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가두시위를 준비하다
1980년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탄압만으로는 파쇼 지배체제를 강화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1982년에 프로야구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1984년에는 ‘학원 자율화 정책’으로 대학 교내에 상주하던 사복형사들이 사라졌다. 이에 학생들은 학생 자치기구인 ‘총학생회’를 부활시키고 반정부 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간다.
대학생들이 1985년에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하면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는 슬로건으로 광주학살의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1986년에는 김대중,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야당이 직선제 개헌 천만 명 서명운동을 벌인다. 이에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86년 5월 3일 인천에서 직선제 개헌을 뛰어넘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위를 거리에서 벌인다.
이에 놀란 전두환 정권은 지금까지의 유화정책을 포기한다. 학생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언론은 학생운동 세력을 폭력집단으로 매도하며 학생운동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다.
1986년 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 개최 결사반대’를 외치는 단순 시위 가담자도 전원 구속하겠다는 정부의 강경방침이 발표된다. 그 뿐만 아니라 차기 대통령 선거를 일 년 앞두고 전두환은 대통령을 직접 국민의 손으로 뽑는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다. 이에 학생들의 선도적인 투쟁이 시작된다.
4학년이 된 이정훈은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이정훈의 서클 동료 최지혜, 박창식도 핵심멤버가 되었다.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건물에는 누런 광목에 붉은 스프레이로 쓰여진 <광주항쟁 계승하여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학생회관 건물 쪽으로 걸어가는 이정훈, 박창식, 최지혜 그리고 서클 후배인 3학년 김영철의 모습이 보인다.
“이번 학기 등록했어?”
이정훈이 박창식에게 묻는다.
“아니 안 했어.”
박창식은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말한다. 이정훈이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농담어린 말투로 묻는다.
“의대는 학과공부가 너무 벅차서 본과생 중에 운동하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야.”
“칭찬 고맙습니다.”
“그런 거 보면 지혜 누나는 대단해요. 운동하면서 성적 장학금까지 받고요.”
후배인 3학년 김영철이 싱글벙글 웃으며 대화에 끼어든다. 김영철은 최지혜와 같은 영문학 전공이다. 충청도 깡촌에서 올라온 김영철은 말투도 조용하다. 아버지가 중학교 때 돌아가시고 홀어머니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지혜가 장학금 받는 덕에 우리 조직이 운영되잖아.”
이정훈 얘기에 김영철이 ‘맞다’고 엄지손가락과 검지를 튕긴다. 최지혜는 그냥 미소만 짓고 있다.
“영철아, 후배들 다 연락했지?”
“네에!”
씩씩하게 대답하는 김영철을 이정훈이 믿음직스럽게 쳐다보며 모두가 학생회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학생회관 4층에 위치한 ‘사회문화연구회’ 서클룸이다. 서클룸 책상 한 쪽에 학생들이 촘촘히 동그랗게 모여 있다. 중간에 앉은 이정훈은 하얀색 종이 위에 능숙하게 광화문 사거리 일대 약도를 플러스펜으로 그리고 있다. 거의 화가 수준으로 쓱쓱 거침없이 그리는 약도에 서클 후배들의 감탄이 절로 나온다.
“정훈이 형은 굶어죽지는 않을 거예요. 나중에 극장 간판이라도 그리면 먹고는 살거예요.”
“벌써 직업을 구하고 나만 신나네.”
이정훈이 감사의 농담을 하고 후배들에게 나지막하게 말한다.
“여기 광화문 사거리 이쪽에 보면 덕수 제과라고 있어…….”
‘덕수 제과’ 글자 위에 이정훈이 별표를 친다.
“여기서 *동이 뜬다. *동 뜨는 시간은 사백삼십. 다들 잘 기억해.”
이정훈의 강조에 후배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 동이 뜬다 : 주동이 시위를 주도한다.
* 동 뜨는 시간 : 주동이 시위를 시작하는 시간
이정훈의 가두시위 장소 설명이 끝나자 남학생들은 ‘가리방’이라 불리는 등사기로 반정부 유인물을 밀기 시작한다. 검은 잉크가 옷에 묻을까봐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손에는 빨간 고무장갑까지 끼고 있다. 남학생이 힘차게 롤러로 등사기를 밀면 갱지에 유인물이 찍혀 나온다. 그러면 바로 옆에 있던 여학생이 한 장 한 장씩 빼낸다. 또 다른 여학생들이 반정부 유인물을 비어있는 케이크 상자 안에 넣는다. 마치 생일 케이크인 듯 위장하는 것이다. 케이크 상자 위에 꽃모양 리본까지 테이프로 붙여놓는다. 누가 봐도 생일 케이크이다.
남학생들이 톱으로 절단한 각목을 여학생들이 선물 포장지로 감싸고 있다. 전투경찰의 검문검색을 피하려면 철저하게 위장해야 한다.
서클룸 바닥에 학생들이 앉아 빈 소주병에 깔때기를 대고 휘발유 시너를 부어넣는다. 반쯤 채워진 소주병 구멍을 신문지로 꽉 틀어막고 그 사이로 가는 철사를 뽑아낸다. 이 철사에 솜뭉치를 돌돌 만다.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당부를 한다.
“*꽃병에 신문지 꽉 조여야 한다. 안 그러면 휘발유 다 증발되서 현장에 가면 빈 병 된다.”
* 꽃병 : 화염병의 은어
여학생들이 마지막으로 그 솜뭉치에 비닐 랩을 씌운다. 휘발유 시너가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과 냄새나는 것을 동시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마침내 화염병이 완성된다. 완성된 화염병은 선물가게에서 쇼핑백 안에 차곡차곡 채워진다. 병 사이사이에는 신문지를 끼워 넣어서 병이 깨지는 것을 막는다. 유인물, 각목, 화염병을 운반하는 여학생들은 치마에 구두까지 신고 화장까지 나름 진하게 했지만, 왠지 어색해 보인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학생들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 사거리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이 일대는 회사가 많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다. 광화문 사거리 국제 극장 앞에는 전투경찰 버스와 최루가스를 분사하는 검은색의 페퍼포그 차량이 항시 주차해 있다. 사거리 근처 버스 정류장에는 전투경찰들이 배치되어있다. 은색 헬밋을 쓰고 청재킷을 상하로 착용한 사복 체포조들이 2인 1조로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학생들이 골목 안에서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보고 있다. 사백 삼십, 4시 30분이 되기를 기다린다. 화염병, 각목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들고 있는 여학생들이 남학생 옆에 애인처럼 서 있다. 이제 시위 주동자가 나타나면 남학생들은 쇼핑백에서 각목과 화염병을 꺼내들고 뛰쳐 나간다.
덕수 제과 안에서 사람들이 빵과 우유를 먹고 있다. 그들 중에 한 명, 오늘 시위를 주동할 학생이 의자에 앉아 있다. 제과점 벽에 부착되어 있는 시계 바늘이 4시 30분에서 1분 정도 모자란다. 곧바로 광화문 사거리 대로변 시계 가게에 진열되어있는 탁상시계 바늘이 4시 30분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위 주동자가 가방에서 메가폰을 꺼내 덕수제과 밖으로 나간다. 시위주동자가 메가폰에 부착되어있는 사이렌 소리를 울린다.
“광주항쟁 계승하여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
시위 주동자가 메가폰으로 구호를 힘차게 외치자 육교 위에 서 있던 학생들이 반정부 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가로로 펼쳐 든다. 곧이어 골목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학생들이 쇼핑백에서 화염병과 각목을 꺼내 들고 차도로 뛰어든다.
“자! 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운동가요 ‘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며 학생들이 도로 위에서 스크럼을 짜기 시작한다. 여학생들이 시위를 구경하는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준다. 각목과 화염병으로 무장한 남학생들이 시위대를 보호하기 위해 학생들 스크럼 앞뒤에 서 있다.
광화문 사거리 국제극장 앞에 주차해있던 전투경찰 버스에서 전투경찰들이 다급히 내린다. 페퍼포그 차량이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시위대가 긴장하기 시작한다. 시위대를 보호하는 CC 전투소조(Combat Cell)라 불리는 학생들이 일회용 라이터를 켜서 화염병에 불을 붙인다. 사복 체포조들이 시위대를 향해 뛰어오자, 전투소조 학생들이 화염병을 그들을 향해 던진다. 아스팔트 위에 화염병이 깨지며 불꽃이 일자 사복 체포조들이 주춤거린다. 곧바로 전투경찰들이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발사한다. 최루가스가 도로에 자욱하게 퍼지자 그때를 이용해 방독면을 착용한 사복 체포조들이 뛰어 들어온다.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 시위를 주동한 학생은 도망가지 않고 서 있다. 오늘 시위를 주도하면서 대학 생활을 정리하는 것이다. 시위 주동자의 다리를 사복 체포조가 걷어차서 아스팔트 바닥에 쓰러뜨린다. 그리고 시위 주동자의 팔을 뒤로 꺾고 사복 체포조 두명이 그를 연행해 간다.
* ‘대머리’ 단어는 1980년대 파쇼정권의 전두환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