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사실은 내가 말야.
A는 처참한 내신 등급으로 수시는 찔러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이 추운 수능날.
수능 대박을 기원하며, (내심 귀신이 보이게 된 사람이니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작용하여 대박이 나지 않을까하는 헛된 망상을하며)
수능을 친다.
그리고 집으로 곧장 돌아와 친구들과 가채점을 하는 A.
언어 영역.
...!!!!!!!!
세 개 틀렸다.
대박이다.
A의 역대 성적 중 최고의 점수이다.
"야!!11111111 대박!!! 나 세개 틀렸어!!!!!!!!!!!"
"헐 뭐???"
친구들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하다. 고작 세 개 밖에 틀리지 않았다.
"야 드디어 수능대박이 나는구나, 내가. A인생 대박이다! 수능대박! 인생대박!"
한껏 들뜬 A는 우렁찬 고함을 지르며 신이나서 다음 시험지를 펼쳐 들었다.
수리 영역.
......한 개.
한 개......
맞았다.
그 많은 문제들 중에. A는 단 한 문제만을 맞혔다.
언어 영역의 눈부신 대박 조짐에 각자 자기 시험지는 팽개치고 A의 수리 영역 시험지 답안 채점을 숨죽여 지켜보던 친구들은 그대로 자지러지고 만다.
"야 대박!!!!!!!!!1 진짜!! 대박!!!!!!!!! 역시 A!!!"
"끡끅끅"
방바닥과 침대위로 나동그라 지며 친구들은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한다.
숨도 못쉰다.
"아..."
A는 그 옛날 언어 장애를 겪던 때 만큼이나 세상의 모든 단어를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까만 피부는 더욱더 칙칙해졌고 건조하기 짝이 없던 입술은 허옇게 말라붙어 버렸다.
갈 곳 잃은 초점으로 황망히 다음 시험지를 집어 든다.
사회 탐구 영역.
그래, 그래도 이건 좀....
....다섯 개 맞았다.
A는 모든 시험지를 던져 버렸다.
침대위에서 침을 흘리며 웃던 친구 M이 눈물을 훔치며 주섬주섬 A의 시험지들을 챙긴다.
"야 그래도 끝까지 다 해 봐야지-"
M은 침착하게 나머지 외국어 영역과 과학 탐구 영역 시험지들을 챙겨 A의 책상에 자리 잡는다.
침대위에 시체처럼 엎드려버린 A와, M의 곁으로 둘러싸는 친구들.
숨죽여 채점을 하던 아이들은 각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나도 집에 가서 내거 채점할래."
"난 학원가야돼. 학원에 모여서 학원쌤이랑 같이 맞춰보기로 했어"
서둘러 겉옷과 가방을 챙겨 A의 방을 빠져 나가는 아이들.
표정들이 사뭇 진지하다.
그리고 채점을 했던 M은 침대위에 널부러져 있는 A에게 다가가 곁에 앉는다.
"A야...."
"말하지마."
M의 목소리에 불행을 예감한 A는 M의 말을 막았다.
"그래..."
안경을 벗어던지고 엎드린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누운 A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 좋은 대학 가고 싶었는데..."
".......공부를 좀.. 하지 그랬어 이 년아..."
"....안 하기는 했지만... 아예 안 하지도 않았어..."
궤변을 푸념처럼 쏟아 놓으며 M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너 그냥 방구석에 있으면 우울해서 안돼겠어. 애들이랑 놀자. 나가자~ 수능 끝난 날 이잖아! 부모님도 허락 해 주실거야!"
"......"
나가기 싫은 양, 가뜩이나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비죽이 내밀며 M을 향해 한껏 토라진듯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A.
"안 갈 거야?"
"....옷 좀 갈아입고."
수능은 망했지만, 똥멋은 부리고 싶은 A였다.
그녀만의 패션 부심은 훗날에도 쭉 이어진다. (그리고 그녀의 수능 점수 또한 향후 10년간의 놀림거리로 남아 레전설로 불리게 된다.)
하이힐에 짙은 화장까지 마친 A는 누가봐도 미성년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미 수차례 그런 모습으로 친구들과 만나서 술을 마시기도 했던 터였다.
그 모습을 본 M또한 질세라 가방속에서 화장품을 꺼내 화장을 마친다. 그리고 M의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으며 흩어졌던 친구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어디 먼저 갈까?"
"일단 밥 부터 먹고."
"밥 먹고 커피숍 갔다가 포켓볼 치고 노래방 그 담에 한 잔하고 나이트 콜?"
"콜!!!!"
초등학교 때 부터의 우정을 이어오던 M과 A는 K무리와 합류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어느 소주 방.
"여긴 왜 이렇게 음침해"
조선시대 주막을 모티브로 한 듯한 황토 벽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개별 방 구조로 되어있는 소주방을 들어서며 A는 혼자서 구시렁 거려 본다.
"왜.. 또 뭐 있어?"
A의 곁에 작은 소리로 속삭여 묻는 M
"아니.. 그런건 안 보이는데 뭐 튀어나올거 같잖아.."
A의 말에 안도하며 M의 얼굴이 환 해 진다.
"왜? 너 또 뭐 귀신 보인다고?"
그런 둘을 유심히 보던 K가 날카롭게 쏘아 붙이듯 묻는다.
"아니.. 없다고."
무덤덤하게 대답하는 A.
사실 K는 친구들 중 우두머리 격으로 중학교때 소위 말하는 "좀 노는" "좀 잘 나가는" 아이였다.
15세에 스무살 남자친구를 사귀며 각 반의 껌 좀 씹는다는 아이들을 아우르던 K
(다섯 살 연상의 그 오라버니는 K의 16세 봄, 함께 걷던 공원에서 갑자기 K가 한통의 전화를 받고 비장한 표정으로 "오빠 미안하지만 지금 나 급히 좀 가봐야돼." "갑자기 왜? 무슨 일이야?" "....아 애들 맞고 있대. 아오." 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그런 K 에게 A는 절친이면서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별 존재감 없이 학교 생활을 하던 A가 어느 날 갑자기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어딜 가나 화제 집중에 어느 날 인가 부터는 귀신을 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놀려먹던 아이들을 자연스레 공포에 떨게한 A.
다른 반이던 A를 화장실에서 처음 본 K가 A의 명찰을 보고 대뜸 사실 확인을 하려 들었을때도 A는 그랬다. 그저 무덤덤.
그런 의외의 담대함이랄까. 무던함이 마음에 들어 친구 무리에 끼워 주긴 했지만, K의 말이라면 득달같이 실행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별 감흥이 없는 A는 좀처럼 마음에 들어 차질 않았다.
게다가, 우리와 어울릴때도 항상 데리고 나오는 초등학교 친구인 M은 순박한 외모에 순박한 성격까지. 우리 무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야 너는 근데 그거 진짜냐??"
"아 K 또 시작이네~"
"아직 술도 안 들어갔는데 왜 그려~"
A가 "귀신 같은게 보이는거 같다"고 처음 친구들에게 본인의 입으로 털어 놓았을 무렵. 그 때 부터 A에 대한 불만과 함께 가슴 한 켠에 품고 있던 의구심.
K는 그걸 오늘 꼭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그거 진짜냐고."
"뭐가."
"귀신 본다며. 진짜 맞아?"
"왜."
"뭐?"
"그걸 왜 확인이 하고 싶은데?"
역시 A는 고분고분한 아이가 아니다.
"아~참~ 진짜면 진짜다. 말을 하면 돼는거지. 왜 확인을 하냐네, 또~"
"말을 하면, 니가 믿냐? 믿어서 나한테 지금 이러냐? 내가 얘기 안 했어?"
평소 같으면 무던하게 넘길 A였지만, 오늘은 아니다. 수능이 대 폭 망 이었고, 친구들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을 그 의구심에 대해 A도 속 시원히 증명해 내 보일 수 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터 였다.
"그럼 여기. 아무것도 없냐?"
의미심장하게 날리는 K의 질문에 A는 물론 다른 아이들도 방안을 둘러 본다.
"어. 없는데?"
"그래? 이상하네?"
빈정거리듯이 웃는 K를 향해 다른 아이들이 물어본다.
"야 왜그래~ 여기 뭔데~ 뭐 있는데~"
"G오빠가 (K의 남자친구) 그랬거든. 여기 작년에 불 나서 사람 죽었었다고."
"뭐???"
일동 경악하는 표정.
"아 시발. 그래서 여기 오늘 같은 날 이렇게 한산 하구만?"
"야 넌 미쳤어? 아무리 궁금해도 그렇지 꼭 여길 와야 겠냐?"
그리고 속사포 처럼 터져나오는 저 마다의 불만들 중에도 A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귀신 나온다고 소문나서 일부러 오는 사람들 말고는 거의 안온대. 너처럼 귀신보는 사람들 오나본데. 너는 안보여?"
승기를 거머쥔듯 여유있게 웃는 K.
A는 그런 K를 보며 힘겹게 입을 연다.
"나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