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된 스탯과 팬들 마음 속의 '스탯'
1년 내내 팀의 경기를 직관하고 시청하는 팬들은 그 팀의 사정을 압니다. 응원팀 선발 투수의 특징을 알고, 불펜의 상황을 알고, 그날 그날 타자들의 컨디션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코칭 스태프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상대팀이 지금 상승세인지 아닌지, 상대팀 선발의 실력은 어느 정도이며 타선은 어떤지도 개략적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상대팀 투수가 작년의 클레이튼 커쇼나 올 해 양현종 같은 투수인데도, 경기 초중반에 '빠따'들이 2점을 뽑아주면, 상대팀 땜빵 5선발에게 2점 뽑을 때와 같은 2점이라할지라도 팬들에게 다가오는 무게는 다릅니다. 그리고 가튼 2타점 적시타를 친 선수에 대한 평가 또한 다릅니다.
불펜이 약한 팀이 경기에서 이겼는데, 게임 중반에 어떤 선수가 한 점 앞서 가는 1점 결승타를 치면, 그 기록은 '결승타 1회 추가'로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점수차를 확 벌리는 추가 3점 홈런을 친 선수가 팬들의 마음 속 스탯에서는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고, 그게 '결승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1~2점차 승부를 버티지 못하는 마무리 투수를 오랜 동안 계속 보아 온 팬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1. A 선수 그와 마찬가지로 동점 또는 1점 뒤진 9회에 첫 타자로 등장한 선수가 볼넷이라도 얻어서 악착같이 1루에 살아나가려고 하고 그 결과 진루해 준다면, 게임이 확 벌어진 상황에서의 1점 홈런보다 팬들의 기억 속에는 더 큰 가치로 남습니다. 비록 그 출루가 득점으로 연결되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그 상황에서 선두타자가 바깥쪽 높은 공에 초구 스윙 땅볼 아웃된다면 팬들의 아쉬움은 그 장면 바로 뒤에 그날 호수비를 하며 최선을 다한 어린 선수의 얼굴에 드러난 아쉬움과 마찬가지입니다. 저 땅볼 아웃이나 다른 상황에서의 땅볼 아웃이나 숫자 상의 스탯에서는 차이가 하나도 없습니다. 똑같은 원 아웃이고, 똑같은 비율로 선수의 타율과 출루율과 OPS가 내려갈 뿐입니다. 9회 초구 높은 공 스윙 땅볼 아웃을 당한 선수에 대해 팬들은 '아무 생각없는 플레이'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없는 플레이'는 스탯에는 반영이 되지 않습니다
2. B 선수 어떤 팀이 4 : 3 으로 진 게임에서, 중반 이닝에 포수가 공격 방해로 출루를 허용했다고 하면, 먼 훗날 스탯과 기록지만으로 경기를 보는 사람들은 그 수비방해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릅니다. 그 팀의 선발 투수가 한 때 리그 최고의 에이스 중 한 명이었다가 나이가 들어서 구속이 떨어졌고, 그래도 잘 던져볼려고 매 경기 아둥바둥하며 코너코너에 공을 꽂으면서, 주자가 나가면 매우 민감해지는 특징을 가진 투수이며, 그 공격방해 이전까지 퍼텍트로 쉬어갈 곳 없는 상대팀 타선들을 막고 있었다는 것을 스탯만 보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 공격방해 한 번은 점수가 많이 벌어진 상황에서 패기로 넘치는 젊은 파이어볼러 투수가 등판한 상황에서의 공격방해 한 번과 스탯으로는 똑같이 취급됩니다. 게다가 그렇게 출루한 주자는 발이 빠른 2번 타자고, 그 뒤에는 리그 최고로 꼽히는 상대편 클린업 트리오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수는 도루 시도에 어이없는 2루 송구까지 연이어 하고 맙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가사처럼, 그 이후 투수는 멘탈이 흔들린 듯 1점 적시타와 동점 홈런을 허용합니다. 스탯은 '스토리'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3. C 선수 그것과 마찬가지로 번트를 잘 댔는데, 상대팀 수비진이 잘 대처해서 아쉽게 아웃되는 것과, 승부처 주자 1, 2루 노아웃 상황에서 번트 대기도 힘든 높은 공에 연이어 2번 손을 댔다가 아웃되는 거랑 스탯에서는 똑 같습니다. 똑같이 타율 내려가고 출루율 내려가고 OPS 내려갑니다. 그런데 팬들의 '기억 속의 스탯'에서는 투런 홈런 맞은 투수보다도 더 크게 마이너스가 매겨집니다. 4. D 선수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주자 만루 상황에서 얼척없는 스윙으로 삼진 당하면서도, 주자가 없거나 경기의 흐름이 넘어간 상황에서 단타 하나 똑딱 쳐서 스탯을 관리하는 거포 타자입니다. 그런데 그 똑딱 안타와 주자 만루 2타점 적시타가 타율과 OPS에서는 가치가 똑 같습니다. 구분이 하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거포 선수가, 전 년도까지 최악의 암흑기를 거친 후 시즌 초반에 하루살이 야구로 처절하게 중상위권 싸움을 하고 있는 팀에 오랫만에 복귀했는데도, 승부처에 2루 주자로 있으면서 3루로 쪽으로 한발짝 더 가 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후속 타자의 번트시에 자동 진루를 해야하는 상황인데도굴러가는 공을 보고 나서야 뛰기 시작했으며, 베이스 근처에서 슬라이딩도 하지 않고 설렁설렁 조깅하듯 달려들어가서 타자가 더블 아웃 되는 것을 방관했다면 팀 분위기에 끼치는 폐해는 의외로 큽니다. 그런데 그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고 10년 뒤에 그 상황을 게임기록지로만 본다면, 그 더블 플레이는 번트를 댄 선수가 잘 못 했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 거포 선수의 스탯에서 타율이든 그 무엇이든 주요 스탯에서 내려갈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팀 분위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스탯에서 손해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위에 쓴 것을 보고 어떤 분들은 스탯이란 평균에 수렴할 것이니, 결정적 상황에 잘 못 하는 선수도 평균적인 스탯이 높으면 장래의 결정적인 상황에서 좋은 결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고 말할 겁니다. 저도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스탯의 평균 수렴화'나 적시타와 그냥 안타의 차이 같은 게 아닙니다.
'게임의 흐름을 고려한 플레이', '아무 생각없어 보이는 플레이', '절실해 보이는 플레이와 그렇지 않은 플레이' 같은 '팬들 마음 속 은행의 적립금' 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세이버메트릭스 같은 게 아무리 정교해지고 있다고 해도, 이런 것까지 반영한 스탯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팬들은 늘상 경기장에서 그리고 TV 화면으로 보면서 게임의 흐름과 팀의 상태 등을 고려해서 '마음 속의 스탯'에서 입출금을 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리그 최다 안타 부문 1위를 달리고, 전날 경기에서 4안타를 어 친 어떤 선수가 오늘 경기에서 무안타에 그치더라도 팬들의 '마음 속 스탯'과 감정계좌'가 파산하지 않는 것은, 그동안 잘 해 왔고 계속 잘 할거라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 순간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팀의 패배에 분해하는 그의 눈빛 때문이기도 합니다. 부상을 당한 뒤에 땅볼 아웃만 연이어 당하고 관련 별명까지 만들어지면서 조롱을 받던 선수를 팬들이 마음 속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던 것은 그의 '클래스'를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선수가 최소한 얼척없는 플레이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위의 A, B, C, D 선수 중 한 두 명 또는 전부에 대해 많은 팬들이 기대를 접은 것처럼, 코칭 스태프도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팀의 사정상 단 며칠이라도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삼진을 밥 먹듯이 당하고 그래서 숫자 스탯은 그렇게 이쁘지 않더라도, 이적 첫 날 3점 홈런을 치고 이후 단 몇 경기에서라도 승리를 부르는 결정타를 날려준 절박한 표정의 한 선수를 팬들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 선수에 대한 팬들의 마음 속 '스탯계좌와 감정계좌'의 적립금은 여전히 플러스입니다.
굳이 3점 홈런까지 칠 필요는 없습니다. 팀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볼넷을 얻고, 단타를 때려주고, 선행 주자를 진루시켜 주고 하면서 자기 개인 숫자 스탯보다는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플레이를 하면 됩니다. 그러면 팬들의 마음 속 스탯은 다시 쑥쑥 충전되어갈 겁니다.
그게 팬이고 팬의 마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