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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낯선 남자는 위험하다
1.
꽤 화창한 날이었다. 지루했던 전공 수업을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렇게 맑은 날에 집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너무 맑았기 때문에 햇빛을 피해 집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렸다. 햇볕은 가을 같지 않게 뜨거웠다. 바람은 찼다. 이 어울리지 않는 아이러니가 하루를 낯설게 했다.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기 시작했다. 오른편에는 아이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버려진 놀이터가 보였다. 언제부턴가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 아이들 또한 집에서 나와 같은 놀이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열심히 마우스를 클릭하는 놀이. 그래서일까? 이제 놀이터를 생각하면 뛰노는 아이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교복을 입고 어른의 놀이를 즐기던 고등학생 커플이 떠오른다. 컴퓨터나 놀이터나 이제 애와 어른의 경계가 사라진 공간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놀이터에 한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모습이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던 것 같다. 그 아이는 9살 정도 돼 보였는데,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그네에 앉아 있었다.
‘특이하네...’
아이가 그네에 앉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생각되는 이 세상이 더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의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그 아이를 빤히 쳐다봤고, 그 아이 또한 나를 의식하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눈을 마주친 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를 계속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놀이터 안과 밖, 그 사이에는 꽤 거리가 있었는데도 그 아이의 시선은 강렬했다. 뭔가를 요구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조금 더 보다 보니 그 아이의 입 주위가 좀 부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필요한가? 무슨 일 있나?’
나는 혹시나 뭔가 해 줄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놀이터를 지나쳤고, 그 아이와의 아이 콘택트는 끝이 났다. 동시에 그 아이에게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한 관심을 접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놀이터 동영상을 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2.
저녁 8시쯤이었을까? 친구들과 밥을 먹고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몸에서 고기 냄새가 송송 피어오르고 있었고, 얼굴은 발그레 상기 되어 있었다. 술을 잘 못해서인지, 술을 조금만 마셔도 금방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부끄러워서 술을 마시면 발걸음을 빨리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
서둘러 걷고 있는 상황에서 그 아이를 다시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저번의 눈 마주침이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고, 그 때문인지 놀이터를 지날 때마다 은근슬쩍 그 아이가 있는지 의식하는 버릇이 생겼었다. 저번과 똑같은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 아이는 이번에도 똑같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빨랐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나는 천천히 그 애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며 놀이터를 지나갔다. 놀이터를 지나 이제 시선이 단절될 때쯤에 그 아이가 눈웃음을 쳤다. 분명히 눈웃음이었다. 순간적이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건 눈웃음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그 아이와의 시선은 이미 단절되어 있었지만 그 아이가 여전히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살짝 뒤로 몇 발걸음을 물러섰다. 그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그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채로.
나는 앞에 보이는 편의점으로 갔다. 보통 술 마신 이후에는 조명이 밝은 편의점에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런 꺼리는 마음에 대한 의식조차 없었다. 나는 꽤 당당하게 편의점에 들어가 빠삐코를 두 개 꺼냈다.
“아이야, 이거 먹어.”
껍질을 벗기고 꽁다리를 따서 빠삐코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아이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빠삐코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빠삐코를 먹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딱히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손과 귀밑에 살짝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서는 더욱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섣불리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아이는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걸까? 이 아이의 아이답지 않은 표정과 눈빛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됐다.
갑자기 그 아이가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빠삐코를 빨면서 그녀는 그네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당겼다. 그 이끌림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는 나를 놀이터 뒤쪽 출구로 데리고 갔다. 나는 그 아이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끌려갔다.
“헉!”
그때, 누군가가 나를 세게 밀었다. 그 충격으로 나는 뒤로 넘어졌고, 빠삐코를 놓쳤다. 아이의 손도 놓쳤다. 아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아이 옆에 서 있는 후줄근한 한 아저씨를 바라봤다.
“지금 뭐하는 거시여! 우리 딸하고 어딜 가는겨?!”
아저씨의 얼굴이 내 얼굴이 그런 것처럼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자신의 딸이 낯선 남자와 함께 가는 것. 아저씨에게는 충분히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오해를 피하려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놀이터에 혼자 있어 가지고요. 무슨 일 있나 해서 와본 거에요. 근데 아이가 저를 끌고 와서 그냥 따라가는 중이었어요. 다른 건 아니에요.”
아저씨가 나를 째려봤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이는 화가 난 듯한 얼굴로 아저씨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내가 나쁜 짓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도 생긴 것처럼 마음이 좀 편안해 졌다. 아저씨는 자신을 째려보던 아이를 품 안에 감싸고는 나를 보고 말했다.
“낯선 남자는 위험한 거시여. 알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다. 아이에게 묻어 있던 핏자국을 생각하면 조금 더 나서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나는 충분히 오해받을만한 처지였으니까.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이는 아저씨와 함께 곧 사라졌다.
3.
경찰차 소리가 요란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놀이터의 뒤편으로 갔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틈을 살짝 비집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내가 며칠 전 봤던 아저씨가 있었다. 그 아저씨의 양팔을 잡고 있는 경찰들. 아저씨가 연행되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이를 폭행한 일이 발각된 것이다. 아마 아이는 보호소에 가서 조금 더 보호받으며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 사람을 죽였데...”
갑자기 눈이 커졌다. 사람을 죽였다니? 갑자기 아이의 눈빛이 떠올랐다. 아이가 지었던 그 강렬한 눈빛은 어쩌면 살려달라는 외침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날 조금 더 나섰다면 아이를 지킬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 내 탓인 것 같았다.
“완전히 난도질을 했다는구먼. 막 잘라냈댜.”
“아이고 징그러라... 세상에 어쩌면 좋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며 내 머리를 어지럽게 했다. 잘못했다. 잘못했어. 조금 더 나설걸, 조금 더 관여할 걸...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이고, 아빠 없이 이제 저 아이는 어찌 살까? 안됐다 정말...”
아이가 어찌 사느냐고?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 틈으로 나아갔다. 제일 앞쪽에 서자 피 묻은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하늘색 원피스에 군데군데 검은색 점이 피어나 있었다. 아이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고, 슬퍼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차분한 모습이 오히려 정신 나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저씨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죄송하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고 반복하는 그를 보며, 어쩌면 살해당한 그 남자가 죽을만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하려다가 이런 사달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계속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경찰차에 탔다. 아이 역시 경찰들과 함께였다. 나는 아이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에 충분히 만족하며 학교로 향했다.
4.
놀이터에 있는 아이를 보고 나는 놀라기보다는 반가웠다. 그네에 앉아 있던 그 아이는 예전처럼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무슨 감정(혹은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날 이후 나는 항상 이 아이를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내가 변태인 것인지 아니면 소아성애자인 것인지, 내가 이 아이를 그런 대상으로 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연민인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애매모호한 감정이었다. 확실한 건 그 아이의 그 눈빛이 계속 기억났다는 점이다.
빠삐코를 내밀자 그 아이는 자연스레 빠삐코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 날처럼,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아이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아이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 조그마한 손에 이끌려 아이를 졸졸 따라갔다. 빠삐코를 쭉쭉 빨면서.
아이는 놀이터 뒤쪽의 문을 지나 골목길을 가로질러 갔다. 할로겐램프의 노란 주황색이 길을 비치고 있었다. 좁아터진 골목길을 이미 깨져버린 보도블록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길을 아이와 내가 걷고 있었다. 아이는 앞에서 나를 이끌었고, 나는 하늘색 원피스의 잔상을 쫓아 끌리는 대로 따라갔다. 멍한 느낌. 하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는 느낌. 뭔가 잘못을 저지를 것 같을 때 느껴지는 요상한 불편함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이는 철로 된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작은 집이었다. 들어가자마자 간신히 한 명이 설 만한 부엌이 있고, 그 안에 단칸방이 있는 구조였다. 나에게는 턱없이 답답할, 그렇지만 아이에게는 충분한 공간이었다. 방 한구석에 컵라면 박스가 보인다. 교회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받은 물품 같았다. 이 아이에 대한 이상한 감정, 일단 연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 같은 그 감정이 라면박스를 보고 더 커졌다는 것이 이상하게 나를 위로했다.
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때의 그 눈빛이다. 도대체 이 눈빛은 뭘까?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그 동공이 가늘게 떨렸다. 아이의 입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나는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아이와 키를 맞췄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계속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았다. 장담하건대, 이때 내가 이 아이를 안은 것은 결코 아이에게 더러운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연민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연민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혼자 지내기 무섭지 않니?”
그 아이를 안은 채로 그렇게 물었다. 그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 보니 아이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음.........”
아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것이 반가워서 아이의 얼굴을 보려고 포옹을 풀었다. 아이는 무언가 말하려 하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서는 라면박스 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라면박스 위에 놓여있던 가위를 들고 나에게 왔다.
“왜? 뭐 잘라줘?”
내가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가위로 내 목을 찌른다.
“헉....”
말이 잘 안 나온다. 이상한 느낌이 든다. 장담하고 몸에 날카로운 무언가가 들어와 본 경험을 못 해본 사람은 이 느낌을 절대로 모를 것이다. 아이를 옆으로 쳐낼 수도 없을 만큼 온몸에 힘이 쫙 빠져버린다.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이 나는 건 너무 웃기지만, 어쩌면 여자들은 이 느낌을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여자의 몸에 남자가 들어갈 때 이런 느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이상하고 오묘하고 힘이 다 빠지는 것 같고... 그런데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떨린다. 서있었다면 바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무릎을 꿇고 있었던 나는 그냥 옆으로 쓰러진다. 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목에 박혔던 가위를 빼낸다. 가위가 빠져나간 자리로 피가 솟구쳐 나온다. 피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으로 다시 바람이 들어온다.
이제는 궁금하다. 아이가 왜 나를 죽이는 건지.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그런데 곧 궁금하지도 않게 된다. 그냥 억울하다. 나는 이 아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이는 내 옆에 와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얼굴에는 빨간 피가 묻어 있었는데 하늘색 원피스를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쓱 닦아냈다. 하늘색 원피스에 묻은 피는 곧 검게 변했다. 아이의 얼굴 옆선을 따라 여전히 약간의 핏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아이는 가위를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가위의 그 스극하는 소리를 나에게 들려준다. 그리고는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낯선 남자는 위험해...”
점점 눈이 감긴다. 가위 소리가 들린다. 시야가 점차 흐려진다. 아이의 눈빛이 보인다. 그래... 그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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