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국가보안법, 뒤집어보기 북한의 입장에서 국가보안법 논쟁을 본다면 By Crete 「국가보안법」, 당연히 폐지되어야 하는데도 말이 많은 건 북한은 변한 게 없는데 왜 우리만 발가벗고 무장해제 해야 하느냐? 하는 논리가 크죠. 막말로 〈조선일보〉에서 선정적으로 뽑아내는 문구처럼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을 찬양하고 공산당 입당원서를 받아도 어쩌지 못하는데 반면에 북한에서는 반에 반만이라도 이런 자유가 주어지겠냐? 뭐 이런 논리가 아닐까하네요. 게다가 북한은 핵을 보유한 걸로 추정되고 보수 측에서는 언제고 거리낌 없이 북한이 그걸 남한에 사용할 수도 있다고 보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정말 북한은 남한 사회가 겪고 있는 이런 진통과는 동떨어진 채로 여전히 철권통치의 앞뒤로 꽉 막힌 변화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사회일까요? 남한에 바라는 건 돈 뿐이고 자신들은 개혁 개방을 할 생각은 전혀 없는 건가요?
남북한의 입장을 한 번 뒤집어 생각해 보기로 하죠.
일단 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가정을 해보죠. 조중동과 한나라당에서 떠드는 그런 선정적인, 「국가보안법」 폐기시 일어날지도 모를 사회혼란상 말고 좀 더 실질적이고 즉각적인 안보상의 위협을 가정해 보죠.
제 외가가 효자동에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한국에 살 때는 설날과 추석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 때면 청와대 앞길로 해서 큰 삼촌댁에 가고는 했죠. 「효자동 이발사」라는 영화 참 재미있게 보기도 했지만 옛날 생각도 많이 나게 만들더군요. 어렸을 때는 근처 인왕산에 놀러가기도 하고 어머니와 삼촌들이 다니시던 초등학교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가끔 어른들이 들려주시는 인왕산의 대공포 진지 얘기도 귀 기울여 듣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 KAL기 한 대가 길을 잘못 들어 서울시내로 진입했을 때 이 인왕산 대공포 진지에서 위협사격을 가해 명동에 유탄이 떨어져 시민들이 사망한 사건도 기억도 나네요.
첫 번째 가정입니다.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청와대를 감싸고 있는 이 인왕산 대공포 진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이북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적 항공기의 공격로 상에 존재하는 이 마지막 저지선 을 제거한다고 한다면 한나라당과 조중동을 포함한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이 가정을 북한에 한번 적용해 볼까요?
3년 전인 200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김진경 연변과학기술대 총장에게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을 부탁하며 평양시 락랑구역 승리동에 100만 제곱미터 (33만평) 규모의 대학부지를 기존에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대공포부대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 가면서 까지 내어주었습니다. 현재 건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서 내년 가을쯤이면 신입생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 승리동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평양지도를 보신다면 아시겠지만 북한 입장에서 한미연합공군의 평양으로의 주진입로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예전에 평양 방위 사령부 소속의 대공포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겠죠.
느낌이 잘 안오신다고요? 그럼 서울 서초구 은마아파트나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평양-남포 간 도로에서 400미터 떨어져 있으니 남쪽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진짜 관문중의 관문인 셈입니다.
두 번째 얘기입니다. 어려서부터 북한에 대한 별의 별 괴담이나 해괴망칙한 얘기들 말고도 북한군의 무시무시함을 들려주는 이야기 중 중부전선에 있는 김일성고지에 관한 것이 있습니다. 철의 삼각지대 북쪽에 북한군이 축성해 논 이 김일성고지는 워낙 견고해서 북측에서 남한군 개목걸이를 한 트럭 가져다주어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다는 제법 그럴듯한 얘기를 듣고는 했죠. 625 기간 중 전 전선에서 나름대로 격전이 심했지만 동부전선도 예외는 아니어서 금강산과 설악산 사이에서 제법 전사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얘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설악산 등반 이야기 좀 해보겠습니다. 대학원 때 처음으로 선배 한사람과 백담사, 봉정암, 희운각으로 해서 동해안으로 빠져나오는 코스로 등반을 했었습니다. 설악산 참 가파르데요. 전 공룡능선 쪽으로는 발도 들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설악산은 대청봉을 중심으로 해발 1300미터 급의 산봉우리들이 많이 있죠. 금강산은 한술 더 떠서 주봉인 비로봉을 비롯해 해발 1천5 백m 이상의 거봉이 10개에 이르며 1천m 이상 의 준봉은 무려 60여개나 됩니다. 군사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설악산이나 금강산은 방어를 하는 측에게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면
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군이 미리 중부 이탈리아에 구축한 구스타프 방어선 (로마에서 서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곳에 동쪽의 산그로 강입구에서 아브루찌 산악지형을 지나 서부 해안의 라피도/가릴리아노 강입구까지 이어져있음)을 돌파하는데 처절한 피해를 입고 엄청난 기간을 소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구스타프 방어선의 한 가운데 해발 519m의 ‘몬테 카시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금강산이나 설악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낮은 높이지만 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연합군은 카시노 전선에 인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등의 7개의 영연방군 사단, 브라질 부대, 5개의 미육군 사단, 5개의 영국본토 사단, 4개의 프랑스군 사단, 3개의 폴란드 사단을 투입해야만 했고 인명손실도 막대해서 미 제5군은 (안찌오 지역을 포함하여) 1월15일에서 6월4일까지 모두 107,144명을 잃었고 카시노 전선에서 영국 제13군단은 4,056명을, 폴란드 제2군단은 3,779명을 잃었습니다.
인명피해도 피해지만 장장 5개월 간 월등한 화력과 압도적인 항공우세 속에서 가까스로 거둔 이 돌파는 험악한 산악지형 속에서 잘 훈련되고 감투정신이 투철한 군대가 미리 잘 준비된 요새에서 방어에 임했을 때 이를 제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금강산의 경우 남한에 금강산 관광을 허용하기 전까지 금강산에 근무했던 북한군 출신의 많은 탈북자들은 금강산 관광 얘기가 나올 때마다 코웃음도 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생전에 북한이 금강산의 요새화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이고 세밀한 투자를 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정성들여 요새화한 금강산을 무장해제하고 남한 인민들에게 관광지로 공개한다는 게 그들의 상식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매년 수억 달러의 현찰 수입에 금강산은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금강산 일대에 대한 얘기를 하나만 더하죠. 지난 96년 9월 18일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변 암초에서 상어급 잠수함이 좌초된 것을 발견된 뒤 2개월여 동안 육지로 달아난 무장공비를 소탕하느라고 작전 지역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으며 3천7백억 원이 넘는 재산 피해가 있었습니다. 강릉일원에 전시사태가 선포되면서 2개 사단 병력이 집결해 칠성산 일대를 포위하고 저인망식 수색작전을 벌였고 밤낮으로 군.경 수색대와 공비 잔당들의 교전이 벌어졌고 하루가 멀다 하고 양측에서 희생자가 나왔죠.
강릉에 침투했던 무장공비는 모두 2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13명은 사살, 11명 시체로 발견, 1명 생포됐으나 1명 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측에선 군인 11명, 경찰 1명 ,예비군 1명, 민간인 4명이 사망했고 사건은 51일만에야 종결되었습니다. 동원된 군. 경, 예비군은 연인원 150만 명에 달했고요. 이들이 타고 온 잠수함은 북한군 동해함대 사령부가 있는 함경남도 낙원(퇴조)잠수함기지에서 발진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당시 북한 해군의 동해안 최남단 발진기지는 지금은 금강산 관광 유람선이 정박해 있는 강원도 고성군의 장전항이었습니다. 최근 북한은 장전항의 군사 시설을 더 북쪽으로 이전했다고 하더군요.
북한 해군 잠수함이 침투했던 지역은 남한의 핵심 군사시설이 밀집돼 있는 곳입니다. 이 지역의 직경 15km 이내에는 8개의 군사시설이 있습니다. 2개의 유도탄 부대, 한국군 동부 최전방 비행전투 기지, 2개의 공군 레이더 기지, 동해안 해상감시와 초계임무를 맡고 있는 강릉비행장, 동해를 지키는 1함대 사령부, 8군단 사령부가 밀집돼 있는 곳입니다.
북한의 군사시설 정보는 장전항과 금강산 요새 말고는 뾰족이 아는바가 없지마는 금강산 개방 전에는 남한군에 필적하는 시설이 금강산 주변의 북측 지역에 전진 배치되어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두 번째 가정입니다. 북한과의 화해와 매년 2-3억 달러정도의 외화수입을 위해 위에 언급한 강릉과 동해시 근처의 8개 군사시설을 좀 더 남쪽으로 이전하자고 한다면 남한에서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그리고 설악산에서 휴전선까지 일대의 군사시설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전한다면.
세 번째 얘깁니다. 통일부는 올해 4월23일자로 개성공단 100만평에 대한 최종 사업승인을 했습니다. ‘개성공단 사업’은 지난 6월 시범단지의 부지정비를 마무리하고 연내 일부 공장에서 생산을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진척됐습니다. 이미 북한은 2년 전인 지난 2002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개성공업지구법」을 통과시켜 이 법의 3조에도 나와 있듯이 “공업지구에는 남측 및 해외동포, 다른 나라의 법인, 개인, 경제조직들이 투자할 수 있다”고 명시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어떤 지역입니까? 남한으로 치자면 문산 파주 의정부 포천 수색 김포 정도 되는 셈이죠. 서부 전선에서 군생활을 보내신 분들이라면 위에 나열한 지명들이 주는 이미지가 뭘 의미하는지 잘 아실 겁니다. 실제로 남한군에 4개 밖에 없는 기계화 사단들이 배치된 지역이기도 하고요. 북한은 개성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저들의 기갑 사단들과 대전차 장애물들을 모두 북쪽으로 이동시키거나 제거해 2000만평 규모의 공단부지를 내 놓았습니다.
제 외가쪽 선산이 구파발에서 차로 한 15분 정도 서북쪽으로 가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질리도록 본 것이 대전차 장애물과 군 시설들입니다. 개중에는 좀 큰 바위로 만든 조잡한 것부터 콘크리트로 제대로 축성한 성곽과 같은 것도 있죠. 어르신들 말씀이 이건 5분, 저건 15분 지연용이라고들 하시는데…….
자 한번 봅시다. 우리나라 군부에서 아무리 북한과의 긴장이 완화된다고 한들 위에 언급한 북한군 전차부대 예상 진격로 상의 대전차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고 서울 북방의 기계화 사단들을 한강 이남으로 후진 배치한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쿠데타에 준하는 반발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자 신문들에 공중조기경보기 구입을 위해 이스라엘과 미국 기업과 본격적인 협상에 돌입했다고 보도가 나오더군요. 한 2조원 정도니 20억 달러에 조금 모자라는데. 물론 전 제 예전 글에도 언급했듯이 조기경보기 도입 건에는 대찬성입니다. 하지만 조기경보기를 아무리 많이 보유해 한반도 상공의 비행물체들을 손바닥 보듯이 한다고 한들 개성공단과 금강산 개방에서 보듯이 실질적으로 북한 지상군의 배치가 수십 킬로미터 후방으로 이동된 것에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제 제가 드릴 얘기는 대충 드린 것 같네요. 이미 북한은 남한이 「국가보안법」 폐기로 겪는 내부 갈등 이상의 갈등을 이미 겪었고 또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다고 봅니다. 김정일이 북한 군부를 얼마나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김일성 시절과는 다르리라봅니다. 북한의 권력실세들에게는 개혁과 개방 특히 남한에 대한 문호개방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도박이자 다른 한 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로 여기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유훈통치시절 북한은 완벽한 병영국가였죠.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군사상의 고려가 다른 모든 사업에 앞서 최우선이었다는 뜻입니다. 위에 제가 나열한 세 가지 예는 북한으로서는 남한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시 보수 세력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100배는 더 고통스러운 결단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결단의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이미 북한은 남한에게 도저히 잘못 해석될 수 없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한 셈입니다.
“우리가 개성공단이라는 넓은 지역을 내줬다. 군사분계선에 제일 가까이 있고, 군사적으로도 매우 민감한 지역이다. 인민군대가 거기 포진하고 있다가 다 나왔다. 그리고 그 땅을 공업지구로 선포했다.”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이 얼마 전 중국에서 국내 인사들을 만나 한 말이랍니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북한의 핵개발과 개방을 위한 몸부림은 남쪽의 국민들에게 좀 혼란스러운 이중적 의미로 해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의 핵 개발이 남한을 겨냥한 것이라면 북한당국이 결정한 위의 세 가지 사업은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 눈엔 북핵은 한미연합사 특히 미국 쪽에서 가해지는 위협에 대응한 사업이라고 보이네요.
이제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때입니다. 북한을 아직도 적화야욕에 넘친 붉은 늑대들의 집단으로 보셔도 전 할 말이 없네요. 하지만 그 늑대가 스스로 송곳니와 발톱을 모두 뽑아 놓고 우리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인식의 전환을 이뤄 한 단계 성숙된 남북관계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그 첫 번째 단추가 「국가보안법」 폐지가 되겠죠. 정작 북한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법이지만 독재자의 권력을 강고히 하기 위해 이용되었죠. 이제 3대에 걸친 문민정부에서 더 이상 남용이 없다 하더라도 그게 「국가보안법」 폐지를 가로막는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이미 북한은 뒤로 돌아서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거죠.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어 그들을 당겨줄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