. 그런 모습을 본 학급 아이들은 허보의 눈짓과 손짓에 굽실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충청남도 이름도 모르는 지역에서 태유라는 녀석이 전학을 왔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것이 꽤 잘생긴 녀석이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초점이 없고 뭔가 대강대강 자기소개를 했다. 물론 선생님이 바빠서 반장이 데려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긴장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벅터벅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전학 첫날에 주머니에 손을 넣는 다는 것은 쉽지 않은 용기였다. 역시나 그것이 허보의 심기를 건드렸다. 쉬는 시간에 허보의 똘마니 중 가장 비열하다는 우석이가 태유에게 다가갔다.
“마, 전학생 새끼야. 저기 있는 허보가 니 좀 보잖다.”
태유는 듣는 둥, 마는 둥 책상에 엎드려서 졸린 눈으로 우석이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석이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화가 났는지 윽박지르며 태유의 목덜미 쪽 옷깃을 잡았다. 녀석은 허보의 영원한 딸랑이 아니던가? 허보의 비위를 맞춰주는 대신 2인자 자리를 보장 받았다. 그리고 2인자가 되면서 더욱 잔인해지고 더러운 짓을 서슴치 않았다. 반 아이들은 전학생이 불쌍했지만, 차마 도와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이곳으로 전학 온 태유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녀석이 꼬장을 부릴 것을 알기에 아이들은 애써 눈을 피했다.
“와장창창”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리에 모두가 놀랐다. 태유가 전학을 오자마자 더러운 꼴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리는 것은 우석이의 비명 소리였다. 교실에 있는 모두가 창문 쪽을 바라봤다. 우석이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창문은 깨져서 파편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피를 본 우석이는 겁이 났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태유는 우석이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코쟁이 새끼가 죽을라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엎드렸다. 그 광경을 본 허보가 얌전히 둘 녀석은 아니었다. 육중한 몸을 일으켜서 태유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 모두가 몸이 굳어버렸다. 그런데 허보가 태유에게 도착하기 전, 태유가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날려 허보의 복부를 ‘이단 날라 차기’로 가격했다. ‘퍽’이라는 소리와 함께 허보가 쓰러졌고, 고통을 호소했다. 한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급기야 눈물을 흘리는데 선생님이 들어오자마자 119를 불렀다. 실로 통쾌했지만, 태유가 선생님께 혼자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당황한 선생님이 어떻게 된 일이냐며, 태유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실수로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저 친구와 부딪혔습니다. 덕분에 저는 다치지 않았지만, 저 친구가 많이 다치지 않아야 할 텐데요. 죄송합니다. 저의 불찰입니다.”
선생님은 태유의 말을 듣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타이르는 정도로 끝났다. 교실에 있던 아이들은 태유의 태세전환에 경악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우석이도 자리에 없다는 걸 알아챘다. 태유는 얼굴색이 하나 변하지 않고 또 거짓말을 했다.
“아까 혼자서 저를 놀래 켜 주려고 장난치다가 머리로 유리창을 깨서 상처가 나서 양호실에 갔습니다. 큰 상처가 아닌 긁힌 정도여서 다행입니다만, 창문이 깨졌는데 어떻게 하죠?”
전학생의 능수능란한 거짓말에 학우들 모두가 소름이 돋았다. 선생님은 도대체 뭘 어떻게 까불기에 유리창을 머리로 깼냐며, 제발 조심 좀 하라고 했다. 운이 좋게도 원래 우석이 녀석은 반에서 많이 까불고 돌아다녀서 선생님도 그 정도에서 넘어갔다.
태유는 선생님이 있을 때는 눈이 반짝반짝하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본드를 마신 동네 형들처럼 허공을 보며 멍을 때렸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도시락을 꺼내었다. 하지만 태유만 도시락을 싸오지 않았다. 반 아이들 중 눈치 빠른 녀석들이 태유에게 다가가서 줄을 섰다.
“태유야, 빵 사올까? 라면 사올까?”
태유는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녀석들을 한참 바라봤다. 태유가 허보보다 강하다고 판단한 녀석들이 지지의 러브콜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유는 관심 없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자신이 매점에서 라면을 사올 테니, 식사를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먹으려면 먹어, 기다려주면 고맙고...”
아이들은 태유의 반응에 우왕좌왕했다. 먼저 먹으라는 건지, 기다리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먼저 먹었다가 허보와 우석이 꼴이 날까봐, 태반이 밥을 먹지 않고 기다렸다. 몇 분 뒤에 태유는 먹을 것을 엄청 사들고 왔다. 라면 두 개에 온갖 빵들, 그 밖의 간식거리와 음료수르 사왔다. 조금 늦은 태유는 먼저 밥을 먹지, 왜 기다렸냐며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투덜댔다. 녀석과 밥을 먹는데, 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다르게 학우에게 매우 친절했다. 자신이 사온 간식거리나 음료수를 나누어 주고, 도시락을 못 싸온 아이들에게 사온 빵을 먹으라며 무심하게 툭 던지는 것이었다. 얼떨결에 반에서 아웃사이더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어쩌다보니 허보의 존재는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런데 허보가 전학생에게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각반의 일진들이 교실 앞을 기웃거렸다.
“허보 때린 전학생 새끼가 누고? 오늘 전학 온 새끼라는데 얼굴 함 보자?”
교실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태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과 농담 따먹기에 집중했다.
“프린세스 메이커2에 dd파일 지우면 우째 되는지 아남? 웃는 새끼들, 다 변태. 키키키키...”
아이들이 생각한 것보다 태유는 재밌는 녀석이었고, 좋은 친구였다. 다만, 말이 너무 많았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급기야 교실 밖에 있는 일진들이 자신들 말이 안 들렸냐며 들어왔다. 순식간에 여석 명 정도가 겁을 주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하지만 그러던가, 말든가 태유는 혼자서 떠들어댔다. 여석 명 중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성동이가 태유의 멱살을 잡았다. 태유는 멱살을 잡힌 채로 아이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보편적인 수준의 정신을 가진 놈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성동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순식간에 멱살을 잡은 손을 꺾는 태유였다. 성동이가 아파하며 비명을 질렀다.
“끄아악.”
태유는 아무래도 상당히 희한한 녀석이었다. 성동이 녀석의팔을 꺾은 채로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녀석은 팔이 아픈지 주저앉으면서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태유가 수다를 멈추고 성동이의 팔을 다시 다른 방향으로 꺾어 일으켜 세웠다.
“야이 좀만한 새끼아,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 오늘 니놈 팔모가지 다시는 못 쓰게 할려다가 참은 거여. 다시 내 눈에 보이면 그대는 물어뜯어 죽여 버린다?”
마치 ‘지킬 앤 하이드’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성동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태유는 적응이 끝난 듯 아이들과 잡담의 향연을 벌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허보와 우석이가 씩씩거리며 나타났기 때문이다. 허보는 인상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걸어와서 다시 태유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태유는 또 도라이 기질을 발동하며 몸을 날려서 허보의 코뼈를 팔꿈치로 쳤다. ‘와드득’소리가 교실을 채웠다. 허보는 휘청하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내 수도꼭지처럼 쌍코피가 쏟아져 내렸다. 태유가 우석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녀석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허보는 연속 이틀 동안 눈물을 보였다. 자존심도 상하고, 무엇보다 피가 멈출 주를 몰라서 코를 부여잡고 화장실로 갔다. 시간이 꽤 지난 뒤, 허보는 코에 휴지를 박고 돌아왔다. 녀석은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만만한 녀석인 진호를 불러서 빵과 우유를 사오라고 시켰다. 진호가 자리에 일어나서 교실문을 여는 순간, 태유가 가지 말라고 했다. 진호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됐다. 왜냐하면 허보가 인상을 쓰며 계속 노려봤기 때문이다. 태유가 그것을 보자, 당장 허보에게 달려들었다. 사정없이 녀석의 볼에 싸대기를 날렸다.
“이런 씹대두 새끼, 대가리 크기만큼 나쁜 새끼야, 쟤가 니 심부름꾼이여? 확 갈아 마셔 버릴라?”
태유는 아침부터 허보를 사정없이 때렸다. 그 정도가 심해서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말렸다. 그제야 멈춘 태유는 화가 진정이 안 되는지,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누군가에게 한 번도 맞아 본적이 없던 허보는 이틀 연속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날 이후로 허보는 태유의 눈치를 보며 학교를 다녔다. 처음에는 2인자가 되려고 했지만, 태유는 친구끼리 그런 게 무슨 이유가 있냐면서 ‘서열놀이’를 금지 시켰다. 허보는 답답했다. 자신이 권력을 휘두르고 힘이 있다는 것을 자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짜증이 났다. 가끔 아이들이 자신들과 동급 취급 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급기야 태유는 허보에게 머리가 크다면서 ‘허두보’라든지, ‘허대두’라든지 듣기 싫은 별명으로 부르는데, 바보취급 당하는 것 같아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러나 대들기라도 하면, 언제든 태유의 더러운 성격 때문에 늘 맞는 일이 일상 다반사였다. 이상하게 태유만 보면 전갈의 독에 찔린 것처럼 마비가 되는 것 같다. 녀석의 눈빛만 보면 무서워서 몸이 움츠려 든다. 사실 힘으로 보나, 덩치로 보나 허보가 꿀리지 않을 법한데 말이다. 하지만 가끔 태유의 잃을 것 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돋는다.
어느 때부터 허보는 동네북이 되었다. 반 아이들이 태유처럼 허보를 ‘허두보’라든지, ‘허대두’라고 놀리고 다녔고, 역시나 태유의 눈치 때문에 그걸 듣고도 가만히 있었다. 계속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 보니, 허보는 정말 바보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반 아이들이 실수만 하면 허보에게 탓을 하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도 서슴없이 했다. 한때 폭군으로 불리던 녀석이었는데 단 3개월 만에 동네바보가 되었다. 예전에 휘두르던 권력은 진상 짓이 되어 비난을 받았다.
문제는 순식간에 동네바보가 된 아들을 본 엄마의 마음이었다. 학교를 주름잡던 아들이 언제부터인가 기도 못 펴고 다니는 걸 보니 마음이 쓰렸다. 돈이 있는데 ‘가오’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허보의 엄마는 무슨 일이 있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결국 허보는 서러운 마음에 모든 걸 말해버렸다. 태유라는 녀석 때문에 학교생활이 꼬여버렸고, 이제는 모두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며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허보의 엄마는 화가 났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고나 너를 때린 거야? 집안 어르신이 전두환 대통령을 모시던 하나회 출신인데, 그딴 놈이 감히 우리 아들을 때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네?”
일부 못된 녀석들은 호보가 달리기가 느리단 걸 알고 뒤통수를 때리고 도망치거나, 허보가 아끼던 물건을 가져가 버렸다. 억울했다. 이제는 더 이상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런 취급 받고는 살 수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분노로 가득 찬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태유였다. 허보는 자신에게 또 화를 내는 줄 알고 긴장했다. 그러나 태유는 허보를 괴롭히던 녀석들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야이 시펄, 느그들 어째 그럴 수가 있냐? 그렇게 비겁한 새끼냐? 당장 안와? 시펄 안 오냐고?”
태유의 눈빛이 변하자, 녀석들이 냉큼 달려왔다. 당장 허보에게 사과하라고 쏘아대자, 녀석들은 미안하다고 했다. 태유는 그런 비겁한 것 못 본다며 한번만 더 허보를 우습게보면 가만 안 둔다고 당부를 했다. 허보는 태유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눈 녹듯 녹았다. 이상하게 태유가 그날따라 크게 보였다. 태유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만큼은 허보를 놀려댔다. 둘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무지막지하게 빠르게 흘렀다. 어느 덧 2018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했다. 서른세 살이 된 허보는 엄마와 통화를 하고 있다.
“20년간 전국곳곳을 돌며 도를 닦은 용한 보살님이 내일 우리 절에 온단다. 내일 너 운세 좀 보러가자.”
워낙 사주 보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용하다는 보살이라기에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서둘러 엄마를 모시고 약속 시간에 맞추어 보살님을 만나러 갔다. 보살은 허재의 사주와 손금, 관상을 차례대로 보더니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 허보씨... 자네는 원래라면 고향에서 정치를 할 팔자요. 전형적인 대장이 될 운명인데, 어쩌다 기가 막히고, 팔자에 마가 끼었을까? 이는 필시 자네가 천적을 만났다나는 거요. 하필이면 저팔계가 손오공을 만난 팔자라오. 저팔계가 손오공만 만나지 않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존재이지만, 손오공을 만나는 순간 밥이 되거든... 쯧쯧...”
천적 2부에서 계속
출처 | 문화류씨가 쓴 모든 이야기가 개정되었습니다. 맞춤법, 문장, 내용 등 개선 시켰습니다. 본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s://britg.kr/novel-group/novel-posts/?novel_post_id=463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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