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은건지 평소 모의고사보다 수능점수가 높게 나와
자신감 있게 원서를 제출한 대학교는 모두 떨어졌다.
결과론적으로는 운이 나빴던 것일까...
내년부터 수능 점수는 500점으로 바뀐다는데,
한 학년 후배들은 교과서가 흑백이 아닌 칼라던데,
재수하려면 학원 알아봐야 하는데 집안은 넉넉치 않고...
대충 개기다가 군대나 가야겠다며 시작한 온라인 게임.
만만히 보고 시작했는데 만렙이 되니 더 바쁘다.
시간 맞춰 출첵하고 서너시간 눈이 충혈 될 정도로 집중해서
클리어했건만 내가 원하던 아이템은 오늘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갖고 싶은 아이템을 먼저 획득 할 수 있는,
하지만 언제 쓸 수 있을지 모르는 포인트만 적립 한 채
이제는 가족같은 알바형에게 인사를 하며 피씨방 문을 나선다.
"벌써 새벽 세 시네" 담배에 불을 붙이며 혼잣말을 내뱉는다.
이 정도 노력이면 서울대는 벌써 갔을 거라는 망상을 하며
어둑어둑 익숙한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동네 전체가 신축빌라 공사가 한창인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집으로 가는 길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구시렁 거리며 한참을 걷고 있는데 공사 현장에서
오른손에 뭔지 모를 것을 쥔 어두운 그림자가 나온다.
오줌을 지릴 정도로 놀랐지만 쪽팔릴까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집 쪽으로 걸음을 향한다.
얼핏 스친 실루엣은 모자를 푹 눌러 쓴, 팔뚝 길이의 철근을
손에 들고 있던 남자로 보인다.
손엔 땀이 나기 시작하고 모든 말초신경은 뒤통수에 집중된다.
10미터나 걸었을까? 가로등이 겹치며 내 그림자가 앞으로
길어지는데 내 밭 밑에도 다른 그림자가 길어지며 올라온다.
한 문장만이 내 머리 속을 꽉 채운다. '뛰어야 한다'.
골목길 코너를 돌자마자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발 등에 불 떨어진 듯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다.
뒤에서 아무 소리도 안들리면 좋으련만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따라 들려온다.
'X됐네...' 저게 사람인지 귀신인지 날 따라오는건지
못보던 우리동네 X친놈인지는 이미 내 알 바가 아니다.
그렇게 뛰며 골목을 한 번 더 꺾자마자 남의 집 담벼락을
뛰어 넘고 엎드려 내 입을 양 손으로 틀어막는다.
억겁의 시간 같은 몇 초가 흐른 뒤 담벼락 너머로
헉헉대는 숨소리가 스친다.
행여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까 미동조차 할 수 없다.
십 수분을 그러고 있자니 팔 다리가 저려 종전의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고개를 들어 조심스레 동태를 살핀다.
무사히 집으로 들어와 불도 켜지 못하고 까치발로
살금살금 내 방으로 가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일찍 일찍 다니라는 엄마의 졸음 섞인 잔소리가
오늘따라 너무나도 반갑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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