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실제 일어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잔인한 내용을 싫어하시는 분께서는 이글을 읽지 말아주시실 부탁드립니다.
.
.
.
.
.
.
.
.
.
.
.
.
오늘 소개해드릴 사건은 1980년에 발생한 "이윤상 군 유괴 살인 사건"입니다.
제목에서 밝힌바와 같이 이사건은 영화를 즐기지 않는 분이라도 한번쯤은 보았을 영화
"친절한 금자씨" 와 "밀양"의 모티브를 제공한 사건입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감독 박찬욱 감독이 직접 이사건을 모티브로 했다고 밝힌 바 있고
영와 "밀양"의 경우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가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밝혔지만
소설의 서문에는 "이윤상 군 유괴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시작합니다.
당시 이윤상 군 (당시 14세)은 마포구의 공덕동의 한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 이었습니다.
이 군은 어릴적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가 조금 불편한 학생이었습니다.
사건당일(1980년 11월 13일)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을때
이 군은 학교 체육교사로 근무하던 주영형 선생님으로 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이 군은 체육교사인 주영형 선생님이 상담을 하러 간다고 집에 말한 뒤
저녁시간이 넘도록 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 날 저녁 8시경 집으로 낯선 남자에게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옵니다.
협박전화는 이후로도 3차례나 더 걸려오는데
자신들을 전과자라고 밝힌 남성은 윤상이를 살리고 싶으면
자신들이 필요한 밀항자금 4천만원을 내놓으라는 내용의 협박전화 였습니다
(당시 4천만원이라는 액수의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당시 몇가지 비교하자면
당시 소주와 우유가 200원 짜장면 한그릇이 250~300원 최저시급이 462원
당시 회사의 부장급 월급이 50만원선 직장인 월급이 30~40만원
서울시내 아파트 한채 가격이 1천만원~1천2백만원 수준이었습니다.)
어느정도의 돈인지 감이 오시나요?
범인은 아파트 30~40채에 해당하는 돈을 몸값을 요구한것이죠
밤세 고민하던 이 군의 부모는 다음날 14일 경찰에 신고하게 되고
경찰은 즉시 이 군의 집에 통화녹음에 필요한 창치를 하고 집에 형사 두명을 배치합니다.
이틀뒤인 16일 범인들은 이 군의 집에 전화를 걸어
녹음된 이 군의 목소리를 들려주며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곳으로 돈을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녹음된 내용은 시키는데로 하지 않으면 자신을 죽일거라는 내용의 목소리 였습니다.
이 군의 부모는 범인들이 지시대로 같은날 오후 6시경 2천만원을 준비해
이윤상의 누나가 약속장소로 나갔지만 범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범인들은 해를 넘겨 다음해인 1981년 4월 까지 편지(5회)전화(62회)로 협박을 합니다.
마지막 협박편지인 5번째 편지에는 이 군이 얼마 전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크게 다지친 않았다며
이 군의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상한것은 처음 이 군의 집에 협박전화를 건 범인의 목소리는 남성이었지만
처음 건 협박전화를 제외하면 협박전화의 목소리는 모두 여성이었습니다.
협박편지 또한 1 ,2 ,5번째 편지는 또박 또박 쓴 여성의 필적이었고
3, 4번째 필적은 휘갈겨쓴 거친 필적으로 보아 남성의 필적으로 추정해
경찰은 여성이 낀 3~4인조 혹은 그 이상의 계획적 범행으로 보고 사건을 진행합니다
사건발생 초기에는 이 군의 안전을 고려해 비굥개 수사를 진행하였지만
발생 후 4개월이 지나도록 범인의 협박전화와 편지 이외의 별다른 단서를 찾지못하자
경찰은 사건을 비공개수사에서 공개수사로 전환하게 됩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은 이례적으로 대국민담화를 열고
당시 두고두고 회자되는 유명한 발언인
"살려보내면 너도 살고 죽여 보내면 너도 죽는다" 라는 메세지를 범인에게 보내고.
덧붙여 5공과국 출범일 (3월 3일)까지 자수한다면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겠다는 말도 합니다만
범인은 잡히지 않습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이 군이 학교 체육선생님을 만나러 간다는 이 군 부모의 진술 때문에
체육교사인 주영형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았지만 교사라는 점,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 있는 점
주 씨가 이 군을 살해 할 특별한 동기가 없는 점 때문에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고
겉으로는 선량하고 무고한 학교선생을 강압수사로 용의자 몰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겉으로는 용의선상에서 제외 된 것 처럼 보이게 하고 주 씨의 수사를 계속 진행합니다.
그러다 같은해 11월 주 씨가 전에 몸담았던 학교 oo여중에서 재직 당시 교외지도를 빌미삼아
같은 학교에 다니던 여중생 20여명을 강간한 사실을 밝혀내게 되면서 사건은 급진전 됩니다.
경찰은 주 씨를 여중생 강간 사건을 빌미로 이 군의 사건과 병행해 조사하는데
사건 당일, 집을 나서며 이 군이 어머니에게
"선생님이 어머니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는 모친의 진술이 실마리가 되어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된 수사를 진행 하고 거짓 반응이 나온점을 들어
집요하게 추궁한 결과 11월 29일 경찰은 주 씨에게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아내는데 성공합니다.
경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평소 주 씨는 도박으로 당시 1천만원이 넘는 빚이 있었고 사건이 발생 할 즈음
채무자에게 빚 독촉을 받게 되자 납치를 계획했는데
이 군의 집이 부유해 잘 살았고 평소 자신을 잘 따르는 점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가 있어 범행을 실행했을때 실패의 우려가 적은 점 때문에
이 군을 범행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경찰이 이렇게 간단한걸 왜 놓쳤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당시 금융실명제 전 이었고 거의가 현금이 유통되는 구조였기에 밝히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주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더 놀라운 사실이 나오는데
원래 범행대상은 사망한 이 군이 아니라 이 군의 누나였다고 합니다.
범행을 실행하기 위해 불륜 관계에 있던 여제자 A양과 B양 2명을 범행에 가담시키는데
실패로 돌아가고 이 군의 누나 대신 이 군이 피해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 씨의 진술에 따르면 13저녁 이 군을 납치했고 사건 발생 다음날 14일 오후 6시 경
영등포구의 한 아파트에서 결박된 상태로 있었는데
이 군이 누나를 유괴하려고 한것도 선생님이라며 고함치는 것을 듣고
반창고와 테이프로 입을 틀어 막고 이불을 뒤집어 씌워 버리고는 집을 나와버리는데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보니 이 군이 숨져 있었다고 합니다.
사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며 2주간 방치하다
같은 달 30일 A양의 도움을 받아 이 군의 사체를 북한강변의 야산에 암매장 했다고 합니다.
사건의 공범인 A양의 진술에 따르면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자 주 씨가 자신에게 동반자살 하자고 권했고
주씨에게서 수면제 40알을 받아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고 진술했고
B양은 단순 협박편지에만 가담하였다고 하는데
B양 또한 주 씨가 자신에게 청산가리가 든 병을 쥐어 주면서
"자신을 사랑하면 자신을 위해 죽어달라" 며 자살을 종용했고
B양은 정말 죽기 위해 자살할 날짜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실행전에 검거가 되어버리죠
A양과 B양의 자살을 종용한건 이유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주 씨는 1982년 11월 23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게되고
다음해인 1983년 7월 9일 사형이 집행됩니다.
이사건의 공범인 A양과 B양
A양은 장기5년 단기 3년의 징역형이
B양에게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이 선고 되고
다음해인 1984년 B양은 집행유예로 A양은 1985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됩니다
사족이지만
당시 70년 후반 80년 당시
집에서 키우던 양딸을 학교 졸업하고 마누라 삼는 개xx들도 있을 만큼
여성들의 여권이 좋지 않을 때였고 주 씨가 교사라는 위치를 생각해볼때
공범이라는 A양과 B양도 언론에서는 불륜이라고 했지만
(그들의 범죄를 옹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마도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끗