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바둑 고수다. 아마 4단으로 국내 정치인 중 최고수에 속한다. 이세돌 9단의 책에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바둑 고수는 일반인보다 미래를 헤아리는 수 싸움에 탁월하다는 시각도 있다. 당장은 속을 알 수 없지만 나중에 보니 신의 한 수인 경우가 많다는 것. 그래서 문 대통령의 행보 역시 ‘바둑 고수’라는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문 대통령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바둑 고수인 문 대통령은 다음 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을 겨냥해 차곡차곡 포석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수 한수에 의미를 곁들이며 주도권을 놓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궁극적 목표는 동북아의 혼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주도권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실험으로 야기된 국제사회의 동요와 혼란을 대한민국이 주도해 풀어내겠다는 것이다. 이는 외세 개입으로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고달픈 운명을 겪은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읽힌다.
현재 한반도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중국의 사드 갈등이 극에 달하고 있다.
미국 최대 군수업체 록히드마틴사가 개발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는 고도 50~150㎞에서 비행중인 탄도미사일 요격이 주임무다. 사드를 한국에 배치할 경우, 주일 미군기지, 괌 미군기지, 하와이 미군기지, 미 본토를 북한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사드 한국 배치에 사활을 건 모습이다.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오바마 정부 당시 아시아 중시 및 중국 견제로 해외전략을 전환한 상태다. 이에 따라 사드가 한국에 배치될 경우, 북한의 군사동태가 미국의 손바닥에 들어가게 될 뿐 아니라, 중국을 겨누는 비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한국 사드기지는 북한 감시전용이라며 중국에 양해를 구하고 있지만, 중국은 의심을 100%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통제하에 있는 한국 사드기지에서 과연 어떤 장난을 칠 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한국군 역시 미군 측에 사드 관련 정보를 요청할 수는 있지만, 미국이 안 주면 강제할 수단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文 대통령의 목표는 ‘동북아 정세 주도권’ =양측 갈등이 팽팽한 상황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다. ‘위인은 난세에 나온다’는 말처럼 문 대통령은 어려운 시기에 원하는 결과를 위한 포석을 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의 첫 번째 사드 전략은 6월28일~7월2일로 예정된 한미정상회담 전에 미국 주도의 판을 깨는 것에서 시작된 듯 하다. 한미정상회담에 가서 겉만 번드르르한 의전행사만 하고 오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정상회담은 하나의 종착역이 아니라 난국 타개의 과정이라는 시각이 엿보인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문정인 연세대 특임 명예교수(통일외교안보 대통령 특보)를 십분 활용했다.
문정인 교수는 정상회담에 앞서 지난 13~21일 미국을 다녀왔다.
그는 지난 16일 동아시아재단과 우드로윌슨센터가 워싱턴DC에서 공동주최한 세미나 기조연설 및 문답을 통해 ‘사드배치 문제로 한미동맹이 흔들린다’는 일각의 평가에 대해 “일개 무기에 불과한 사드 때문에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그게 동맹이냐”고 말했다.
또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중단하면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출동과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축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사드 한국배치가 지상 과제인 미국으로서는 상당히 과민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귀국길에 오른 문정인 교수가 국내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일타쌍피’ 문 대통령의 포석 2개 =문정인 교수 발언은 문재인 대통령식 사드 해법의 첫 포석이다.
문 교수의 발언은 한미 외교가에서 지극히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발언들이다. 한미동맹이 사드로 흔들릴 수는 없으며, 북한의 핵활동 중단은 자연스럽게 미국 전략자산 출동 및 한미연합훈련 축소 수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언이 미 외교가에 파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한 가지다. 미국이 목적 달성을 위해 문 대통령 흔들기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같은 발언을 다음 주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했을 시, 미 외교가는 문 교수가 아닌 문 대통령을 향해 융단폭격을 가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식으로 한국 대통령에 모욕을 주고, 앞으로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낼 여지를 잘라버리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정인 교수가 먼저 미 외교가의 성난 반응을 이끌어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 카드를 잃어버린 셈이 됐다. 더구나 문정인 교수는 한국 뿐 아니라 미국 학계에서도 실력을 검증받은 학자이자 안보 전문가이기 때문에 미국의 판흔들기에도 불구하고 내상이 크지 않다.
만약 문 대통령이 문정인 교수 없이 이와 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외교 초보의 실수’, ‘비전문적 대통령의 오판’ 등으로 공격 받았겠지만, 권위자인 문 교수가 방패막이가 됨으로써 장애물을 쉽게 넘은 셈이 됐다. 문 교수 카드는 문 대통령에게 미국 카드를 먼저 쓰게 하면서 대통령 논리도 강화하는 ‘일타쌍피’였던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두 번째 포석은 ‘팩트 폭격’이다. 미국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팩트로 사드 관련 미국의 문재인 정부 무시 정서를 말끔히 정리하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팩트 폭격’ 수단으로 해외 언론을 택했다.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유력 언론인 CBS, 국제통신사 로이터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미국에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이다.
먼저 문 대통령은 20일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문정인 교수 논란과 관련해 “개인의 견해”라며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동시에, 오토 웜비어 등을 언급하며 북한이 비이성적 정권이며 이들과 대화하려면 제제 뿐 아니라 대화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북한과의 대화 국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노린 포석이다.
이어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머지않아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할 것”이라며 발언 수위를 높였다. 제재와 압박으로는 북한 제어가 어려우며, 대화가 필요함을 다시 한 번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이어 문 대통령은 또 한 번의 팩트 폭격에 나선다.
그는 “원래 한미가 올해 하반기까지 사드 발사대 1기를 배치하고 나머지 5기는 내년에 배치하기로 합의했다”며 “그러나 어떤 연유에선지 지난해 탄핵 국면에 들어서고 난 후 이런 절차들이 서둘러졌다”고 말했다. 또한 “당연히 거쳐야 될 절차를 지키는 것은 국민 여론에 따른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세계 민주주의의 모범국가’라는 자부심이 강한 미국이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정책 추진’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문 대통령은 두 가지 포석으로 미국 정치권의 의도적인 조소나 야유를 피했고, 문재인 정부의 사드 원칙을 관철할 단단한 근거도 마련한 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