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홍벚꽃, 머리에 털 난 뒤로 이런 인물은 처음인걸. "
" 뭘 좀 알아내셨습니까, 기원스님. "
늘어지게 하품하며 무심히 질문하는 영민과 달리 기원의 눈빛은 여전히 진지했다.
이미 경찰서에서 밤을 새운 둘이었다. 책상 위로는 노란색 파일철이 잔뜩 올려져
있었기에 마치 압수수색 당하는 현장을 방불케 했다.
" ...그게 말야. "
기원이 입을 열고자 하는 순간 낯선 인기척이 들려왔다.
" 김 경사님, 일찍 출근하셨지 말입니다? 옆의 분은 누구십니까? "
" 동훈이 왔냐. 인사해. 사설탐정이셔. 내가 고용했어. "
" 사설탐정... 아직 합법적인 직업은 아니잖습니까? 진짜로 누구십니까? "
" 꼴이 이래서 그렇지, 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야. 우리 팀의 브레인이 되어주실 분이니까 정식으로 소개할게.
구기원이라는 분이고, 내 고교 동창이자 이번 연쇄자살 사건 수사에 핵심적인 도움을 주실 분이야. "
" ...최동훈 경장입니다. "
어색한 분위기 속에 기원이 먼저 악수를 청했다.
굳어있던 표정을 슬며시 푼 최동훈 경장이 커피 세 잔을 타기 시작했다.
" 그럼 그 '여자'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겁니까? "
" 그래. "
영민이 대답했다.
" 비공식적인 수사인만큼 인력과 예산에 대해서도 재량껏 편성하면 된다고 확답받았어.
만약 홍벚꽃을 잡을 수 있다면 저승사자라도 꼬셔오면 된다는 얘기지. "
" 그래야지 말입니다. 잡을 수 있다면. 경사님, 커피 드십쇼. 구 탐정님, 커피 한 잔 드시고 하십쇼. 열심이십니다. "
" 고맙습니다. 그리고 탐정은 아닙니다. 땡중입니다. 발음은 비슷하네요. "
ㅡ
열흘 전만 하더라도 용의자로 지목된 여자를 체포하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자살자와 접촉한 사실이 있는 여인으로부터 자백만 받아내면 종결될 수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민이 수사국장을 만나고 온 후 수사의 진행은 멈춰버렸다.
처음엔 다들 폭소를 터뜨렸다. 50년에 걸친 추적? 더군다나 일본에선 200년?
그렇다면 경찰이 귀신을 쫓고 있단 말이냐며 웃던 이들은 본청에서 보내온 택배의
어마어마한 물량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방대한 양의 문서와 자료, 와 으로 표시된 제목을
따라 분류하는데만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나마도 일부에 불과했던지 택배는
그 뒤로도 계속 이어져 지하 문서고에까지 택배 상자가 꽉 들어차버렸다.
" 이래도 웃음이 나오십니까? 하고 싶은 사람만 남고, 아니면 빠져요. "
영민의 말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고,
끝내 곁에 남은 건 최동훈 경장 한 명 뿐이었다.
" 넌 왜 안 가냐. "
" 재밌잖습니까. "
" 평소같으면 가라고 하겠는데, 이번엔 네 힘 좀 빌리자. 혼자선 못 쳐내겠어. "
" 제가 잡으면 제 실적입니다. "
" 죽지나 마라. "
" 염려 감사합니다. "
우선 검토할 문서들로 캐비넷 두 개를 꽉 채우고나자 서장이 그들을 찾는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 두 달. 그 안에 해결해. 만약 두 달 안에 안 되면 손 떼는거야. 알겠지. "
" 서장님. "
" 토 달지마. 간부들은 자네들 잃기를 원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세상에 어느 바보가 부하를 사지로 내모나? 못 잡으면 수사 종결이야.
그 이후론 본청에서 판단하겠지. "
" ... "
" 노파심에 해주는 말인데, '홍벚꽃'. 직접 대면하지말고. "
ㅡ
" 잠시 자리 비울테니까, 동훈이 네가 탐정님께 자세한 브리핑 좀 부탁한다. "
" 다녀오십쇼. "
영민이 나가자 기원이 물었다.
" 다른 자료는 어디에 있죠? "
" 벌써 다 보셨습니까. 빠르십니다. 절 따라오십쇼. 문서고에 가야합니다. "
" 네. "
문서고로 가는 길에 만나는 경찰서 직원들은 땅거지 같은 기원의 차림에
의아해하면서도 나란히 걷고 있는 동훈을 보면서 무언가 납득하는 눈치였다.
" 이미 소문은 퍼진 모양이네요, 최 경장님. "
" 무슨 짓을 해봤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 겁니다. 본청에 쳐들어간 경사,
그 경사 따라 뛰어든 경장, 짬도 안 되는 것들 둘이서 미제사건 수사팀 구성.
탐정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데려와도 그러려니 할 겁니다.
자, 열렸습니다. 이 안에 가득한 파란색 상자가 전부 홍벚꽃 관련된 겁니다. "
" 끔찍하네. 두 달 안에 잡는 게 아니라 읽기만 해도 빠듯하겠는걸. "
" 이렇게 파일이 쌓이도록 그녀를 확실히 잡을만한 증인도, 증거도 구하지 못 했습니다. "
" 죽음에 이르도록 권유하는 모양인데, 살인 방조죄가 성립하지 않나요? "
기원의 물음에 동훈을 고개를 단호히 저었다.
" 자살하는 그 순간에는 홍벚꽃이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자살자들은 홍벚꽃과
헤어진 후 머지 않아 목숨을 끊었지만 막상 홍벚꽃이 그 현장을 지켜봤다거나
자살하는 행위에 협조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방조죄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어느새 기원의 손은 파일을 집어들었고, 눈은 빠르게 내용을 훑어가고 있었다.
- 1986.01.03. 서울시 노원구 ○○빌라 201호 -
피해자 : 이 용 호
나 이 : 34세
직 업 : 기자
자살방법 : 흉기를 이용한 경동맥 절단
사인 : 과다출혈
- 1986.02.17. 진주시 문산읍 ○○리 1024번지 -
피해자 : 박 점 순
나 이 : 65세
직 업 : 무직
자살방법 : 소류지에서 투신
사인 : 익사
- 1986.03.09. 울산시 중구 염포동 ○○아파트 A동 408호 -
피해자 : 이 경 주
나 이 : 18세
직 업 : 학생
자살방법 : 옥상에서 투신
사인 : 쇼크 및 과다출혈
- 1986.04.28. 진도군 ○○읍 241-8번지 -
피해자 : 오 명 환
나이 : 22세
직업 : 군인
자살방법 : 피복을 벗긴 전선으로 감전 유도
사인 : 감전사
기원은 무언가 수상한 점을 눈치챈 듯 읆조렸다.
" 한 달에 한 번이잖아. "
" 정확합니다. 한 달에 한 명씩입니다. "
" ... 자살은 전국적으로 하루에 수십명씩 발생할텐데. 그 '특징'을 통해서 분간하는 건가요? "
" 특징이라 하시면 익히 알고 계시는 그 '미소' 말씀입니까? "
기원은 파일을 덮은 채 동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 보통 자살자들은 고통에 절규하던지, 서서히 죽음에 이르러 마땅히 표정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홍벚꽃'을 만난 후 자살한 사람들은 모두 웃고 있습니다. "
" 최근에도 그런가요? "
기원의 물음에 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 확실합니다. 웃고 있었습니다. "
그 말을 듣곤 기원은 자료 속 시체들의 표정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ㅡ
" 여기 계셨수? 난 무서워서 둘 다 도망간 줄 알았네. "
" 영민이 왔어? "
" 오셨습니까, 김 경사님. "
" 밥은 먹고 해야지. 뭐 시킬까. 비빔밥? "
" 간짜장. "
기원의 뜬금없는 주문에 나머지 두 사람의 표정이 괴랄해졌다.
" 고기 빼달라고 할까? "
" 탕수육도 시켜줘. "
기원의 추가 주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눈치만 보다가,
" 에이, 간짜장 세 개, 탕수육 하나! 콜! "
" 찬성입니다. 문서고 정리 좀 부탁드립니다. 전 올라가서 밥 시키고 공문 좀 처리하고 있겠습니다. "
동훈이 올라가자 기원은 영민에게 넌지시 물었다.
" 어디 다녀온거야? "
" 그녀한테. "
" 너, 만났어? "
" 아니.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똑똑히 보고 왔지. "
" 지난 한 달 동안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웃으며 자살했어. 이 지역에서. 맞지? "
" 그래. 그래서 예의주시하고 있는거야. 한 달에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이쪽에서도 더 이상 소극적으로 대응할 순 없어. "
" 영민아. 나에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 "
" 방법? "
영민이 기원에게 바짝 붙었다.
기원의 '방법'을 듣는 영민의 얼굴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ㅡ
후루룩, 짜장면 먹는 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 김 경사님, 페이스북이랑 트위터에 광고는 갑자기 왜 올리라고 하십니까? 진짜
본청 국장님이 돈 갖다쓰라고 한 건 맞습니까? "
" 우리 월급에서 뗄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써. 광고는 메이저 SNS 위주로
골고루 다 실은 거지? 내일은 5대 신문사에도 올리고. 주요 공모전 사이트에도 의뢰해서 배너 띄울 수 있는지
알아봐. 사상 최초의 '말빨 공모전'. 어때. "
" ...위험한 짓입니다. 그 내막이 알려지기라도 해보십쇼. "
" 단무지 좀 주세요. 최 경장님. "
세 사람의 늦은 저녁 식사를 알려주듯 보름달은 벌써 모습을 감췄다.
빈 그릇을 내놓을 무렵부터 전국에서 문의 전화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기원이 내놓은 '방법'과 관련된 전화였다.
ㅡ
윤성호 씨는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칭했고, 때론 '낭만협객'이라 칭했지만
세상이 그를 칭할 때는 '키보드 워리어'라고 했다.
주요 일과는 독설. 주로 정부의 시대 착오적인 정책이나 세계 주식시장의
불확실성 등에 대해 자신만의 독특한 필력으로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 필력은 뛰어난지라 몇 몇 팬을 거느리곤 있었지만 문제는 생계.
직장에서 쫓겨나며 받은 퇴직금도 다음 달이면 땡인지라 돈 한 푼이 궁했다.
" 알바천국에 왜 할만한 알바가 없냐. 천사들이 다 가져가셨나... "
2페이지, 3페이지, 택배 상하차, 조선소, 공사장 인부...
몸 쓰는 일은 하기 싫다는 핑계로 한참을 헤매이다 마침내 독특한 문구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 이게 뭐야? "
[ 당신의 말빨을 캐스팅합니다 ]
모집 인원 : 공고 종료시까지
일당 : 삼백만원
평소 자신이 한 말빨한다고 생각하시는 분,
혹은 어디 가서 말로 져본적이 없으신 분,
혹은 어떤 말을 들어도 주눅들지 않는 강력 멘탈을 지니신 분,
아래 연락처 혹은 링크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삼백만원? 이정도면 두 달은 버텨보겠는데. "
사이비 종교나 인신매매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막상 핸드폰에는
연락을 위한 번호가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ㅡ
'광고보고 전화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좀 더 자세히 설명듣고 싶은데요'
'구인광고 보고 전화했어요, 말빨 자신있는데 삼행시 하나 운 띄워주세요'
'일단 의심스럽지만 연락 드려보는데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
윤성호를 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통화가 최동훈의 휴대전화를 울려댔다.
링크를 통한 연락도 어마어마했기에 상당수의 연락은 영민에게 돌려졌다.
두 사람이 정신없이 연락을 받는 동안 기원은 묵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단순히 간 보기용으로 전화한 사람과 다르게 처음부터 접수를 목적으로
전화한 사람들은 대부분 뛰어난 논리성과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신중하면서도 섬세하게 자신의 의중을 전달하고 상대방의 문장 속 핵심 요소를
파악하는 모습이 과연 '말빨'을 자부하는 사람들다웠다.
" 와. 목 다 쉴 뻔 했네. 이제 오는 전화는 적어놨다가 그냥 내일 연락주자. 동훈아, 수고했다. "
" 수고하셨습니다. 탐정님, 뭘 그리 고민하십니까? 전화가 아주 박이 터집니다. "
" ... 이상한 점을 발견해서요. "
숨을 고르던 경찰 2인방이 기원의 말에 다가갔다.
" 1999년 7월에는 자살자가 없었어요. "
" 뭐? 제대로 찾아본 거 맞아? 다른 파일에 실린 거 아냐? "
" 아냐. 대강 훑어보긴 했지만 다른 파일에서도 찾아볼 순 없었어. "
" 잘못 봤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
" 아니에요. 그럴리는 없어요. "
기원의 검지 손가락이 펼쳐졌다.
" 첫 번째 가설, 99년 7월에 홍벚꽃이 움직이지 않았다. "
이윽고 가운데 손가락도 펼쳐져 'V'를 그렸다.
" 두 번째 가설, 누군가 죽었지만 수사에서 누락되어 단순한 자살로 처리되었다. "
그 말에 영민의 고개가 끄덕였다.
" 두 번째 가능성도 무시 못 하지. 모든 자살이 다 발견되는 건 아니니까. "
그러자 기원은 영민을 쳐다보더니 주먹을 내렸다.
" 아니야. 오히려 첫 번째 가설이 가능성은 더 높아. "
" 왜? "
" 너도 파일을 봐서 알겠지만 모든 희생자는 자택이나 직장, 학교 같이
가장 발견되기 쉬운 장소에서 자살했고 하루 사이에 발견되었어. "
" ... "
그 말은 정확했다. 50년 동안 이어져 온 월 1회의 연쇄 자살 속에서
희생자들은 하나 같이 가장 발견되기 쉬운 장소에서 자살했으며 하루도 되지 않아
누군가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 자살자가 발견되지 않을 가능성은 있지만 홍벚꽃이 접근한 인물들은 달랐어.
그들은 부패가 진행되기도 전에 항상 발견되었잖아? 항상 그 '미소'와 함께 말야.
마치 발견되기를 노린 것처럼, 웃으면서. "
" ... 그렇다면. "
영민의 말에 흥분이 섞였다.
" 홍벚꽃은 우리에게 일부러 발견되게끔 그들을 조종하는거야. 우리에게 주기적으로 신호를 보내는거지.
그 미소를 통해서. "
" 후. 그래, 한 달에 한 번뿐만이 아니라, 일부러 희생자로 하여금 무언가 전달하려고 한다,
좋아. 그럼 대체 뭣 때문에? "
" ...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고민 중인거야. "
영민의 콧소리가 한참을 씩씩거릴 즈음 동훈이 한 마디를 보탰다.
" 일본 측에 한 번 물어볼까요? 일본도 그녀를 쫓고 있었다면 웃는 시체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파악해왔을 겁니다. "
" 부탁할게요. 동훈 씨. "
" 동훈아. 내 책상 서랍 안에 보면 명함 하나 있어. 일본 측에서 아카이 사쿠라를
전담했던 수사관 전화번호야. 나한테 가져다 줘. 내가 물어볼게. "
" 바깥 공기나 좀 마시고 올까. 아직 수행이 멀었구나, 나는. "
영민과 동훈이 일본에 급히 연락하는 동안 기원은 밤거리로 나섰다.
ㅡ
나이가 사십줄에 들어보이는 한 사내가 사무실 쇼파 위에 벌렁 누워있었다.
제 집 안방이라도 되는 듯 불손한 태도를 한 채 다리를 달랑달랑 떨어댔다.
" 뭡니까? 저 인간. "
열 받은 표정의 동훈을 만류하는 건 기원이었다.
" 제가 데려온 히든 카드에요. 김중호 씨라고... 나중에 소개할게요. "
" 우이씨. 무슨 히든카드가 저렇습니까. 아무튼 곧 시작이니 이동하시죠. "
" 네. 영민이가 미리 가있으니까 장내는 정리되어 있을 거에요. "
" 여보쇼. 김준호? 김장호? 아저씨! 따라오세요. 안 들려요? 이동한다구요! "
기원이 다가가 직접 업다시피 한 뒤에야 중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ㅡ
수 백명의 인원이 모여 웅성대는 강당 안,
세 사람이 들어서자 영민이 기원과 동훈을 맞이했고 중호는 자연스레 어느 빈 구석을 찾아가 드러누운지 오래였다.
" 자, 잠시 장내를 정리하겠습니다. 주목해주세요. "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기원의 목소리에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멎었다.
" 중앙에 보이는 책상을 기준으로 줄을 서주세요. 면접을 시작합니다. "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줄을 서기 시작했다.
중앙의 책상에 앉은 기원의 앞에 첫 번째 면접자가 다가섰다.
" 안녕하세요. "
" 얼굴이 왜 그렇게 생겼어요? "
그 말에 면접자가 잠시 머뭇대다 이내 능글맞는 미소를 지었다.
" 제 얼굴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만드셨는데, 여태껏 불량품이라고 생각해서
반품할까 생각했거든요? 근데 면접관님 얼굴 보니까 반품 대신 별점 5점 그냥 드리려구요. "
그 말에 웃는 기원의 표정이 의미심장해보였다.
" 통과하셨습니다. 뒤에 있는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제 옆에 앉아주세요.
자, 공지하겠습니다. 이제 이 분께도 가셔서 면접을 보시면 됩니다.
이 분이 인정하면 통과, 인정하지 않으면 탈락입니다. 통과하신 분은 책상과
의자를 가지고 와서 이 옆으로 나란히 앉아주시면 됩니다. "
그 공지를 시작으로 지독한 설전이 시작되었다.
무턱대고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 그런 사람과 맞서는 사람,
그 와중에도 누군가를 지혜를 발휘하고 기지를 발휘했다.
화가 나서 우는 사람도 있었고, 몸싸움을 벌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차례를 기다리는 면접자들에 의해 거진 정리가 되었고
점점 심사위원은 늘어나고 면접자는 줄어들어 2시간이 지나자 백 명 남짓한
인원만이 장내에 남아있었다.
마침내 그 누구도 면접을 보려하지 않았다.
" 좋아. 이제 시작인거야. "
기원이 책상에서 일어나 단상 위로 올라섰다.
저마다 책상에 앉아있는 통과자들이 기세 등등한 표정으로 기원을 노려봤다.
" 여러분은 3일 뒤 다시 이 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
본선인가, 또 말싸움인가, 이번에는 쉽지 않겠는데, 여러 잡담이 터져나오는
가운데 기원의 다음 말이 장내를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 이 장소에서 한 명의 여자를 말로써 굴복시키는 것이 여러분의 임무입니다. "
강당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 그녀는 지독한 죽음 찬양론자입니다. 여러분은 힘을 합쳐 공동으로 그녀를 상대해야 합니다. "
그 말에 통과자들의 불평이 곳곳에서 날카롭게 터져나왔다.
" 그깟 여자 하나 이기라고 우릴 모이게 한다고? "
" 나 혼자 해도 충분하거든요?! "
" 아~ 다들 아가리 싸무세요, 그 날 저 혼자 와도 충분하니까~ "
흥분한 말처럼 날뛰는 그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기원이 설명을 이어갔다.
" 만약의 경우에 여러분은 그녀에게 설득되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앞의 봉투를 가져가세요. 내용물은 현금 삼백만원과 각서입니다.
어떤 설득을 당해도 자살하지 않겠다는, 자살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입니다. 그 날 오셔도 자유, 오지 않으셔도 자유입니다.
다만 그 각서의 의미를 3일 동안 천천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그 자리에서 대부분의 통과자들이 각서를 제출했고,
기원과 영민은 이미 던져진 주사위를 위해 눈동자를 다시금 반짝였다.
ㅡ
" 네, 최동훈입니다. 아! 네. 맞습니다. 그대로 내보내주세요.
네. 맞습니다. 사람 찾는 광고에요. 그렇게 실으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어요.
그대로 보내주세요. "
동훈은 광고 업체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 업체와 한 판, 저 업체와 한 판.
이름도 불명. 나이도 불명.
정체 불명의 여인에게 일방적으로 보내는 광고. 아무리 돈만 주면 실어주는
광고라지만 업체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 벚꽃, 설득, 가르침 >
장소와 시간 외에는 단 세 마디 단어가 전부인 기묘한 광고가 전파를 타고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시각 동훈 옆에선 영민이 경찰서와 보건소 등 협조를 구할 기관에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 사람이 많이 모여서 그럽니다, 앰뷸런스가 적어도 두 대는 필요해요.
소방서에서는 구급대원 보내주기로 했구요, 저번에 저희가 행사 때 주말에
교통정리 요원 많이 보내드렸잖아요, 저 한 번 도와주십쇼. 부탁합니다. "
...
" 와, 정말 죽다살아났지 말입니다. "
" 동훈아.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고생 많다. 임마. "
" 근데 김 경사님, 탐정님. 진짜 홍벚꽃이 올지 궁금합니다. "
" 홍벚꽃은... 반드시 와요. 제 시나리오대로 올 겁니다. 최 경장님. 제가 말해놓은 건 도착했나요? "
기원은 눈을 지긋이 감은 채 대답했다.
" 아. 그건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겁니다. "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는 기원,
그런 기원의 묵상이 길어진다.
하루, 이틀,
마침내 삼일.
새벽 일찍 목욕을 마친 기원은 머리를 짧게 깎고 수염을 밀어 말끔해진
모습으로 강당에 나타났다.
" 어라, 수염 밀었네. 몰라뵐 뻔 했습니다. 스님. "
" 중요한 날이잖아. "
기원은 영민의 물음에 답하며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미 절반 이상이 착석해있는 가운데 저마다 상기된 표정이 눈에 띄었다.
" 공기가 축축한게... 다들 긴장 되는 모양이다. "
기원이 자리에 앉고, 영민은 여전히 일어선 채로 서성이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 이제 한 시간 남았어... "
40분이 지나자 한 명의 낙오 없이 면접 통과자 모두가 도착했다.
신분도 성별도 나이도 천차만별, 변호사, 교사, 대학생, 종교인, 기자, 영업사원 등
서로 다르지만 목적만은 같은 사람들이 앞으로 있을 설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 약속시간이야. 영민아. 동훈 씨와 함께 나가있어줘. "
" 그래. 조심하고. 이거, 동훈이가 주라던데. "
" 고마워. "
영민으로부터 무언가 건네받은 기원이 물건을 꺼내자마자 강당의 문이 열렸다.
장내는 기침 소리 하나 없이 침묵에 젖었고, 모두의 시선이 입구로 향해있었다.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붉은 색 기모노를 입고 땋은 머리가 허리를 지나 바닥까지 닿을 듯한 여자.
날카로운 고양이를 닮은 얼굴을 한 여자.
여자의 뒤를 이어 창백한 얼굴의 꼬마 한 명이 함께였다.
" ... 홍벚꽃. 왔구나. "
기원이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여인은 누구의 안내 없이도 능숙히 단상 위에 올라섰다.
" 쪽바리 년 같은데, 한글 공부는 다 하셨나? "
" 고작 당신 따위가 우리 상대가 될 것 같아? 내가 누군지 알아? "
"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하고 끝냅시다~ "
기선제압을 위한 사람들의 도발이 계속되는 와중에 아주 상냥한
목소리가 또렷히 들려왔다.
- 여러분 -
기원은 황급히 들고 있던 물건을 뒤집어썼다.
주위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방음기가 그 정체였다.
' 시작이다. '
- 제 말 좀 들어보십시오 -
화술의 달인 백 명과 홍벚꽃 한 명간의 대결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