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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식이를 언 땅에 묻은 날부터 동네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을에서 흉측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장은 온 동네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경찰에서 연락이 왔슈.
날이 추워서 먹을 것이 떨어진 들짐승들이 아주 기승인거 알쥬?
그러니까 말이여... 얘고 어른이고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어유, 잉?
웬만하면 날도 춥고, 눈도 오고... 위험한데 말이여 방 안에 있으면 좋찮여?
잘 들었으면 다들 어혀 집에 가서 문 단속 잘 하시고...”
그 상황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은 ‘들짐승 탓이다’, ‘설녀 때문이다’ 소란스러웠지만
둘 다 위험천만한 것은 매한가지라 모두들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가끔 저 멀리서 짐승의 울음소리라도 들리면 어른들은 낫을 손에 들었고
아이들은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런 육시랄, 영규야... 어혀 이불 속으로 들어가.
들짐승 새끼들이 어지간하게 울어대는구나.”
유일한 혈육인 아들과 단 둘이 사는 영규네 아버지도 예민해졌다.
안 그래도 친구를 잃은 상심이 큰 어린 아들에게
창식이 어머니와 마을사람들이 쉴 새 없이 따져들었던 터라
마음이 싱숭생숭했는데, 거기에 들짐승의 울음소리가
점점 집 가까이에서 들리자 불안감이 커졌다.
영규 아버지는 창호지문을 살짝 열어, 머리만 바끔 내밀었다.
대문 앞에 들짐승의 무리로 추정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순간 동공이 커지고 손에서 땀이 났지만 여차하면 뛰어나가 그것들을
낫으로 벨 심정으로 대문 쪽을 응시했다.
짐승의 발로 대문을 긁는 소리가 ‘타닥타다닥’하고 나다가,
이윽고 여우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영규 아버지는 그것이 마치 동료들을 부르는 신호처럼 들려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야이 못된 놈의 여우새끼들아!!!”
한 손에는 낫을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아궁이 속 커다란 장작하나를 빼어 들고
대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일단 철문을 한번 박차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아래쪽 문틈으로 낫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시뻘겋게 타오르는 장작을 넣어 겁을 줬다.
여우들은 그제야 겁을 먹고 ‘깨갱’소리를 내며 어디론가 도망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이웃에게까지 들렸는지,
근처 집집마다 허공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댔다.
“잉, 아무것도 아니여...
여우새끼들이 대문 앞에서 설쳐대서 거 좀 주고 내쫓은 것이여!!!”
영규 아버지의 목소리가 조용하던 마을에 울려 퍼졌다.
여우를 쫓아냈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어깨에 힘을 잔득 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봤지? 남자답게 여우새끼들 내쫓는 거 말이여, 허허...”
영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뚱한 표정으로 화로 속에 타들어가는 환한 숯불만 바라 볼 뿐이었다.
“왜 그러는 겨, 아들...
아직도 창식이 엄니랑 마을 여편네들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겨?
네 이놈의 여편네들을 그냥...”
창식이 어머니는 경찰의 의견과 달리,
영규가 본 여자가 분명 창식의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설녀인지, 그저 지나가는 행인인지 알 수 없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규에게 기억해보라고 재촉했다.
아들을 잃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 밖에 없는 어린 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영규 아버지는 안쓰러웠다.
“그러니까 영규야, 아줌마가 미안한데...
그날 창식이랑 만났을 때 말이야,
창식이 뒤에 어떤 여자도 걸어왔다고 했잖여?
그 여자... 정말 누구인지 모르는 겨?
잘 좀 생각혀봐... 아줌마가 이렇게 부탁할게.”
한 동안 영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눈물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아줌니, 정말 그 여자가 창식이 뒤로 걸어가는 것만 봤어유...
그게 누구인지 참말로 몰르겠어유, 이럴 줄 알았으면 창식이랑 만난 날...
창식이를 우리집으로 부를 걸 그랬어유.
정말 죄송해유, 제 자신이 너무 회회가 되유...”
창식이 엄마는 그런 영규를 부둥켜안고 말없이 울었다.
이후, 더 이상 영규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 없는 여편네들은
그 여자가 ‘설녀’인지 묻기 위해 문 밖에서 영규를 불러댔다.
마치 그 모습이 어린 아이를 잡아가려는 손각시처럼 보였다.
그럴 때 마다 영규 아버지는 화를 ‘버럭’하고 내며 돌아가라고 했다.
영규는 문틈 새로 자신을 찾아 온 마을 사람들을 보고
방구석에 홀로 앉아 경기(驚氣)를 일으키듯 떨어댔다.
“아니, 진짜 이상한 것 아니여?
추운 겨울에 이런 촌에 외부사람이 미쳤다고...
그것도 아침댓바람부터 여자 혼자 그 길을 왜 걸어가?
그길로 가면 방앗간 창식이네 집 밖에 더 나오남?
필시 이것은 설녀의 저주라니깐?
내가 어릴 적에 무당이 굿하다가 죽은 것을 똑똑히 봤잖여?
종대네도 설녀의 저주라고 생각하지?
엄맘마마...? 저기 영규네 아버지가 빗자루 들고 나온다, 어서 가자..”
영규 아버지는 괜히 본 것을 경찰에게 이야기 하라고 해서
아들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닌지, 후회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날의 영규는 참 이상했다.
뒷간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종일 홀린 것처럼 고개를 갸우뚱 댔다.
그리고 창식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새파랗게 질려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이 하얗던 여자가 창식이 뒤에서 걸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영규 아버지는 영규가 유일한 목격자라고 생각되어 경찰에 데려 간 것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논란만 일으켰다.
이를 두고 설녀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밤낮으로 찾아왔다.
다음 날 아침, 문 밖에서 누군가가 영규를 불렀다.
영규 아버지가 깜짝 놀라서 밖을 나가보니, 영규의 친구들이었다.
계집아이 주제에 골목대장처럼 희경이가 앞장서서 영규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영규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과 달리,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영규야, 괜찮은 겨? 상구네 집에서 같이 콩 구워먹자.
여기 상구랑, 종대, 명우도 왔어.”
방에 있던 영규도 친구들이 반가웠는지 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반가움에 한 걸음에 달려 나왔지만 차마 같이 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다음에 꼭 같이 놀자, 지금은 쉬고 싶어...”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희경과 친구들은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동네 사람들이 하도 영규한테 이것저것 물어 대서 얘가 몸살이 난 거래.
요즘 세상에 말이여, 설녀가 어디 있다고 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냐?
경찰도 들짐승이 창식이를 그렇게 만든 거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영택이 형이 제일 먼저 발견했잖여, 이것만큼 명백한 증거가 어디 있는 겨?”
‘설녀’라고 믿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며 콧방귀를 끼며 명우가 말했다.
하지만 희경은 왠지 자신을 비롯한 할머니를 비웃는 것 같아서
명우의 주장에 반박했다.
“아니여, 어쩌면 진짜 사람들 말대로 설녀가 그랬을 수도 있어.
니네들 창식이가 죽기 전에 우리한테 준 호루라기 기억 안 나는 겨?
들짐승을 만났다면 창식이가 그걸 안 불 리가 없어.”
명우는 기가 찬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바보야, 그걸 어떻게 확신 하냐?”
희경은 지난밤에 자신이 혼자 생각했던 것을 주절주절 늘어놨다.
“멍청아, 들짐승이 뒤에서 덮쳤으면 이빨 자국이라든지,
상처가 뒤에도 있어야 할 것 아니여? 배 말고는 아무런 상처도 없잖여?
만약 들짐승을 만났더라면 고것들이 뒤에서 덮치지는 않았다는 뜻인데...
다시 말해서 들짐승을 정면에서 만났다면, 창식이는 호루라기를 불었을 것이여.
그리고 창식이를 모르냐? 몇날며칠을 호루라기 타령하던 얘잖여..”
명우는 거들먹거리며 그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창식이가 호루라기를 못 불수도 있는 것이었고,
불었더라도 마을 사람들이 못 들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눈이 심하게 내린 날이라면 소리가 방음되는 효과가 있었기에
명우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둘이서 여기서 이렇게 싸우고 있지 말고,
창식이가 발견 된 장소에서 호루라기를 불어보면 될 거 아니여?”
종대는 창식이가 걸었던 건너편 길을 가리켰다.
영규의 말대로 산부터 논까지 새하얗게 눈이 덮여서 만약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간다면 못 알아 볼 것이 분명했다.
아이들은 영규네 집 아래에 꽁꽁 얼어버린 개천을 건너서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밤나무가 심어진 평지를 지나 우축으로 꺾었더니,
넓게 펼쳐진 광활한 논이 나왔다. 상구가 오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아이들은 갑자기 너나 할 것 없이 침묵하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티격태격 싸우던 아이들의 얼굴이 어두운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이 부근이여, 차.. 창식이가 있던 곳이...”
눈으로 가득 쌓인 넓은 논 중앙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하얗게 물든 세상은 아름다울 줄 알았는데, 위압감이 덜컥 들었다.
쓸쓸하게 이곳에서 죽어간 창식이가 떠올랐다.
희경이 눈물을 흘리자, 종대, 명우, 상구도 전염 된 것 마냥 울어댔다.
“이렇게 차가운 곳에서 얼마나 무섭과 아팠을까...
창식이 이 자식아... 그날 아침에 왜 이렇게 빨리 간 겨...
우리 집에서 아침 먹고 나랑 같이 천천히 놀다가 집에 가도 되잖여...”
종대는 창식이 죽기 전에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냈던 것이 계속 떠올라 오열했다.
열한 살 아이들이 겪기에는 버거운 감정들이 오가는 사이,
하늘에서는 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또 눈이여, 정말 징그럽게 내린다...
빨리 확인해보고 우리 집에서 콩이나 구워 먹자.”
상구가 눈치를 주자, 희경은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목 아래에서 호루라기를 꺼냈다.
이내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있는 힘껏 입김을 불어넣었다.
‘삐익’하는 소리가 내리는 눈을 뚫고 마을 전체에 울렸다.
순간 동네 어른들은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여, 도대체 어디서 나는 것이여???”
희경은 쉬지 않고 호루라기를 계속 불었다. 절박하다는 심정으로 마구 불어댔다.
잠시 후 몇몇 어른들이 곡괭이며, 낫이며 잔뜩 들고 뛰어왔다.
“아가들아 무슨 일이여, 잉? 들짐승이라도 나타난 것이여?”
놀란 어른들의 물음에 세 사내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경은 어른들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호루라기만 주구장창 불어댔다.
그러다가 이윽고 다시 참아왔던 울음이 터졌다.
“분명히 창식이도 그날 이렇게 호루라기를 불었을 건데...
호루라기 소리가 이렇게 커서... 마을 사람들이 듣고 구해줬을 건데...
왜 죽은 거에유? 우리 창식이가 왜 죽은 거에유? 누가 창식이를 죽인 거에유?
진짜 들짐승 새끼들이 죽인 거 맞아유..? 이렇게 잘 들리는데 왜 안 분 것이여..”
희경은 절규를 했다. 그걸 보는 동네 어른들도 먹먹함에 고개를 돌렸다.
그저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는 아이들을 각자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것일 뿐이었다.
그날도 얄미운 눈은 눈치 없이 소덕말 위에서 한 없이 내려댔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날 밤, 소덕말에 끔찍한 일이 또 벌어질 줄이야...
설녀 : 백발의 살인귀 3부에서 계속
PS :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지난 한해, 여러분 덕분에 자신감을 얻어서 다시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응원과 격려 해주신 모든 분들 덕분에 다시 하고 싶었던 걸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요. 언젠가는 제가 은혜 갚을 수 있게...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지내주셔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문화류씨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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