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학생운동 리더와 전경 소대장의 운명적 만남
깔끔한 양복 차림의 이정훈이 버스를 타고 종각역을 지나 종로3가, 5가 그리고 동대문 신설동을 거쳐 지나가고 있다. 창밖으로 건물 간판 등을 보고 있는 이정훈이 청량리 성 바로오 병원 앞에서 내린다.
서울 시내에서 사람들 왕래가 많고 붐비는 곳을 꼽으라면 여기 청량리 로터리가 빠지지 않는다. 지하철역뿐만 아니라 기차역도 있어 오고가는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힐 정도다. 가두시위 지역으로 천혜의 조건이지만 경찰도 그걸 알기 때문에 청량리 로터리에는 아예 전투경찰 버스와 페퍼포그 차량이 상주해 있다. 거기다가 이 근처에는 외대, 경희대, 시립대 등이 있어, 학교 근처에 대기 중인 전투경찰 병력이 청량리 로터리에서 시위 발생 무전을 받으면 10분 내로 달려올 수 있다.
이정훈이 기차역인 청량리역 안에서 거리 상황을 살핀다. 청량리역 광장 쪽에는 2인 1조 사복 체포조가 5분 간격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만큼 시위 발생에 즉시 대처하겠다는 의도다. 청량리역에서 학생들이 모여 있다가 큰 도로까지 나오기에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아무래도 청량리역보다는 맘모스 백화점이 모이기가 쉽다고 이정훈이 판단한다. 그런데 막상 맘모스 백화점 쪽에서 보니 백화점 건물을 중심으로 사방에 전투경찰들이 뻗치기 근무를 하고 있다. 시위 학생들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와 숨어있는 걸 원천봉쇄하겠다는 뜻이다.
이번엔 이정훈이 맘모스 백화점 길 건너편 오스카 극장으로 걸어가는데 거기는 아예 사복 체포조들만 태운 봉고차가 진을 치고 있다. 극장 안에 시위대가 숨어 있다가 뛰어나오는 전술을 경찰들도 워낙 많이 겪다 보니 극장 쪽을 시위 우범지대로 판단한 것이다. 사복 체포조 봉고차가 있는 것만으로도 다가갈 엄두가 안 난다.
‘이거 생각보다 택 짜기가 쉽지 않은데…….’
사람도 많고 주위 골목길도 복잡해서 시위를 벌이기 좋은 지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정훈이 현장에 와보니 그렇지가 않다.
‘혹시 내가 시위장소를 너무 큰 도로만 생각해서 그런건가?’
이정훈이 자문자답하면서 청량리 로터리에서 시립대, 외대 방향 쪽으로 몸을 돌린다. 거기에는 진주 상가 낡은 건물이 있다. 진주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본다. 철학원, 한의원, 옷가게 등 가게들이 수없이 덕지덕지 있다. 퇴로는 외대, 시립대 방향 위생병원 쪽으로 잡으면 된다. 단, 진주 상가 뒤쪽으로 도망치면 거기엔 청량리 경찰서가 있다.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꼴이다. 이정훈이 검문하는 사복 체포조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종이에 시위 지역 약도도 그리지 않는다. 머릿속에 다 그려서 담는다.
‘너무 큰 그림을 그리지 말자, 작게 가보자. 꼭 큰 로도가 있는 로터리를 향해 전진하는 시위가 최선은 아닐 거야, 이번엔 청량리 로터리로 치고 나가지 말고 진주 상가 앞에서 스크럼을 짜고 로터리에 있는 전투경찰들이 몰려올 때 치고 빠지자. 어차피 시위가 길어져 외대, 시립대 쪽에서 전경 버스가 몰려오면 양방향으로 퇴로가 막혀 끝장난다.
이정훈이 진주 상가 앞에서 시위 전술을 궁리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른다.
“정훈아!”
이정훈이 걸음을 멈춘다. 누구지? 호흡을 가다듬고 돌아서는데 사복 체포조 한 명이 자기 이름을 부른 것이다. 사복 체포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이정훈이 일순 긴장한다. 어떻게 백골단이 내 이름을 알지, 혹시……. 여차하면 이정훈이 도망칠 자세를 취한다.
“정훈이 맞네. 나야. 용수!”
사복 체포조가 이정훈에게 다가와 손을 잡는다.
“오오~ 용수, 김용수구나?”
이정훈이 사복 체포조가 고등학교 동창 김용수이자,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반가움을 동시에 표한다. 김용수가 이정훈의 위아래를 훑어보고 말한다.
“우와, 우리 정훈이 멋쟁인데”
김용수가 사복체조 2인 1조로 돌아다니는 동료에게 이정훈을 소개한다.
“야! 인사해라, 내 고향 친구, 고등학교 동창 이정훈이야 서울대학교 법학과 다녀.”
동료 백골단이 이정훈에게 공손히 손을 내밀자 이정훈이 악수를 한다.
“용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여수에서 천재 소리 듣던 의리 있는 친구라고…….”
“아. 무슨 그런 말씀을…….”
김용수가 사복 체포조들한테 자기 친구 이정훈 자랑을 평소에 많이 한 모양이다.
“아직 판사는 안 된 거야?”
“아직 공부 중이야.”
“우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이네. 정훈아,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잠깐만.”
김용수가 무전기를 켠다.
“야! 소대장 바꿔.”
김용수가 말한 소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온다.
- 뭐야? 무슨 일이야?
“소대장님, 어릴 때 우리들 친구를 발견해서 지금 체포했습니다.”
- 너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친구를 체포했다니? 누구를?
“정훈이입니다.”
김용수의 말에 상대방 무전기가 잠시 말을 멈춘다. 소대장의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 정훈이면 이정훈?
- *** -
이정훈, 김용수 그리고 전경 소대장 최성식 등 고등학교 동기 3명이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빵집, 파리 제과점에 앉아있다. 창밖으로는 사복 체포조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김용수가 슈크림 빵, 곰보빵 등을 잔뜩 들고 온다. 최성식이 이정훈에게 다정히 묻는다.
“사시 공부 힘들지?”
“뭐, 공부가 다 그렇지 뭐.”
“정훈이는 워낙 공부를 잘해서 사시뿐만 아니라 행시, 외시까지 3관왕을 할 거야.”
김용수가 테이블 위에 빵을 내려놓으며 자기가 먼저 한입 크게 베물고 둘의 대화에 참여한다.
“정훈이가 빨리 판사 돼야 우리도 도움받고 좋을 텐데.”
김용수의 계속되는 얘기에 이정훈이 대답없이 곰보빵을 맛있게 먹는다.
“여긴 웬일로 왔어?”
예상했던 최성식 질문에 이정훈이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
“제기동 경동시장 쪽에 과 선배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고 해서 거기 들렀다가 운동도 할 겸 여기까지 걸어온 거야.”
“아~ 경동시장 약재 골목 입구에 있는 변호사 사무소?”
지형지물을 잘 파악하는 전경 소대장답게 최성식이 그쪽 지역을 얘기한다.
“그래 그 건물 3층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
이정훈이 진짜로 거기를 들렀다 온 것처럼 최성식에게 말한다. 이정훈이 종로를 거쳐 동대문 신설동을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경동시장 근처의 변호사 사무실을 기억해낸 것이다.
“너희는 할 만하냐?”
이정훈의 물음에 김용수가 대답한다.
“나야 뺑이 치는 백골단 사복 체포조고, 우리 소대장 성식이는 경찰청장까지 바라보는 경찰대 출신이라 나랑은 달라.”
“그러면 소속이 여기 청량리 경찰서야?”
이정훈의 질문에 이번엔 최성식이 대답한다.
“아니야, 우린 서대문서 소속인데 요즘 데모가 너무 많아서 지원 나온 거야, 여기 청량리가 근처에 대학이 3개나 있고 기차역에 시장에 588도 있잖아.”
* 588은 청량리 근처에 있는 사창가를 말하는 은어
“우린 시도 때도 없이 여기서 부르면 달려가고 저기서 부르면 달려가는 뺑뺑이야,”
김용수도 한마디 거두는데 최성식이 이정훈에게 엉뚱한 얘기를 꺼낸다.
“정훈아,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우리 고등학교 1학년 때 경찰서 잡혀간 거 기억하지?”
이정훈은 최성식이 자기 한테 ‘너 대학에서 데모하니?’ 이런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꺼내자 이정훈이 나직이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지.”
최성식이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불을 붙여 피워 문다. 그리고 담배 연기를 속 깊이 빨아들이고 길게 내뱉는다.
* ‘대머리’ 단어는 1980년대 파쇼정권의 전두환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