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내 가방 안에서 포르노 비디오 테잎이 나오길 기대했던 전경이 사장의 배낭 가방은 열어보자는 말도 안했다. 이상했지만 내가 무사 통과하는게 급선무였다. 박사과정 실험에 필요한 전자제품을 사러 세운상가에 왔다는 나의 위장된 진술에 형사가 격려의 말까지 해줬다.
“이래서 세운상가에서 로켓트도 쏘아올릴 수 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깐”
전경이 나를 예비 과학자로 착각하고 잘 가라는 손 경례까지 해줬다. 안도의 한숨을 천천히 내쉬는데 아차! 사장은 내가 공고 졸업생으로 아는데 아인슈타인 논문에 박사과정이라고 했으니.... 내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장의 눈치를 살피는데 사장은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묻는 듯 말을 했다.
이제 사라질 일만 남았어
사라지자는 말을 도망치는 걸로 이해한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장은 월드뮤직 공장에서 했던 말을 다시 되새겼다.
CD음반이 나타나면 레코드판이 사라지고 그러다가 CD도 뭔가에 밀려서 사라지겠지?
촌각을 다투는 이 상황에서 사장은 뚱딴지같은 소리를 했다. 빨리 피하자는 나의 말이 사장의 다음 얘기에 가로막혔다.
그러나 레코드판이 사라진다고 그걸 들었던 그 때 추억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음악의 진실 보존 때문이지, 어때 내 말이?
네, 맞습니다. 사장님 빨리 가시죠
내가 사장을 재촉했다.
2층 공중보도인 구름다리 쪽으로 빠져나왔다. 거기에는 1층으로 내려가는 외벽계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미행을 따돌리려고 세운상가로 올 때도 이 계단을 이용했고 지금도 이 계단의 도움을 받는 셈이었다.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rn 노래 제목처럼 이 계단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미행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의 끈이 팽팽히 내 목을 조여오는 기분 나쁜 공기의 흐름이었다.
바로 한 달 전, 지하철에서 부터 나를 유령처럼 따라온 그 미행자가 다시 쫓아온 것이다. 등 뒤로 식은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계단을 한발 디디기 직전, 내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장이 서 있었다. 어어? 여기까지 함께 걸어온 사장을 왜 미행자로 착각한 걸까?
지금 한시가 급한데 사장이 느긋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을 했다.
지하철역부터 자네를 따라서 여기에 왔는데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거 같네
지하철역에서 나를 따라 오다니 무슨 소리야? 사장의 기습적인 발언에 내 머리 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지하철역, 따라온 사람이 사장이면...... 나는 움찔했다. 내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 동안 우리가 꿈에서 종종 만나다가 오늘 하루는 직접 만나 짜장면도 같이 먹고 참으로 줄거웠어
내가 꿈에서 만난 사람이라면 ........ 내 몸에 소름이 끼쳤다.
사장은 나와 달리 차분히 다음 얘기를 유언처럼 꺼냈다.
한 시대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게 우리가 할 일 아닐까? 그게 레코드판이든 뭐든 간에 말이야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코드판이 환각처럼 내 눈앞에서 속도를 최대로 높였다. 현기증이 났다. 검문 전경들이 왜 사장을 그냥 지나쳤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들 눈에는 사장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는 사장을 향해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 누구세요?
그러자 사장이 뒤돌아서 혀를 살짝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나? 아인슈타인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사장은 건물 구석, 변압기 쪽으로 유령처럼 흘러서 갔다. 내가 가까스로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변압기 뒤로 모습을 감춘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 난간으로 막혀있어 갈 곳이 없는데 ...... 어디 갔지? 내가 사방을 둘러보는데 한 달 전, ‘팝송상식 겸비자 우대’ 사원모집 공고가 붙어있던 곳에 내 수배 전단이 붙어있었다. 수배전단이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부착되어 있어야 하는데..... 정신이 혼미해지고 구역질까지 났다. 여기서 꽤 먼 거리의 남산 타워 야간 조명 불빛이 내 눈을 강렬하게 비쳤다. 그 불빛에 눈이 멀 지경이었다. 여기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떼는데 진공상태 우주공간을 붕붕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
“미스터 킴! 사무실 비워놓고 어디 갔었어?”
박씨 아저씨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세운상가 나열 702호 월드뮤직 공장 문 앞에 박씨 아저씨가 서 있었다. 얼이 빠져 있는 나를 박씨 아저씨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봤다. 멍한 시간이 꽤 지나고 내가 울듯이 물어봤다.
“아저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늦다니 밥만 먹고 바로 왔는데”
“사장님이랑 제가 제작까지 했는데요”
“뭔 소리야? 밥먹으러가 가다가 사장님 만났는데 원판에 기스가 심해서 오늘 작업 못한다고 했는데”
“예에? 여기 레인보우 판 다 찍었는데요?!”
사장과 내가 사무실 바닥에 수북이 쌓아놨던 레인보우 빽판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라진 빽판들을 찾으려고 내가 복도로 뛰어 나갔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 쪽 복도 끝에 서 있던 산타클로스 인형도 안 보였다. 내가 찾는 걸 포기하고 뒤돌아서는데 사무실 문 바로 옆에 놓여있는 짜장면 빈 그릇이 보였다. 사장과 함께 먹고 내가 내놓았던 두 개의 빈 그릇이었다.
<에필로그>
1982년에 CD음반이 발매되면서 레코드판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2004년에 제작이 중단됐다. 하지만 추억을 그리워하는 매니아들에 의해 레코드판은 최근 소량 기념음반으로 재발매되고 있다.
1917년 레닌이 혁명으로 세운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1991년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레닌을 그리워하는 옛 소련 공산당원들이 5월 1일, 메이데이, 노동절 기념식에서 레닌 사진을 들고 간혹 시위를 하고 있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