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유신선포 전 북에 통보
동구권 국가-북한 외교문서 ‘2차례 접촉’ 밝혀
이후락 “남쪽 다수 통일 반대…질서 구축해야”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17일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북한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의 국제문제 연구기관인 우드로윌슨센터는 23일 누리집(www.wilsoncenter.org)을 통해 이런 내용이 담긴 옛 동구권 국가들의 북한 관련 외교문서(1971~72년)를 공개했다.
이 가운데 당시 평양주재 불가리아와 동독대사관의 본국 보고 문서를 보면, 김재봉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72년 10월19일 오후 평양주재 동유럽 6개국 대사들을 외교부로 불러 2시간 동안 남북 접촉 내용을 설명하며 “(유신 선포 직전인) 10월16일 남쪽의 제의로 이뤄진 남북 연락대표 접촉에서 남쪽은 ‘유신 선포’ 배경을 설명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소개했다.
이후락 부장은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쪽 위원장에게 보낸 이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쪽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
남쪽은 17일 박 대통령의 발표 한 시간 전에도 “오후 7시에 비상사태를 공표할 것”이라고 알려왔다고 김재봉 부부장은 전했다.
김 부부장은 또 “이후락 부장이 18일에도 메시지를 보내왔다”며 “평화적인 남북대화를 위해 헌법 수정을 통한 대화의 법적 근거를 만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쪽은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한 것은 이후 야당이 남북 대화에 참여해 북쪽에 유리한 2 대 1 협의구도가 성립되지 않도록 야당을 금지하려 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김재봉 부부장은 덧붙였다.
"박정희 정부, '10월유신' 北에 알려"
美우드로윌슨센터, 北 1971-72년 외교문서 분석
(서울=연합뉴스) 임주영 기자 = 박정희 정부가 1972년 10월17일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북한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을 설명하는 등 당시 남북 당국 간에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또 북한은 1970년대 초반 '대남 평화공세'를 취하면서 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에는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해 그 배경과 목적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설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내용은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윌슨센터가 동독과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옛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관하고 있던 1971-72년 북한 관련 외교문서를 입수, 영어로 번역해 분석한 결과 밝혀졌다.
23일 이 센터가 입수한 당시 평양주재 불가리아와 동독대사관의 본국 보고 문서에 따르면 김재봉 북한 외교부 부부장은 72년 10월19일 오후 평양주재 동유럽 6개국 대사들을 외교부로 불러 2시간 동안 남북 접촉 내용을 설명하며 "10월15일 남측에서 16일에 남북 연락대표 접촉을 제안하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후락 부장은 메시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김일성 내각 수상이 권력을 갖고 있는 동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룰 것"이라며 "하지만 남측 다수가 통일을 반대하고 있다. 따라서 질서가 먼저 구축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17일 북한이 주의해서 들어야 할 중요한 선언을 발표할 것"이라고 전했다.
김재봉 부부장은 또 동유럽 6개국 대사들에게 "17일 박정희의 발표가 있기 1시간 전 남측에서 전화 메시지가 왔다"며 "오후 7시에 비상사태를 공표할 것이니 18일 접촉을 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남측 대표가 18일 김영주 북측위원장에게 보낸 이후락 부장의 메시지도 소개, "평화적인 남북대화"를 위해 "헌법 수정을 통한 대화의 법적 근거를 만들 것"이라며 남한의 헌법 개정에 관해 설명했다.
김 부부장은 대사들에게 "박 대통령은 야당이 남북대화에 참여하면 박 대통령과 북한의 1대 1 대화가 아니라 북한에 유리한 2대 1 대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북한 노동당의 분석도 소개했다.
한편 김일성 내각 수상은 1972년 9월22일 정준택 부수상을 루마니아에 보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대남 평화공세의 목적과 배경을 설명했다.
정 부수상은 이 자리에서 김일성이 "대남 평화공세의 목적"은 남한 내의 "혁명역량"을 키우고 "남한 정권이 우리(북한)가 남한을 침공하기를 원한다고 날조모략하는 것을 폭로"하며 "미 제국주의의 닉슨독트린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가 잘 싸운다면 박정희가 남북연방제를 받아들이도록 할 수 있다"며 "남한이 민주화되면 남한 내 모든 정치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합법화되고 통일혁명당과 혁명역량이 강화돼 남북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를 관철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의 이만석 외교부 부부장도 1972년 6월17일 소련, 동독 등 동유럽 8개국 외교관들에게 7.4남북공동성명 등과 관련해 "우리의 평화공세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분단 정책과 일본의 군국주의 침투를 막고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원조를 받지 못하게 할 것"이라며 "사회주의 형제 나라들도 남한 정부를 고립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박정희를 (같은) 좌익으로 판단했다.
사망한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1961년의 5·16 쿠데타를 예측하고 이를 지지하는 입장을 준비했다가 철회했다는 내용을 담은 중국의 외교문서가 15일 공개됐다.
한국의 북한대학원대학교와 냉전(冷戰) 당시 북한 관련 사료를 공동 분석 중인 우드로 윌슨 센터는 5·16 당일 저녁, 당시 김일 부수상이 평양주재 중국대사를 긴급 면담한 사실 등이 기록된 1961년 중국 외교부 문서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 문서에 따르면, 김 주석은 김일 부수상을 통해 한국의 5·16 쿠데타 지지 성명을 준비 중이라고 중국에 미리 알렸다.
북한은 당시 5·16 쿠데타에 가담한 군인들의 대부분이 진보 성향이며, 미국과 관련이 없는 독자적인 반란이라고 파악했다. 특히 5·16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 당시 한국군 소장이 한때 남로당 사건에 연루됐으며 그의 형 박상희도 사회주의 혁명활동 도중에 사망한 것을 중국 측에 강조했다. 이번에 발굴된 중국의 외교문서는 이 밖에도 북한이 당시 한국군 내의 일부 진보세력이 반란을 도모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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